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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가도 사람이 산다. 살아가는 근본 모습도 같다. 다만 역사와 환경이 다름에서 풍습과 생활형식이 다를 뿐이다. 여행의 참 목적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해하는 것으로 상식을 넓히고 지혜와 슬기를 익혀 나름대로 구김살 없는 풍요한 삶을 구가하는 데 있다.

다양한나라 민족이야기
2005.01.22 18:26

다양한 나라 - 몽골 울란바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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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감정 자극하는 동질의 문화. 샤머니즘 속 한 통속의 우리 옛모습

실수 아닌 사건

바이칼湖 동쪽의 브리야트共和國 “울란우데”에서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로 가는데는 소련항공 아에로플로트를 이용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타보는 48인승의 낡은 프로펠러 경비행기였다. 좌석 번호를 확인하고 앉으려는 순간 슬쩍 옆 승객을 본 나는 너무도 반가웠다. 틀림없는 한국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나는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자신 있게 우리말로 인사했다. 그러나 그녀는 반응이 없었다. 나는 또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그녀는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나는 아차 했다.
“유 아… 몽골리안?”
그제야 그녀는 “예스”하는 것 아닌가.
“아임 쏘리, 아임 코리언...”
하고 내가 멋적어 하자 그녀는 “아임 오케이.” 하며 싱긋 웃었다. 나는 눈을 의심하기보다 귀를 의심해야 했다. 보고 또 봐도 그녀는 내 고향의 이웃에 사는 여성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너무나 한국사람 같아서…”
나는 거듭 사과했다. 나 자신에 대한 사과일 수도 있었다. 웬만해서는 없는 실수였다. 오랜동안 여행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이 각 나라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인종 전시장을 방불케하는 홍콩이나 사우디 아라비아의 제다 중앙광장 같은 곳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 국적 알아맞히기 내기를 해 친구에게 조니워카 불루를 얻어 마신 적도 있는 실력이었다.
잘 구별되지 않는다는 한국인과 일본인 중국인도 나는 정확히 구별했다. 언어가 다르고 식생활이 다른데서 비롯되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같은 한국이라도 북한인과 남한인의 분위기는 또 달랐다. 99%의 정확성을 자부하는 입장에서 몽골여성을 한국인, 그것도 남한 여성으로 단정 짓고 함부로 우리말로 말을 건 것은 실수라기보다 하나의 사건(?)이었다. 몽골인은 그 정도로 한국인과 구별이 안되는, 하나인 것만 같은 민족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그건 우리 입장에서도 그래요. 한국인은 동족같아요. 중국인이나 일본인은 아니에요. 느낌이 달라요. 하지만 한국인은 그렇지 않아요. 우리도 가끔 같은 실수를 해요“
나는 그녀에게 세 가지 몽골어를 발음으로 배워 외었다.
“셈 베노 (만날 때 인사)” “바이를 라(고맙습니다)” “바이야르 테(헤어질 때 인사)”등이었다.

푸른 평원의 한적한 나라 몽골

도착 전 몽골에 대한 지식은 중앙아시아에서 비교적 교육수준이 높다는 것과, 남한 면적의 16배나 되는 너른 국토에 총 인구는 200만을 조금 넘을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소련의 붕괴와 함께 몽골사회주의도 평화혁명으로 무너지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국민소득이 1천불 대에 머물고 있는 가난한 나라였다.

몽골은 고원에 있어 추운 나라였다. 북쪽은 산악지대요 남쪽은 고비사막으로, 그 중앙을 흐르는 톨라강 북안에 수도 울란바토르가 있는데, 이곳만 해도 해발 1,300m의 고원이었다. 인구의 약 30%인 60만명이 여기 울란바토르에 모여 산다고 했다. 그러나 하늘에서 보는 몽골의 자연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고원에 끝없이 펼쳐진 평원의 초지는 골프장의 페어웨이를 연상하게 할만큼 아름다웠다.

초지는 평원에 한정되지 않고 산기슭까지 이어지기도 했는데, 나무가 빼곡한 곳과 없는 곳의 구별이 인공으로 다듬은 것처럼 분명하고 깔끔했다. 알고보니 그것이 곧 양지와 음지의 구별이었다. 음지에서는 붉은 빛을 뿌리는 소나무들이 촘촘히 모여서서 힘차게 하늘로 치솟고 있었지만 양지는 산정까지도 오로지 초지일뿐이었다.
적송(赤松)외에 다른 잡목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푸른 평원에는 유목민들의 집인 겔이 하얀 점으로 간간이 보였고 방목 중인 말이나 소 떼, 또는 양의 무리가 보이기도 했다. 수도 울란바토르가 보였다. 울란바토르 역시 면적은 넓게 차지하고 있었으나 한적해 보였다.
러시아식의 육중한 콘크리트 건물들이 군데군데 주요 지점에 들어서서 도시 윤곽을 정해주고 있었다. 필시 사회주의 국가들의 도시 전형을 보듯 여기 역시 중앙의 붉은 광장 주변에 정부나 당의 공공건물들이 들어서 있을 것이었다. 광장을 중심으로 바둑판처럼 도시가 설계되고, 오페라 하우스, 극장 등 예술의 전당들과 종합대학이 대칭을 이루는 사이에 박물관이며 호텔, 비지니스 빌딩 등 잡다한 건물들이 들어섰을 것이었다.

국제공항에 내려 전세버스를 타고 도심으로 들어갈 때의 울란바토르는 하늘에서의 느낌보다 더 한적하고 조용한 도시였다. 자동차도 드물었고, 오토바이나 자전거조차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공기가 맑게 느껴졌고, 하늘의 구름들은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몽골인들의 표정도 밝고 평화롭게만 보였다. 러시아와 변화를 같이 했다지만 러시아에서 느꼈던 몰락한 사회주의의 잔영을 밟는 듯한 침침한 분위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적어도 러시아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몽골은 깨끗하고 생기가 있었다.

오후 3시 반에 도착하여 호텔로 옮겨 여장을 풀고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고 났는데도 해가 중천에 걸린 한낮이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9시였다.
“이게 뭐야. 여기도 백야인가?”
몽골의 시간은 우리와 같아 시계를 고칠 필요가 없었는 데, 5시에 날이 밝아 22시 반쯤 되어야 석양이 물들고 23시가 넘어야 어두워 졌다. 어두워지면 이내 캄캄해지니 백야는 아니었다. 겨울에는 물론 밤이 길어지겠지만 6월의 몽골은 그랬다. 피곤했지만 한낮의 밝음 속에 잠을 자기는 뭣해서 오후 10시쯤인가,

호텔 주변을 산책하니 한 청년이 다가와 직접 그린 것이라며 그림을 내보인다. 몽골민의 전통적인 유목생활을 소재로 한 그림으로 소품들이었다. 한 점에 2불씩을 주고 몇장 샀는데, 그 청년 역시 한 핏줄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호텔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비행기에서 만났던 그녀보다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정말 아무것도 다른 게 없었다. 다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와 다를 뿐이었다. 문득 강한 욕구가 치밀었다. 몽골의 역사에 대해 보다 강한 호기심이 이는 동시에, 과연 얼마나 같은가, 몽골 여인을 품에 안아보고 싶은 욕구도 치밀었다.

징기스 칸과 몽골제국

“몽골”하면 떠오르는 것이 징기스 칸이다. 날렵하고 사나운 반목반렵(半牧半獵)의 몽골민족은 기원전부터 이곳에서 살며 강력한 기마전투력에 의한 주변 지역 정복에 나서곤 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징기스 칸 이전에 “몽골족”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근거지인 몽골고원에서 고비사막에 걸친 지역에는 일찍이 흉노(匈奴)족이나 선비(鮮卑), 유연(柔然), 위구르 등의 유목기마민족이 활약하였을 뿐이다.

몽골의 선조라 생각되는 종족은 징기스 칸 대에 “몽골(蒙  )”이란 이름으로 처음 등장했다. 13세기 징기스 칸(테무진)은 고원에서 패권을 다투는 투루크와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1206년 몽골제국을 수립한 뒤, 금나라를 토벌하고 중앙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유라시아 대륙에 사상최대의 대제국(元)을 건설했다. 인도, 동남아시아, 서유럽을 제외한 유라시아 전역이었다.

처음에는 카라코름이 수도였으나, 영역이 넓어지면서 연경(燕京;지금의 북경)이 그들의 수도가 되었다. 대제국의 성립에 따라 몽골족은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유럽 각지로 거주지를 넓혀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대부분이 그 지방의 토착민족에 동화, 흡수되어 버렸다.

제국이 붕괴된 후에도 몽골족은 현재의 내 외몽골에서 신강(新彊)에 걸친 지역에서 세력을 유지하였으나 동서로 분열하여 결국 만주족인 청나라에 병합되었다. 이로서 몽골(蒙  )은 몽고(蒙古)로 격하되고 황실 가족도 유목생활로 자족하며 수백년을 보내게 된다. 융성했던 시기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 탓에 한때 화려했던 카라코롬도 쇠미해져 몽골의 찬란한 문화는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다.

담갈색의 몽골로이드

1911년 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난 때에 몽골민족은 라마교의 생불을 황제로 하는 자치독립을 선언하였으나 백계 러시아와 청의 간섭에 의해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민족운동은 더욱 활발해져, 10년 후인 21년
소비에트 붉은군대의 원조를 받은 몽골인민혁명군이 백계 러시아와 청을 물리치고 울란바토르(현재의 수도)에 입성, 인민정부를 수립함으로서 외몽골은 독립을 이루었다. 그러나 내몽골은 중국령에 머물고, 또 바이칼호 동안의 브리야트가 근접하면서도 소련령에 있게 되어 몽골민족은 3개의 국가에 나뉘어 살게 되었다.

독립 후 몽골인민당은 세계 도처에서 공산주의가 저질러온 “부르조아 민족주의자“들의 대숙청이나, 왕과 라마교 재산의 몰수 등을 자행하며 사회주의 건설에 박차를 가한다. 종교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상은 재산의 몰수에 그치지않고 대다수의 사원을 없앴다. 물론 샤머니즘도 눈에 띠게 쇠퇴하였다. 이로 인해 브리야트에서는 볼 수 있는 몽골민족 샤머니즘의 많은 부분을 정작 몽골에서는 보기 힘들게 되었다. 그러나 마두금(馬頭琴)을 비롯하여
12현의 쟁(箏) 동각(銅角) 피리 양금 퉁소 북 등을 사용하는 민속음악이나 전통예술은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는듯 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아무리 봐도 한 통속으로 보이는 것은 선입견 때문일까?    

선입견은 “몽골로이드(Mongoloid)란 용어에서부터 출발하는 것 같다. 이는 몽골인 같은 사람을 뜻하는데, 아시아 대륙의 동쪽 절반 또는 동쪽에 산재하는 섬들 및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 폭넓게 분포하는 담갈색(황색) 인종을 가리킨다. 물론 우리도 이에 속한다. 갓난아기 둔부의 푸른반을 흔히 몽골반이라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로 느낌을 주는데 세계 인구의 1/3이 여기에 속한다고 한다. 불쑥 등장한 몽골이 어떻게 해서 그런 식으로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을까는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우리와의 관계만을 따로 떼어서 볼 때도 몽골은 언어나 풍속, 심지어 핏줄에 있어서까지 매우 깊숙히 들어와 있다.
“수교는 5년 전, 교류는 2천년 전부터”라고 말하지만, 본격적인 관계는 역시 13세기로,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받아 그 지배 아래 있게 되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삼별초의 난이 항몽투쟁이었듯이, 몽골은 1231년부터 1258년까지 28년동안 7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하였고 이후 80년 동안 고려의 정치에 간섭하였다. 이 때 몽골이 세운 원나라 황실의 혈통이 고려황실에 직접 이어지면서 양국은 단순한 종번관계를 넘어서 친족관계로 변하게 되었으며 장기간에 걸쳐 수많은 혈연교류가 여러 형태로 이루어졌다.

고려 공민왕(1351-1374)과 몽골제국 위황제의 딸 노국공주 일화는 아직도 우리 기억에 남아있다. 노국공주가 난산으로 죽자 공민왕은 슬픔에 빠져 불사에만 전념, 왕비만을 추모하며 국정을 신돈에게 맡김으로서 망국의 비운을 재촉했던 역사가 있는 것이다. 수수께끼 투성이인 몽골풍은 세시풍속에서도 얼마든지 엿볼 수 있다.
▲여자들의 족두리라든가 ▲남녀가 옷고름에 차는 장도 ▲신부가 연지 찍는 풍속 ▲장사치, 시정아치 등 어미에 치를 붙이는 언어습관 ▲귀뿌리를 뚫고 귀고리 다는 풍속 ▲왕의 진지상을 수라상이라고 부르는 말 등등이 그것이며, 줄타기 땅재주 칼날디디기 등의 환술적(幻術的)인 기예와 투전의 원형 또한 대개 몽골에서 전래되었다는 것이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또 하나 몽골에 얽힌 낯익은 이야기는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인 세계의 묘사(Divisament dou Monde:東方見聞錄)이다. 폴로는 1271년 아버지를 따라 몽골(元)에 가서 쿠빌라이 칸에게 교황의 친서를 전했다. 그 뒤 폴로는 원의 관직에 올라 17년 동안 그곳에서 살며, 인근의 여러곳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고 기록을 남겼다. 1290년 폴로는 이란의 몽골 왕조 일한국의 아르군 칸에게 시집가는 공주 코카친의 여행 안내자로 선발되어 몽골을 떠났는데, 그는 당시 몽골에서의 풍경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그들은 결코 한 곳에 정주하지 않는다. 겨울이 가까워지면 가축의 목초를 확보하기 위하여 따뜻한 지방의 평야로 이동한다. 그들의 집인 장막(帳幕;겔) 작은 나무가지로 뼈대를 세운 후 그 위에 털로 된 전(氈)을 씌우는 데 그 모양이 둥글고 아담하다. 문은 반드시 남쪽으로 내며, 이동할 때에는 그것을 뜯어서 간단히 묶어가지고 사륜차에 싣고 운반한다. 하루종일 비가 와도 결코 그 내부가 젖지 않도록 되어있다…

…물품의 매매나 상업과 같은 일은 부인이 한다. 주인과 가족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하는 것도 부인의 임무이다. 남자는 사냥이나 그 밖에 군사(軍事)에 관한 일만으로 세월을 보낸다. 그런데 그들이 사냥에 쓰는 매와 수렵용의 개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  

…부인들은 순결을 지키고 품행이 단정하며 남편에 대해 매우 충실하다. 부정을 범한다는 것은 부덕한 행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씻을 수 없는 불명예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고난을 이기는 데 강하다. 필요하다면 말젖과 때때로 잡는 들짐승의 고기만으로 1,2개월 거뜬히 견딜 수 있다. 남자들은 보통 2日2夜 말안장에서 내리지 않고 견딜 수 있다. 또한 말이 풀을 뜯어먹는 동안 안장 위에서 잠을 잘 수 있도록 잘 훈련되어 있다…

마르코 폴로는 또 그들의 신앙과 교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들은 하늘에 있는 높은 유일신을 믿는다. 이 신에게 향을 피워놓고 정신과 육체의 건전함을 비는 뜻에서 기도를 한다. 그밖에 Natigay라는 신을 믿고 있는데 어느 집이나 그 신상을 털로 된 전(氈), 또는 무명에 싸서 안치하고 있다. 징기스칸 때부터 변치않고 지켜내려오는 관습으로 황제며 국왕들은 반드시 알타이라고 불리우는 높은 산에 묻혀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백일 길을 가지 않으면 안되는 먼 곳에서 죽었을 경우에도 반드시 알타이까지 시신을 옮기는 것이다. 완과 같은 귀한 사람의 관을 옮기는 도중에 사람을 만나면 “저 세상에 가서 그대의 죽은 군중에게 봉사하라“고 말한 후 호위대가 목을 베어 죽인다.  망구 칸의 유해를 알타이까지 호송하는 중 그렇게 해서 도중에 죽은 사람이 이천 명도 더 되었다…
  
폴로의 기록대로라면, 전쟁 중 낙마하여 죽었다는 이야기만 있지 어디에 묻혔는지 모르는 징기스 칸의 무덤은 알타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몽골의 원시적인 모습 또한 알타이 문명 속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관광의 포인트는 자연

몽골은 추운 나라이다. 여름은 25도까지 올라가지만 겨울은 영하 35도 까지 내려간다. 비는 7,8월에 약간 내리지만 겨울은 많은 날이 눈으로 덮인다. 추위를 무릅쓰고 눈 속에서 수렵을 즐기겠다는 사람이 아니라면 몽골 방문의 적기는 6월부터 9월 사이이다. 관광을 원하는 사람에게 현재의 수도 울란바토르는 의미가 없다. 사회주의로 인해 실패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레닌박물관은 여기보다 훌륭한 곳이 얼마든지 있다. 새롭게 역사박물관이며 민족문화예술을 다듬어 가는 움직임이 있지만 아직은 준비가 부족한 상태이다.

체제는 바뀌었지만 사람들의 습성은 아직 사회주의 시절 그대로 남아있어 버젓한 상점들이 토요일은 일찍 문닫고 일요일은 쉰다. 자동차는 많지 않은데 현대의 엑셀, 르망, 기아의 베스타 등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띤다.  

관광의 포인트는 자연이다. 오염되지 않은 광대한 자연에서 나름대로 느낌을 가져보는 것이다. 사전에 몽골에 대한 지식과 목적을 분명히 정하고 와서 남쪽의 고비사막으로 가던가 북쪽의 유적지와 산악지대를 둘러보던가 해야 한다. 옛수도 카라코름은 몽골의 가장 오래된 불교사원인 에르데니묘(廟) 북쪽에 유적지가 있어 함께 둘러볼만한 곳이다. 고원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교통 중심지로 흉노 돌궐 위구르 등 역대정권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징기스 칸에 의해 병참기지가 설치되고, 그의 아들인 오고타이 칸에 의해 성벽과 만안궁(萬安宮)이라는 중국식 궁전이 지어진 것이 도시로서의 기원인데 당시 이곳은 정치와 문물의 대단한 중심(?)이었다.

몽골의 강은 모두 바이칼호로 흘러든다. 올혼, 톨라, 셀렘가강 등인데 강 유역은 질 좋은 목초지가 펼쳐지는 평원이다. 필자는 징기스 칸의 고향이라는 텔레지로 가서 그들의 전통적인 생활을 경험함으로서 몽골에 대한 지울수 없는 인상을 얻고 또 추억거리를 만들었다. 울란바토르에서 70Km 정도 거리에 있었는데, 몽골의 특징적인 자연을 한눈에 보고 즐길수 있는 곳이었다. 둥근 천막인 겔에서 지냈고, 엉덩이에 상처가 날 정도로 말을 타고 초원을 달렸으며, 밤에는 조명등처럼 빛을 뿌리는 별을 보았다. 견우성 직녀성은 물론 은하수까지 그렇게 선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더듬어보면 그것 역시 30년전 내 고향에서 보던 밤하늘이었다. 몽골의 자연은 그렇게 필자의 고향감정을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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