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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가도 사람이 산다. 살아가는 근본 모습도 같다. 다만 역사와 환경이 다름에서 풍습과 생활형식이 다를 뿐이다. 여행의 참 목적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해하는 것으로 상식을 넓히고 지혜와 슬기를 익혀 나름대로 구김살 없는 풍요한 삶을 구가하는 데 있다.

다양한나라 민족이야기
2005.01.22 17:39

다양한 나라 - 큐바 / 카리브해의 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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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빛 바다 한가운데 그림 같은 섬나라,


큐바(Cuba)의 문이 열렸다. 큐바가 문을 연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큐바여행을 “허가”에서 “신고”로 바꾸며 문을 연 것이다. 우리와 달리 큐바의 문은 진작부터 열려있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인상은 어떤 것일까. 김일성 못지않은 독재자 카스트로의 장기집권에 시달리는 사회주의 나라, 그로인해 피폐해진 나라, 난민탈출을 뜻하는 보트피플, 이제는 지구상에 몇 남지않은 “북한과 친한 나라” 등등 아닐까. 북한이상으로 획일적인 나라, 자유라는 것은 없는 나라, 위협적인 군사정치가 지배하는 나라…  

동서문화가 1994년에 완간한 세계대백과사전에도 큐바는 “카리브해의 붉은 섬”으로 소개되어 있다.
…중앙아메리카 서인도제도의 공화국. 면적 11만861Km. 인구 1,089만2,000(1993). 정식명칭은 큐바공화국(Republic of Cuba). 국명은 중심지라는 뜻의 인디오 말인 “큐바나칸”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있다. 카리브해 서쪽, 플로리다 남쪽에 있으며 대서양과 접한다. 아메리카대륙 최초의 공산국가로서 “카리브해의 붉은 섬”으로 비유되며, 자연적 위치때문에 동서 양대세력이 충돌하는 요충지가 되어왔다. 수도는 아바나…

그러나 관광객을 부르는 큐바 아바나의 소리는 이와는 다르다. 카리브해의 붉은 섬이 아니라 “카리브해의 진주”다.

…태초에 하늘이 열리고 자연이 숨을 쉬기 시작했습니다. 그 자연의 숨결을 원시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 바로 큐바입니다. 하늘빛만큼이나 투명한 바다 사이 끝없이 이어지는 백사장. 사람마저 하늘만큼 맑아 보이는 미지의 자연이 당신과의 만남을 기다립니다. 쿠바와의 만남은 수평선 넘어에 있는 신비의 도시 아바나로부터 시작됩니다. 잦은 해적들의 약탈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입구에 쌓은 견고한 성. 해안선을 향하고 있는 대포는 지금도 매일 밤 9시면 불을 뿜고, 대포를 발사하는 의식과 함께 성문은 닫힙니다.

아바나에 오시면 헤밍웨이도 만날 수 있습니다.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걸작 “노인과 바다”의 실제 모델이 여기 살고 있습니다. 리브데리카 데 메리오 식당에서 그레고리 후안데스 翁(1898-)을 만나 함께 헤밍웨이를 추억하는 것은 헤밍웨이를 직접 만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혁명이 있었던 도시. 혁명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바로크시대의 우아하고 장중한 건물들. 언어를 대신하는 사실적인 조각 예술들이 퇴색한 역사에서 내뿜는 창연(蒼然)한 빛을 노래합니다. 시간이 멈추는 곳 큐바. 사랑이 정열을 더하는 곳 쿠바. 아바나 트로피카쇼의 화려한 율동과 하바네라로 대표되는 흥겨운 유러큐반음악이 넘치는 도시 아바나. 룸바 볼레로 맘보 차차차의 고향 역시 이곳 아바나입니다. 영화와 축구 야구에 열광하는 “명랑한 사회주의자”의 나라 큐바…

큐바를 “카리브해의 붉은 섬”이라 부른 것은 1959년 카스트로 등장 이후의 일로 미국이 그렇게 명명했다. 큐바가 동서 양대세력이 충돌하는 요충지가 된 것도 이때였다. 당시 쿠바가 온몸으로 원했던 것은 미국으로부터의 경제적 독립과 부의 재분배였다. 카스트로가 등장해 이것을 시도하기 이전의 미국과 큐바는 밀월을 즐기던 우방이었다. 물론 당시의 큐바는 우리나라와도 우방이었다. 6.25 때에는 북한을 규탄하고 미주국가와 단합, 한국을 지지할 것을 호소하기도 했던 친구였다. 미국에 의해 “카리브해의 붉은 섬”이라 불리우기 전의 쿠바는 “카리브해의 진주”였고 대륙의 부호(富豪)들이 즐겨찾는 “낙원”이었다.  
  
큐바는 1492년 콜럼버스의 첫 항해 중 발견되었고, 1511-14년 에스파냐(스페인)에서 파견된 군인 D.벨라스케스에 의해 정복당했다. 이후 1898년까지 에스파냐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원주민인 인디오들은 식민초기, 사금 채취와 농장에서의 혹사를 견디다 못해 반항하다 학살당하기도 하고 마침 유행한 악성전염병에 의해 거의 절멸되다시피 했다. 일꾼을 잃은 에스파냐는 아프리카 흑인노예를 수입, 사탕수수와 담배를 재배하였는데, 1886년 노예제도가 폐지되기까지 수입된 노예수는 1백만명에 이르렀다.

노예들은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으나 국제적인 관심은 끌지 못하고 모두 진압되었다. 특히 19세기 초 라틴아메리카대륙에 분 식민지 독립전쟁의 영향을 받아 1812년에 일어났던 흑인반란은 대규모였으며 희생도 적지않았다. 그러나 이 반란도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반란자들에게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원주민이 아닌 노예일 뿐이어서 호소력이 약했다. 권력과 부자들은 찰떡처럼 유착되어 있어 당당하고 거칠 것이 없었다.

다만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할 필요는 권력자들에게도 있었다. 1868년 C.M.데 세스페데스가 독립을 선언함으로서 에스파냐와의 10년 전쟁은 시작되었고, 기간 중 공화정권이 수립되었다. 이 전쟁은 78년 정치개혁과 노예해방을 약속한 산혼조약이 체결되면서 끝났다. 이에 따라 86년 노예해방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는 계속되었고 기타 약속들은 이행되지 않았다. 이에 1895년 J.마르티가 분연히 일어나 쿠바혁명당을 결성, 제2차 독립전쟁을 벌이게 된다. 쿠바는 이때의 지도자 호세 마르티를 혁명영웅 이자 독립의 아버지로 받들게 된다. 그러나 쿠바는 안타깝게도 자기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했다. 오늘의 쿠바를 불행하게 본다면 그 원인은 여기서 비롯된다.

호세 마르티에 의한 제2차 독립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1898년 아바나항의 미국선박 메인호에서 원인모를 폭파사건이 있어났다. 미국은 에스파냐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시작했다. 이 전쟁은 4개월만에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파리평화조약의 성립으로 쿠바의 독립은 승인되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도움으로 독립을 얻은 것이다. 국제사회 논리가 그렇듯, 독립 쿠바는 다시 미국의 경제적 속국을 면할 수 없었다. 독립후 3년간 미군정이 실시되었고 1901년에는 미국의 “내정간섭“과 ”군사기지 설치“를 인정하는 플랫수정조항이 헌법에 추가되어 관타나모灣 등에 미군기지가 설치되니, 쿠바는 실질적으로 미국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형식적으로는 공화제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마차도와 바티스타 등, 미국의 지지를 받아 군대의 힘과 암살 등의 방법으로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인물들이 58년간 쿠바를 이끌었다. 어떤 이는 이 58년을 노골적으로 미국지배하의 시기라고 적기도 한다. 쿠바는 미국이 지도(?)하는 전형적인 코스를 밟았다. 미국의 자본이 계속 유입되면서 제당산업이 급속히 발전하였으나 국민경제는 향상되지 않고 정치적 부정부패가 심화되는 따위,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볼 수 있었던 현상들이었다.

50년대 상황을 보면 설탕이 총수츨액의 80%를, 국민총생산의 25%를 차지하였는데 생산의 60% 이상이 미국자본에 의존하는 정도였고, 수출량의 3/4이 미국으로 수출되었다. 또한 토지소유자의 8%가 총 토지면적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1959년 혁명에 성공한 카스트로는 우선적으로 이를 시정하려 했다. 일차적으로 농지개혁법을 실시, 대기업과 대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였고, 이어 61년 “사회주의 선언”을 채택하면서 석유법과 대기업 국유화법으로 미국계 설탕회사들을 접수했다. 그러자 미국은 즉각 쿠바와의 국교를 단절하였고 62년 미주기구(OAS)에서 쿠바를 제명시키는 등 봉쇄정책을 펴나갔다. 우리나라와 쿠바의 국교가 단절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로써 쿠바는 아메리카대륙에서 고립되게 되었고, 사태는 10월 “쿠바위기“로 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쿠바 안에서의 카스트로 인기는 대단했다. 국민들은 “카스트로”를 연호하며 그를 지지했고 그에게 전권을 부여했다. 이에 힘입어 63년 2차 농지개혁을 단행한 그는 65년 10월 “쿠바공산당”을 창당하였다.

처음에 카스트로는 소련이나 동유럽과는 다른 독자적 사회주의를 구상했다고 한다. 모든 나라와의 평화공존, 내정불간섭 등 중립국적인 입장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 의해 국제적으로 고립되면서 경제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급한 나머지 옛 소련과 밀착하게 되었다. 적극적인 성격의 카스트로는 기왕 소련과 밀착하느니 아예 솔선하여 소련의 이익을 대변하며 쿠바의 국제적 지위향상을 꾀하고자 했다. 이에 아프리카 중남미지역 게릴라군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정부반란군을 훈련시키는 등 반제국주의나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게 되니, 민주세계는 祺注恬??쿠바를 규탄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원한 등 돌림이란 없듯, 시간이 흐르면서 쿠바와 국교를 단절했던 많은 나라들이 관계를 다시 맺었다. 중미와 남미의 여러 나라들과 교류는 재개되었다. 그러나 미국과의 관계만은 아직까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쿠바의 아픔이 컷던 탓일까. 아니면 미국의 자존심이 용서 않는 것일까.

73년 2월 “공중납치금지협정”을 체결하면서 두 나라 관계는 나아질듯 했다. 그러나 75년 쿠바가 코메콘(COMECON:경제상호원조회의)에 가입하여옛 소련과의 유대가 강화되는 바람에 다시 멀어졌고, 미국이 마음을 돌려쿠바의 미주기구 재가맹을 허용할 즈음, 쿠바는 앙골라 전쟁, 소말리아 전쟁에 참전함으로서 다시 악화되곤 하였다. 1980년 미국이 이민제한법 을 공포함으로서 12만여명의 쿠바인이 미국에 망명한 것도 관계악화의 한 요인이었다. 같은 해 4월 카터 대통령이 나서서 화해분위기를 만들자, 이듬해 12월 양국간 긴장해소를 위한 회담이 열리기도 하였으나 83년 10월 미국의 그라나다 침공으로 반미감정은 다시 고조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약사(略史)는, 어쨌든 쿠바는 아직 경직된 공산주의 사회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게하기에 충분했다. 공산주의에 대해 일반보다 높은 경계심을 갖고있는 우리에게는 “붉은 섬”을 지배하고 있는 보이지않는 긴장과 공포를 예상해야만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쿠바는 보통의 관광지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 선입견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바나 거리에서 군인은 구경을 하려고해도 없었다. 사회주의 냄새는 한두곳에 남아있는 레닌벽화 정도였다. 치안관계도 염려할 것이 없는 나라였다.

혁명광장에 서 있는 동상은 19세기말 에스파냐로부터의 실질적인 독립을 주도한 호세 마르티였고, 국제공항에도 그의 이름이 붙어있었다. 카스트로의 동상은 어디에도 없었다. 카스트로의 얼굴은 엉뚱하게도 싸구려 관광상품들에 담겨 팔리고 있었다. 게릴라니 무기수출이니, 군사독재니 하여 북한과 비슷하겠거니 여겼던 것은 커다란 오해였다. 김일성과 카스트로는 다른 인물이었다.

아바나에 이는 자유시장 물결

그런 가운데 쿠바는 변신하고 있었다. 이미 1년전부터 자유시장의 물결이 일어 화려한 경력의 엘리트들이 개인돈을 벌고자 시장 상인으로 탈바꿈했다. 관광객 유치에도 온 힘을 쏟고 있었다. 이 나라의 허약한 산업구조는 제당산업이 주이면서 상품화된 사탕은 귀하고, 유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휘발유는 귀하다는데서 그 심각성을 엿볼 수 있었다.

후일에는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현재의 아바나는 미국 패권주의에 대항한 죄로 화려한 도시의 내실(內實)을 잃었다. 아바나(La Habana)는 명실상부한 카리브해 최대의 항만도시였다. 에스파냐의 아메리카대륙 식민지배 중심지이자 무역중계지로서 일찌기 발전한 도시였고 1898년 쿠바의 독립으로 수도가 될 때만 해도 아메리카대륙에서 손꼽히는 유서깊은 도시였다. 카스트로 혁명전까지만해도 미국 부호들의 별장이 줄지어 있었고, 많은 관광객이 모이는 환락도시였다. 그것이 혁명 이후 쿠바 사회주의 건설의 중심지가 되면서 생산도시로 바뀌었다.  

역사를 가진 도시들이 흔히 그렇듯 아바나 역시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바로크시대의 웅장하고 화려한 스페인풍 건물들이 있어 옛날의 영화를 짐작케 해주는 한편에 신시가가 있어 조화를 이룬다. 독립영웅 호세 마르티 동상이 있는 혁명광장을 경계로 구시가와 신시가가 나뉘어 지는데, 17-18세기초 아바나만 서부에 건설된 구시가는 하얀 건물이 많은 에스파냐풍의 아름다운 마을로, 아직도 식민지 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반면 그 서쪽에 위치한 광대한 신시가지는 제1차 세계대전 뒤 미국 쿠바의 자본가나 바티스타 정권 정부요인의 고급주택지로 개발되어 넓은 길과 고층 빌딩들이 들어선 현대적 도시이다.

카스트로 혁명 이후 이 큰 저택들은 학교나 공공건물이 되었으며, 바티스타정권 아래에서의 콜럼비아 병영은 교육센터로 바뀌었다. 그 밖에 국영경비대의 병사였던 모로요새, 아메리카대륙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건물인 푸에르사요새. 옛 에스파냐 총독 관저(지금은 아바나시립박물관)등은 역사 유적이 되어 관광에 제공되고 있다. 아바나시 남동부 교외에는 생전에 쿠바를 좋아했던 "E. 헤밍웨이“의 체취가 남아있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쓰기 10년전에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이곳 아바나의 암보스먼도스호텔에서 썼다. 집필하여 탈고할 때까지 17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스페인 내란 문제를 다룬 소설을 아바나에서 쓴 것은 이곳에서 스페인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는 스페인을 유난히 사랑한 작가였다. 31년 여름 스페인을 여행, 투우에 관한 연구를 통해 “오후의 죽음”을 완성한 이후 스페인에 남다른 애정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스페인에서 파시스트의 반란이 발발하자 구호차 구입자금으로 4만 달러를 보내는 등 앞장서서 정부군 “인민전선파”를 도왔고, 그리고 “나나통신”의 특파원으로서 이듬해 직접 건너가 내란의 진상을 세계에 알렸다. 그러나 내란은 헤밍웨이의 기대와는 달리 프랑코측의 승리로 끝났다. 그는 쿠바의 아바나를 택해 머물며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써 내란에 희생된 영령들 앞에 바쳤다.

그리고 10년간 그는 침묵을 지켰다. 사람들은 그의 문학이 쇠퇴한 것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노인과 바다”를 써 냈다. 문학과 인생에 대한 그의 모랄이 집약된 금자탑같은 작품이었다. 탈고한 뒤 발표하기까지 200번이나 고쳐 썼다는 것만 보아도 헤밍웨이가 이 작품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주인공 산티아고는 실존인물인 마누엘 올리바리 몬테스판이라는 어부로 1963년 미국에 망명했다고 알려졌었다. 그러나 아바나에는 그레고리 후안데스라는 97세의 어부가 “내가 진짜 모델”이라며 관광객과 더불어 헤밍웨이 문학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 아래 헤밍웨이 흉상이 있지요. 헤밍웨이가 1898년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것은 내가 태어난 해에요. 헤밍웨이는 1899년에 태어났거든요. 우린 그렇게 혼동이 될 정도의 사이가 되었어요”

그는 쿠바를 유명하게 만든 인물이라 하여, 사회주의 국가의 유료관광식당에서 평생 점심을 무료로 먹는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자랑했다. 그는 헤밍웨이의 낚시나 사냥 스타일 까지 소상히 알고 있었다. 미국을 적대하는 괴뢰정권이면서 헤밍웨이를 관광상품화 하는 것, 이것을 “문학에 국경이나 이념의 벽은 없다“라고 보아야 할까?

쿠바가 자랑하는 관광지는 아바나 동쪽에 있는 바이데로 해변과 쿠바 제2의 도시 산티아고 데 쿠바이다. 아바나 동쪽에 있는 바이데로 해변은 바다 사이에 가늘게 이어진 경이로운 비치풍경이 20마일이나 계속되는 곳이다. 이곳에서보는 바다빛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만 없다면 하늘빛처럼 맑고 투명한데 뜻밖에도 병치료를 겸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일명 기후요법이라는데 건기(乾期)의 공해 없고 따뜻한 날들이 당뇨환자나 안질환자, 신경계통 이상자들에게 효험이 있다고 한다.

쿠바섬 남동부, 카리브해에 면한 마에스트라만에 있는 항구도시 산티아고 데 쿠바는 예술의 도시이자 혁명의 도시이다. 16세기 에스파냐의 정복자 D.벨라스케스에 의해 건설된 도시로 벨라스케스의 저택이 그대로 남아있다. 한 때 해적들의 밀무역 거점이 되기도 했지만 18세기 말 프랑스인들이 아이티혁명으로 망명해 오면서 사탕수수 재배가 확대되었다. 에스파냐식 건물 사이에 프랑스 풍의 건물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1898년 에스파냐 미국간 전쟁도 이곳에서 발발했고 1953년 카스트로가 지휘하는 무장청년들이 이 지방의 몬타카 병영을 습격한 것은 쿠바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공룡과 원시인들의 생활모습을 재현해 놓은 유적공원이 있어 발길을 머물게 하고, 사냥공원(엘 인디오)이 있어 산비들기나 노루 사냥을 즐길 수 있는 곳. 또 탁월한 자연과 스킨스쿠버다이빙 등 해양스포츠를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해변(부카네오)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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