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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언제 읽어도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위선이나 불의에 대항하여 정의를 세우면서 인간성을 옹호하고 정신을 이끄는 따위는 다음 이야기입니다. 잔잔한 물결처럼 다가와 가슴을 파고드는 반취 이기윤의 소설들에는 독특한 향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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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수요일이 되었다. 이 태호는 아침 일찍 맑은 정신으로 출근했다. 어제 너무 피곤했던 탓에 집에 가자마자 골아 떨어져 푹 잔 덕분이었다. TV며 신문을 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자며 그냥 푹 잔 것이 상쾌한 출근을 맛보게 해주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사무실 문을 여는데 이미 열려 있었다. ‘누가 이렇게 일찍…’ 하고 살며시 밀고 들어가니 김 미숙 차장이 먼저 나와 있었다.
  “웬일이야. 김 차장이 이렇게 일찍?”
  이 태호는 아침 인사 대신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숙제 때문에 잠을 못 잤어요.”
  책임감 때문에 잠을 못 잤다는 말이었다. 이 태호는 빙긋 웃고 주방에 가 커피를 두 잔 타서 한 잔은 김 차장에게 내밀었다.
  “그래서 다 하셨나?”
  “다 하긴 요… 나 이번 일은 정말 자신 없어요.”
  김 차장은 입을 내밀며 투정부리듯 말했다.
  “포기하긴 이르지 않아? 간담회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는데…”
  “그래도 헛일 같아요. 자살은 자살이지. 자살이 어떻게 자연사로 포장 되겠어요. 생각해 볼수록 자연사라는 용어도 애매하기 짝이 없구요. 말이 안 되는 걸 되게 만들 수는 없잖아요.”        
  김 차장은 자살과 자연사를 접목시키는 일에 지친 듯 했다.
  “어제 저녁까지는 그렇지 않았잖아. 어제 갈 때 뭐라고 했지? 모든 죽음은 주님의 뜻이라고 했던가?”
  “그랬어요. 그때만 해도 이렇게 절망적이진 않았어요.”
  “뭐 때문에 그렇게 절망하게 되었는데?”
  “세상에 자살이란 건 없어요. 자살은 자기 자신을 살인하는 행위에요. 십계명의 여섯 번째에 있죠. 살인하지 말라! 그건 타인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에요. 자기 자신에게도 그러지 말라는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신의 뜻이 아닌 거예요.”
  이 태호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자연사(自然死)’ 라는 주제를 놓고 진행되는 이야기가 흥미진진했다. 내용을 그대로 희곡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려도 훌륭할 것 같았다.
  “김 차장. 이런 생각도 해 봤어? 신(神)도 자살할 수 있을까?”
  그 소리에 김 차장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신이 어떻게 자살을 해요?”
  “신들의 세계엔 자살이 없을까?”
  “글쎄요.…”
  김 미숙의 표정이 조금 흥미를 되찾는 것 같았다. 이 태호는 그녀를 위해 섬광처럼 스쳐가는 생각들을 놓치지 않고 말해주려 애썼다.
  “세상 만물을 생각해 봐. 그 무엇도 한 번 태어나면 그냥 착하게 사는 것 외엔 별다른 길이 없어요. 신도 마찬가지일 걸. 그렇다면 그 무엇도 만능은 없어요. 스스로 죽고 싶어도 자살할 수 없기 때문에.”
  “무슨 말씀이에요? 자살할 수 있으면 만능이라는 건가요?”
  “인간이 참 희한한 존재라는 거지. 의도적으로 악하게 살 수도 있고 비겁하게 살 수도 있고 자살할 수도 있고… 니체가 이런 말을 했대. 자살을 생각하는 것처럼 커다란 위안이 되는 것은 없다고. 자살을 생각하며 밤을 보내면 아무리 상황이 위태로워도 멋지고 편안한 밤이 된다고 했거든.”
  “어머, 그건 그럴 것 같아요”
  김 미숙의 눈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소크라테스도 죽음은 위대하다고 했어. 특히 죽음을 인식하고서 목숨을 끊는 일이야말로 참으로 훌륭한 죽음이라고 외쳤어. 그가 사형 당하기 전날, 제자들이 감옥을 습격해 그를 구해냈어. 그 때 그가 한 말이 ‘악법도 법이다.’였거든. 나아가 법치국가의 국민은 법을 준수해야 한다며 감옥 밖에 나가기를 거부했지. 그래서 그의 죽음은 자살로 분류된 거야.”
  “……?”
  “인터넷에서 좀 더 꼼꼼하게 찾아 봐. 자살에 대한 재미있는 해석이 많을 거야. 자살을 더할 나위 없는 겁쟁이의 결과라고도 하지만 이런 경우도 있지. 적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싫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 말야.  결국 뭐야. 죽음이 두려워 죽음을 택하는 거 아냐? 삶이 다한 것을 느낀 순간 명예를 빛내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 자살일 수도 있다는 말이지.”
  “알았어요.”
  “어제 얘기한 죽음의 권리장전 찾아 봤어?”
  “알았다니까요.”
  김 차장은 더 말하지 말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간담회에서 경청한 뒤 다시 정리해 볼 게요.”
  “김 차장 능력은 내가 믿어.… 흐흐흐”
  이 태호는 일부러 소리 내어 웃었다. 김 미숙 차장은 그런 이 태호를 예쁘게 흘겨보았다.
  이 태호와 김 차장이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사이에 사진기자 김 경숙, 편집부장 서 귀석, 또 우 제면 기자, 수습 양 정희 등 편집실 직원이 모두 출근했다. 한 성태 국장도 어느 새 출근해 있었다. 이 태호는 국장실을 노크했다.  
  “국장님, 언제 나오셨죠?”
  “하하. 김 차장과 열띤 토론을 하느라고 내가 손짓해도 모르던데?”
  “그랬나요… 어떻게 할까요. 아침에 편집회의를 할까요?”
  “오늘은 바쁘니까, 간담회 준비가 어떻게 되었나, 만 점검하도록 합시다.”
  “그럴까요.”
  이 태호는 잠시 자리로 돌아와 취재노트를 들고 다시 국장실로 갔다.
  “오늘 오실 분은 계획한 그대로입니다. 산부인과 최 미형 박사, 하 순봉 변호사, 곽 재수 신부, 석 선운 스님, 이렇게 네 분입니다.”
  “의사 변호사를 빼면 자칫 종교 논단이 될 수도 있겠군.”
  “참. 철학자도 있죠. 철학은 국장님 몫입니다.”
  이 태호는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그러기로 했지 않나? 그래서 나도 준비 했어… ”
  “그럼 시작할 때 인사말은 누가 하죠? 국장님께서 해 주셔야 하는데…”
  “간담회니까 인사말 같은 거 특별히 하지 말도록 하지. 이 부장이 대충 취지를 설명하고 각자 편하게 얘기하는 걸로 이끌어 봐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때 양 정희 기자가 차를 두 잔 갖다놓고 갔다.
  “어때… 오늘 좋은 얘기들이 나올 것 같아?”
  “글쎄요. 열심히 유도를 해 봐야죠.”
  “아까 김 차장하고는 자살을 가지고 얘기하는 것 같던데.”
  “그랬습니다. 자살을 자연사와 접목시키려고 하는 거죠.”
  “잘 될까?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있지. 인간은 자기 감옥의 문을 두드릴 수 없는 수인(囚人)이다. 인간은 신이 소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며 스스로 생명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고 했어. 우리 대학 다닐 때도 참으로 위대한 철학의 문제는 자살밖에 없다고 매달렸던 그룹이 있었지. 인생을 괴로워하며 살 값어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판단을 하는 것. 이것이 곧 철학의 기본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라고 여겼었거든.”
  “……”
  이 태호는 철학으로 접근하는 자살이나 죽음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국장은 흥이 나는 듯 말을 계속했다.
  “자연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은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야.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는 거지. 인간 외에는 그 어느 생명체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가 없어요. 어쩌면 적절한 시기에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인생일지도 모르지. 자살은 본능 이상의 이상적인 어떤 내용을 내포하고 있게 마련이거든. 생각하기 따라서는 자살을 인간에게 허용된 최후의 만찬이라 여길 수도 있어요.”
  “그렇지 않아도 김 차장과 그런 비슷한 얘기를 나눴는데요, 어떤가요?  그러면 철학은 자살에 대해 긍정적인가요?”
  “대체로 긍정적이지. 인간은 누구든지 자기의 생명에 관해서 절대적인 권리를 가진다는 입장에서 긍정하는 것이야. 자살부정론자는 종교나 지배계층이야. 자살 반대는 신과 국왕에 대한 의무를 포기하는 행위라고 비난하는데서 출발하는 거니까. 특히 그리스도교에서 자살은 신을 모독하는 행위라 하여 죄악시하고 종교적 제재를 가한 역사가 많아요. 가톨릭에서 자살을 죄악시하는 것도 물론 같은 이유지. 불교는 불교대로 열반사상 입장에서 자살을 경계하고 있지만…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종교자살이 적지 않다는 것 또한 아이러니의 하나일 걸.”
  “어제 곽 신부를 만나 성서적 고찰 같은 걸 해봤는데, 성서적으로는 모든 죽음을 주님의 뜻으로 귀결시키던데요. 그렇다면 모든 죽음이 자연사인 것 아닐까요?”
  “어찌하겠나. 신의 뜻일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건 죽음이겠지. 자살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이지는 않을 걸.”
  “그런 면은 있었습니다.”
  “아무튼 진행을 잘 해 봐요. 뭐 언제나 잘 하니까 할 얘기는 없지만… 세 시라고 했든가?”
  “예, 간담회는 세 시에 시작입니다.”
  “십오 분 전 쯤 가면 되겠지?”
  “예. 다들 그렇게 오실 것 같습니다.”
  “이 부장은 언제 갈 건가?”
  “저는…”
  이 태호는 국장의 질문에 뒷머리를 만졌다.
  “어쩌다보니… 오늘 일정이 좀 복잡합니다. 12시에 선운 스님 만나 점심을 같이 하기로 했고, 1시 반에는 서울일보가 모퉁이찻집 취재 나오는데 한두 마디 거들어주기로 했구요. 2시에는 제가 특별히 만날 사람이 있는데 역시 그곳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어이구. 무슨 일정을 그렇게 한 날 한 곳으로 몰았어.…”
  “별 일은 없을 겁니다.”
  “알았어. 그럼 간담회 직전에나 보겠군.”
  “알겠습니다.”
  이 태호는 공연히 미안하다는 웃음을 보이며 국장실을 나와 제 자리에 앉았다. 이면지를 앞에 놓고 간담회 진행 순서를 짜 보았다. 옆에 취재노트도 폈다. 자. 어떻게 사회를 볼까?…
  우선 ‘자연사’에 대한 일반적 개념을 살짝 이야기하자. 국어사전은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노쇠하여 죽음. 또는 그런 일.」이라고. 그러나 노환으로 사망하는 경우도 질병사망에 속하며, 암으로 사망하는 경우도 질병사망에 속한다. 생명체라면 늙음과 병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노쇠하면 기력이 떨어지게 마련이고 결국 면역기능이 다하여 죽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사의 1차적 정의는 노쇠가 아니라 병약해져 죽는 것이다.  

  그렇게 서두를 뗀 다음 「존엄사」「안락사」에 대한 현대적 논쟁을 끌어들여 보자. 과연 어떻게 죽는 것이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것인가. 그런 다음 낙태에 대하여, 그리고 자살에 대하여 토론하다 보면 큰 줄기는 정리될 것이다. 그 다음 사고사나 돌연사, 타살, 자연 재해사를 이야기 하고 마지막으로 희생(犧牲)적인 죽음 을 거론하면 다 되는 것 아닐까.  
  김 차장이 넘겨준 자료를 보면 ‘자살’에 대한 논쟁이 제일 흥미로울 것 같았다. 자살 율은 어느 나라나 여자보다 남자가 훨씬 높다. 여자가 역경에 순응하고 곤경을 참아내는 능력은 강한 반면 사회적 활동의 범위는 좁아서, 자살의 동인(動因)이 될 만한 곤경에 봉착하는 경우가 적기 때문일 것이다. 깊이 들어가면 더 복잡해지겠지만 어쨌든 통계에 의하면 신경쇠약, 실연, 병고(病苦), 생활고, 가정불화, 장래에 대한 불안, 사업실패, 염세(厭世) 등의 이유가 있다. 남녀별로 보면 남자에게는 신경쇠약과 병고가 많고, 여자에게는 가정불화와 실연이 많다. 청소년에는 실연과 염세가 많고, 노인은 병고가 많다. 어느 경우든 자살의 원인은 자살하는 사람이 유서로 밝히고 가기 때문에 예약하는 죽음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예약하는 죽음? …’ 이 태호는 빙긋 웃었다.  

  12
  11시가 넘었다. 이 태호는 일어날 준비를 했다. 선운 스님과 미리 점심을 먹기로 한 것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안 해만이라는 사람 때문이었다.
  물에 빠져 익사하려는 사람을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주었다면, 점심이라도 대접하겠다고 나설 만한데 전혀 그런 기미조차 없는 것이었다. 전화선을 타고 온 목소리에도 고마워하는 기색은 담겨있지 않았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만나보면 의문이 풀리겠지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전화벨이 울리자 이 태호가 받았다. 어느 새 열한 시 반이었다. 예상대로 선운 스님이었다.
  “아, 스님. 어디 계세요?”
  “나 모퉁이 찻집에.”
  스님의 목소리는 밝았다.
  “벌써요? 차는 식사 후에 드셔야지요, 스님.”
  “식전에도 마시고 식후에도 마시면 더 좋지 뭐.”
  “알겠습니다. 그리 가겠습니다.”
  이 태호는 안 해만 씨 생각을 털어버렸다. 편집실 모두가 들으라는 듯 조금 큰 소리로 ‘나 먼저 가서 준비할게’ 하는 한 마디를 던지고 취재노트를 챙겨 사무실을 나왔다.    
  모퉁이찻집에 가니 선운스님과 윤 정숙 사장이 마주앉아 이미 차를 마시고 있었다. 윤 사장이 차를 내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이 부장님.”
  선운 스님보다 먼저 윤 정숙 사장이 반겼다. 이 태호는 빈자리에 앉았다.
  “윤 선생이 직접 내는 차를 마시는 건 오랜만인 것 같네.”
  이 태호는 윤 정숙이 내미는 잔을 받으며 황공하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차만 내는 게 아니라 점심도 살게요.”
  윤 정숙 사장은 방긋 웃었다.
  “점심은 왜?”
  “오늘 서울일보 취재 도와주시는 대가지요.”
  “오오, 그럼 부담 없이 먹어야죠. 그러나 바쁘지 않아요?”
  “그래서 아르바이트 한 사람 더 불렀어요. 우리 집에 가끔 오는 아이라 차를 잘 알고 서빙도 곧잘 해요.”
  “준비를 단단히 했군요. 그렇게 기대했다가 서울일보에서 눈에 띨까말까 하게 작게 내 주면 어떻게 하죠?”
  이 태호는 다 마신 찻잔을 내려놓으며 느물거렸다.
  “할 수 없죠 뭐.”
  그러나 웃음을 흘리는 윤 정숙의 모습은 설마 그럴 리 있겠습니까. 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요. 이제 우리 이야기 좀 할까요?”
  그때까지 말 없던 선운 스님이 이 태호를 향했다.
  “예, 스님. 어떻게… 자료가 좀 정리되셨나요?”
  “자료는 뭐… 이 부장이 궁금한 걸 물어봐요. 아는 대로 내 소견을 말하도록 하지.”
  “묻고 싶은 거는 죽음이죠. 불교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보는가, 또 자연사에 대해서는 어떤 정의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거죠.”
  “뭐예요? 죽음이라니요?”
  윤 사장이 반문하며 끼어들었다.  
  “아, 우리가 다음 호에서 죽음에 대한 특집을 하거든요. 오늘 간담회 주제가 자연사에요.”
  “어마… 왜 그런 걸해요?”
  윤 정숙은 마땅치 않은 기색이었다. 두 사람은 상관하지 않았다. 선운 스님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보지. 냉혹한 자각을 통해, 죽음이라는 실상을 초월하는 보다 높은 차원의 진실을 체득함으로써 현실적 죽음의 문제가 극복된다는 것이 붓다의 입장이었어. 이 극복을 통해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신행의 목표인 셈이고.”
  “일종의 영생 론인가요?”
  이 태호는 곽 신부의 영생 론을 떠올렸다. 유사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영생 론인 셈이지. 그러나 사후(死後)의 존재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인식이에요. 삶에도 번민하지 않고 죽음에도 번민하지 않는 생명에 대한 추구랄까.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업과 윤회를 벗어난 경지로서 번뇌를 꺼버린다는 원의를 지닌 열반… 불교에서는 그런 걸 죽음이라고 해요.”
  “알 듯 말 듯 어렵네요. 쉽게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는데…”
  “이따가 자료를 드릴게. 두세 번 읽어보면 다 이해되는 말들이에요.”
  선운 스님은 서류가 든 걸망을 두드려보였다 윤 정숙이 말했다.
  “이야기가 길 것 같으면 점심 드시면서 하는 게 어때요?”
  “그럴까?”
  스님은 이 태호를 보며 의사를 물었다. 이 태호는 ‘그러지요.’ 하고 먼저 일어났다. 윤 사장의 제안으로 세 사람은 한정식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선운 스님은 말을 계속했다.
  “불교에서의 죽음은 마음의 문제에요. 마음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무심(無心)의 상태, 즉 적정(寂靜)이며 열반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 때 해결된다고 보는 거죠. 한 마디로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
  “역시 영생이네요. 아니면 무(無)이든가… 그게 범불교적으로 공통적인 사상인가요?”
  이 태호는 저도 모르게 ‘역시’라는 부사를 썼다. 어제 곽 신부에게 들은 것을 떠올린 것이다.  
  “범불교는 아니지. 예를 들어 티베트 불교에서 보는 죽음은 달라요.”
  선운 스님은 자신이 티베트 불교에 심취했던 과거를 드러내듯 티베트 불교의 죽음과 윤회를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이 태호는 환영했다.
  “저도 파드마 삼바바의 《티베트 사자의 서》를 읽어보긴 했습니다. 죽음을 논하는 데는 좋은 참고가 되겠죠?”
  “그래요? 물론이지.”
  스님은 그 말을 반가워하며 ‘그렇다면…’ 하고 유창하고 장황하게 티베트 불교 이야기를 시작했다. 식사가 차려지자 먹으면서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이 태호가 말했다.  
  “거기 보면 티베트 사람들은 바르도라 부르는 실험을 하던데요.”
  “모두는 아니고 명상을 한 사람들이 하는 거지. 죽는 순간 그를 아는 사람들이 주위에 모여 이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계속 주시하라는 주문을 계속해요. 죽음을 맞이하는 상태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나기 때문이지, 새로운 현상을 이해하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하니까. 자. 봐요. 어떤 사람이 죽었어. 죽었는데 죽음 이후에도 의식적으로 남아 있게 된다면 그는 한동안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영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지. 의식은 곧 영이니까.”
  “그럴 수 있겠지만, 제 생각엔 그런 가정이 산 사람들의 작품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던데요. 산 사람은 죽음 이후를 전연 모르지만, 죽은 자는 살았을 때의 일을 알 거라는 상상도 산 사람들의 것이니까요.”
  “그렇게 의심을 가지면 바르도고 뭐고 아무 것도 성립되지 않아.”
  “바르도에서도 처음에는 상황이 바뀐 줄 모르다가 사람들이 자기 시신을 옮기고 화장터에서 불태우기 시작할 때 비로소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지 않나요? 육체는 죽었어도 내면은 죽을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 것 같은데,… 그래서 단지 분리되어 거리감을 느낄 뿐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럴까요? 살아있을 때 산 것만 있듯이 죽었을 땐 죽음 이외에 아무 것도 없는 것 아닐까요?”
  “낸들 무슨 명쾌한 답을 줄 수 있을까?”
  선운 스님은 그 대목에서 웃었다. 이 태호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더 이야기를 끌고 가지 않으려는 웃음 같았다.
  “명상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그것이 우리의 선 수행과 상통하는 게 있나요?”
  모처럼 윤 정숙 사장이 물었다. 선운 스님이 답을 했다.
  “명상의 목적이 바로 바르도에 있는 거지. 명상으로 수련하면 죽음이 일어날 때도 의식은 완전하다는 것이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죽음을 맞으면 영혼은 그 의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다음 생을 맞이할 수 있을 거 아닌가. 그렇다면 새로운 삶의 첫날은 무지(無知)의 날이 아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시작이 되겠지?”
  “그럼 완전한 윤회네요.”
  “그렇지. 아무 것도 기억하는 것이 없는 윤회가 아니라 온전히 모든 것을 의식하는 윤회가 되는 거지.”
  “과연 가능할까요?”
  “가능하니까 믿는 거지. 해방을 위한 노력. 명상 수련을 통해 완전한 의식을 가지고 죽음과 탄생을 맞이하는 것은 오직 한 번에 한해 가능하다고 해요. 그렇게 해서 탄생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삶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고 깨달으면 해방에 이르는 거야. 그 모델이 아바타라, 티르탕카라, 붓다, 예수, 크리슈나 같은 분들이에요.”
  “우리 식으로 말하면 해탈이네요.”
  윤 정숙은 웃었다. 스님의 말은 계속됐다.  
  “티베트 사람들은 가능한 한 화장을 빨리 해요. 육체가 죽었다는 것을, 육체가 불타 재가 되고 있음을 빨리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죠. 물론 의식적으로 죽었을 때에만 알 수 있는 거니까 명상가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에요. 죽은 사람이 바르도 속에서 자신의 육체가 불타는 것을 지켜보도록 하기 위해서 주위 사람들이 그에게 말하죠. ‘달아나거나 비켜서지 말고 그대의 불타는 육체를 잘 보아라, 다음번에는 그대가 그대의 육체에 애착을 갖지 않도록.’ … 일반적으로 천 명 중 999명은 죽을 때 무의식이 된다고 하죠. 그들에겐 바르도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티베트의 죽음과 윤회, 바르도에 대하여 갖고 있는 지식을 마저 이야기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죽으면 즉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갑니다. 새로운 세계는 경험한 것도 아니고 경험하지 않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무섭고 두렵겠죠. 그 세계는 지상에서의 삶과 관련이 없을 수도 있어요. 육체가 없는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상상을 넘어서는 무서운 경험이 될 수 있는 거니까. 보통은 무의식 상태에서 이 과정을 지나기에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의식적인 상태로 이것을 통과하는 사람은 피할 수 없이 커다란 혼란과 어려움에 빠져요. 바르도는 그런 경우, 그것이 어떤 세상일지,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그리고 어떠한 존재들을 그가 마주치게 될지를 미리 설명해주는 시도입니다. 깊은 명상을 해 온 사람만이 이 실험에 초대될 수 있는 것은 그런 이유입니다. 어때요 좀 이해가 되나요?”
  “대충은요. 그러나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윤 정숙은 또 웃었다.
  “저는 조금 알아들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이 태호가 말했다. “그렇게 모든 걸 의식하는 완전한 윤회가 이루어진다면 그 삶도 좋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들에겐 좋고 나쁘고 가없지. 죽음은 다른 형태의 존재로 가는 피할 수 없는 문이니까. 삶과 죽음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보는 건 같아요. 티베트에서는 현재와 미래 사이의 전이 기간도 ‘바르도’라는 용어로 설명해요. 바르도를 삶, 수면, 꿈, 명상과 사후 바르도로 나누는데 죽음과 환생 사이의 과도기적 상태인 ‘환생’ 이라는 대목에서 이 용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거든.”
  “마치 단테가 설정한 연옥과 같네요?”  
  “연옥? 허허. 나는 그런 생각까지는 못했구만. 그래요 연옥과 비슷한 설정이 되겠지. 그러니까 바르도란 죽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강력하게 느끼는 것으로 지각과 생각, 감정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순간적인 느낌 같은 거라고나 할까.”
  “바르도라는 건 그럼… 죽음의 느낌인가요? 죽음이 늘 함께 하고 있다고 해석하면 되겠습니까?”
  “죽음의 느낌?…”
  스님은 고개를 갸웃하며 묘한 시선으로 이 태호를 잠시 보고 나서 말을 이었다.  
  “죽음의 느낌하고는 다르지. 죽음과 새 삶 사이의 안내 같은 거라고 할까. 그들은 살아있는 동안 명상을 통해 마음의 본성에 친숙해져야하며 죽음의 순간 그것이 자발적으로 강력히 현현할 때 자유를 성취한다고 말하니까.”
  “머리가 이상해지려고 하네요.” 이 태호가 즐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단테의 신곡에서 천국을 안내하는 베아트리체 역할이에요!”
  “그런가? 허허허. 그리고 보니 그런 것 같군. 허허허허.”
  새로운 비교는 선운 스님에게도 즐거움 같았다.  
  “그래요. 어쨌든 명상은 죽음의 순간 본성과의 합일을 가능케 해 주고, 평정을 기를 수 있도록 장려하는 수행이에요. 마음의 평정을 기름으로서 티베트 불교는, 내가 느끼는 나는 본성이 아니라 자기 집착일 뿐이라고 말하며, 따라서 모든 행위는 자신에게 과보를 낳는다고 하는 카르마의 법칙으로 죽음 이후를 설명하지요.”
  “오늘의 행위가 다음 생에 열매를 맺게 한다는 건가요?”
  “결국 그거지. 현세의 행위가 다음 생의 향방을 결정짓는 거. 그게 윤회사상으로 연결되는 거고.… 불교는 우리가 죽음을 제대로 준비한다면 삶과 죽음 모두에 커다란 희망이 있다고 말해요. 그러니까 철저하게 죽음을 준비하고 수행에 전념한 사람에게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시작이 되는 거고, 패배가 아니라 승리, 또는 삶의 영광스러운 성취의 순간이 되는 거지.”
  “그렇다면 스님…”
  하고 이 태호가 말하려는데 윤 정숙 사장이 끼어들었다.
  “대화가 너무 진지해서… 그러나 식사를 마저 드시면서 하시지요. 모처럼 내는 점심이 다 식어버렸네요. 곡차라도 곁들일까요?”
  “곡차는 뭘… 기자도 만나야 하고, 오후에 간담회도 있고…”
  스님은 사양했다.
  “이 부장님은요?”
  “저도 마찬가지네요.”
  이 태호도 사양했다. 그러나 침을 삼키며 말하는 것을 윤 사장이 보았다.
  “그러지 말고 한 잔씩만 하세요. 제가 실력을 다 아는 데요.”
  윤 정숙이 다시 권하자 선운 스님은 이 태호를 보았다.
  “허허. 그럼 곡차니까… 꼭 한 잔씩만 합시다.”
  “스님이 그러시다면…”
  이 태호가 마다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윤 정숙은 막걸리를 가져오게 하여 세 개의 잔에 따랐다. 스님은 곡차를 들면서 또 말했다.    
  “이 부장. 티베트 불교 이야기는 그만하고 우리 이야기로 마무리 합시다.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 중 하나가 죽음이지만 아무도 죽음을 경험하지는 못하지요. 따라서 죽음에 대해 설명한 모든 것은 추상적인 것이지 직접적인 것은 없어요. 부처님조차도 사후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무기(無記)'라 하여 논하지 않으셨어요. 아마도 당장의 실재에 대한 탐구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다만 부처님께서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모두 고(苦)로 보고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그 고(苦)에서 해탈(解脫)하게 하고자 하신 노력은 있지요. 부처님께서 확연하게 깨달은 진리는 삼라 만유란 인연 생기적 현상이며, 마음이라고 부르는 청정한 고요의 바다 위에 일어난 하나의 물결 파문이라고 본 것으로, 결국 상대적인 인간개념과 경험의 현상으로서의 삶과 죽음이라는 현상도 삼라만유 중 한 가지 현상일 터이니 두말할 것 없이 삶과 죽음 역시 인연생기적 현상일 뿐 그것 자체로서의 실체나 실재로서의 불변적 속성이 없다는 것이에요.”
   “예, 이제 그 정도는 이해가 됩니다.”
   이 태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제로 이해가 되었다. 죽음에 대한 불교적 극복은 윤회고(輪廻苦)를 벗어나는 것이라는 사실은 알기 때문이었다.  갈애(渴愛)를 극복한 사람은 일체가 무상(無常)임을 받아들이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투철한 이해를 갖는 것만이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이라는 말이었다. 업을 지으면 그 업력으로 윤회하게 되고 결국 계속하여 고통을 받게 된다고 했다. 따라서 업을 짓지 않으려면 반대로 행이 없어야 하고, 무명을 떨쳐야 한다. 선운 스님은 자리를 마무리하듯 말했다.
   “석가모니께서는 임종 때 어떤 갈등도 고통도 없으셨다고 합니다. 부처님 자신이 죽음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성을 지닌 사람이면 누구나 마음의 전환으로 생사의 초월이나 극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지요. 이렇게 불교에서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일차적 목표는 무심(無心)입니다.”
   “고맙습니다, 스님. 그런데 오늘의 주제는 극복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입니다. 인간의 ‘자연스런 죽음’에 대한 논의인 거죠,”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결론은 같을 거예요. 삶과 죽음은 하나이니까…”
   “그렇군요. 그러면 어떻게 삶이 죽음으로 변화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볼 것이냐, 그런 이야기를 해보자는 자리가 되겠군요.”
   “역시 이 부장은 훌륭해. 허허허.”
   “좋은 말씀 사전에 많이 주셔서 고맙습니다. 간담회 때 더 좋은 말씀을 주십시오.“
   이 태호는 선운 스님께 감사하고 윤 정숙 사장을 보았다.
   “윤 선생께 미안하게 됐네요. 점심도 내셨는데 우리 둘만 이야기하다보니 심심하셨죠?”
   “아니요. 저도 열심히 들었어요. 스님, 참 뵐수록 박식하시네요.”
   “무슨 부끄러운 말씀을…”
   “이제 가시죠. 조금 있으면 서울일보 기자가 오기로 한 시간이거든요.”
   “그럽시다. 점심 잘 먹었습니다.”
   스님과 이 태호는 거의 동시에 윤 사장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일어섰다.
  한정식 집을 나와 모퉁이찻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에 이 태호는 스님의 말씀을 곽 신부의 기독교적 논리와 비교해 보며 두어 걸음 뒤쳐져 걸었다. 선운 스님은 앞에서 윤 정숙 사장과 이야기 하며 걸어갔다.  
  
    13
   “어머. 벌써 오셨네요.”
   찻집에 들어서자 윤 정숙은 첫 눈에 서울일보 기자가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선운 스님과 이 태호에게 다른 쪽의 자리를 안내하며 ‘우선 차 드시고 계세요. 제가 모시러 올게요.’ 한 뒤 쪼르르 서울일보 기자가 않아있는 쪽으로 가서 인사하고 마주 앉았다. 기자에겐 동반 여성이 있었다.
  이 태호는 스님과 다른 자리에 마주 앉았다. 혹시 그가 미리 와 있지는 않을까 해서 둘러보니 세 개의 탁자에 손님이 있는데 혼자 있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다 얘기하자는 건 아닙니다만…” 이 태호는 스님에게 말했다. “스님이 보시기에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기독교는 ‘죽임의 세력’에 관심을 기울이는 반면 불교는 죽음 그 자체와 정면 대결하여 죽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비문제화 시켜버리는 것이 달라 보이는데…”
  “글쎄. 나는 기독교의 논리를 잘 모르니까…. 불교의 관점은 이 부장이 대충 파악한 것 같네.”
  “저는 그게 차이인 것 같네요…”
  “어쨌든 우리는 말해요. 인간이 낳고 죽고 하는 것은 현상적 자아로서의 나인 것이지, 진여자성(眞如自性)으로서의 나, 곧 불생불멸하는 법성의 내면적 실재인 ‘진아(眞我)’로서의 나가 아니라고. 죽음이란 삶의 대립적 실재가 아니라 삶과 더불어 존재를 구성하는 인대적 변화 계기에 불과한 거예요. 죽음이 없이는 삶이 없다. 죽음이란 더 크고 새로운 삶을 향한 변화의 계기요 전환이다. 육신은 진여자성(眞如自性)이 머무는 자연 소재물이다. 죽음이란 그 육신을 자연에 다시 되돌려주는 환원 행위일 뿐이다.…”
  “사실 저는 어제 곽 신부님과 오랜 시간 같이 있었어요. 죽음에 대한 논의를 한 거지요. 느낌은 결국 같네요. ‘자연사’란 표현은 아니네요. 그리고 놀라운 건 불교나 기독교나 영생을 논하는 부분은 같다는 사실의 발견이네요. 다만 수사적 표현이랄까,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데서 접근이나 표현 방법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일 뿐이네요.”
  이 태호는 마음속으로 어느 정도 결론을 정리해가고 있었다. 결국 무엇인가? 자기 삶의 주체는 자기라는 것 외에.
  그 때 윤 정숙 사장이 쪼르르 다가와 도움을 청했다. 선운스님과 이 태호 부장은 일어나 그들의 자리로 옮겼다. 정확하게 1시 반이었다. 이 태호는 실내를 다시 둘러보았다. 그는 아직 오지 않은 게 분명했다.  

  14
  윤 정숙 사장은 스님과 이 부장을 취재진에게 소개했다.  
  “단골 중에 단골이세요. 차에는 저보다 더 해박하신 분들이구요. 불가의 다도에 대해서는 스님이 해결자(?)시구요. 차문화사나 현대인의 생활차 측면은 이 부장님께서 말씀 주실 겁니다.”  
  “반갑습니다. 서울일보 문화생활과학부의 박 정수입니다.”
  남자는 명함을 내밀고 옆에 앉은 여자를 소개했다.
  “이 쪽은 시를 쓰는 친구입니다. 이 친구가 여기 모퉁이 찻집을 추천해서 함께 왔습니다.”
  “한 해련입니다.”
  여 시인도 인사했다.
  “시인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저는 잡지사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 태호는 두 사람에게 모던라이프 명함을 주었다. 선운스님은 합장했다.
  “그럼 필요한 것을 물어 주시지요. 별로 아는 것은 없지만….”
  이 태호는 얼른 끝내고자 했다.
  “예.”  하고 기자는 수첩의 메모를 보면서 물었다. “차가 우리 토산물이고 건강에 좋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좋은 건지요?”
  이 태호는 스님 눈치를 본 뒤 답했다.
  “차의 좋은 점을 어찌 한두 마디로 하겠습니까?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지요, ‘위로 머리를 맑게 하고 아래로는 소화를 돕는데 그 덕은 말로 표현하기 부족하다.’ 고 말입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요?”
  박 정수 기자는 스님을 보다.
  “수미를 혀로 삼아 아승기겁 논한다 해도 그 덕을 다 말할 수 없다, 고 했습니다. 수미란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산이고, 아승기겁은 끝이 없음을 뜻합니다.”
  “표현이 사뭇 선문답 적이네요”
  여 시인은 탄성을 흘렸다.
  “차는 어떤 분들이 좋아하시나요? 불가의 스님들 외에…”
  박 기자가 물었다.
  “여자들이 좋아하죠. 신부님 중에도 차를 좋아하는 분이 많구요.”
  “그렇군요 차는 주로 사찰에서 즐기는 것으로 알았는데…“
  “그래요? 기자분이 그런 식으로 차에 종교 색을 부여한다는 건 좀 문제가 있는 데요“
  “어떤 면에서요?”
  “그럼 내가 되묻죠, 커피의 종교적 색깔은 뭡니까?”
  “커피요… 굳이 말한다면 기독교가 아닐까요?”
  “보세요. 그것도 잘못 알고 있죠. 커피는 이집트에서 발견된 후 회교 승들이 수도용 음료로 즐겼던 겁니다. 세계최초의 커피하우스가 아라비아 메카에서 문을 연 것도 그런 연유지요. 기독교 사회에서는 오히려 커피 마시는 사람들을 박해했습니다. 한 때 이스탄불에서는 커피를 마시다 들키면 혀를 뽑았고, 팔고 사고 하다가 잡히면 커피자루에 담겨 절벽에서 떨어뜨리는 극형을 당하고 했었지요.”
  “아니, 커피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기자와 여 시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커피를 찾는 사람은 늘어나 유럽의 기독교 사회 전체가 큰 혼란에 빠지고 말았어요. 어떻게든 교황이 결단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지요.”      
  “어머 그래서요?”
  여 시인의 눈이 더 반짝였다.
  “당시 교황은 클레멘트8세였어요. 커피를 가져오라. 내가 마셔보고 결정을 내리겠다. 이러셨지요. 그렇게 해서 커피를 마셔 본 교황은 이윽고 말씀하셨어요, 이렇게 훌륭한 음료를 회교도만 마시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 듣거라, 내가 커피에 세례를 줄 것이니 앞으로는 모든 기독교인이 부담 없이 마시도록 하라. 이에 며칠 후 로마에서 커피 세례식이 성대하게 거행 되었지요”
  “참 재미있군요. 커피에 그런 에피소드가 있다니요”
  “차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있어요, 차 때문에 일어난 전쟁만 해도 굵직굵직한 게 얼마나 많습니까? 영청간의 아편전쟁, 미국의 독립전쟁, 이런 게 모두 차 때문에 일어난 대표적 전쟁이었죠.”
  “아니 미국 독립전쟁이요?”
  박 기자가 놀랍다는 표정을 꾸밈없이 드러내 보였다.
  “보스턴 티 파티라는 게 있지요. 미국독립전쟁의 직접적인 발단이 된 게 이 보스턴 티 파티에요. 백과사전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까 살펴보세요. 미국이 독립 후에 의도적으로 커피왕국을 표방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이거… 메모할 게 아니라 강의를 들어야 되겠습니다. 음료에 대해 워낙 무식한 탓이겠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놀라운 데요.”
  박 기자는 그렇게 말하고 여 주인을 보며 웃었다. 여 주인이 말했다.
  “저도 한 말씀 드릴까요? 시경에 이르기를 높은 산은 우러러 보고 큰일은 행한다고 했지요, 거기 근거해서 차 내는 일은 ‘행차(行茶)’라고 한답니다. 차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큰일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하나 같이 재미있네요.”
  박 기자가 재미있어 하니 여 시인도 덩달아 신이 나는 것 같다.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무슨 말을 먼저 하나요? 어디 가서 차 한 잔 할까, 아닌가요? 그렇게 하는 거라고 가르쳐준 사람도 없는데 말이에요. 차가 고유명사임을 상기한다면 정말 다시 생각해볼 보배 중 보배 같네요.”
  “그럼요.” 윤 정숙 사장도 기분이 좋아졌다. “제 경우는 소중한 상대일수록 보다 아늑한 장소에서 아름다운 음악 곁들여 차를 나누려고 하게 되죠. 탁자에 꽃까지 있으면 더욱 좋고… 그런데 이때 차 내는 것을 누구 시키지 않고 직접 정성껏 만들면 얼마나 더 감동적일까요. 차는 그런 거예요. 그래서 차를 하면 몸가짐도 다듬어지고 마음도 고와지는 것이지요.”
  “제가 부끄럽군요. 그렇게 훌륭한 문화를 여태 몰랐다는 것이…”    
  박 기자는 얼굴을 붉히기까지 했다.
  “차 생활을 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아름답게 가꾸고 다듬는 노력이에요. 스스로 아름답지 못하면 아름다움에 접근할 수 없다는 논리가 그 안에 있습니다. 심미안만 열리면 아름다움은 어디에나 있어요. 불완전한 것도 다 사랑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도 좋은 점만 보는 거예요. 여기저기서 새 마음 갖기 운동들 많이 하고 있죠. 하루 한 번 상대를 칭찬하기라든가. 심미안 기르기. 제자리 놓기 운동 등등… 원래 차 생활 교육에 그런 것이 다 포함되어 있어요. 그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고 발전해서 예절바르고 아름다움을 숭상하는 문화를 낳았던 것이지요.”
  “종교가 따로 없군요. 넉넉함과 사색으로 가득하니…”
  박 기자는 메모하기에 여념이 없다.
  “조용한 가운데 항상 사랑이 넘치고…”
  “가만, 음악이 들리는 군요, 이게 대금입니까?”
  “아녜요, 이건 단소 소리에요”
  “박 기자님” 한 해련 시인이 끼어들었다. “모퉁이찻집이 좋은 곳이라는 제 말, 이젠 공감하시겠죠? 저는 여기 앉아서 시를 쓸 때가 많아요, 여긴 공간 자체가 사색을 도와주는 숲이라구요.”
  여 시인은 은근히 생색을 냈다.    
  “그러면, 그런 차가 왜 우리 생활에서 멀어졌을까요?”
  “역사를 이야기하자면 너무 길어지죠.” 이 태호가 말했다. “그건 자료를 보시거나 찻집 주인이신 윤 정숙 선생에게 들으세요.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차가 멀어진 게 아니죠, 쉽고 편하고 보기 좋은 인스턴트 제품들이 판을 치면서 사람들이 차를 멀리한 거죠. 차(茶)라는 글자를 보십시오. 풀 초(艸)와 나무(木)사이에 사람(人)이 있는 모양입니다. 사람이 자연과 더불어 사는 모습입니다. 현대는 어떻습니까. 사람이 자연을 멀리하고 살지 않습니까.”
  “차(茶) 자가 그런 가요? …”
  박 기자는 한문으로 茶 자를 써 보더니 웃었다.
  “정말 그렇네요.”
  “그럼요. 차 생활에 익숙해져 보세요. 무엇보다 자연을 다시 보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자연을 그리워하는 고향감정 같은 것이 잠재되어 있지 않습니까. 차가 그런 고향감정을 건드리는 자극제라고 보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훌륭한 예찬이십니다.”
  “좋은 걸 좋다고 하는 게 무슨 예찬입니까. 차는 정말 좋은 벗이에요. 차는 사람을 사색의 숲으로 이끄는 마력이 있습니다. 또 무례하고 거칠고 불순한 것들을 다 순화시켜 주기도 하지요. 이 기회에 박 기자님도 차를 가까이 해 보세요”
  이 태호는 명함을 다시 보며 박 정수라는 이름을 두 번 확인했다.
  “허허허허, 차를 마시는 것으로 과연 성품까지 고쳐질까요.”
  박 기자는 너무 과장 아니냐는 제스처를 보였다. 이 태호가 말했다.
  “직접 체험하는 것보다 더 빠른 확인은 없죠. 나는 역사가 증명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차 문화가 융성했을 때는 나라가 번창했고, 차 문화가 쇠퇴했을 때는 나라꼴이 형편없었지요. 오죽하면 음다흥(飮茶興) 음주망(飮酒亡) 소리가 나왔겠습니까. 차 마시면 흥하고 술 마시면 망한다고….”
  “차는 누구에게나 좋습니까? 체질에 상관없이?”
  박 기자는 스님을 향해 물었다.  
  “몸이 찬 사람은 적게 마시라는 얘기도 있긴 한데, 그러나 자꾸 마시다보면 다 잘 맞는 거 같아요. 사람뿐이 아니죠. 한국의 다성 초의선사가 전하는 동다송 글귀에 이런 예찬 대목이 있습니다. 하늘이나 신선이나 사람, 귀신, 모두가 아끼고 사랑하니 너의 타고난 성품 참으로 기절(奇絶)하구나. …차는 만인에게 좋은 겁니다.”
  “그러고 보니 묘한 인연이네요.” 이 태호가 스님의 말을 받았다. “오늘 마침 죽음을 테마로 해서 간담회를 하는 자리인데 한쪽에서 삼세(三世)가 아끼는 차 얘기가 한창이니까요.”
  “그런가요? 죽음이란 테마를 놓고?”
  “예 3시부터 간담회죠.”
  “재미있겠는데요.”
  박 정수 기자는 잠시 취재수첩을 덮고 차 맛을 음미했다. 윤 정숙 사장은 벽시계를 보고 ‘어머, 2시네요. 간담회 준비를 해야겠네요.’하며 일어섰다.
  “어때요. 박 기자님. 궁금하신 거 있으면 두 분께 더 물어보세요. 전 준비할 게 있어서…”
  윤 사장이 일어서자 이 태호도 일어나려 했다. 대충 자기 조언은 끝났을 거라는 생각에서 였다. 그러나 아직 그가 오지 않아 어정쩡했다.  

  그 때였다. 한 남자가 찻집 안으로 들어왔다. 혼자였다. 이 태호는 한 눈에 물에 빠졌던 ‘그’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곁눈으로 보니 이목이 수려하고 눈썹이 짙어 선비다운 용모인데다 170 정도의 키에 호리호리한 표준형이었다. 다만 고뇌가 깊은 듯 약간 초췌해 보였다. 찻집에 들어선 그는 주인을 찾아 뭔가를 물었다. 윤 정숙이 생긋 웃으며 예쁜 손짓으로 내 위치를 가리키며 안내하는 소리가 들렸다.  
  “예. 먼저 오셔서 기다리고 계신데 잠시 다른 분과 말씀을 나누시네요. 저쪽으로 앉으시지요. 제가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윤 정숙은 ‘그’를 창가로 안내하고 엽차를 탁자 위에 놓았다. 창밖으로 인사동 네거리가 보이는 자리였다.
  “작설 세작으로 2인분 주세요.”
  ‘그’가 차를 주문했다. 윤 정숙은 뜻밖이었다. 메뉴판에 세작이란 표현이 있지만 ‘작설 세작…’이라면 ‘국산차 세작…’을 달라는 정확한 표현이었다. 차를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가운 게 찻집 주인이었다.
  “차를 잘 아시는 군요. 반갑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하고 여 주인은 그 자리를 물러나 쪼르르 이 태호에게 다가와 홍조 띈 얼굴로 속삭였다.
  “저 손님 있죠? 느낌인데, 차를 잘 아시는 분이네요.”
  “그래요?”
  이 태호도 반가웠다. 윤 정숙은 주방으로 갔다.  
  이 태호는 이제 그만 스님에게 뒤처리를 부탁하고 일어나고자 했다. 그런데 박 기자가 물었다.
  “이 부장님은 차를 좋아하시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습니까? “
  “건강에 좋다는 게 동기겠죠. 저는 저혈압이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차를 마시는 것으로 혈압의 안정을 찾았죠.”
  “아까 저혈압에는 차가 안 좋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한 해련 시인이 끼어들었다. 아마도 혈압 이야기는 자기 관심사이기도 한 듯 했다.
  “그건 육우 다경(茶經)을 잘못 이해하는 데서 생겨난 오해입니다. 임상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제 경우는 도움이 컸습니다. 유명한 약사가 이야기하는데 차는 고혈압은 낮춰주고, 저혈압은 올려주어 정상화를 돕는다고 하더군요.”
  “그런가요.”
  박 기자는 화제를 효능 쪽으로 돌렸다.  
  “약리적인 효능으로는 어떤 게 또 있을까요.”
  “그 부분은 차를 잘 아는 의사나 약사에게 들으시죠.”
  “다서에 나와 있는 거라면?…”
  “아까 말씀드렸죠. 위로 머리를 맑게 하고, 아래로 소화를 돕는다. 다경(茶經)에 그렇게 적혀 있어요.”
  “그렇군요. 다시 들으니 아주 명쾌하군요. 하하하”
  박 기자는 즐거워했다.
  “그럼 저는…”하고 이 태호가 일어나겠다고 양해를 구하자 박 기자는 한마디만 더요, 하고 붙잡았다.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끝으로 모퉁이찻집 단골손님으로서 한 마디 이 찻집을 추천하거나 자랑하신다면?”
  “회사 가까이에 이런 전통찻집이 있다는 건 우리 같은 차인들에게는 축복입니다. 주인 윤 정숙 선생은 동네의 보물이구 말입니다.”
  “하하하. 그 말씀도 아주 명쾌합니다. 알겠습니다. 그 말씀을 꼭 넣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이 태호는 일어났다. ‘그럼 더 궁금하신 것은 스님께 물어보세요. 저는 저쪽에 손님이 와서 이만…’ 하고 일어났다. 스님께도 합장하며 양해를 구했다.

  15
  이 태호는 성큼성큼 걸어 ‘그’가 앉은 쪽으로 갔다. 미소를 머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윽고 3일 전 목숨을 건져 준 중년남자 앞에 섰다. 병원에서 확인한 주민등록증에 의하면 그는 이 태호보다 여섯 살 위인 마흔 둘이었다.  
  “안녕하세요. 이 태호입니다. 건강한 모습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 태호는 얼굴 가득 미소를 담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러자 그가 이 태호를 보았다. 순간 이 태호의 얼굴에 올려졌던 미소는 저절로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의 즐거웠던 기분도 일시에 가 버리고 말았다. 이 태호가 기대하거나 상상했던 눈빛이 아니었다. 악수하려고 준비했던 손도 거두어야 했다. 전혀 손을 잡아줄 분위기가 아니었다.
  얼음처럼 냉랭한 시선 —. 너무나 예상 밖의 반응이어서 이 태호는 저절로 긴장이 되었다. 얼어붙은 몸으로 말을 잃고 서 있으니 그제야 그는 앉기를 권했다.
  “앉으세요. 젊은 분이군요.”
  전혀 고마워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왜 쓸데없는 짓을 했느냐 하고 질책하는 투였다.
  “당신이 나를 구했습니까?”
  이 태호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엉거주춤 마주 앉으며 말을 더듬거렸다.
  “그렇습니다.… 무엇이 잘못됐습니까?”
  “……?”
  그는 치솟는 분기를 억지로 누르느라 말을 못하는 사람 같았다. 충혈 된 눈으로 이 태호를 뚫어지게 보더니, 다음 동작으로는 탁자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고 만지작거리며 말을 아꼈다.
  “잘 모르겠군요. 무엇이 잘못된 건지…”
  하도 분위기가 무거워 시간이 더디 흘렀다. 짧고도 긴 침묵 뒤에 그는 진정이 되는 듯 얼굴을 들어 시선을 바로 주며 말했다.
  “우선 차를 드시지요.”
  그는 탁자에 놓인 다기세트를 능숙한 솜씨로 다루며 차를 내더니 이 태호에게 잔을 내밀었다.
  “괜찮습니다. 차는 저쪽에서 마셨습니다.”
  이 태호는 그가 내미는 차를 마시고 싶지 않았다.
  “……”
  “말씀을 해 주시지요. 무엇이 잘못된 건지…”
  이 태호는 그를 찬찬히 보았다. 외모는 볼수록 호감이 가는 선비의 용모였다. 이 태호의 기분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의문으로 뒤섞여갔다.
  “보시오.” 이윽고 그는 말했다. “한 번 들어나 봅시다. 어떻게 책임지려고 그런 짓을 했는지.”
  “뭐라구요? 제가 무슨 짓을 했는데…”
  이 태호는 귀를 의심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기분이 착잡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몸이 얼어붙는 긴장이 엄습했다. 거기 불쾌감이 덧 씌워졌다.  
  “물에 빠진 나를 구하지 않았오?”
  “그랬습니다. 그걸 그리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 태호는 말이 이어지질 않는 느낌이었다.
  “그럼, 그냥 두어야 했습니까?”
  “물론이지. 그냥 두었어야지!”
  이글거리는 그의 눈초리에 담긴 문책이 보였다. 그는 그런 눈으로 이 태호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다시 창밖을 보다 찻잔 보기를 반복했다. 낭패한 일을 당한 분노와 원망을 삭히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이 태호는  기가차서 픽 웃었다.
  “허허 세상에…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보고만 있을 사람도 있단 말입니까?“
  이 태호는 행여 그가 창피해서 그러는가 생각했다. 아랫사람에게 구출된 것을 부끄러워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한 감정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코웃음을 흘렸다.
  “말을 바꿔볼까요? 그냥 보고만 있는 사람이 많을까, 당신처럼 뛰어들어 구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많을까?”
  “……?”
  어떨까. 이 태호는 생각해 보았다.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고 ― 구경하는 건 재미있어 하지만 ― 직접 구하겠다고 뛰어드는 사람은 드문 것이 현실 아닌가. 불타는 집에서도 그렇고 거리의 싸움판에서도 그렇고… 의협심을 발휘하는 사람이 드물어진 사회이기에 그런 사례가 생기면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것 아닌가.
  “왜 답을 못하시나?”
  그가 추궁하자 이 태호에겐 반발심이 생겼다.
  “답을 할 필요가 없는 질문 아닌 가요? 의협심이 사라진 사회를 긍정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의협심?… 의협심이 뭔데?”
  “남의 어려움을 돕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의로운 마음이죠.”
  “아무나, 무슨 일에나, 자기 마음대로 나설 수 있는 시대가 아닐 텐데.”
  “무슨 말씀이시죠?”
  “잡지사 중견 기자라고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소? 당신에게 남을 위험에서 구할 수 있는, 어떤 자격을 가진 것이 있소?”
  “거기도 자격이 있습니까?”
  이 태호는 억지도 이런 억지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추궁은 계속됐다.
  “있지.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경찰이나, 119요원이나 해난구조대원 같은 게 자격이지!”
  “그렇다면 없습니다. 그런 쪽과는 상관없습니다.”  
  “자격도 없이 남의 일에, 그것도 생명에 관한 일에 간섭을 하다니… 대체 어떻게 책임지려고 그런 짓을 한 거냔 말이요?”
  그의 목소리에 담긴 채찍이 보다 완연해졌다. 이 태호는 눈을 크게 떴다. 그의 한 마디 한마디는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이게 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이 태호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뜻밖입니다.”
  이 태호는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저는 선생이 고맙다고 인사하러 온줄 알았습니다. 지금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구요. 길을 막고 물어보십시오. 나보고 잘못했다 할 사람이 있겠는가?…”
  “알아듣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런 역겨운 소릴 한다면…”
  “……?”
  이 태호는 입을 다물었다. 배반당한 기분이 치밀었다. 이런 따위 형편없는 대화를 계속해야 하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는 또 말했다.
  “여러 모로 상황을 되짚어 보았소.… 결론적으로 그것은 나에게 자연스럽게 찾아온 죽음의 길이었소.”
  “네엣?”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은 아시겠지. 어떻게 사느냐가 과제일 때도 있지만 생각이 바뀌면 어떻게 잘 죽는지가 인생의 최대 과제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시오?”
  “……?”
  “아름답게 산 사람은 아름답게 죽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 나의 철학이오. 그리고 가장 행복할 때 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마무리라고 나는 늘 생각했소.”
  “그건 철학자들의 수사적 이야기 아닌 가요?…”
  이 태호는 얼른 상대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더욱 목소리를 깔았다. 저음이지만 발음은 또렷했다.  
  “다시 묻겠소. 어떻게 책임지려고 나를 구했소?”
  순간 이 태호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많은 생각이 섬광처럼 스쳐갔다. 생각은 그를 의심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흥. 무슨 사연이 있는 사람이로군. 그래서 죽으려고 했던 참에… 그래. 보험을 들어놨다거나 뭐 그런 부류겠지. 제기랄! 기껏 위험을 무릅쓰면서 구한 게 이런 놈이었나? 말을 조심해야겠다는 경계심도 들었다. 이 태호는 고쳐 앉았다.  
  “뭔가 사연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본의 아니게 주민등록을 보아서 선생이 마흔 둘이신 걸 알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이르신 거 아닙니까?”
  “그건 건방진 이야기이고! 내 질문에 답을 달라니까.”
  “어떻게 답이 있겠습니까.”
  나는 점점 반항하는 사람이 되어 갔다.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선생이 무얼 하시는 분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굳이 숨길 건 없지만, 밝히고 싶지도 않소.”
  “그렇습니까.…”
  이 태호는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상상해 보았다. 감이 오지 않았다. 다만 불량해 보이지는 않았다. 지성미도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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