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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언제 읽어도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위선이나 불의에 대항하여 정의를 세우면서 인간성을 옹호하고 정신을 이끄는 따위는 다음 이야기입니다. 잔잔한 물결처럼 다가와 가슴을 파고드는 반취 이기윤의 소설들에는 독특한 향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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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반취가 정리한 고 조자용(趙子庸) 박사 삶입니다.  

한국의 부모는 아이가 삼신 할머니 점지로 태어나면 온갖 정성을 기울여 가장 좋다고 여겨지는 이름을 지어 주니 대개의 경우 그 이름은 일생 변함이 없다. 이와는 달리, 아기가 자라서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고, 늙은이로 인생을 마무리 짓는 과정에서 그 성격과 인품에 따라 아호(雅號)를 갖기도 한다. 스스로 짓기도 하고 스승이나 친구가 지어 주기도 한다.

본명이나 아호나 다 고상하고 권위 있어 보인다. 그러나 달리 보면 작위적인 느낌도 든다. 이에 대하여 장난기 짙은 별명은 속된 것 같지만 꾸밈새 없고 순수하다. 한 사람의 인품을 제대로 아는 데는 본명보다 별명이 더 명쾌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별명을 좋아하는데 최근에 얻은 것이 “젊은 늙은이”이다. 아마 이것이 세상사람이 나에게 붙여 주는 마지막 별명일 것 같다.  

이러한 원리를 적용하면 한문화(韓文化)에서도 가식적이고 권위적인 본명문화(本名文化)를 쉽게 발견한다. 성(姓)은 한국문화(韓國文化)이요 이름은 중국문화(中國文化)이고, 자(字)는 불교문화(佛敎文化) 식이다. 문화영향학(文化影響學)이라고나 불러야 알맞을 현대적 학문의 문이 열리면서 얻은 본명이다.

이대로 라면 우리는 머지않아 문화적 고아(孤兒)가 되고 말 것이다. 이 캄캄한 시점에서 우선 해야할 일은 용감하게 민족문화의 모태를 찾는 길이 아닐까. 이러한 공부의 길을 나는 문화모태학(文化母胎學)이라 이름지어 본다.

나는 중학시절 가장 나이가 어리다 해서 「베이비」라 놀림을 당했다. 스무살에 미국으로 유학 가서는 「코리언 양키」로 바뀌었고, 십여년 후 돌아온 뒤에는 「카우보이」나 「찰스 판돌푸(Charles Pandolph)」같은 괴상한 별명이 붙었다. 서양 원숭이라는 의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북이 아저씨」가 되었다. 경주의 어린이들이 그렇게 불렀으니 한창 문화모태학에 빠져있던 때이다. 불혹에 이르러서는 「도깨비」「호레이」「산신령」이 내 별명이었다. 오십 이후에는 「대갈선생」「두령」으로 불리었고, 육십대에는 「속리산 할아버지」「호레이 할아버지」「덩덕쿵 할아버지」가 되었다.

키가 6척이 넘는 불리한 체구지만 「키다리」라든가 「싱거운 놈」소리는 듣지 않았다. 짜고 맵고 화끈하게 굴어야 싱거운 키다리 소리를 면할 수 있기에 그렇게 노력하며 살았다.

칠십줄에 이르니 삼신사를 찾아주는 젊은이들이「형님」「호레이 형님」「도깨비 형님」「젊은 오빠」라고 불러준다. 늦게나마 나의 알몸이 제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40년 전 건축과, 토목과 학생에게 구조공학(構造工學)을 가르쳤다면 내 전공도 확실한 것인데, 그런 내력에는 아랑곳없이 나를 민속학자나 미술사학자, 심지어 고고학자라고 까지 멋대로 소개하는 사람이 있는 걸 보면, 나는 그동안 탈선인생을 살아온 것이 틀림없다. 좋게 보면 전공 외에 또 한 인생을 살아온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그러한 인식이 바로 가식 아닐까. 내 인생의 알맹이야말로 별명이 정확하게 알려 주고 있다. 선생님, 교수님, 사장님, 회장님 따위 경칭은 내가 이룩한 일을 망칠 뿐이다.

한 사람이 이룩한 일이란 따지고 보면 별거 아니겠지만 그래도 자기 깐에는 열심히 살아왔기에 애착이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영원할 수는 없다.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하여 덩덕쿵 할아버지, 호레이 할아버지, 도깨비 형님, 젊은 오빠답게 물려줄 때가 온 것 같다.

나는 삼신할머니가 특별히 두 번 점지해 주셨다. 이 책은 첫 점지인생 50년간의 체험을 글과 사진으로 정리한 것인데 45세 때 쓴 에세이가 주축이다. 전공분야가 무엇이든 사람은 자기 민족문화의 바탕을 알아야 한다. 특히 우리 나라는 이 부분이 약해 문제가 심각할 정도라고 느꼈다. 내가 내 분야에서나마 내나라 전통을 토대로 현대화작업을 이념으로 삼은 것은 그 때문이다.

서양 원숭이가 되어 묘기를 부리는 한편에선 부지런히 고적을 찾아다니며 자랑스러운 조상의 작품을 찾아냈다. 다음에는 옛 기와조각을 수집하는데 열을 올려 집안에까지 끌고 들어왔다. 결과는 무엇이었던가. 일본학자나 서양학자들이 역설한대로 한문화(韓文化)는 중국문화의 한 지방적 특색이거나 불교문화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문화가 양부모문화(養父母文化)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문화적 고아가 되고 말았다. 도대체 내 민족의 생부모문화(生父母文化)는 어찌되었단 말인가. 고아의 서러움을 당하면서 나는 방황했다.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지식이 몸 속 깊숙이 배어 있는 게 틀림없다고 느꼈다.

그러한 지식의 독소는 어디서 왔는가. 그것은 권위주의거나 사대주의 문화관에서 왔다. 그렇다면 내 문화의 참된 모태는 어디에 숨어있는가. 문득 짚신 밑에 깔려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기어 들어가 보았다. 도깨비를 찾고, 호랑이를 찾고, 산신령을 찾고, 거북을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희미하게나마 내 생부모문화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별명인 민문화(民文化)속에서 민족문화의 모태를 찾은 것이다.

이 책에는 내 젊은 가슴에, 그렇게 민문화관(民文化觀)이 싹트고 굳어지기까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민족문화의 모태(母胎)를 찾노라 쉼 없이 고적을 찾아다니고, 자료를 수집하고, 박물관을 세우고, 해외문화홍보에 나서고, 마침내는 삼신사(三神祠)를 세우고, 잃어버린 마을문화 보호운동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일어난 해프닝을 한데 모았다. 양부모문화권을 탈출, 생부모문화를 찾아 헤맨 문화적 고아의 뼈저린 일기장이다.  

시간적으로는 1947(21세)년 미국 유학 길에 오르면서부터 1977년(51세) 병으로 쓰러질 때까지의 이야기가 주축이니 나로서는 이것이 첫 점지 인생이고, 곧 이어 출판될 「삼신사의 밤」은 다시 살아나서 삼신사를 세우고 내 민족문화의 모태를 알려주는 구체적 움직임을 그린 후편이니 두 번째 점지 인생이다. 한편에서는 이 책에 앞서 삼신민고(三神民考)를 내놓았고, 또 민문화서설(民文化序說)을 통해 별명문화를 이론화시키고자 하였다.

이 길은 본업이 아니어서 이론적 발표를 삼가 왔는데, 삼신사 젊은 식구들 청이 있어 용단을 내렸다. 알아줄 사람도 없고, 인기 끌 일도 아니고, 칭찬을 받거나 상 받는 일은 더더욱 아닌 외로운 길을 걸으면서, 그래도 기왕의 문화관(文化觀)과 타협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몇몇 따뜻한 친구 덕분이다. 일을 저지를 때마다 깊은 관심을 쏟아주신 문화계, 언론계, 교육계, 그리고 외국인단체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삼신할머니의 축복이 내리기를 기도 드린다.

                               속리산 삼신사(三神祠)에서


여기서부터 본문입니다.


우리 문화의 멋

과객(過客)들의 멋

경상도 청도군 풍각면에 용천사(涌泉寺)라는 절간이 있다. 이 절 뒤에 있는 바위굴 속에 새끼용 두 마리가 살고 있다하여 찾아갔다. 주지스님 말씀을 들어보니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닌 모양이다. 어느 날인가 깊은 밤 굴에서 나와 맑은 물에서 노는 새끼용 두 마리를 직접 보았다니 말이다. 나 같은 속된 사람 눈에까지 쉽사리 새끼용이 나타날 리 없겠기에 그 주지의 실담(實談)으로 만족하고 내려와 풍각 고을 민가에 여장을 풀었다.

풍각쟁이를 연상시키는 고을 이름이 지나가는 술 나그네의 뱃속을 가만둘 리 없다. 내가 들어간 대폿집은 산골 술집치고는 근사하게 꾸며진 「높은 집」이란 이름의 주막이었다. 도깨비 국물이 온몸에 스며들면서 나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였을 무렵 문 밖에서 난데없이 장타령 가락이 터져 나왔다.

"얘들아! 밖의 손님 대포 한 잔 대접해서 보내드려라."
내 앞에 앉았던 마음씨 고운 주인 아주머니의 이 한마디에서 순간적으로 조선 오백년의 '멋'이 솟아올랐다. 거지는 태연하게 그 자리에 앉아 대포 한 잔을 유유히 다 마시고 일어나 사라졌다. 세상에 드문 보물이 잠깐 내 품속에 들어왔다 나간 기분이다. 구수한 장타령 가락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거지의 여유 있는 거동이며 주인 아주머니의 훈훈하고 넉넉한 대접이며, 텁텁한 막걸리며, 비틀어진 큼직한 막걸리사발…
'멋'이라는 우리말이 없다면 무엇으로 표현해야 그 느낌이 제대로 전달될까.  

'한양 손님'이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에 우쭐해서 넥타이로 목을 조이고 앉아 유리컵에 술을 따라 마시는 얼빠진 신사 - 그게 그날 밤 그 자리의 내 꼴이었다.

얼마 전 텔레비전 프로에 거지가 나와 장타령을 불렀다. 그랬더니 이튿날 그런 창피스러운 꼴을 외국 사람이 보면 어떻게 하느냐 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외국 사람이 볼까봐 두려운 것은 장타령을 부른 거지가 아니라 그 장면을 항의한 거룩한 분이다. 또 하나의 얼빠진 신사 말이다.

우리 나라에는 문둥이 춤이니 곱사춤 장타령 따위 불구자를 모델로 한 민간 예술이 남아있다. 그것은 성한 사람이 병신을 비웃고 놀리기 위한 예술이 아니라 거꾸로 곱사나 난쟁이 문둥이가 불우한 운명을 초월한 경지에서 얼빠진 성한 사람들을 훈계하고 풍자하는 뜻에서 만들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흔히 우리는 외국 손님에게 우리 고유의 음악이나 춤을 보여주면서 자랑하려고 애를 쓴다. 비교적 점잖은 것을 골라 보여주면서 그들의 눈이 반짝이기를 기대한다. 결과는 기대와는 반대로 지루해 하거나 졸아 버리는 바람에 우리 마음만 안타까워진다. 그럴 때 곱사춤이나 장타령이나 문둥이 춤이 나타나 방안을 휘휘 돌면 어떻게 될까. 모두 정신이 들고 흥이 살아나 일시에 분위기가 일신된다.  

사람이 살아 움직이는 곳에는 율동〔춤〕이 있고, 언어를 가진 민족에게는 고유의 소리〔노래〕며 버릇이 있다. 오천년 역사를 통하여 무르익은 한국의 멋은 과연 어디에서 찾아야 그 본연의 원액을 만날 수 있을까. 멋은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를 훌륭하게 대변한다. 그러나 근세 역사의 격랑 속에서 사라지기도 하고 또 밖에서 스며든 문화 때문에 변질되기도 하는 등 갖은 고난을 겪었다. 그러나 어느 한 모퉁이에서 '누군가'는 그것을 지켜왔다. '누군가'는 결코 높은 사람들이 아니다. 넥타이 신사들이 아니다. 곱사들이 지켜왔고, 문둥이들이 지켜왔고, 거지들이 지켜왔다. 한국의 멋은 절름발이 장타령 속에 건강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샘터 1971. 5. - 韓國의 멋을 찾아서>


니나니 장타령과 원제이

  민예(民藝)의 세계에 심취되어 이런 말을 하게끔 내 자신이 자란 것은 어렸을 때 친했던 ‘니나니’라는 거지 덕분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니나니’가 죽었다고 한다. 얼어  죽었을까, 굶어 죽었을까. 동네 사람들은 ‘니나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기도 하고 궁금해 하기도 했다.

  ‘니나니’는  40년 전 황해도(黃海道) 황주군 일대를 판도 삼아 돌아다니던 절름발이 거지였는데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는 내 가슴 속에 무엇인가 잊지 못할 것을 심어놓았다.

  비틀어진 헌 모자를 쓰고, 누더기 옷을 입은 ‘니나니’는 전형적인 거지였으나, 언제든지 벙싯 벙싯 웃으면서 살아가는 마음씨 착한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장타령의 명수였고 어린이를 잘 웃기는 명배우였다.

  한 끼 얻어먹기 전에 언제나 대문 밖에서 멋들어진 장타령을 먼저 불러댄다. 옷만 갈아 입히면 카루소를 울렸을 정도로 그의 장타령 가락은 천하 일품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내 눈에는 ‘니나니’가 밥을 얻어먹는다 기 보다 명창을 들은 대가로 사람들이 그를 대접하는 것 같았다. 차츰 ‘니나니’는 신격화(神格化) 되어 ‘그’가 나타나면 풍년이 든다는 말까지 돌게 되었다.

  어느 해 겨울 첫 눈이 내리던 날 새벽 ‘니나니’는 또 우리 집 대문 앞에 나타났다. 산길을 걸어오다 잡았다면서 귀여운 방울새 한 마리를 내게 주었다. 날개에 상처를 입은 방울새는 그 후 꽤 오랫동안 나의 벗이 되었다. 그 새를 볼 때마다 ‘니나니’의 고운 마음씨가 생각났고 장타령이며 웃음이 그리웠다.  

  서민예술(庶民藝術)의 정체를 파헤쳐 보려는 지금에 이르러 ‘니나니’의 옛모습은 하나의 신상과 같이 나의 마음을 잡아 흔든다. 불우한 팔자에 대한 번뇌를 초월하고 그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면서 살다 간 ‘니나니’가 참다운 예술가로 보인다. 그의 장타령은 박력이 있고, 달관의 깊음이 있고, 해학 풍자가 있고, 때로는 깜짝 놀라게 하는 창작도 있었다.

  병신춤이나 장타령은 누가 시켜서 할 수도 없고, 쇼로 꾸며서 이루어질 성격의 예술도 아니다. 흥이 극치에 도달했을 때 아무런 두려움 없이 제멋대로 지랄부리고 싶어질 정도의 경지에서 폭발하는 엑스터시의 가락인 것이다. 궁중 음악이나 춤이 여러 가지 규제를 받는데 비하여 곱사춤이나 각설이 타령은 우주의 회전을 거꾸로 돌릴만한 박력과 난폭성을 드러낸다. ‘니나니’도 신바람이 날 때는 안하무인의 난폭한 왕자가 되어버리곤 했다.  

  우리 민악(民樂)이나 민화(民畵)에 빠져들면서 나는 그 ‘니나니’류 예술의 박력과 난폭성에 도취되고 말았다. 가사를 지은 사람도 알 수 없고 누가 그렸는지 낙관도 없는 그림 따위 민예의 세계, 그 끈질기고 억센 물결 속에 풍덩 빠져버리고 말았다.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형식에 구애된 흔적도 없는, 그저 신바람 속에서 터져 나온 예술을 우리들은 그저 못난이 병신의 속기(俗技)로만 여겨왔다. 내가 보기에 못난이 병신은 그들이 아니라 예술의 극치를 깨닫지 못하는 멀쩡한 사람들이다. 애정(愛情)을 가지고 보면 우리 나라 민간예술은 사회적으로 천대받은 서민들이 부귀영화에 눈 먼 거룩한 자들을 거꾸로 비웃는 것이 많다.

  ‘니나니’가 장타령을 부르면서 돌아다니던 때, 가끔이지만 주기적으로 찾아오던 또 한 분의 잊지 못할 방랑 과객이 있었다. 붓을 갖고 다니던 그 진객의 이름은 ‘원제이(元貞)’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언제나 새로 만든 싱싱한 붓을 꺼내 꼭지를 혓바닥으로 빨면서 품질을 자랑했다. 몇 자루 팔면 어린아이 같이 좋아하며 붓 보따리를 도로 싸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떠나기 전에 그는 흰 종이에다 글씨를 써주기도 하고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다.

  내가 천자문(千字文) 글씨를 배우던 어느 해, 주기가 되어 찾아온 ‘원제이’는 내가 쓴 글씨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배낭 속에서 헌책을 한 권 꺼내 주었다. 헌 책이 아니라 헌 책을 뒤집어서 자기가 쓴 귀거래사(歸去來辭)였는데 오늘날까지 나는 그런 명필을 다시 못 보았다. 어린 나의 머릿속에 그의 인상은 그만큼 깊이 박힌 것이다. 그때부터 ‘원제이’는 ‘니나니’와 더불어 다정하고 늘 그리운 친구가 되었다. 거룩한 자세로 위엄부리는 선비 풍의 할아버지들 보다 나를 친구로 대해주는 ‘원제이’가 훨씬 더 좋았던 것이다.

  ‘원제이’ 같은 명필이 어째서 붓이나 팔고 돌아다니며 천대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의문은 그때,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를 괴롭혀 왔다. 그러한 의문이 자라서 나는 끝내 ‘원제이’ 같은 사람들이 남긴 이름 없는 그림을 수집하게 되었고, 그런 예술을 평가하는 미술관( 美術館)을 세웠고 ‘니나니’ 예술을 되살리기 위하여 ‘니나니 하우스’를 세우고 있다. ‘니나니’나 ‘원제이’ 같은 사람의 산모습을 머리 속에 되살려 가면서 일을 추진해 나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른다.

  우리 문화를 귀족문화(貴族文化)와 서민문화(庶民文化)로 갈라서 취급하는 것을 나는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한문화는 하나이지 둘이나 셋이 될 수 없다. 다만 표리(表裏)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표면 장식은 권위적이고 논리적이면서 때론 가식적일 수도 있지만 한문화의 모태(母胎)는 겸손하고 본연적(本然的)이고 놀랄만큼 솔직하다. 때문에 우리 문화의 참모습은 표면에서 보다 그 조용한 바탕을 파헤쳐야 드러난다. 그 속에서 ‘니나니’나 ‘원제이’ 처럼 이름 없이 스러져간 예술가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니나니’는 타고난 병신이었다. ‘원제이’는 몸은 멀쩡했지만 장인(匠人)이었던 탓에 사회적으로는 불구자였다. 우리 문화의 고유한 예맥(藝脈)은 그런 불구자에 의해 창조되고 지켜져 온 면면이 많다. 다시 말해서 우리 예술은, 예술가에게 상(賞)을 주는 풍토에서 자란 것이 아니라 쟁이라고 욕하고 놀려대는 풍토에서 자랐다. 천기사상(賤技思想)에 항거해 살면서 억울한 운명을 극복한 예술인 것이다.

  상을 받으면서 자란 것이 참 예술이냐, 욕을 극복하며 뚫고 나온 것이 참 예술이냐 는 깊이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문제라고 여겨진다. ‘니나니’나 ‘원제이’에게는 분명 또 하나의 세계가 있었다. 세속적 부귀영화를 초월한 달관(達觀)의 세계였는데, 내 생각엔 그것이 우리 나라 민중예술(民衆藝術)의 진정한 고향이라 믿어진다.  


  기생(妓生)의 멋

  과객들의 창작은 기방(妓房)에서 종합적으로 다듬어져 하나의 세련된 예술로 정리되는 경향이 있다. 장타령이나 병신춤이 그 모델이다.

  천하의 건달들이 모여서 멋을 자랑하는 곳이 기생집이다. 술좌석에서는 명인천재(名人天才)들이 모두 활짝 벗은 자세로 비논리적(非論理的) 예술 창작에 참여한다. 관중을 위하여 며칠씩 진땀 흘리며 연습을 반복하고 나타나는 드라마 하우스와는 근본적으로 그 성격이 다르다.

  전통사회에서 잔치나 술자리의 흥을 돋우기 위해 제도적으로 존재했던 기생의 역사도 유구한데 오늘날까지 일관성 있게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들의 존재 가치는 예술적 재능에 의해 빛을 더할 수 있었다.  

  재치있는 시(詩)를 지어 김삿갓을 손들게 한 문학(文學) 기생도 있었고, 머리카락에 대동강(大洞江) 물을 찍어 일필휘지(一筆揮之)를 남긴 명필 기생도 있었으니, 기생이야말로 서민예술사(庶民藝術史)에 절대적인 존재이다. 공맹(孔孟)이 뭐라 하든지, 석가(釋迦)가 야단하든지 간에 흔들림 없이 우리 예술의 맥을 지켜온 것이 기생이다.
  “불로초로 술을 빚어 만년배(萬年盃)에 가득 부어 비나이다… 이 잔 드시고 만수무강하옵소서”
  술좌석에서의 첫 가락인 권주가(勸酒歌) 속에는 술을 먹는 이념부터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시(詩)로 대화를 나누고 노래와 춤으로 주흥(酒興)을 돋구고, 재치있는 재담으로 오입장이를 간지럽히는가 하면 주흥이 극치에 올랐을 때 곱사춤이나 장타령으로 술손님 간이 터지도록 웃음을 선사한다.
  그러다가 손님이 일어서면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오난 날을 일러주오” 하고 이별가를 슬피 부르며 막을 내린다. 돈이 없으면 속치마 자락에 그림 한 폭 받는 것으로 술값을 때워줄 줄 아는 여성이 우리 나라 원래 기생이었다. 지금은 주막이 ‘바’가 되고, 살롱이 되고, 비어홀로 바뀐 데다 기생은 마담이니 접대부니 콜걸 따위로 전락해 버렸다. 전통적인 기생을 찾기란 잃어버린 문화재를 찾는 일보다 어려워졌다.  

  나는 진작부터 우리 전통 예술의 핵심을 논함에 있어 거지와 건달과 기생의 존재가 절대적이라고 믿어왔다. 그 믿음을 기회있을 때마다 말로 떠들고 글로 써왔는데, 한 번은  여러 사람 앞에서 실감나게 입증할 기회가 마련되었었다.  

  몇 해 전 황립 아시아학회 모임에서 강연을 했다. 대개 위에 적은 내용으로 우리 나라 민간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강연 말미에 장타령과 회심곡(回心曲)을 레코드판으로 들려주었다. 그랬더니 이듬해 가을 그 학회(RAS)는 ‘장타령’에 대한 본격적인 강연을 청해왔다. 한편 놀랍기도 했고 한편 웃음도 나왔지만 어쨌든 내 기분은 매우 흐뭇하고 후련했다.

  각설이 타령 잘하고 곱사춤 잘 추는 기생을 찾으려고 온통 서울 장안을 다 뒤졌다. 며칠을 돌아다니며 수월찮게 술값도 썼건만 하나 같이 미친 놈 취급이었다. 어떤 년이 외국 학자들 모인데서 술도 안 취하고 곱사춤을 출 수 있단 말이냐. 흥이란 저절로 터져야 제멋이 나는 건데, 곱사춤을 어떻게 돈으로 산단 말이냐 였다. 물론 그 점은 나도 동감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주어진 기회를 어찌 버릴 것인가. 내 뜻을 이해하는 몇 몇 친구도 제 일처럼 애쓰며 돌아다녔는데 강연 바로 전날 믿기 어려운 전화가 안양(安養)에 갔던 김두식(金斗植)으로부터 걸려왔다. 장타령 잘하는 진짜 거지를 찾았다는 소식이다. 다음 날 점심때는 또 곱사춤 잘 추는 기생도 한 명 만나게 되어 아슬아슬하게 거지쇼 준비가 갖춰졌다. 거지는 42세였는데 거지군 상좌〔대령〕라고 했다. 전국에 흩어진 2만여 명의 거지가 거지군이란 조직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는 또 당당하고 도도했다. 거지는 곧 거지(巨知)를 이름이니 쓸데없는 체면이니 동정심 따위 갖지 말고 자기를 그냥 ‘거지’라고 불러달라고 나왔다.  

  안양(安養) 다리 밑에서 스승을 만나 3년간 수련(修鍊)한 끝에 장타령․거지춤 가락을 익혔고, 아울러 거지의 삶이 정상적인 사람의 삶에 비해 결코 비굴하거나 떨어지지 않다는 자신감도 다졌다는 거지는 무슨 말을 물어도 척척 받아넘겼다. 산에 가서 뱀을 잡아다 팔기도 하고 시골 장터를 돌며 병신춤을 팔아 돈을 버는데, 그렇게 번 돈을 모아 그들은 두 다리와 두 팔을 잃은 불우한 사람들을 도와준다고 했다. 관중 속의 선교사들은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병신춤을 추라고 했더니 서슴지 않고 무대가 부서져라 난폭한 춤을 추고 각설이 타령을 불러댄다. 세련되지는 못했으나 자신만만하고 도도하기 짝없는 자세와 박력 있고 난폭하게 느껴지는 움직임이 한 ‘거지’의 달관한 인생관(人生觀)을 너무나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세속을 초월한 경지에서 또 하나의 밝은 세상을 발견해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관중은 잔뜩 긴장해 있었다. 그 때 기생이 곱사 모습으로 등장했다. 거지 춤을 볼 때는 조용했던 관중석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곱사 기생의 빈틈없는 춤가락이 흥을 돋구자 이윽고 관중석에서 터질 듯한 흥분과 웃음이 폭발했다. 제멋에 취한 곱사 기생이 지나치게 흥을 내다가 그만 치마끈이 풀어지는 사건(?)이 생겼지만 온통 뜨거운 열기에 휩싸인 강당을 가득 채운 것은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였다.  

  거지나 기생이나 우리 사회에서 천대받은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런만큼 그들은 체면이나 오르지 못할 욕망 때문에 사는 사람들은 아니다. 그런 것을 초월한 그들에게는 보다 자유롭고 큰 이상 세계가 있다. 보통 사람은 상상 못할 굵고 묵직한 인생관이 있는데, 그런 인생관에서 태어난 것이 우리 서민예술이라고 생각된다.


  무당의 신바람

  서민예술의 형성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존재는 무당이다. ‘무당굿’은 적어도 5천년 이상 우리 문화 저변에 뿌리를 내린 민간신앙, 즉 종교적 표현이기 때문에 그것이 미신이든 비과학적이든 우리 문화의 모태를 찾는데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당초 무당이란 임금과 같은 위치에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백성을 다스리는 존재였다. 우리 본연의 신앙에 근거하여 모든 종교 의식을 주관하는 거룩한 존재였다. 후세에 들어온 여러 가지 종교와는 때에 따라 대결하기도 하고 융합하기도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때로는 사회의 규탄을 받기도 했고, 또 지금도 배척 당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오랜 맥이 끊어지지는 않는 현상에서 우리는 무당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창 바닥까지 떨어졌었지만 차츰 우리 나라 고유의 음악이나 춤이 모두 옛날 무당굿에서 시발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설이 생길 정도로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특히 민예(民藝) 사상에서 무당굿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 되어가고 있다.
  
  무당이 쓰는 악기(樂器)를 보면 징․꽹과리․북․장고 같은 것이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악기들은 민속풍물에서도 똑같이 기본 악기로 삼고 있다. 농악(農樂)이라는 풍물을 구경할 때 우리는 무당의 굿거리와 일맥 직통하는 흥을 느끼게 된다. 기생의 풍월거리에는 여러 가지 악기가 등장하지만 가장 흥이 날 때에 이루어지는 곱사춤에서 우리는 역시 굿거리의 흥을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하여 우리가 느끼는 극치의 흥은 결국 모두 무당의 굿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 현상을 우리는 보통 ‘신난다’고 표현하는데 이것이 곧 우리 서민예술의 바탕을 이루는 신기사상(神技思想)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무당굿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무당의 예술적 가치보다 신통력(神通力)에 더 치중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춤을 얼마나 잘 추느냐 보다 신이 얼마나 올랐느냐가 문제되는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멋의 핵심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천대받던 거지나 기생이나 환쟁이나 무당에 의해 구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 또 하나 대중(大衆)의 참여를 간과해선 안 된다. 거지춤이나 무당춤이나 광대놀이나 기생 술판에는 결국 모든 사람이 같은 자격으로 참여하였으며 각각의 위치에서 주어진 역할을 여하히 조화롭게 소화해 냈느냐에 따라서 예술성이 좌우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우리 민족, 민간 예술의 특징이 있는 것이라 하겠다.


  옹기쟁이의 신기(神技)

  지난 10월 중순 경, 우리 나라 옹기를 연구하겠다는 미국인 민속학자 두 사람이 찾아왔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것이 장독이요 누구나 매일 쓰고 있는 것이 김치독일 터인데 ‘연구’라는 단어를 앞세우니 그들에게 해줄 말이 얼른 정리되지 않는다.

  흔해 빠진 장독을 언제부터 써 왔는지, 누가 어디서 언제 만들기 시작했는지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기회에 우리 옹기에 대해 공부도 하고 혹 외국인 학자에게 배울 것이 있으면 배워놓자는 생각이 들어 그들의 현지답사를 도와주기로 했다. 10일 정도 예정으로 여행을 떠나 여주(驪州)에서 대전(大田), 경주(慶州) 울산(蔚山) 마산(馬山) 진주(晉州) 사천(泗川) 하동(河東) 등지의 옹기굴을 돌아다녔다. 덕분에 나는 옹기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흐뭇할 정도로 많은 자료를 거두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스래브 방식’이란 공법을 꼭 찾아보아야겠다고 억지를 썼다. 도대체 그게 무엇인지 생전 처음 듣는 말이라 짐작할 도리가 없었다. 이럭저럭 도공들과 이야기 해 보니 전라남도 지방에 가야 그런 공법을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리산 밑에 있는 초라한 옹기굴을 찾아 들어갔을 때였다. 그들은 드디어 어린애처럼 환성을 올렸다. ‘스래브 방식’을 찾은 것이다. 나도 같이 흥분하고 싶었지만 아무 것도 모르면서 억지로 흥분할 수는 없었다. 무지에는 흥분이 스며들지 못하는 모양이다.

  ‘스래브 방식’이란 옹기장이 말로 ‘채빠꾸 타림’이란 것이었다. 혼자서 겨우 들 정도의 커다란 흙덩어리를 땅에 던지는 순간, 그 흙덩어리는 기합을 받는 것처럼 넓적하게 뻗었다. 그것을 묘한 솜씨로 두서너번 재주 넘기 시키니 더욱 쭉 뻗어서 널찍한 흙판이 되는 것이다. 이런 신기한 공법이 한국에 전래되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반신반의했는데 직접 보니 과연 놀라운 묘기라고 전문가들은 경탄했다. ‘스래브 방식’이란 서양사람답게 형상 위주의 관념에서 붙인 이름이겠지만 ‘채빠꾸 타림’이란 이름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원을 알 수 없어 신비롭기만 하다. 그 옹기장이는 40여 년 경험을 가진 노인이었는데 미국인 교수들을 어린애 대하듯 다루었다. 그는 기술자라기 보다 신들린 무당 같았고 기법도 단순한 공법이라기 보다 신기(神技)로 느껴졌다. 이런 신비스러운 재간을 우리는 ‘신통하다’고 표현하고 있으니 신기사상(神技思想)의 오랜 전통을 또 한 번 느끼게 된다.

  상식적으로 가장 뚜렷하게 신기(神技)를 나타내는 사람은 두말할 것 없이 무당들이다. 그들이 가무를 통해서 신을 부른다는 것쯤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정신적으로 신과 통하는 과정에 있어서 가무예술이 작용하는 것이니 이것이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신기(神技)이다. 우리 나라 무악(舞樂) 역시 이러한 무당의 신통가무에 연원한다는 것은 ‘신바람난다’는 일상용어를 통해서도 그 맥을 찾을 수 있다. 예술이 극치에 도달할 때면 무당이 신통하는 순간 같이 엑스터시의 경지에 들어선다는 말이다. 이런 신통한 말을 떡 먹듯 하는 게 한인들이다.

  신라 시대에는 흙으로 철〔토기〕을 만들었고 고려 시대에는 흙으로 비취〔청자〕를 만들었고 조선시대에는 옥〔백자〕을 만든 것이 세계적 인정을 받고 있다. 우리 장인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조건에서나 신기 사상이었다. 조물주만이 알고 있는 조화의 술을, 도를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집착을 통하여 끄집어 낸 것이 곧 우리 조상의 예술이었으니, 결코 단순한 손재주가 아니었다.  


  떠돌이 쟁이들

  오랜만에 전라도 광주에 가서 몇 몇 술친구와 어울려 춘원(春園)이라는 술집을 찾아갔다. 으레 기생들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달콤하게 맞이하기 마련인데 그날 저녁에는 아무도 맞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푸대접이었는데 돌아설 수도 없어 들어갔더니 방안에 꽉 찬 기생들이 벽에 걸린 조그마한 그림 한 폭을 보면서 키들거리고 있었다.

  한 늙은 어부가 그물이 있는 바닷가로 뛰어가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허리띠가 풀어져 엉덩이가 반쯤 나타나 있었다. 한 손으로 흘러내리는 바지자락을 움켜쥐고 뛰어가는 유머러스한 그림이었다. 며칠 전 어느 화가가 모자라는 술값 대신 그려준 즉흥화(卽興畵)라고 했다. 화가도 멋쟁이었겠지만 술값 대신 그림을 받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전라도 기생이 더 멋있게 여겨졌다. 술값 대신 돈 구실을 하는 그림이니 이런 그림을 주대화(酒代畵)라 분류하면 어떨까. 나는 그때부터 우리 나라 주대화에 대하여도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었다.  

  관심을 가지면 그런 심리를 충족시켜 주는 자료가 묘하게 모여든다. 다음 자료는 전주의 행원(幸園)이란 이름난 술집에서 얻었다. 이 집 주인 남전(藍田)은 묵화도 제법 칠 줄 아는 정도의 예인(藝人)인 동시에 수십 명의 장학생을 돌보고 있는 의인(義人)이었다.

  놀라운 일은 남전의 주대화 수집이었다. 술값을 때우기 위한 그림이 아니라 주대화를 얻기 위한 술대접이라고 함이 옳을 듯 싶게, 그는 전주를 찾는 명사들의 즉흥화를 수없이 모아 간직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그야말로 기생들 속치마에 그린 그림도 많았다. 술에 취한 멋쟁이가 붓을 들고 청하면 서슴지 않고 속치마를 벗어 펴놓을 줄 아는 것이 우리 전통의 기생 가락이었던 것이다. 이런 멋진 자료가 하나씩 손에 잡히면서 나의 주대화 찾아보기도 본격화되어 갔다.

  조선 말엽의 주대화 대가 한 분을 알게 되었다. 이름은 정암(靜庵), 직업은 방랑승(放浪僧), 머리도 안 깎고 수염도 안 깎는 이 괴승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경기도 일대를 방랑하던 필객승(筆客僧)이었다.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산길만을 헤매는 정암은 저녁이 되면 언제나 대포집에 머물었는데, 그에게 술값이 있을 리 없고 또 그에게 술값을 기대하는 술집도 없었다고 한다. 다만 그는 들린 술집마다 올빼미 한 마리를 문짝에 그려 놓고 갔는데 그의 올빼미 그림을 얻은 집은 장사가 번창했다고 한다.  

  수원 용주사(龍珠寺)와 서울 화장사(華藏寺)에 벽화로 남아있는 담배 먹는 호랑이 그림이나 올빼미 그림이 60년전 정암의 솜씨라고 한다. 정암이 언제 어디서 태어났고 죽었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다만 정암의 후손이 있고 제자가 살아 있어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주대화(酒代畵)의 대가 한 분이 우연한 기회에 드러난 것이다. 이 귀중한 자료는 김두식(金斗植)에 의해 찾아졌음을 밝혀둔다.  <韓國人의 멋 - 1972>


  벙어리 멍석쟁이

  세상이 변하여 떠돌이 환쟁이는 옛말로서나 들을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1971년 가을 어느 날 살아있는 멍석쟁이 한 분을 우연하게 만났으니 참으로 꿈같은 일이 었다.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 손님들과 같이 옹기굴을 찾아다니던 때였다. 전라북도 이리 (裡里) 근방에 있는 옹기마을에 들렸을 때인데, 여기서도 그 수수께끼의 ‘채빠구 타림’ 기법을 또 한번 만나게 되어 흥분했었다. 그때 그 집 마당 한 구석에서 세상일에는 전혀 관심 없이 맷방석 엮기에만 심취해 있는 장인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마을 사람들 말을 들으니 그는 벙어리였다. 그래서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 고향이 어디인지, 나이가 몇 살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볏짚으로 맷방석을 잘 만들기에 동리 사람들이 잠자리도 마련해 주고, 밥도 먹여줄 뿐이었다. 구경꾼이 모여들어 시끄럽게 굴어도 그는 쳐다보지 않고 온갖 정성을 볏짚 한 가닥 한 가닥에 쏟을 뿐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의 머리엔 이상한 띠가 둘러져 있었고, 귀밑에 와서는 볏짚으로 만든 패물이 달려있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동리 사람에게 물어 보았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단순한 장신구는 아닌 듯 싶었다.

  추측컨대 그 볏짚 패물은 부적일 것 같았다. 그는 볏짚 하나로 인생을 영위한다. 볏짚이 있어 잠을 잘 수 있고 밥을 얻어먹을 수 있다. 그래서 온 정성을 있는 대로 볏짚에 쏟고 있다. 볏짚은 그의 삶의 수단이자 신앙이기에 부적을 만들어 머리에 느리고 있을 것이다. 그의 볏짚 예능도 내 눈에는 신기(神技)로 보였다.        <민학, 1973>


  서양 나그네의 멋

  맨발에 고무신 신고 양팔로 가야금을 안은 미국인 학생 하나가 비좁은 서울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때마침 반대편에서 한국인 학생 하나가 날씬한 폼으로 기타를 들고 걸어왔다. 둘은 서로 스쳐 지나갔는데 문득 한국 학생이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미국 학생의 뒷모습을 보았다. 미국 학생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뒤를 보았다. 두 학생은 눈이 마주치자 묘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그리고는 각각 제 갈 길로 사라졌다.

  얼마 전 ‘앤 가버’란 평화봉사단 소속 여학생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우리는 한참 웃었다. 어느새 우리 생활 속 깊이 파고 들어온 고무신 바람의 젊은 미국 나그네들은 우리들보다 더 텁텁한 모습으로 무엇을 찾는지 애를 쓰고 다닌다. ‘앤’은 천진난만한 어린 학생이지만 뚜렷한 주관과 끈덕진 노력의 주인공이며 한국 탈춤 공부에 몰두하고 있다. 앞으로 한국 농악까지 배운 뒤 돌아가서 뉴욕 맨하탄을 휘잡아 보겠단다.
  
  ‘바바라 씨글’이라는 단원은 ‘앤’보다 나이가 위인데 제주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하면서 조지훈(趙芝薰)의 시를 번역하는가 하면 한국 고대 문학까지 파고들고 있다. 가끔 한복차림으로 나타나는데 그도 시간이 나는 대로 봉산 탈춤을 배우고 있다. 한국 땅을 밟은 지 여섯 달 밖에 안 된 서양인의 활동이 이렇다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함열(咸悅)이라는 시골에서 초가집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 ‘스트롬’씨 부부도 친해졌는데 만나자마자 도깨비 이야기와 함열에 있는 장수바위 전설을 털어놓는 바람에 도깨비 할아버지로 통하는 나도 그만 두 손을 들고 말았다. 한번은 인사동 골동품 가게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다름아닌 나를 만나러 온 것이라 한다. 시골서 올라오자마자 만난 것을 산신령님 뜻이라며 좋아하니 나는 이런 묘한 미국 나그네들 때문에 환장할 지경이 되었다.

  첫인상부터 괴상하다 할만큼 색다른 미국 친구들은 일년도 못 되어 우리 나라 말을 곧잘 하고 한글도 제법 읽어내면서 가끔 한국의 멋이 무엇이냐는 등 우리 삶의 핵심을 물어오기도 한다. 십 년이 지나도록 한국에 살면서 쉬운 인사말 하나 배우려 하지 않던 지난날의 미국 군인이나 공무원이나 장사꾼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사람들이다.  

  얼마 전 부산으로 무당굿 구경을 갔다가 그곳에 모인 평화 봉사단 학생들의 열광적인 모습에 감동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벌써 구경꾼이 아니었다. 무대밖에 없는 우리 고유의 무당극장에 앉아 어깨를 들썩들썩 신바람을 날리면서 네 시간 동안 꼼짝 안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단원 중 한 사람이 나더러 무당과 불교의 관계를 말해 달라기에 저녁을 먹고나서 회심곡(回心曲) 레코드판 하나를 사 가지고 호젓한 살롱으로 들어갔다. 일요일이라 손님이 없는 틈을 타서 회심곡 감상을 시작했다.

  이 세상에 나온 사람 / 뉘 덕으로 생겼는가 / 하나님의 은덕으로 / 아버님 전 뼈를 타고/ 어머님 전 살을 타고 / 칠성님께 명을 타고 / 제성님께 복을 타고 / 석가여래 제도하여 / 인생 일생 탄생하니…

  한국의 꽹과리 가락도 알고 북 가락도 아는지라 삼십 분 동안을 꼼짝 않고 귀를 기울여 주는 것까지는 고마웠으나 내가 지루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미국 사람들이 단순한 호기심으로 우리 나라 민속예술을 구경하는 때는 이미 지났다. 한국의 고유 종교를 샤머니즘이니 미신이니 하면서 전망대로부터 내려다보던 시기도 얼마 안 가서 지나가리라고 생각된다. 내가 가까이 지내고 가끔 대포집에 가서 막걸리 잔을 나누는 친구들은 외국 손님이라기보다 신이 올라서 무당이 될 수 있는 문화 특공대원이라고 부르고 싶다. 단지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와 자존심만으로 우리 것을 다 아는 척하고 적당히 대들다가는 큰 코 다칠 때가 온 것이다.

  반성할 것은 우리가 미국으로부터 받아들이기만 하는 일방통행 식 배움만 생각한 나머지 우리가 미국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배움이 있다는 것은 잊어버렸을 뿐 아니라 이미 우리 것을 배우러온 사람들이 들끓고 있다는 사실마저 무관심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연 우리는, 우리 멋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무엇을 내놓을 수 있으며 또 가르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준비는커녕 우리 자신이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멋을 현대적 감각으로 느끼고 소화하는데 있어서조차 손님한테 뒤지고 있는 것 아닌가 염려된다.  

  한국의 가락이나 신바람이나 멋은 벌써 우리들 전용물이 아니다. 기타를 배우기에 바쁜 얼빠진 꼴을 비웃는 나그네들이 머잖아 우리를 앞지를 것이다. 이대로 라면 우리는 조상이 남겨준 멋의 원형 그대로를 넘겨주고, 그 원료가 미국으로 건너가 하나의 문화상품이 되어 거꾸로 수입되는 날, 그게 우리 것인지도 모르고 어깨를 들썩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샘터 1971年 9月號 - 韓國의 멋을 찾아서>


  쎈스 오브 구경

  키가 6척이나 되는 금발의 미국 여학생 평화봉사단원이 시골 장 구경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가던 촌사람이 괴상한 이 서양여자 구경에 정신이 빠져 목을 돌린 채 페달을 밟다 그만 길 한쪽에 매어 있던 황소를 받아 버렸다. 순한 사람이 화를 내면 큰일나는 법이다. 점잖은 한국 황소가 놀라 화를 내니 장 마당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이 이야기는 ‘한국 사람은 유난히 구경을 좋아한다’ 면서 한 미국 학생이 들려준 것이다. 하루는 외국 학생들과 둘러앉은 자리에서 ‘구경 버릇’이 화제에 올랐는데 그들이 솔직하게 털어놓는 ‘한국사람 구경 버릇’ 관찰담에 나는 배가 터지도록 웃어야만 했다.

  이런 이야기도 나왔다. 한 시골 신사가 새로 건축중인 빌딩 내부를 구경하는데 밖에서 데모 소리가 터져 나오자 창문 쪽으로 갔다. 유리 사이즈가 지나치게 컷던 탓에 신사는 유리가 끼어있는 것을 모르고 머리를 밖으로 내밀었다. 얼마나 열광적이었던지 머리는 유리를 뚫고 밖으로 나갔다. 당황한 그는 머리를 도로 들이려고 애썼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나가기는 했지만 들일 수는 없는 귀신 장난 같은 구멍이 뚫어졌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폭소가 난무했는데 우리네 흉을 보는 것인지 그저 흥이 나서 떠드는 것인지 분간할 여유도 없이 나도 한 몫 끼어서 실컷 웃어 버렸다. 다 한마디씩 하고난 뒤 무전여행 중인 영국학생이 모든 것을 종합하는 듯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자전거 한 대로 5십여 나라를 돌아다녔는데 한국 산골에 갔을 때처럼 자기를 구경하러 많은 사람이 모여든 나라가 없었다는 것이다. 좀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우리에게 그런 기질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 않는가.

  구경거리라면 우 몰려가는 우리 나라 사람을 우리 자신 쑥스럽게 여긴다. 전형적인 미개인 습성 같기도 하고, 교양이 없어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확실히 구경거리가 생겼을 때 지나치게 호기심을 나타내는 사람은 촌놈처럼 보이거나 얼빠진 놈 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어느 나라에서나 그런 꼴을 보이지 않도록 어린 아이 때에 가르쳐 주는 듯 싶다.

  한국 사람이 세계에서 가장 구경을 좋아한다는 평을 받은 이상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가지 말고 우리 구경 심리를 탁 털어놓고 심판을 받아 보자. 솔직하게 말하면 나 자신부터 거리를 걸어가다 싸움 구경하기 좋아하고, 골목 빈터에 자리잡은 뱀장사의 양기 돋구는 열변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충청도 계룡산 근처에서 못을 푸고 용을 잡는다고 떠들썩할 적에 2주일간 그 거사에 참여한 바도 있고, 도봉산 속에 호랑이와 이야기가 통하는 할머니가 살아 있다니 시간만 나면 꼭 가서 구경할 셈이다. 누가 신사답지 못하다고 하든 말든 내가 좋아하는 구경거리를 어찌 놓쳐버릴 것인가. 길거리에 주저앉아 신나게 장기를 두고 있는 친구를 보고 어찌 무관심하게 지나갈 것인가. 찌는 듯한 여름 거리를 오바코트 바람으로 유유히 걸어가는 멋진 도사를 어떻게 보지 말란 말인가. 기왕에 구경꾼으로 이름난 바에야 실컷 구경이나 하고 볼 것이지 쓸데없이 가면 쓰고 점잖은 척 한들 무엇하겠는가.  

  우리가 좋아하는 구경거리를 마음놓고 털어놔 보자. ‘구경’하면 먼저 정월보름 달구경이 생각나고, 다음은 7월 7석 별구경인 것 같다. 가을 하늘 기러기 구경은 처량하고, 봄날 꽃구경은 신선하고 향기롭다. 이런 식의 대자연 구경부터 시작하여 동리의 굿 구경, 잔치구경, 씨름구경, 놀이구경 등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구경거리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돈을 내라는 구경은 별로 없으니 한국의 구경이란 공짜라야 진짜 구경이 되는 셈이다. 아니 구경에 그치는 게 아니라 떡도 얻어먹고 술도 얻어먹고 돌아와야 더 진짜이다. 옛말에 한국 호랑이는 굿 구경을 좋아한다는데 그 역시 굿이 끝나면 돼지 대갈 하나쯤 얻어먹고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 아닐까.

  구경을 즐기는 우리의 타고난 습성을 쑥스러운 일이라 여기며 이마를 찌푸려야 할까. 동양 예절에서 보나 서양 에티켓으로 재나 구경 좋아하는 습성은 군자답지 못하고 신사답지도 않다. 그러나 한쪽 시각에서 하나의 자막대기로만 재는 것 또한 얼빠진 짓이다. 한 면만 보면 다른 한 면에 숨어있는 진리를 놓치고 만다.

  구경 좋아하는 우리 습성을 참여예술(參與藝術)이라는 원칙에서 접근해 보자. 우우 몰려드는 꼴은 언듯 촌스러운 모습으로 비칠지 모르나 시각을 바꾸어 보면 내면에 있는 예리한 호기심과 감상력, 또한 참여력의 발로이다. 그런 이유에서 지금까지 쑥스럽다고 생각해 오던 구경 심리를 ‘쎈스 오브 구경’ 이라 부르기로 한다. 살피며 들어가면 이 쎈스야 말로 ‘참여 예술의 시발’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시골 사람들은 굿 구경을 좋아한다. 굿이란 우리 시골이 지니고 있는 이동식 민속 극장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하리라 생각되는데 이 극장에는 무대와 관람석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오로지 무대 뿐의 극장이다. 따라서 여기 모여드는 구경꾼은 관람객이 아니라 무당패와 같이 어울리는 또 한 종류의 예술인들이다. 꼭두각시 놀음도 그렇다. 놀음패와 구경꾼이 한마당에 앉아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신이 나면 날수록 누가 놀음패인지 누가 구경꾼인지 모를 정도로 하나가 되어버린다.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 나라는 술좌석 또한 극장이다. 신이 나면 누구나 한가락 부르는 명창이 되고, 수저고 젓가락이고 쟁반이고 구별 없이 소리나는 물건은 다 두들이 악기가 되어버린다.  

  타고난 우리네 ‘쎈스 오브 구경’은 한 걸음 나아가 누구에게나 ‘가락’의 테크닉을 배우게 하고, 가락을 통하여 ‘멋’을 표현하게 하며, ‘멋’이 극치에 도달하였을 때 ‘신바람 예술’을 창조해 온 게 아닌가 싶다.                                             <1975>


  주시록(酒示錄)  

  주(酒)여, 맥주(麥酒)여, 시원한 술님이여.
  목마른 자의 답답한 속을 풀어 주시고, 찌푸린 이맛살을 펴 주시고, 너그러운 마음씨의 씨알을 심어주시니 감사하고 감사하나이다. 세상의 모든 못마땅한 일, 구역질나는 일, 삐뚤어진 일, 속상한 일, 안타까운 일, 욕하고 싶은 일, 싸우고 싶은 일, 다 잊어버리게 하시니 님의 뜻을 따라 관대하게 안아주겠나이다.

  주(酒)여, 법주(法酒)여, 거룩한 술님이여.
  법(法)에 눌려 피어날 줄 모르는 째째한 자에게, 법을 뚫고 나가 가슴을 활짝 펼 수 있는 힘을 주시니 감사하고 감사하나이다. 창조(創造)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법, 왜소한 인간성을 자인하는 법, 형식의 구멍으로 몰아넣는 법, 이런 그릇된 법(法)을 주입한 착각 교육의 주사기를 빼 버리기 위하여 빼라 빼라, 하면서 벗어버리겠나이다.

  주(酒)여, 양주(洋酒)여, 비싼 술님이여.
  돈에 어두운 자에게 돈맛을 가르쳐 주시니 감사하고 감사하나이다. 민족의 얼을 되찾으려고 땀흘리는 자, 가엾은 사람을 도우려고 애 쓰는 자, 뜻 있는 일을 이끌어보려고 고민하는 자, 이 모든 사람이 돈을 몰라서 허덕이고 있었는데 이제 님으로 하여 돈이 곧 자유와 힘이란 진리를 전도하게 되었사오니 돈 돈 하면서 돈교(敎)나 포교하겠나이다.

  주(酒)여, 탁주(濁酒)여, 텁텁한 막걸리여.
  멋들어진 민족 예술의 주류(主流)이시며, 가락과 멋과 신바람의 원천(源泉)이시며 외세(外勢)에 휩쓸리지 않고 뼈대 지킨 주체(主體)이며 구국(救國)의 영웅과 만고(萬古) 멋쟁이들의 도깨비 국물이신 님이여.

  님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는 가엾은 자, 님의 뜻을 거역하고 님을 팔아먹는 자, 님의 멋을 모르고 욕하는 자, 님의 넓고 넓은 사랑을 모르고 슬슬 피하는 자, 이 모든 얼빠진 무리를 용서해 주시옵고, 크고 크신 힘과 지혜와 사랑으로써 앞 못 보는 겨레를 주시(酒示)하여 주옵소서.                                        <京鄕新聞 - 魚眼錄, 1971年>










한국 민예미술(民藝美術)의 멋


  예술 속의 웃음

  연설(演說)에 만담(漫談)이 생기고, 연극(演劇)에 희극(喜劇)이 등장하고, 문학에 해학(諧謔)이 담기면서 그림에도 만화(漫畵)란 것이 세상을 휩쓸게 되었다. 모두 웃음거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특수한 예술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 같이 웃음 ‘거리’를 골라 모았을 뿐 아니라 그 표현 자체가 또한 웃음을 나타낸다. 결국 세상은 ‘웃음’을 다루는 만담가, 희극배우, 해학문학가, 만화가 등을 전문가로 인정하게 되었다.  

  웃음의 예술이 전문화되고 국제화 되어감에 따라서 ‘웃음’의 개념이 논쟁의 대상이 되더니 어느 새 웃음의 학문까지 생겨난 감이 든다. 현대의 웃음거리 이론은 Humour라는 영어를 주체로 하여, Laughter, Joke, Funniness, Playfulness, Comic, Wit, Irony, Satire 등 어의적계보(語義的系譜)를 만들어 웃음거리 이론체계로 삼고 있다.

  동양 사람은 여기에 알맞는 한어(漢語)를 추려서 해학(諧謔)을 주체로 모셔놓고, 골계(滑稽), 풍자(諷刺), 기지(機智), 희학(戱謔), 농기(弄氣) 등으로 분류한다. 우리는 우리말에서 멋, 웃음거리, 웃음감, 꾀, 익살, 장난기, 등 고유한 말을 끄집어내어 그것을 억지로 Humour에 맞추려고 애쓰기도 한다. 결국 예술의 웃음에 있어서는 Humour란 서양어가 그 표준이 되고 말았다. 나는 한어의 해학이나 우리말의 ‘멋’이 꼭 Humour에 해당된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에 ‘유머아’라고 표현해 본다.  

  ‘유머아’ 문제를 가지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예술 속에 ‘유머아 예술’이 따로 있었던 게 아님을 알게 된다. 다만 모든 분야의 예술에 있어서 ‘유머아’가 중요한 예술적 요소였다는 점만 동서고금에 상통된 사실로 드러날 뿐이다. 말하자면 ‘유머아’는 아마추어적 표현이었을 뿐이다. 특히 우리 전통문화에서 ‘유머아’의 자리는 ‘유머아 예술’이 아니라 ‘예술의 유머아’, 즉 문학에 있어서나 연예에 있어서나 미술에 있어서의 해학성을 뜻하는 것이니 예술 속에 담겨있는 ‘웃음의 멋’을 말한다.


  한가락의 멋  

  여기서 우리는 잠시 정신을 가다듬어 우리 예술의 특이한 문화사적 성격을 파악해 둘 필요가 있다. 엄격하게 말해서 우리 나라 예술사의 주체는 소수의 전문가가 아니라 민중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가의 역사가 아닌 민중의 광범위한 참여로서 키워진 예술의 역사이다. 음악이나 춤이나 노래나 글이나 그림 따위를 지금은 예술이라고 부르지만 조상들은 그것을 ‘가락’이라고 불렀다.

  ‘가락’이란 사람의 일거일동을 예술적으로 재어보는 척도로써, 무슨 일이든 멋있게 느껴졌을 적에 우리는 ‘가락을 안다’ ‘한가락 한다’ 등의 말로 표현한다. 가락은 사람 움직임의 ‘멜로디’이며 ‘리듬’이었던 것이다. 기침을 멋지게 기쳐도 가락이 있다 하고, 웃음을 멋지게 웃어도 가락이 좋다 하고, 농담을 멋지게 해도 가락이요, 노래를 잘 불러도 가락이요, 춤을 잘 추어도 가락이다. 가락을 통하여 찾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한국인의 멋’이었다.

  서양에서 분석적인 이론에 따르는 미학(美學)을 꾸며내는 대신에 우리 조상은 가락을 통한 ‘멋’의 표현을 민간미학(民間美學)의 기준으로 삼아왔다. ‘멋이 있다’는 것이 ‘예술성이 높다’는 표현으로 직결될 만큼 모든 움직임의 예술성을 ‘멋대가리 없다.’ ‘멋있다’ ‘멋드러졌다’ 등으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예술의 ‘유머아’나 해학을 말할 적에는, 우리는 마땅히 ‘멋’을 척도로 측정해야 한다. 어떠한 예술적 요소가 ‘멋’을 구성하는가, 흔히 쓰이는 우리말로 풀이해 보자.

  (1) 시원한 ‘멋’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 목이 타는 듯한 해장국을 우리 술꾼들은 ‘시원 ― 하다’면서 한가락 들이킨다. 서양 사람 같으면 입에도 대기 어려운 매운탕을 ‘얼큰 ― 하다’면서 넘기고 입맛을 다신다. 이 때의 ‘시원하다’는 표현을 영어로 번역하자면 Unity, Openness, Fluency, Simplicity 등을 종합해 접근할 수 있지만 ‘얼큰하다’는 표현에 해당되는 영어는 도저히 찾을 길이 없다.

  그러니까 무엇이든지 멋이 있으려면 시원하게 생기고 시원하게 움직여야 한다. 말을 해도 시원하게 해야 하고, 욕을 해도 시원하게 해야 멋이 있다는 찬사를 받는다. 노래를 불러도 시원하게 부르고, 춤을 추어도 시원하게 추고, 그림을 그려도 시원하게 그려야 멋이 나는 것이다.

  (2) 어울리는 ‘멋’
  백발의 할아버지가 찌그러진 탈을 쓰고 꽹과리를 치면서 젊은이 대열 속에 끼어 춤 추는 모습을 보고 다들 멋이 있다고 야단이다.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어울린다’는 표현을 영어에서 찾으면 Harmony, Contrast, Match 같은 단어를 뽑아보게 된다. 남녀가 잘 어울리고, 늙은이와 젊은이가 잘 어울리고, 농부와 황소가 잘 어울리는 데서 멋을 찾을 수 있다. 음악이나 그림이 멋있으려면 소리나 색깔과 잘 어울려야 하는 것이다.

  (3) 텁텁한 ‘멋’
  화려한 칵테일 파티에나 잘 어울릴 줄 알았던 높은 분이 시골 모내기 판에서 농부들 사이에 끼어 막걸리 바가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볼 때 우리들은 ‘텁텁하다’라고 말하면서 멋을 느낀다. 꾸밈새 없는 아름다움의 표현이며 ‘멋’의 절대적 구성요소가 바로 ‘텁텁함’이다. 억지로 영역해 본다면 Unpretentious, Natural, No make-up, Humbleness 등을 떠올릴 수 있다.

  (4) 웃음의 ‘멋’
  점잖다고만 생각했던 어른이 술판에서 방석을 등에 집어넣고 곱사춤을 출 단계에 이르면 술판은 신바람의 폭풍 속에 휘말린다. ‘멋’의 극치는 역시 웃음에 있는 것이니 영역하면 Humour, Comic, Funniness, Laughter 정도로서 때어질지 모르겠다.  

  (5) 싱싱한 ‘멋’
  캠프화이어의 불꽃이 싱싱하게 타오른다. ‘늙은 젊은이’들은 벌써 방안에 들어가 환자가 되어 버렸지만 ‘젊은 늙은이’는 새벽까지 버티고 앉아 몇 남지 않은 싱싱한 벗과 술 다툼을 한다. ‘멋’은 싱싱한데서 솟아오르지 축 늘어지고 헬렐레한 꼴에서는 찾을 수 없다. 음악, 춤, 예술도 싱싱해야 멋이 난다. 이 역시 영역을 해 본다면 Vitality, Freshness 같은 단어하고나 맞출까 꼭 들어맞는 말은 없어 보인다.

  (6) 구수한 ‘멋’
  한국 호랑이는 구수한 팥죽을 좋아하다가 큰 변을 당한다. 그래서인지 민화에 등장하는 호랑이 모습을 찬찬히 보면 구수한 멋을 듬뿍 품고 있다. 바보스러우면서도 여유 있는 멋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Ampleness, Humbleness, Generosity, Roundness 등이 맞을 것 같은데 ‘구수함’ 역시 멋의 요소로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런 식으로 ‘멋’을 풀이해 가면 즉흥적인 멋, 독창적인 멋, 부드러운 멋, 취한 멋, 미친 멋, 신나는 멋, 같은 평범한 표현 속에서 민중 예술의 미학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한 토속적인 표현은 다른 나라 말로 번역할 수 없는 특이한 것이며, 바로 그런 느낌에서 동서고금에 유례없는 한국 민중예술의 ‘멋’이 태어났다고 믿어진다.


  장난기와 웃음의 멋

  ‘멋’을 빚어내는 여러 가지 예술적 요소 중 가장 두드러지고 쉽게 느낄 수 있는 요소는 아무래도 ‘웃음의 멋’ 같다. 그래서 여기서는 다양한 민중 미학에서 ‘웃음의 멋’ 부분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다만 민중 예술을 민중 미술로 그 범위를 축소시켜 병행하기로 한다.  

  한국 사람의 ‘웃음의 멋’은 일상 생활 속에 있는 이야기 거리에서부터 발견되는데 농담가락이 그것이다. 말 잘하는 연사 치고 농담기 없는 사람이 없다. 이 농담기는 말로서만 전해지는 게 아니라 노래나 춤, 글이나 그림에서도 나타나며 ‘웃음의 멋’을 빚어내는 주역이다.

  이 중 문학에 나타난 해학은 벌써부터 연구 대상이 되어 1970년 ‘펜’ 대회 때는 해학을 대회 주제로 삼기에까지 이르렀다. 근래 들어 우리 나라 민속놀이나 춤이 세계에 널리 소개됨에 따라서는 한국 가면극의 해학성이나 풍자성이 부각되었는데 그것은 웃음거리의 내용은 몰라도 가면의 찌그러진 모습이 유머러스하게 생긴데다 놀음이나 춤의 움직임이 저절로 웃겨주기 때문이었다.

  이에 비하여 그림의 해학성이나 조각의 웃음기는 아직 뚜렷하게 거론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옛 조각 작품에 웃음이 많이 나타난다지만 이것은 ‘부드러운 멋’으로 나타나는 Smile을 말하는 것이지 Laughter를 일으키는 ‘웃음의 멋’은 아니다. 관세음보살이 미소를 짓고 있다하여 사람을 웃기지는 못한다. 그것은 부드러운 멋이지 웃음의 멋은 아닌 것이다. 신라시대의 기와에 나타나는 도깨비나 이조시대 민화 석각에 나오는 호랑이 중에는 아주 바보같이 생겨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폭소를 터뜨리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웃을 수 없는 대상들이 웃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보는 사람은 Laughter의 웃음을 웃게 되니 이런 것이 바로 미술 속에 담긴 웃음의 멋이다.

  작가는 어떠한 힘을 가졌기에 관객을 그토록 웃길 수 있는가. 연설에 있어서 농담기가 힘이 되는 것과 같이 그림이나 조각에 있어서는 ‘장난기’가 힘이 될 수 있다. 어린아이가 흙반죽을 가지고 장난할 때면 참으로 웃기는 물건을 많이 만들어낸다. 어른도 다를 게 없는 것이 원시시대 토우(土偶) 같은 유물을 보면 알 수 있다. 토우야말로 조각 해학성의 연원을 가르쳐주는 위대한 유물인 것이다.

  토우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인간 유머아의 원천이 벌거벗는데 있다는 점이다. 정상적인 사람은 나체 사진만 보아도 힐쭉힐쭉 웃게 마련이다. 그래서 흙반죽을 가지고 어른보고 장난을 하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벌거벗은 사람을 만들기가 일수이며 특히 국부를 멋지게 노출시킨다. 이런 장난을 남녀가 마음놓고 나눌 수 있는 자리가 있으니 바로 술좌석이다. 술좌석의 언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남녀 관계의 색담인데 그것을 못마땅히 여기는 사람이 그 자리에 있다면 불구자일 것이다. 언어뿐이 아니다. 술좌석에서는 노래나 춤까지도 ‘그것’이래야 신이 나는 법이다. 우리는 그 방면의 문화유산도 톡톡히 이어 받은 민족이다.


  쌍 미술의 멋

  예술의 해학성을 말하는 마당에서 그 시발점을 인간 음양관계로 귀결시키게 되었다. 그것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 옛사람들은 타락된 현대인과 달리 모든 창조의 근원을 음양 결합에 두었고, 따라서 남녀의 성기를 신성시하는 신앙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거룩한 것이 가장 즐겁고 우스운 것이었다는 사실은 선사시대 암각 미술로서 입증되고 있는데 이것은 세계 인류문화사에 있어서 공통된 점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가장 오래된 예술의 해학성은 미술 분야가 그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한국 예술의 해학성에 대한 논고도 미술 자료를 중심으로 시작되어야 그 체계가 확립될 것 같다.

  우리 나라 미술사에서 가장 웃기는 작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세히 보면 유머러스한 선사시대 미술 자료가 많이 발견되어 있다. 우선 ‘선돌’이라고 불리는 남근형(男根型)의 입석(立石)을 들어야겠다. ‘선돌’ 중에는 남근형으로 생긴 자연석에 약간의 인공을 가하여 만들어진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남근석 만으로는 그리 유머러스한 것은 못된다. 반면 남자의 나체상에는 누구나 웃음을 터뜨리게 되니 고대미술의 해학성을 충분히 발휘하고도 남음이 있다. 언양반구대(彦陽盤龜台) 암각화(岩刻畵) 에서도 그런 예를 엿볼 수 있지만 가장 유머러스한 작품은 아무래도 토우(土偶) 같다. 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신라 시대 주형토기(舟形土器)에 벌거벗은 뱃사공이 있는데 그 남근이 큰 베개 만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폭소를 터뜨리게 한다. 뱃사공의 바보 같은 얼굴 표정이나 코끼리 만한 큰 귀 같은 것을 종합해 보아 이 작품은 훌륭한 고대 미술의 해학감이다.

  다음으로는 두말 필요 없이 여근형(女根型)의 고대 작품인데 이것은 모체를 신성시하는 민간사상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남근형의 경우와는 달리 한눈에 폭소를 터뜨릴 만한 작품을 찾기란 사실상 어렵다.

  여근형 작품으로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가 깊은 것은 경주(慶州) 여근곡(女根谷)이라 할 수 있다. 최근 답사에 의하면 이것도 자연반 인공반(自然半人工半)의 여근(女根)인데 이에 대한 민간신앙이 아직 그 마을에 남아 있다. 몇 해 전에 동리 아이들이 여근곡 샘물을 막대기로 장난했었는데 그 때 온 동리 여자들이 모조리 바람이 났었다는 것이다. 신성함과 웃음거리가 또 한 번 결합했던 것이다.

  여근곡에 관한 유머러스한 옛말이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기록되어 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여근곡 근처에서 백제(百濟)의 복병을 습격하기에 앞서 “남근은 여근 속에 들어오면 죽는 법이다” 라고 신하들과 농담을 나누었다 하니 신라 사람들의 유머아 센스가 얼마나 폭넓었던가를 알 수 있다.

  아예 음양을 결합시킨 예도 나타난다. 약방에서 쓰는 손절구를 음양 결합으로 생각하여 그 방망이를 남근형으로 만든 유머러스한 경우이다. 전통공예에 있어 물건을 만들 때 음양(陰陽)의 이치에 따라 ‘암놈’ ‘숫놈’으로 부르는 것은 상식이었던 것 같다. 지붕의 기왓장도 위를 보고 눕는 형은 암기와라 하고 위에서 타고 누르는 형은 숫기와 라고 불렀다. 목조물의 짜임에 있어서도 구멍에 긴 것을 맞추는 공법을 아주 쌍스러운 말로 암놈과 수놈의 결합으로 표현하는 버릇이 남아있다.

  이렇듯 음양(陰陽)의 결합을 한편 우주의 신성한 일로 믿으면서 한편 예술적으로는 매우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전통을 보여준다. 중국의 공예품에 남녀 교합을 노골적으로 나타낸 작품이 많은데 비해 한국 것은 은근하게 표현된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호랑이계(系) 미술의 멋

  음양미술(陰陽美術)이 보편적으로 해학(諧謔)의 대상이 되고 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미술을 중심으로 무엇이 민족적 해학 대상이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1970년 나는 처음으로 한문화(韓文化)에 관련되는 미술도서를 냈는데 그것은 영문으로 쓴 ‘한국 호랑이의 해학(Humour of the Korean Tiger)’이라는 작은 책자였다. 때마침 조선호텔에서 ‘해학’을 주제로 세계 펜 대회가 열렸는데 집행부의 권유로 대회장 매점에서 세계 문인들을 상대로 첫선을 보이게 되어 마음이 조마조마 했었다.
  
  한 구석에 앉아 과연 누가 내 책을 사 가는가 지켜보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하고 비슷한 입장에서 초조하게 앉아있는 학자가 또 있었다. 드디어 한 마리 큰놈이 걸렸다. 중국 사람이었다. 첫 장을 넘기자마자 그는 옆에 서 있는 친구에게 ‘호랑이 담배 피우는 그림’을 보여 주며 중국말로 떠들어댄다. 한민족의 특이한 민족적 웃음거리를 보자마자 중국식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호랑이가 한국인의 ‘웃음’의 원천이라는 점은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확고부동하게 인식되었다. 어떻게 그 무서운 호랑이가 한민족의 해학을 빚어냈단 말인가. 이것이 내겐 심상치 않은 문제였고 보다 조심스럽게 추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오랜 세월 찾아 다녔다.

  앞서 제시한 여러 호랑이 미술 중에는 매우 에로틱한 면을 노골적으로 나타낸 것이 많다. 그 중에서 긴 꼬랑이를 뒷다리 사이로 밀어 올려 남근(男根)의 발기상을 뜻하는 작품을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다. 호랑이 모양의 목침(木枕) 공예품도 보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전신이 남근형으로 조각되어 있어 폭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솜씨는 해태 조각에서도 볼 수 있다. 사자형 고대(鼓台)가 특히 유머러스하게 처리되어 있는데 첫째는 사자의 국부가 상세하게 조각되어 있고 둘째는 사자 전신이 또한 거대한 남근형(男根型)으로 만들어져 있다. 지금 남아있는 몇몇 해태 조각을 볼 때 이러한 처리법이 고대에는 공통된 수법이었음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곧 일반적인 양식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멋’의 체득을 통해 우리는 무서워 해야할 벽사수(僻邪獸) 조각에서 부드러움을 느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무한한 웃음거리의 멋을 느꼈으니 이것이 조형미술로 표현되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해학이었던 것이다.  


  도깨비계(系) 미술의 웃음

  호랑이와 함께 우리에게 웃음을 주는 또 하나의 원천은 도깨비라는 괴물이다. 이 경우도 미술의 세계로 직행하지 말고 설화의 세계를 거쳐가야 이해가 쉽다. 호랑이가 한국인을 웃기는 것처럼 도깨비도 평범한 옛말을 통해서 한없이 웃음의 멋을 창조해 낸다. 그래서 한국인이 모여 앉아 도깨비 이야기를 시작하면 밤을 새워가며 떠들게 된다.

  도깨비 설화는 형체 없는 미술이요 도깨비 미술은 소리 없는 설화라는 것이 오랜 동안 도깨비 미술을 찾아다닌 끝에 얻어 가진 나의 결론이다. 우리 나라 설화 속에 숨쉬는 도깨비 성격을 하나씩 들어보면 첫째, 도깨비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신통한 재주를 부린다. 대동강을 단숨에 휙 건너뛰기도 하고 난데없이 도깨비불을 지르기도 하고, 금방망이 은방망이를 두드리면서 무엇이든 생각나는 대로 만들어 내기도 한다. 신화 속의 도깨비는 한술 더 떠 우레 소리도 내고, 번개도 일으키고, 바람을 불어내면서 비를 쏟게 하는 신통술을 가졌다. 그 중 도깨비 방망이가 우리 해학을 두드러지게 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다.

  둘째로 도깨비는 술과 노래와 춤을 즐긴다. 언제나 부슬비가 나리는 으스스한 밤중에 헌집에 모여 술 마시고 춤을 춘다. 그래서 한국 사람의 도깨비적 해학성은 술과 노래와 춤에서 나온다고 말하기도 한다.

  셋째로 도깨비는 장난을 좋아한다. 사람과 어울려서 같이 춤을 추기도 하고, 밤중에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 기왓장을 뒤집기도 일쑤다. 고기잡이하는 김서방을 골려주려고 고기 대신 말똥을 한 보따리 잡아주기도 한다. 이러한 ‘장난기’가 곧 해학의 원동력인데, 이러한 사실은 한국인이 창작한 모든 예술작품 속에 현저하게 드러난다.

  넷째로 도깨비는 큰 허점(虛點)을 가지고 있다. 씨름을 좋아하지만 왼쪽다리만 걸면 꼼짝 못하고 넘어진다. 남의 돈을 꾸어온 일은 절대로 잊지 않지만 자기가 돈을 갚은 사실은 곧잘 잊어버린다. 이러한 허점이 폭넓은 ‘유머아’의 터전을 마련해 준다.

  다섯째로 도깨비는 의리가 깊고, 감동적인 일을 당하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무섭게 생긴 도깨비가 눈물을 흘린다니까 이게 또 유머러스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하여 도깨비 눈물방울은 결국 한국인 해학의 감로수가 된다.

  이 정도로 요약해도 우리는 한국 도깨비의 해학성이 어떠한 것인가 맛볼 수 있다.

  설화 속에서 찾은 이러한 해학을 도깨비계(系) 미술에서 찾아보자. 지금은 그 자료가 매우 귀해졌지만 옛날에는 동리마다 장승이 있었으니 민중에 가장 가까운 도깨비 미술은 장승이었다. 나무 장승을 세울 때는 큰 나무를 잘라 거꾸로 심어, 뿌리를 내게 하여 머리털을 만들었으니 우선 이것이 해학 감이다. 다음은 표정이 재미있다. 한결 같이 힘이 있는 동시에 부드러움을 느끼게 한다. 설화에서와 같이 무서운 힘과 인자한 눈물을 겸한 얼굴인 것이다.

  나무 장승은 자주 갈아세우는 과정에서 차차 본연의 부드러운 모습이나 익살궂은 표정을 잃고 흉칙한 몰골로 타락해 버렸지만 돌장승은 아직 웃음기 짙은 옛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일부 썩어 가는 나무 장승에 돌장승에서와 같은 점잖은 형태가 남아있는데 특히 코가 떨어진 유물은 웃음거리이다. 장승의 코를 갉아먹으면 아들을 낳는다거나 이와는 정반대로 아기를 뗀다는 등의 미신에서 이루어진 괴상한 미술품으로 탈바꿈된 것이다. 아주 해학적인 장승 조각으로, 머리 모양을 남근형으로 만든 것이 유물에서 발견된 적도 있다.

  도깨비 형체는 인신귀면(人身鬼面)으로 나타내는 것이 표준화되어 있으므로, 장승이 그러한 유형에 속한다는 점은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러나 신체 없이 얼굴뿐인 도깨비 귀면(鬼面)도 있다. 문짝 밑에 그려지기도 하고 혼백 가마에도 그려지는데 이 역시 우리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 귀면에 매우 웃기는 작품이 많다. 심지어 큰 아가리에 물고기를 물고 있는 괴상한 자료도 나오는데 그 뜻은 별것 아니다. 그와 같이 물어 죽인다고 공갈치는 뜻으로 어린이 같은 장난기로 그린 것이다.

  호랑이 민화의 경우와 달리 도깨비 기와 무늬는 직감적으로 웃음의 멋을 느끼게 할만한 자료는 못된다. 다만 여기 소개하는 자료와 같이 도깨비계(系) 미술의 하나로서 인면(人面)에 가까운 벽사무늬 와당이나 구룡자(九龍子)에서 웃음의 멋을 나타내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수복(壽福) 미술의 웃음

  지금까지 우리는 도깨비 계통과 호랑이 계통의 미술을 통해서 한국적인 해학은 민중 예술은 파헤쳐야 보다 뚜렷하게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가장 신성한 상징이거나 가장 무서운 상징이 가장 웃기는 예술로 표현되고 있는 실태도 살펴보았다. 결국 한국 전통미술의 해학성을 찾는 일은, 민간 신앙과 직결되는 미술 속에서 웃음거리를 찾는 일로 전환된 셈이다.

  웃음거리로 정해진 예술 속에서 해학성을 찾는 것은 Comic에 지나지 않겠지만, 우리가 찾는 것은 웃음거리의 ‘멋’이므로 이는 보다 높은 차원의 예술성을 뜻한다. 만담가의 만담을 들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웃는 것과 대통령의 연설을 긴장해서 듣다가 가끔씩 폭소하는 것과는 그 ‘멋’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신성하다거나 무섭다거나 점잖다고 정의된 대상을 골라 정의와는 반대로 사람을 웃기는 예술성을 끄집어  내려고 애써 본 것이다.

  이제는 우리네 웃음거리의 ‘멋’을 찾을 수 있는 영역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민간 신앙문제 자체를 냉정하게 살펴 볼 필요가 생긴다.

  민간신앙(民間信仰)이라면 흔히 원시종교(原始宗敎)와 결부시켜 취급하면서 유교(儒敎)나 도교(道敎), 불교(佛敎) 따위 문명교 와는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렇다면 원시 종교 신앙의 핵심은 무엇이고 문명교 신앙의 핵심은 무엇인가. 살펴보면 인간의 신앙이란 별것이 아니다. 생명을 원하는 기명(祈命) 신앙, 말라 타서 죽게 되었을 때 비를 구하는 기우(祈雨) 신앙, 한 목숨 오래 살겠다는 장생(長生) 신앙, 보다 잘 살겠다는 기복(祈福) 신앙, 그리고 이러한 욕구를 방해하는 마귀들과 투쟁하는 벽사(僻邪) 신앙으로 요약되는데, 이것이 곧 인간의 울트라(Ultra) 신앙이다. 그러면 인간 본연의 울트라 신앙은 문명교 와는 아무 관계가 없단 말인가.

  어느 종교나 철학을 절대시하는 권위면이 있고 한편에서 얌전하게 기도하는 신앙면이 있다. 그리고 모든 종교는 철학에서는 차이를 보이지만 울트라 신앙에 있어서는 공통점을 보이고 있으니 민간신앙도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종교’에 마땅히 포함된다. 다만 기도의 대상이 다르고 형식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또 여러 종교를 민교(民敎)의 관점에서 보면 불교에는 민불교(民佛敎), 도교에는 민도교(民道敎), 유교에는 민유교(民儒敎), 신교에는 민신교(民神敎)가 엄연히 담겨 있으며, 이 모두는 울트라 신앙을 공통분모(共通分母)로 삼고 있다.

  종교마다 종교미술은 어느 분자(分子)에서 태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학문 쪽이 아니라 민교 쪽이란 점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호환(虎患)을 막기 위해서 호압사(虎壓寺)를 창건했다던가 호랑이의 명복(冥福)을 비는 뜻에서 호원사(虎願寺)를 세우는 일은 모두 민교적인 행위이며 학문적인 행위는 아닌 것이다. 산신령님께 빌든 칠성님께 빌든 부처님께 빌든 독성님께 빌든 미륵님께 빌든 옥황상제에게 빌든, 비는데 있어서는 대상이 있어야 하므로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이 산신(山神) 탱화요, 칠성(七星) 탱화요, 삼불(三佛) 탱화요, 노군(老君) 탱화인 것이다. 귀신을 쫓기 위해 민신교(民神敎)가 만든 것이 호랑이 부적이라면, 아기들 눈병 막는다고 민도교(民道敎)가 만든 것이 종규(鐘馗) 부적이요, 아기를 준다고 민불교(民佛敎)가 만든 것이 송자관음(松子觀音)이다. 또 죽은 조상을 지킨다고 민유교(民儒敎)가 만든 것이 시묘석(侍墓石)이다.

  이렇게 정리하면서 따져 들어가면 앞서 거론한 음양미술이 곧 기명(祈命)의 조형적 표현이요, 호랑이나 도깨비 미술이 벽사신앙적 민교미술이었음을 더욱 확실히 알게 된다. 울트라 신앙의 수복(壽福) 사상을 중심으로 해학적인 미술 자료를 좀 더 살펴보자.

  장생미술(長生美術)의 권위는 민도교가 차지하고 있다. 그 중 대표적 역할을 하는 수성노인도(壽星老人圖)를 감상해 보자. 수성 노인은 사람의 수명을 관할하는 남극성(南極星)의 신상(神像)인데 그림이나 조각 공예 등 조형물로 동양 전역에서 유행하였다. 그런데 이 거룩한 수명 신상도 도깨비 나라로 이민 와서는 한낱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머리를 몸집보다 더 길게 그려 장생(長生)을 표시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또 남근형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말이다.

  장생(長生)을 상징하는 미술에서 가장 해학성 짙은 것은 거북미술로 보인다. 무엇보다 남근(男根)의 머리를 귀두(龜頭)라고 부르고 있으니 그와 병행해서 웃음의 거북 미술이 병행될 것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이다. 거북이 빗장의 귀두는 두말할 것도 없고 돌거북 조각에서도 보다 규모가 큰 남근 미술이 발견된다. 그런가 하면 신구(神龜) 미술에 있어서는 의인화(擬人化) 된 걸작그림이 가끔 나타나서 일반적으로 빈약한 거북 그림의 허점을 때워주기도 한다.

  복(福)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으로는 약리도(躍鯉圖)를 들고 싶다. 리변성용(鯉變成龍)의 고사(故事)에 나오는 그림인데 잉어가 뛰어올라 용이 된다 하여 아들 꿈을 뜻하기도 하고 입신출세(立身出世)의 등용관(登龍觀)을 뜻하기도 하는 또 하나의 거룩한 민화 화제다. 약리상(躍鯉像)은 그림 뿐 아니라 연적, 자물쇠 같은 공예품에도 흔히 쓰여지는 유행물이다. 그런데 약리도 중에는 그야말로 사람을 죽도록 웃기는 걸작이 가끔 나타난다. 용문(龍門) 폭포 밑에서 수십 마리의 잉어가 저마다 용이 되겠다고 뛰어오르는 약리 올림픽 그림이 그것이다. 출세에 미친 잉어들이 저마다 상반신을 물위로 쳐 올리고 있는데 한결같이 아랫배를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죽은 물고기인 것이다. 한쪽에서 올림픽에 나갈 생각이 없는 막고기 두 마리가 물고기 모습을 제대로 갖추고 얼빠진 놈들을 비웃고 있다. 자세히 보면 또 한 번 아차 하고 놀라게 된다. 뛰어오르는 잉어 머리가 모조리 남근형으로 그려진 것 아닌가.  

  이번엔 용(龍) 미술을 잠시 들여다보자. 용은 우신(雨神)으로, 수신(水神)으로, 사신(四神)으로, 사령(四靈)의 하나로, 또한 하늘의 상징으로 동양 민속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용은 그림이나, 조각이나, 자수나, 판화나, 각종 공예(工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 때 중국 황제가 용 그림의 발가락 수에 대한 규정을 내린 적이 있었다. 중국 황제만이 다섯 발가락의 용 그림을 가질 수 있다는 괴상한 법칙이었지만 이웃 나라는 모두 그 법을 지켜 네 개 아니면 세 개의 발가락만을 그렸다. 그런데 우리 민화 속에서는 다섯 발가락의 용 그림이 얼마든지 나오고 때로는 일곱 발가락의 용까지 나타난다. 우리의 용 미술은 서민들의 거침없는 기백과 해학이 담겨 있는 위대한 민중 예술의 일품인 것이다.

  용과 한 쌍이 되는 영물로 봉(鳳)이 등장한다. 봉도 사령(四靈)의 하나이다. 백조(百鳥)의 왕(王) 같은 존재이며 길상의 상징으로 동양 사회에 군림하고 있다. 그런 만큼 미술에 나타나는 봉의 모습을 두고 웃음거리의 대상을 삼기는 다소 힘이 든다.  
  그런데 우리는 봉이(鳳伊) 김선달(金先達)이 잘 생긴 수탉을 봉(鳳)으로 팔아먹는 웃음거리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수탉으로 하여금 봉(鳳) 노릇 하게 하는데서 해학이 생겨나는 모양이니 수탉 그림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다. ‘봉 같이 생긴 수탉 그림’을 구하는 한동안 골동상 거리에 묘한 바람을 일으켰다. 가설은 적중했다. 주문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해 수탉 그림도 많았으나 봉 같은 수탉그림도 상당수 모아졌다. 생각해 보면 수탉은 시계조(時計鳥)라는 중대한 사명을 띄고 태어난 영조(靈鳥)로서 새벽이면 게으른 인간을 깨워주고 귀신을 쫓는 일까지 맡아왔다. 봉은 관념상의 영조이며 그림 속의 새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보면 우리 조상들이 수탉을 천계(天鷄)로 여겨 그것을 봉과 같이 그린 것은 너무나 지당한 일이어서 놀라울 뿐이다. 잉어를 용으로 여기고 닭을 봉으로 여긴다면 용봉각(龍鳳閣) 세워 계리숭배(鷄鯉崇拜)의 신당으로 삼을 만도 한 일이다.

  그런데 한편에선 잉어와 닭을 잡아 국을 끓여 먹으면서 그것을 용봉탕(龍鳳湯)이라 부르니 또 한 번 웃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우공숭배(牛公崇拜) 때문에 소인구(牛人口)가 늘어나 쩔쩔매는 족속과는 판이하게 다른 문화족임을 입증해 주기도 한다. 이와 같은 사례는 신구사상(神拘思想)에서도 되풀이된다. 개도 사람을 보호하라는 특명을 받고 태어난 영수(靈獸)인고로 한국 사람은 신구부(神拘符) 부적까지 만들어 갖고 다닌다. 그러나 5, 6월 삼복 더위에는 즐겨 황모보신탕(黃毛補身湯)을 먹으니 어찌 웃음을 참겠는가.

  궁극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태어난 소박한 우리 민중미술을 살펴본 결과를 종합하면, 가장 신성한 대상이 가장 흉측한 대상과 일치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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