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소설은 언제 읽어도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위선이나 불의에 대항하여 정의를 세우면서 인간성을 옹호하고 정신을 이끄는 따위는 다음 이야기입니다. 잔잔한 물결처럼 다가와 가슴을 파고드는 반취 이기윤의 소설들에는 독특한 향기가 있습니다.

단편
2022.07.03 12:51

계약서 없는 사업

조회 수 25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기업소설

 

 

1

 

물류가 나의 길이다. 라는 신념에서 40년간 물류(物流)라는 외길을 걸었습니다.”

한국파레트풀() 서병윤 회장의 말이다. 그의 신념이 얼마나 굳은가는 物流之道라는 네 글자가 들어있는 빛바랜 액자가 말해준다. 그의 사무실에 걸려있는데, 그는 그 액자가 자신에게 있어 가장 가치 있는 자산 제 1호라고 스스럼없이 호언하며 무덤까지 갖고 가겠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 물류는 은혜이자 구원인 동시에 삶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의 산업구조가 변화하면서 물류가 태동하던 1980년대에 남보다 먼저 물류의 중요성을 발견하여 선각자의 길을 걸었다.

물류는 물적유통(物的流通)을 줄인 말이다. 일본에서 먼저 물류라고 했는데 그렇다고 이 용어가 우리에게 일본 것일 수는 없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나 붙어 다니는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영어권에서는 피지컬 디스트리뷰션(Physical Distribution)이라 했다. ‘물품의 시간적 가치와 공간적 가치를 창출하는 제반 활동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써 왔는데 근래 와서는 로지스틱스(Logistics)로 바뀌었다.

로지스틱스는 군사용어이다. 전장의 선두에서 싸우는 군사들에게 식량과 물, 무기와 탄약 및 기타 장비들을 조달하는 병참용어였다. 그것이 일반용어화 된 것은 현대에서 진행되는 물류의 과정이나 경쟁의 모양이 전쟁을 방불케 하기 때문이다. 전쟁의 승패가 병참으로 판가름 나듯, 현대의 기업이나 경제활동은 물류 경영으로 좌우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현대사회에서 진행되는 물류의 과정은 장비와 물자의 소요를 판단하고 생산, 조달, 보관, 수송 등 모든 자원 경영을 산업전쟁 식으로 관리하기 때문에 Logistics에 가까운 개념으로 발전했고, 갈수록 치열해지면서 그 범위가 확장되고 있다.

 

지금은 그렇지만 서병윤이 사업을 시작할 당시는 국내에서 물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이웃 일본이 물류라는 용어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그 중요성에 대한 연구 홍보와 시스템 개발에 국가적 역량을 집중하는 분위기여서 우리 정부나 학계, 기업이 모두 주시는 하고 있었다. 조만간 국내에서도 물류산업이 태동할 조짐은 있었던 것인데, 그러한 때에 서병윤이 한 발 앞서 물류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나의 길로 삼았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서병윤은 말한다.

앞으로도 살아있는 동안 오로지 물류의 길만을 걷겠다는 것이 나 자신과의 약속입니다. 원하는 대로 된다면 다시 태어나도 물류의 길을 걸을 겁니다.”

물류가 천직으로 여겨지셔서 그렇습니까?”

그런 느낌도 있지만 그 보다는 사업이 재미가 있습니다.”

열정이 있으셔서 그런 거겠죠. 그런데 어떤 점에 특히 재미를 느끼시나요?”

하하하하. 계약서가 없는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입니까? 이렇게나 규모 있는 사업에 계약서가 없단 말입니까?”

없습니다. 우리 회사에는 계약서라는 게 존재하지 않아요.”

한국파렛트풀()의 매출액은 2018년 말 기준 4천억. 2019년엔 45백억을 목표로 하고 있다. 대졸 사원만 600, 전국의 물류거점(지점)에서 용역으로 일하는 현장인력은 3500명이다. 회사 자산으로 각양각색 전국의 15만 개 회사가 렌탈(Rental)해서 물적유통에 사용되고 있는 파렛트는 15백만 개, 바늘과 실처럼 파렛트 사업에 없어서는 안 되는 지게차도 6천 대나 임대로 돌리고 있다. 우리나라 물류를 선도하는 최대 기업임은 물론, 규모나 외형에서 우리보다 물류 선진국인 일본을 누르고 아시아에서 최대요, G2로 부상한 중국의 물류를 선도하고 있는 기업이다. 그런데 계약서 한 장 없는 사업이라니?

서 회장은 빙긋 웃는다.

맞아요. 우리 회사는 계약서라는 걸 쓰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재미가 있다는 말이지요.”

……?”

 

2

 

서울대 농대를 졸업한 서병윤은 콤바인이나 트랙터 등 농업용 장비 개발에 참여할 수 있는 직장을 원했다. 당시는 작은 공장들밖에 없었다. 1977년의 어느 날 대우그룹이 대우중공업이란 이름으로 엔지니어 파트 사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응시해 합격했다. 김우중 회장의 대우그룹이 신진자동차와 한국기계를 인수해 대우중공업으로 사명을 바꾸고 사업 확대를 도모하던 때였다.

대우중공업에서 서병윤이 처음 배치된 곳은 산업차량본부 포크리프트(Fork lift) 사업팀이었고 담당은 조립부서였다. 무거운 하물을 들어 올린 채 운반하는 기계가 포크리프인데 당시 생산하던 주종은 거대한 원목이나 철강 등 중량이 무거워서 인력으로 다루기 어려운 하물을 대상으로 하는 중장비 중심이었다. 부품의 대부분을 일본에서 수입해 조립 판매하는 것으로 생산 규모는 1년에 100대 정도였다.

현황을 파악한 김우중 회장은 일 년에 고작 100대라니, 그걸 사업이라고 하겠냐 하면서 한 달에 100대씩 조립해서 팔라고 임무를 주었고, 제휴 선이었던 일본의 고마쓰(小松)사가 잘 아는 회사라며 직접 전화를 해 한 달에 100대씩 조립할 부품을 보내라고 아예 주문까지 해버렸다.

조립부서도 영업부서도 비상이 걸렸다. 회사가 넘어오면서 새로 구성된 팀이기에 시장을 모르므로 이견을 달 지식도 없는 때였다. 어떻게든 맡겨진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각오로 모두가 힘을 모으기로 했다. 생산부장을 중심으로 팀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중지를 모으는 데 포크리프트라는 이름부터가 낯서니 이름부터 바꾸자는 얘기가 나왔다.

자료를 보니까 포크리프트는 1920년대 미국에서 개발했네요,”

미국이 원조겠지. 그래서 온 세계가 다 포크리프트라고 부르는 거고.”

그때 서병윤은 지게를 떠올렸다.

나는 포크리프트를 보면 자꾸 지게가 연상돼요.”

지게를 아는 사람이 포크리프트를 보면 그 원리나 생김새가 같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앞쪽에 2단으로 신축하는 수직 마스트가 있고, 이에 맞물린 좌우 2개의 포크가 있어 하물을 운반할 때 밑에 밀어 넣고 들어 올리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포크를 앞쪽으로 6도 뒤쪽으로 12도까지 경사시킬 수 있는 것도 지게 작대기 기능을 연상하게 했다. 생산부장이 눈을 번쩍 떴다. 그도 농촌 출신이었다.

지게? 과연 그렇군.하하, 마침 생각나서 하는 말인데, 여러분 지게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선조들의 지혜의 산물인 거 알아?”

그래요?”

회의에 참석한 모두가 신기해했다.

지게는 세계 어떤 민족에게도 없는 우리 민족은 독창적인 발명품이에요. 워싱턴에 있는 스미소니언박물관에 가면 인류문명발달관이 있는데 그 입구에 인류문명상 빛나는 기술 개발 품목이 세계전도 위에 해당 민족과 함께 표시되어 있어요. 거기 한반도 위에 보면 자랑스럽게 지게 그림이 있어요.”

그렇군요. 새롭게 알았습니다.”

물론이지. 그러니 우리가 지게차라고 이름 붙이면 그 이름 역시 고유한 게 될 거야.”

그렇다면 차제에 우리가 나서서 지게차로 고치도록 하죠. 얼마나 친숙한 이름입니까. 그러면 영업도 더 잘될 것 같아요.”

.”그때 뒤늦게 영업사원 한 명이 말했다. “지게차 하니까, 대구 공군비행장에 갔을 때 작은 포크리프트를 지게차라고 부른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아요. 이미 지게차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 거 같아요.”

그 자신은 도시 출신이어서 지게를 본 기억이 없어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고 했다. 생산부장이 정리했다.

그래요? 그렇다면 지게차라는 이름이 우리 작품이란 주장은 안 되겠군. 어쨌든 우린 큰 거, 작은 거 구분 없이 모두를 지게차로 통일해 부르는 걸로 시도해 봅시다. 이름이 부르기 쉽고 제품을 금세 알 수 있어야 영업도 잘 되는 거니까. 내일 정식으로 상부에 품의를 해볼게요.”

상부에선 환영이었다. 그렇게 지게차로 이름을 바꾸고 영업에 나섰는데 신기하게도 한 달에 100대가 재고 없이 다 팔려나갔다. 자세를 고치고 마음가짐을 달리하는 것으로 사업이 순식간에 10배 확장된 것이다. 회사는 당연히 생산설비와 생산량을 늘려나갔다. 그래도 제 시간에 납품을 못해 절절맬 정도로 주문이 밀렸다. 3년차에는 더 실적이 좋았다. 김우중 회장으로부터 포상이 내려졌다. 그와 함께 서병윤은 기술개발부로 옮겨졌다.

 

3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3년을 잘 팔리던 지게차가 이듬해부터는 팔리지 않았다. 대형 중량물 하역작업 현장에 어느 정도 지게차가 보급된 것 같았다. 잘 팔린다 하여 생산능력은 연간 1,000대로 늘렸는데 거꾸로 판매량은 500대 이하로 떨어지니 마당에 재고가 쌓이는 등 부진의 늪에 빠졌다. 회사는 여전히 작은 지게차에는 관심이 없고 중량급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다급해진 영업부서는 지게차 판매 확대를 위한 방안 마련에 나섰다. 현장의 엔지니어들로 영업부서에 엔지니어링 팀을 구성하고, 기술개발부서에서 근무하던 서병윤을 그 팀장으로 발령했다.

성격이 소극적인데다 조립이나 연구개발실 근무 경험밖에 없는 그에게 그것은 청천벽력 같은 것이어서 회사에 재고를 요청했다. 회사는 오히려 서병윤을 설득했다. 인사 담당 임원이 말했다.

자네를 지켜본 윗분들의 결정이니 한 번 맡아보게나. 지원이 필요하면 품의를 하게. 한두 해 지나도 성과가 없으면 그때 가서 재고하면 되지 않겠나.”

한시적 파견으로 알고 그대로 임무를 맡아보라는 답이었다.

그는 지게차 시장개척 업무에 착수했다. 이미 어느 정도 보급된 대형 중량물 하역작업 현장은 피하고 차 순위 작업현장 방문 연구에 나섰다. 추곡수매장, 양곡창고, 연탄공장, 벽돌공장 등 물동량이 있어 지게차가 필요하다 싶은 곳이면 좌충우돌 찾아다녔고 시범도 보였다. 곳곳에서 시행착오를 경험하기도 했다. 추곡수매 현장에서 시범작업을 하다 하역인부들의 거센 항의에 직면하기도 했고, 연탄의 경우 기계식 파렛타이저까지 개발했으나 유통과정의 낙후성 때문에 연결 작업에 실패하여 낭패를 경험하기도 했다.

지게차 시장을 어떻게 개척해야 하나?

궁리 끝에 선진국의 지게차 사용현장에 대한 연구를 하자는 방안이 나왔다. 우선 떠오르는 것은 일본이었다. 1980년 기준 우리나라 시장 규모는 연간 1천대 정도였으나 일본은 우리의 100배인 10만대를 생산, 50%는 수출하는 규모였으므로 그런 일본을 방문, 지게차 사용현장을 돌아보고 연구 분석하면 돌파구가 찾아질 것으로 판단되었다.

서병윤은 품의를 올려, 당시 대우중공업의 제휴 선이었던 고마쓰(小松)사 도움으로 일본 산업계의 지게차 사용현장을 3주간 견문하고 분석하였다. 회사에서는 일단 혼자 갔다 와서 보고하라고 했다.

일본에 간 서병윤은 농촌지역의 비료, 양곡, 농산물 재배농가들과 공단지역의 식품 가공회사, 건축자재공장, 자동차, 전자공장 등 생산거점은 물론 유통 소비과정인 종이, 출판물, 항만 부두, 철도역, 창고 등 지게차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찾아다녔다. 다양한 일본의 지게차 사용현장을 방문하여 얻을 수 있었던 결론은 이용방법이 국내와는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우리의 사용방법은 인력으로는 다룰 수 없는 중량 있는 하물을 육중한 지게차를 이용, 포크로 직접 들어 올려 원하는 곳으로 운반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일본은 작은 지게차가 주종이었고 포크에 파렛트를 끼워 사용하고 있었는데, 설탕, 밀가루, 양곡, 종이, 책 등등 공산품, 농산품 가릴 것 없이 모든 인력으로 다룰 수 있는 하물을 상자나 포대에 담아 파렛트 위에 2톤 쯤 될 정도로 다량 올려 운반하고 있었다. 단순히 생산지에서 창고나 출고지로만 가는 것이 아니라 파렛트에 실려진 상태 그대로 전국 각지 최종 소비처를 도착지로 운반되고, 수출품의 경우는 선박이나 항공기에까지 그대로 실려지고 있었다. 파렛트가 있어 열 사람이 해야 할 운반 일이 한 사람으로도 충분히 관리되고 있었다. 서병윤에겐 놀라운 발견이었다.

지게차는 2톤 이하의 짐을 다룰 수 있는 작은 것. 그리고 그 지게차 활용을 위해서는 바늘에 실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파렛트가 필수품?

파렛트 시스템의 발견은 지게차 마케팅의 돌파구를 갈망하는 서병윤에게 그야말로 콜럼버스의 달걀이요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였다.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현해탄 위에 파렛트 무지개가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4

 

귀국 후 그는 출장보고서에 파렛트시스템을 지게차의 마케팅 전략으로 제출했고, 임원을 대상으로 브리핑하는 시간도 가졌다.

- 우리 회사의 지게차 사업은 착수 이래 2, 3년간 급신장하는 것 같았으나 이후 판매가 부진합니다. 초창기에 급신장한 이유는 그동안 지게차가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아 대부분 인력작업에 의존했습니다. 우리 회사에서 지게차를 생산 보급하니 우선 인력으로는 불가능한 중량물 작업장을 중심으로 다량 수요가 채워졌던 것인데, 이렇게 형성된 시장이 연간 1천 대 수준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기본 수요가 충족되었고 1979년의 경우 경기마저 퇴조하니 투자 위축 및 물동량 감소로 지게차 판매가 부진했던 것입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일본의 시장을 돌아본 즉 두 가지에 눈을 떠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 하나는 소형기종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경우 1, 2톤급 소형지게차가 90%를 차지합니다. 3톤급 이상은 10%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그 반대입니다. 지게차 사용 패턴이 인력으로는 이동이 불가능한 중량물 작업장에서만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경우는 크고 작은 작업장에서 수많은 1톤급 지게차들이 인력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를 따라가야 합니다. 아니 따라가야 될 것만 같습니다. 1톤급 엔진 지게차를 조기 개발하여 인력작업을 지게차 작업화로 전환하면서 아울러 지게차 수요를 창출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파렛트 사용의 시스템화 추진을 반드시 병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규격도 표준화가 되어야 합니다. 파렛트(pallet)는 화물 운반용 받침입니다. 물품을 파렛트에 담고, 그래서 파렛트화 된 화물에 뛰어난 운반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곧 지게차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파렛트시스템이 일반화된다면 지게차 시장은 놀라운 속도록 성장할 것입니다.

 

서병윤의 일본 출장 보고에 대한 임원진은 반응은 뜨겁고 고무적이었다. 유닛 로드(unit load) 형 소형 지계차를 속히 개발하여 사람이 일일이 나르던 짐을 지게차 작업으로 전환토록 하자는 발상은 그 전망이 땅 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보였다. 임원진의 질문이 이어졌다.

일본의 소형지게차 생산 규모를 아는가?”

, 년산 10만대 정도인데 50%는 수출하고 50%는 내수인데 재고가 없답니다.”

서 대리 생각에 우리가 생산한다면 연산 몇 대를 출발점으로 봐야 할까?”

서병윤의 직급은 당시 대리였다. 사업계획은 나중에 경영 차원에서 만들어지겠지만 일단은 서병윤의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제 소견으로는 연산 15,000대 정도는 먹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임원들은 서로를 보았다. 그것도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전망이기 때문이었다. 영업이사가 물었다.

소형지게차는 경영차원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게 좋을 것 같구먼. 그런데 파렛트시스템은 문제가 많은 것 같은데파렛트가 있으므로 물자를 쉽게 대량으로 유통할 수 있으므로 지게차 수요가 많아지고 용도가 확실해진다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파렛트 관리나 제작비용은 누구 몫일까? 하역이나 운송, 보관 따위에 들어가는 용역비용은 기업이든 판매자든 수익자의 몫일 수 있지만 파렛트 자체의 제작비용이나 관리 말이네. 그것이 그냥 일회용 소모품일수는 없지 않은가?”

예리한 질문이었다. 서병윤도 그 부분에 의문을 생겨 일본 견문 때 물어본 적이 있지만 명쾌한 답을 듣지 못했었다. 서병윤은 일본에서 들은 대로 말했다.

파렛트시스템은 단순히 우리 회사나 지게차생산 판매 차원을 떠나 국가 차원의 경제활동이라는 관점에서 논해야 한다고 사료됩니다. 물자유통을 국가가 지원하는 개념이 되어야겠죠. 유통이란 상품이 생산되어 소비자에게 공급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생산과 소비를 두 축으로 여겼는데, 제가 일본 출장에서 보고 들은 것은 그 두 축을 연결하는 유통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의 이동(移動), 즉 물적유통(物的流通)을 일본에서는 물류(物類)라고 줄여서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 물류비용이 상품가격의 절반을 차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자료를 보면 GNP10%가 물류비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파렛트시스템 문제는 정부 차원에서 공동 이용제도를 도입하는 구조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허허허허. 거창한 얘기로군. 현재의 우리 정부에서 그런 일을 추진해 줄 사람이 있을까? 십자가를 지는 꼴일 텐데.”

전무이사였다. 전무는 그쯤에서 상황을 종료했다.

오늘 좋은 시간이었어요. 소형지게차 생산계획은 곧 실행에 옮기도록 합시다. 파렛트시스템에 대해서는 서 과장이 좀 더 연구해보도록 하세요.”

5

 

19801월 그는, 일본에서 물류와 파렛트풀 시스템을 어떻게 추진해 왔는가를 보다 깊이 있게 연구하기 위해 일본을 다시 방문했다. 이번에는 한 달 일정이었다. 파렛트 업무를 관장하고 있는 일본의 상공회의소, 운수성, 통산성, 물류협회, 파렛트풀회사, 물류연구기관, 생산성본부, 능률협회 등 30여 곳을 방문하였다. 20년 전인 1960, 일본이 유럽에서 물류와 파렛트풀 제도를 도입할 때의 자료를 입수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두 번째 출장에서 서병윤은 일본 물류의 선각자라고 할 수 있는 세 사람을 만났다. 첫째는 당시 하역연구소의 히라하라 스나오(平原 直) 소장이요, 둘째는 일본파렛트렌탈()의 사까이 겐지(坂井 健二)사장, 셋째는 일본물류관리협의회의 이나스까 모도끼(稻束 原樹) 사무국장인데, 그중 히라하라 소장은 선각자 중에서도 개척자적 선구자였는데 출생지가 평양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압록강에 건설된 수풍발전소 소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조선을 아버지의 나라로 여기며 한국인을 형제처럼 대했다.

아버지는 발전소 소장이었지만 그는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본통운의 하역작업부장으로 근무했다. 그러면서 수많은 하역인부들이 중노동의 고통으로 등뼈가 구부러지고 어깨뼈가 튀어나오고, 혹이 생기는 등 인간에게 너무 가혹한 작업현장을 지켜본 산 증인이었다.

종전 후 그는 인간 존중이라는 큰 뜻을 세우고 하역연구소를 설립, 하역과 기계라는 물류전문지를 발간하며 일본의 물류를 기계화, 자동화하는 운동에 발 벗고 나섰다. 전국을 돌며 강연을 하고, 물류장비를 개발, 전시회도 개최하고, 일본정부에 파렛트풀(Pallet pool) 제도 도입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 파렛트협회 등 물류관련단체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는 하역과 기계라는 월간지를 통해 세계의 물류발달과정을 소상히 소개했고, 미국과 유럽에서 발전하고 있는 물류 산업을 뉴스로 다뤘으며 국제적인 물류 전문가들과 교류를 하여 마침내 일본이 물류 선진국의 대열에 오를 수 있도록 한 공로자이기도 했다.

서병윤은 히라하라 소장을 만난 이후, 그의 간행물을 모조리 구입했다. 그것을 탐독하는 것만으로도 물류의 역사와 현재 그리고 시장과 전망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내친김에 서병윤은 상부에 품의하여 1개월간 스위스, 영국, 프랑스 3개국을 돌며 유럽의 물류도 보았다. 베른에 있는 스위스 철도청(SBB)을 방문해서 유럽 18개국이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는 교환방식 파렛트풀 시스템을 상세히 돌아본 것은 매우 큰 수확이었다. 영국의 물류연구소 윌리엄스(Williams) 소장은 연구소 활동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해주면서 낙후된 한국의 물류 추진방안을 제시해주기도 했지만 영국 파렛트풀회사(GKN CNEP) 견학은 로열티를 30만 불이나 요구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물류전시회를 참관하여 세계 각국의 물류장비와 자료들을 접할 수 있었다. 일본에 이어 유럽을 돌아본 서병윤은 본격적으로 물류세계에 눈을 뜰 수 있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서병윤은 흥분에 겨운 눈으로 지구를 내려다보았다. 물류가 새 시대의 금광이라는 확신에 몸이 부르르 떨리기까지 하는 그였다.

여기에 나의 길이 있었구나. 이것이 나의 길

귀국 후 미국의 자료까지 구해 지식을 보완한 그는 1980년 말, 국내에서는 최초로 물류추진계획서를 작성했다.

 

6

 

회사는 유닛 로드(unit load) 형 지게차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이 소형지게차 판매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파렛트풀시스템이 널리 보편화되어야 하고, 파렛트풀 제도를 정착시키려면 보다 큰 시각에서 물류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본과 유럽을 돌아본 서병윤의 생각이었다. 생각은 신념이 되고 이어 인생의 목표로 서병윤의 가슴에 새겨졌다.

그의 뜻은 마침내 회사를 움직였다. 대우중공업은 회사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할 테니 우리나라 물류의 중심역할을 할 물류협회를 결성해 보라고 임무를 주었다. 그는 열정을 쏟아 동분서주했다. 정부는 물론, 각급 경제단체와 연구기관, 대학을 돌며 설득하고 업계에 호소했다.

그러나 그것이 1981~1984년의 노력이었다. 전두환의 제5공화국이 들어서서 언론만이 아니라 사회 모든 분야에서 유사 협회들을 통폐합하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물류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다시피 해서 무엇인가를 새로 만드는 일엔 호응을 얻어낼 수가 없었다.

파렛트풀 제도도 정부 주도로 추진되도록 관련기관을 수도 없이 찾아가 설득하였으나 역시 역부족이었다. 그러는 사이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3년이 지나도 성과를 내지 못하자 회사 측에서 관심이 적어지고, 소형지게차 판매도 목표에 훨씬 못 미치자 서병윤은 그만 찬밥 신세가 되고 말았다. 회사는 아예 그를 자재과장이라는 한직으로 발령내버리고 말았다. 사실상 회사 차원에서의 물류 프로젝트(project)를 접은 것이다.

나이 36세에 처음 맛보는 엄청난 좌절이었다. 서병윤은 대우중공업이라는 회사의 울타리 안에서 더 이상 추진이 불가능하게 되자 이대로 포기해야 되는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과 유럽의 현장을 두루 견학하면서 여기 나의 길이 있음을 발견했고, 그 발견이 신념이 되고 인생의 목표라며 가슴에 새겼는데이렇게 간단히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인생을 걸고 물류의 길을 가기로 마음 굳혔다면 회사를 사직하고라도 계속 추진하는 뜨거운 젊음과 진정한 용기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두려움과 안이함을 물리치는 용기가 정녕 나에게는 없는 것인가?

 

약한 마음이 수없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불확실한 장래에 내 한 몸을 던질 수는 있으나 가족까지 그쪽으로 끌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창업자금이 넉넉히 있는 것도 아니고

수없이 망설이고 고뇌하던 어느 날 무심히 영어 명어록 집을 보는데 그의 가슴을 울리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Where there is a will. there is a way! Time and tide wait for no man.”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평범한 나날이었다면 지나쳐 갈 문장이었지만 당시의 서병윤에게는 가슴에 불을 지르는 내용이었다. 그는 비장한 각오를 했다. 인생의 문제는 무언가 달라지기를 바라는 데서 시작한다. 문제를 안고 씨름하거나 문제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할수록 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느껴지며 스트레스도 가중된다. 문제를 딛고 올라서야 한다.

이윽고 그는 1984825일 회사에 사표를 냈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91일 서울 용산 갈월동에 소재한 한성빌딩의 조그마한 방에 한국물류관리연구원이란 간판을 걸고 첫 출근을 했다. 한국의 물류를 위하여 物流之道라는 좌우명을 내걸고 홀로서기를 한 것이다. 한국물류연구원장으로서 활동하기 위한 사업계획을 수립하고 뜻을 같이 할 분들을 찾아 나섰다.

할 일은 넘쳤다. 회원모집부터 시작해서 물류연구회 구성, 물류전국대회 개최, 물류설명회 및 세미나 개최, 해외 물류시찰, 물류전시회 개최, 물류컨설팅 및 엔지니어링 실시, 해외 물류협회나 연구기관과의 제휴, 물류정보지 정기간행 및 관련도서발행, 물류자료수집, 국내물류 실태조사 등등모두 당장 추진해야 할 사업이었다. 그러나 내용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의 창업자금은 대우중공업에서 퇴직금으로 받은 800만원이 전부였다.

 

7

 

한 시도 한눈 팔 여유가 없는 나날의 계속이었다. 물류시대가 곧 도래할 것을 예견하고 뜻을 같이할 각 분야 전문위원을 찾아 나섰다. 물류의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은 시기였기에 결코 쉽지 않았지만 믿음과 열정을 가지고 지성을 다하니 한 분 한 분 동참하겠다는 분이 만나졌다.

연구원을 총괄하는 회장에 인하대학교 경상대 학장 안태호 박사 조직과 회계분야는 한국경제개발협회 전만술 부소장 유닛로드분야는 전국경제인연합회 국제 경영원 윤문규 연구원 포장분야는 월간 포장산업의 하진필 발행인 운반 하역 분야는 한국과학기술원 생산기술연실장인 유헌수 박사 수송분야는 인하대학교 임호규 박사 창고 보관분야는 태평양화학 김정환 상품유통본부장 자재관리분야는 삼성전자 신윤균 구매기획과장 유통가공분야는 해외유통연구소 임영웅 소장 정보 분야는 IBM Korea의 허진욱 과장 등 전문가들이 특별한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단지 물류의 미래를 보며 뭉친 것이다. 감사는 유일의 장억근 사장 원장은 서병윤이 맡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12인이 한국 최초의 물류 단체를 만드는 개척자가 되었다. (직함은 19849월 기준)

 

한국물류연구원의 기본적인 틀을 만든 서병윤은 대우중공업 재직 시절 일본 출장에서 만난 일본 물류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일본물류협의회의 이나스까 모도끼 사무국장이 기다렸다는 듯 답장을 보내왔는데 한국물류연구원과 일본물류관리협의회가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물류단체로서 업무제휴를 하자는 내용이었다, 상호간에 국가를 대표하는 전문단체로서 정보와 인재의 교류, 물류연수단 파견, 물류 심포지엄 개최 시 강사 파견, 기타 물류 자료 교환 등을 공유하고 나아가 향후 양국이 주도하여 아시아물류회의체를 결성하자는 내용이었다. 서병윤은 쾌재를 불렀다. 물류연구원을 결성하자마자 국제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동기가 마련된 것이었다.

물류에 있어서 한국은 태동기였지만 일본은 물류선진국 소리를 들을만한 수준이었기에 우리는 배워야 했다. 일본에서 열리는 물류관련 국제 심포지엄이나 회의에 한국대표단을 만들어 참가하기도 했고, 그들의 지도편달 하에 국내에서 물류대회나 세미나를 개최했다. 행사를 할 때마다 일본의 물류전문가들이 대거 참가해 힘이 되어주었다. 한편에서는 물류연수단을 만들어 여러 차례 일본의 선진 물류현장을 견학하는 프로그램도 진행한 결과 물류에 대해 깜깜했던 국내 산업계가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직접 뛰어다니는 사람이나 느끼는 정도였기에 양에 찰 리 없었다.

서병윤에겐물류의 중요성을 산업계에 알려야 하는 과제가 여전히 고민거리였다. 자료를 만들어 배포하고 이곳저곳 방문해 설명을 해 보았으나 그런 식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물류전문잡지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자금도 없었고 당시의 분위기로는 발행허가를 얻기도 어려웠다.

숙고 끝에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물류분야의 중요한 내용과 국내외 소식을 모아 무가지로 물류뉴스를 만들어 각 기업의 물류 관리자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한 번 만들 때 1,000부를 인쇄해 그렇게 보내 보았다. 발송을 하면서 주요 신문사 편집국장 앞으로도 보냈다. 국내에 물류전문지도 없고, 신문사에 물류를 전당하는 부서나 기자도 없던 시기였기에 편집국장 앞으로 보낸 것이다.

 

그것이 기대하지 못했던 일을 만들어 냈다. 1985323일 아침, 사무실에 출근하여 한국경제신문을 펼치니, 서병윤이 만들어 보내준물류뉴스의 기사가 물류관리 새바람이라는 제목으로 크게 보도 되어 있었던 것이다. 간절하게 바라던 물류의 매스컴에의 첫 등장이었다.

서병윤이 감격에 겨워 몇 번이고 보고 또 보고 있는데 한국경제신문사의 서광식 차장이 직접 찾아왔다. 물류뉴스를 보고 우리 산업계에 필요한 분야라고 생각되어 원고를 청탁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큰 행운이었다. 물류연구원을 설립한 이후 6개월간 어떤 방법으로 물류의 중요성을 알려야 할 것인가 방법을 못 찾고 고심하던 서병윤에게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지난 5년 여 자료를 축적하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로 물류 특집기사를 연재해 나갔다. 기사가 나갈 때마다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뜨거웠다. 한국경제신문사와 그의 사무실에 물류에 관한 문의가 연일 쇄도했다. 특집기사를 읽고 물류가 중요하다는 사실과, 물류를 어떻게 추진해야 하는가에 눈을 떴다는 격려 전화도 대기업 최고경영자와 물류관리자들로부터 계속되었다.

6월에는 MBC-TV ‘여기는 MBC’팀에서 찾아와 물류 특집 방송을 도와달라고 했다. 서병윤은 재빨리 보도할 내용을 협의하고 물류 현장 몇 군데를 주선했다. 태평양화학과 OB맥주 물류센터의 파렛트 사용현장을 촬영했다. 서병윤은 난생 처음 TV에 출연하여 물류의 중요성을 온 세상에 알렸다.

신문과 방송을 통해 서병윤은 한국물류의 선각자로 크게 부각되었다. 그의 가족은 물론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축하해 주었다. 특집기사, 방송이 나가자 여기저기서 강연과 컨설팅 요청이 왔다. 서병윤은 그제야 보람을 느꼈다. 무엇보다 물류를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는 대서 보람을 느꼈다.

 

8

서병윤은 대학시절부터 좋은 자료처럼 훌륭한 파트너는 없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일본을 왕래하고 유럽의 물류 현장을 견학하면서 닥치는 대로 자료를 모았었다. 덕분에 경력이 적음에도 최고 전문가처럼 알찬 강연을 할 수 있었고 특집기사도 센세이션을 일으킬 정도로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강연을 요청하는 기관은 다양했다. 표준협회, 능률협회, 생산성본부, 대한상공회의소, 무역협회, 전경련때론 대학 강단에서도 했고 농수산물유통회사, 공무원연수원수원도 있었으며 때로는 물류현장의 작업자들을 모아놓고 역설하기도 했다.

연구원을 설립한 첫해에 80여 차례 강연을 한 것을 비롯, 이후 20년간 1천 회 강연을 기록했을 정도였다. 서병윤의 자신감은 날이 갈수록 굳건해졌다. 좋은 시작은 반드시 좋은 결말을 만든다는 신념 역시 더욱 굳어졌다. 그는 쉼 없이 일을 벌였다. 국제규모의 물류대회를 개최했고, 팀을 구성해 해외연수도 다녀오며 계몽활동을 펼쳤다. 연구원 개설 2년 차에는 컨설팅의 길도 열었다. 일본의 선례를 살펴 사단법인 한국물류협회도 창립했고 사단법인 한국파렛트풀협회 창립도 선도했다. 워낙 주제가 분명한데다 필연적으로 맞닥뜨려야 할 분야의 태동기인 탓인지 행사를 거듭할 때마다 참가자는 늘었고 반응은 뜨거워졌다.

 

그러나 내면은 힘들었다. 비용을 쓰기만 했지 수입은 적어 손가락만 빨고 지내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창업자금은 바닥이 난지 오래였다. 빈털터리 상태의 서병윤을 연명하게 해 주는 것은 신문 방송 덕분에 열린 컨설팅이었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었다.

서병윤은 한편에서 자신이 목적했던 파렛트풀 사업에 곤을 들였다. 대우중공업 차원에서 시도했다가 신임을 잃었고, 정부에 건의했으나 반응을 얻지 못했던 사업 그러나 나름 판단에 금맥(金脈)으로 확신했던 사업에 직접 도전한 것이다.

1985625일자 한국경제신문은 서병윤의 한국파렛트풀 주식회사 설립에 관한 내용을 1면 톱기사로 보도해 주었다. 파렛트풀시스템(Pallet pool system)이란 화물의 받침대인 파렛트를 표준규격으로 통일하여 기업들 간에 공동으로 이용하는 제도이다.

서병윤은 이미, 유럽에서는 1950년대 유럽경제공동체(EEC)를 결성할 때 무역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방안으로 파렛트 규격을 1,200mm×800mm로 표준화하고 각국의 철도청이 주관하여 교환방식으로 운영하는 제도를 마련, 시행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호주에서 2차 대전 중 미군이 병참수단으로 사용하던 파렛트를 활용하는 차원에서 표준파렛트에 의한 렌탈방식의 파렛트풀 제도를 국영기업으로 운영해오다가 1958년 민영화 한 것, 일본이 1966년부터 70년까지 5년간의 연구를 통해 유통근대화와 물류합리화를 위한 파렛트풀 제도를 채택, 중점 육성하기로 한 자료도 갖고 있었다. 추세가 이러했던 만큼 한국에 파렛트풀 시스템이 도입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서병윤의 한국파렛트풀() 설립이 크게 신문에 보도되자 일본 파렛트풀 회사(JPR)의 사까이 겐지(坂井健二) 전무로부터 제안 편지가 왔다. 1980년 일본방문 때에 남다른 인연을 맺은 세 사람 중 하나로 익히 아는 사이였다, 그는 서병윤에게, 한국 내에서 독자적으로 파렛트풀 사업을 착수하는 게 어렵다면 일본과 연대하여 한일 국제파렛트풀 사업을 먼저 착수, 운영하여 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서병윤에게는 행운의 연속 같은 반가운 제안이었다. 즉시 수락 의사를 보낸 서병윤은 한일 간 수출입 물동량을 조사하고 이용이 가능한 물동량을 분석하였으며 한일간 국제파렛트풀의 사업 타당성을 검토하는 등 공조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당시 일본은 미국에 이어 한국의 두 번째 교역국이어서 물동량이 전체의 10%에 해당하는 15백만 톤 에 달했다. 게다가 다행스럽게도 표준 파렛트가 1,100mm×1,100mm로 동일한 점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제안에 힘입어 파렛트 공동이용 사업에 착수한다면 사용자는 물류비용을 크게 절감하는 효과를 얻고, 서병윤은 큰 투자 없이 파렛트풀의 기초 시스템과 물량을 구축할 수 있게 되는 일이었다.

서병윤이 이러한 검토 자료를 가지고 동경의 일본파렛트렌탈()를 방문, 사까이 전무를 만난 것은 19855, 물류연구원 설립 1주년에 즈음한 때였다. 대우중공업 시절인 1980년에 수립한 한국 파렛트풀 주식회사 설립계획이 많은 우여곡절 끝에 결실을 보는 시점이기도 했다.

 

9

 

파렛트를 단순하게 말하면 화물의 깔판이다. 간단한 구조이고, 개당 몇 만원의 가치밖에 없는 하찮은 도구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않는 것과 같다. 파렛트는 한 장소에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물자가 이동하는 흐름을 따라 1톤씩 나누어 담아 옮기는 물류의 기본수단일 수 있기 때문이다. 1매 단위라면 보잘 것 없지만 상자 쌓기처럼 많은 수량이 서로 짝을 맞추고 오와 열을 갖춰 수요에 따라 이동하게 하면 그 기능의 효과는 눈덩이처럼 커지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규모 이상이라면 한 기업에서 수백 수 천 매의 파렛트를 사용할 수도 있다. 파렛트에 실린 물자가 생산 공장에서 소비지까지 전달되는 유통은 지게차에 의해 빠르고 간단하게 처리될 수 있다. 한 기업에서만의 유통도 아니다. 기업과 기업 간, 모 기업과 자회사간, 설탕포대가 과자회사로 가고 과자상자는 물류센터로, 물류센터에서는 도매상으로 가는 식으로 연관 기업과의 유통에 파렛트를 이용하면 물류 경영이 훨씬 효율적일 수 있는 것이다.

 

파렛트풀 시대의 개막!

서병윤이 1985102, 한국파렛트풀()의 출범을 알리는 현판을 걸면서 내건 슬로건이다. 우리나라 물류 선진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국가단위의 파렛트풀 시스템 구축이 바람직한데 국가가 무관심하니 서병윤이 그것을 하늘의 사명(使命)으로 여기고 기업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사명감이나 포부는 원대했고 열정은 뜨거웠지만 현실은 파렛트 200개로 출발하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200개라는 숫자는 웬만한 중소기업 한두 곳에서의 소화 량에도 부족할 만큼 적은 물량이었다.

어쨌든 그것 밖에 능력이 안 되니 200개의 파렛트를 업체에 빌려주는 것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자금이 만들어지는 대로 파렛트를 만들어 자산을 늘려갔지만 있는 수량은 전량 활용하자며 필요한 곳에 대여해 주었다.

그러자 당장 문제가 드러났다. 파렛트풀 사업은 일본이나 유럽에서처럼 물동량을 적재하여 출하시키는 방식이므로 최종도착지에서 화물이 내려진 빈 파렛트는 출발지로 회수되어 재사용되어야 그 효용성이 있는 것인데, 그 회수가 잘 안 되는 것이었다. 물류에 있어서 인식이 낙후된 당시의 국내 산업계는 파렛트를 공장이나 창고 따위 구내에서 사용하는 단순 깔판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게 보통이어서 특별히 관리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최종도착지에서 다른 용도로 사용하거나 유실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렇게 해서 생기는 손해를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회사에 이의를 제기하면 퉁명스런 답만 들려왔다.

빈 파렛트 회수는 당신들이 알아서 해야지, 우리가 회수까지 신경 써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10

 

파렛트를 자기 회사 자금으로 사서 관리할 회사는 없었다. 포장에 들어가는 비용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지만 그 포장된 제품이나 원료, 부자재를 운반할 때 밑판으로 사용되는 파렛트는 운송비의 일부로 여겼고, 따라서 특별히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회사가 없었던 것이다.

파렛트 제작비를 개당 3만원(1986년 기준)이라 할 때 대여 비는 11,000원 정도였다. 30일을 돌려야 원가가 나오고 그 이상 돌려야 이익이 나는데 10일이나 15일 돌아다니다가 없어지면 이만저만 손해가 아니었다. 파렛트풀 회사는 여기에 플러스알파로 운송비를 챙길 수 있어 수지를 맞추고, 파렛트풀을 공동 이용하는 회사들은 물류비를 직접 관리하는 것에 비해 5분지 1 내지 많게는 10분지 1 수준으로까지 낮출 수 있어 서로 이익인 것인데, 파렛트 관리가 되지 않으면 이런 계산이 다 무위가 되는 것이었다.

문제의 심각성을 발견한 서병윤은 영업 전략을 바꿔야 했다. 개별적으로 회사를 상대하지 않고 업계 단위로 영업하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서병윤은 우선 물류에 대해 강연을 했거나 컨설팅을 한 회사가 많은 석유화학업계의 12개 회사를 한 그룹으로 묶어 섭외를 시도했다. 금호케미칼, 대림산업, 대한유화공업, 산성종합화학, SK, LG화학, LG칼텍스정유, 제일모직, 한화석유화학, 호남석유화학, 현대석유화학, 효성 등 12개 회사를 대상으로 계약서 체결을 시도한 것이다.

석유화학업계 파렛트 공동이용제도 계약서제하의 내용 중 골자는 사용이 끝난 파렛트의 조기 회수를 책임져 달라는 것이었다. 임무를 다한 파렛트를 돌려주지 않고 타 용도로 계속 사용하거나, 파손되거나, 또는 외부로 유출시켜 재고가 부족할 시에는 변상하겠다는 약속을 해야 파렛트를 임차한다는, 어찌 보면 당연하고 일상적인 계약서였다.

그런데, 돌아다니며 담당자를 만나보니 선선히 아, 그래야죠.’ 하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주는 회사는 하나도 없었다. 수없이 찾아가 설득하고 도장을 받기까지 어떤 회사는 두 달이 걸렸고 어떤 회사는 5개월이나 걸렸다.

설득이 어려운 것은 금액이 적든 많든 파렛트 렌탈 비를 주고 거기에 운송비도 얹어주는 만큼 파렛트 회수 같은 관리는 직접 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견해였고, 손상되거나 분실된 파렛트에 대해 변상을 하라는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서병윤의 한국파렛트풀 시스템의 장점은 안전하고 간편하고 빠른데다 최소 5분지 1로 물류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선진시스템이었다. 그러나 한국 산업계의 물류에 대한 수준은 선진화의 자에도 진입하지 못한 단계였으므로 이해를 얻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결국 인식의 문제였다.

참으로 힘든 나날이 계속되었다. 강연이나 컨설팅이 먹혀들었지만 현장 진입의 문은 좀체 열리지가 않았다. 그래도 열어야 한다. 열릴 것이다. 하고 믿으며 서병윤은 지치지 않고 뛰어다녔다. 어쩌다 참지 목 할 상황에 처하면 대학시절 가슴에 간직한 모교 유달영 교수님의 시 한 편을 암송하곤 했다.

 

그대 아끼게나. 청춘을 / 이름 없는 들풀로 사라져버림도 / 영원히 빛나는 생명의 광영도 / 오직 젊음 시간의 쓰임새에 달렸거니 / 오늘도 뜨거운 가슴에 큰 뜻을 품고 / 푸른 하늘을 뉘우침 없이 살게나.

 

파렛트풀 회사를 만든 이후 적어도 5년은 수익이 없어 손가락 빨면서도 부지런히 설명하고 설득하는 작업을 통해 하나하나 거래회사를 늘려나갔다. 파렛트를 공동 이용하면 비용이 워낙 적게 들어가므로 거래를 끊는 일은 없지만, 싸면 싼 데로 더 적게 들일 궁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던 시절이어서 더 힘이 들었다. 뒷 자본 없는 그 힘든 시기를 지탱한 것은 여전히 컨설팅 덕분이었다.

5년 노력 끝에 그룹으로서는 처음으로 석유화학업계 12개 회사 중 11개 회사까지 계약서에 도장날인을 받는데 성공했다. 하나가 남았는데, 그런데 그 하나가 업계의 대장 격이었다. 담당자인 상무이사는 끝내 도장날인을 거부했다.

내 상식에서는 이런 계약서에 절대 회사 직인을 찍을 수 없소.”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설득이 안 되었다. 대장 회사의 도장을 꼭 받아야만 하는 서병윤은 난감했다. 문제의 상무이사와 절친한 대학선배가 있어 도와주겠다고 해 함께 만나기도 했는데, 그래도 상무는 요지부동이었다.

며칠을 뜬 눈으로 새우다시피 하며 고민하고 궁리하던 서병윤에게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올렸다. 그가 법보다 상식을 앞세우는 지식인이니 상식으로 해결해보자는 생각이었다.

 

오밤중에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은 서병윤은 서류를 다시 만들었다. 석유화학업계 파렛트 공동이용제도 계약서라는 제목을 석유화학업계 파렛트 공동이용제도 안내서로 부드럽게 고쳤다. “사용 완료된 파렛트는 손상 없이 즉시 돌려주기로 하며, 이를 지체하거나 외부로 유출시켜 회수를 어렵게 하거나, 타 용도로 사용하거나, 손상시켰을 경우 변상하기로 한다.”는 내용은 사실상 그대로였다. 다만 제목을 안내서라 고쳤듯이 변상하기로 한다.” 였던 끝부분을 그런 일이 발생했을 경우 귀사에서 변상이 불가피한 점을 양지하셔서 당사의 파렛트 회수에 적극 협조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하고 고쳤다.

괜찮을 것 같았다.

이튿날 서병윤은 기도하는 심정으로 목욕재계하고, 고친 서류를 들고 다시 상무를 찾아갔다. 더 이상 만날 필요도 없다고 거절하는 상무이사를 만나 고친 서류를 내밀었다. 문구를 들여다보는 상무의 얼굴에 변화가 나타났다. 경직되어 있던 얼굴이 부드러워지더니 이윽고 흐흐흐흐, 하고 입에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사무적인 자세로 책상 앞에 있던 그는 천천히 일어나 응접소파로 와서 서병윤과 마주앉았다.

그래요. 이런 안내문이라면 내가 얼마든지 직인을 찍어주지. 발상의 전환을 아주 잘 했네요.”

그는 비서에게 도장과 인주를 가져오라고 하더니 그 자리에서 시원하게 찍어주었다. 도장을 찍을 때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서병윤은 속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앉아있어야 했다. 내용은 누가 보아도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새로 만든 서류이기에 12개 회사 중 제일 먼저 찍힌 것이 대장회사의 도장이었다. 서병윤은 남은 11개 회사를 돌며 도장을 다시 받았다. 한 장의 서류에 12개 회사 도장이 다 찍혀야 실효성이 높은 서류였기 때문이었다. 새 서류에 도장을 다시 받는 일은 일사천리여서 하루 만에 다 해결이 되었다.

그것이 1990년의 일이었다. 서병윤에게 또 하나의 노하우가 생겼다. 이후 서병윤은 한국파렛트풀을 계약서 없는 회사로 특화시켰다. 계약서 없는 영업을 하기 시작하면서 서병윤의 한국파렛트풀()는 눈덩이처럼 성장했다.

 

11

 

누구나 일생에 세 번은 기회가 주어진다고 했다. 그 세 번이 언제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서병윤에게는 대우중공업 산업차량생산본부에서 지게차(Fork lift)를 만난 것이 하나요, 일본 방문에서 일본 물류의 선각자인 세 분, 하역연구소의 히라하라 스나오(平原 直) 소장과 그리고 일본물류관리협의회의 이나스까 모도끼(稻束 原樹) 사무국장, 일본파렛트렌탈()의 사까이 겐지(坂井 健二) 등을 스승 격으로만난 것이 또 하나의 기회였다. 세 분과의 인연은 조금도 소홀함 없이 지금까지도 자주 왕래하며 이어지고 있는데, 그 중 히라하라 소장은 선각자 중에서도 개척자적 선구자요, 스승 중에 스승으로 서병윤의 가슴에 새겨져 있다. 그들이 있어 서병윤은 한국 물류의 선각자가 될 수 있었다.

오늘날 서병윤의 한국파렛트풀() 회사를 스승인 사까이 겐지(坂井 健二)가 경영하는 일본파렛트렌탈()과 비교하면 서병윤의 회사가 모든 면에서 1.5배 더 큰 규모이다. 그래서 그들을 만나면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며 서병윤을 칭송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1세기를 맞아 중국이 산업국가로 부상하면서 중국에도 물류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북경과학기술대학의 오청일 교수가 일본의 히라하라 교수를 찾아와 사사했다. 히라하라 선생은 서병윤에게 오청일 교수를 소개하면서 물류의 노하우를 전수해주고 도와주면 좋겠다는 당부를 했다. 서병윤은 스승의 뜻을 받들어 오청일 교수를 물심양면 도와주었고 (지금도 돕고 있다) 이에 힘입어 오 교수 역시 중국물류의 아버지가 되었다.

한편에서 서병윤은 국제무역 규모가 매년 증가하고 있고 기업의 글로벌화가 일반화됨에 따라 생산과 판매를 연결하는 국제물류비용도 늘어나고 있어 이에 대한 대응으로 국제물류동맹(LogisALL)을 설립하고, 더욱 가볍고 친환경적이며 원가가 적게 드는 초경량의 RRPP(Recyclel Reusable Plastic Pallet)를 세계 최초로 개발하여 시장에 내놓는 등 파렛트풀시스템의 글로벌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

List of Articles
번호 카테고리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96 단편 회춘의 빛 – 씨놀(Seanol) 반취 2022.07.03 28
» 단편 계약서 없는 사업 반취 2022.07.03 25
94 단편 크레이지 코리언 a crazy Korean 반취 2022.07.03 23
93 단편 런 바이 두잉 (Learn by doing) 반취 2022.07.03 20
92 기타 간증시집 하나님과의 만남 file 반취 2015.09.05 3897
91 장편 다실에의 초대 (차를 알아야 일본을 안다) file 반취 2015.08.25 4231
90 장편 감동의 간증시집 하나님과의 만남 file 반취 2015.08.25 4220
89 장편 전작장편소설 군인의 딸 (하권) file 반취 2015.08.25 4273
88 장편 전작장편소설 군인의 딸 (상권) file 반취 2015.08.25 4283
87 장편 두 번째 소설집 "대수대명" file 반취 2014.06.25 4531
86 장편 사랑, 그것은 영혼의 춤 file 반취 2014.06.25 4293
85 장편 이기윤 시집 - 삶이란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인생의 계절) file 반취 2014.06.15 4631
84 장편 소설 한국의 차문화 (차의 진실) file 반취 2014.06.15 4542
83 중편 축령산 연가 file 반취 2014.06.05 4188
82 단편 사람의 사랑 이야기 반취 2013.08.25 5986
81 단편 고향의 노을 반취 2012.02.26 8219
80 중편 정리없는 끝 (2) 반취 2011.09.18 7032
79 중편 모퉁이 찻집에서 일어난 일 (4) 반취 2011.09.18 6686
78 중편 모퉁이 찻집에서 일어난 일 (3) 반취 2011.09.18 7179
77 중편 모퉁이 찻집에서 일어난 일 (2) 반취 2011.09.18 7450
Board Pagination ‹ Prev 1 2 3 4 5 Next ›
/ 5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2012 Banchui

Powered by Xpress Engine

abcXYZ, 세종대왕,1234

abcXYZ, 세종대왕,1234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