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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언제 읽어도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위선이나 불의에 대항하여 정의를 세우면서 인간성을 옹호하고 정신을 이끄는 따위는 다음 이야기입니다. 잔잔한 물결처럼 다가와 가슴을 파고드는 반취 이기윤의 소설들에는 독특한 향기가 있습니다.

단편
2022.07.03 12:48

크레이지 코리언 a crazy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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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업소설


 

1

 

평생을 검소하게, 또 엄격한 교육자로 사신 강석진의 아버지는 담담했다. 셋째 아들 강석진이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약학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이 됐는데도 축하의 말 보다는 경계를 주었다.

대학에 다니려면 서울 가서 생활해야 하는데 어떻게 지낼 생각이냐.”

당시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장이었지만 가족이 많았고, 따라서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았다. 서울에 지인은 많았지만 아들을 맡길만한 곳은 없었다.

작은 방을 하나 얻어 자취를 하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학생이니 학비 부담은 없지만 생활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

아르바이트 자라를 찾아보겠습니다.”

그래?너는 잘 해낼 거라 믿음은 간다만

그래도 아들을 혼자 서울 보내는 것이 편치는 않은 부모 마음이다.

너 최정식 선생 알지?”

. 이웃에 사시던 고등학교 선생님 요.”

직접 배우거나 한 인연은 없지만 이웃에 살았던 고등학교 선생으로 아버지에게 무척 깍듯했다. 2년 전 서울로 간 뒤 소식을 모르고 지내는데 이웃에 살 때는 강석진이 공부 잘하고 행동이 반듯하다고 유난히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최 선생이 지금 상공부장관 보좌관이다. 편지를 써줄 테니 가서 인사드려라. 너에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을 거다.”

 

강석진을 만난 최정식 보좌관은 오랜만에 친동생을 만난 것 이상으로 반가워했다. 최 보좌관은 강석진보다 열여섯 살 위여서 맏형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자네가 수석으로 졸업할 것을 내 진작 알았지. 축하하네. 요즘은 약대가 최고야. 약대 하면 중앙대가 단연 으뜸이고. 사회가 어수선하고 살기 힘든 때는 안정된 생활이 우선이라네.”

고맙습니다.”

그런데 정말 참, 마침 잘 찾아왔다. 장관님이 입주 가정교사를 찾고 계시거든. 나보고 쓸 만한 청년을 추천하라 하시는데 마침 지네가 나타난 거야. 절묘한 거지. 어떤가? 잘만 된다면 자네에게도 행운, 나에게도 좋은 일 아닌가. 하하하.”

잘 되면 좋겠네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장관님 뵐 땐 복장 단정히 하고 자세를 반듯하게 해야 하네. 장관님이 제일 주시하시는 게 실력이나 언변보다 그거니까.”

알겠습니다.”

강석진은 면접을 기다리는 사이 옷매무새를 다시 추스르고 어깨를 반듯이 했다.

최 보좌관은 바로 장관실에 연락을 해보더니 잠시 후 강석진을 데리고 들어가 인사를 시켰다.

아버지가 상주에서 교장 선생을 하고 계십니다. 밖에서나 안에서나 교육에 아주 엄격한 분이시죠. 그런 분의 셋째 아들로 일곱 형제 중에 공부를 제일 잘하고 됨됨이도 반듯합니다.”

이어 최 보좌관은 비록 상주지만 이번에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중앙대 약대를 장학생으로 입학했다는 것까지 소개했다.

. 단정하고 반듯해 보이는군.”

첫 인상이 마음에 드는 것처럼 말한 김 장관은 다짜고짜 물었다.

수석 졸업이라니 성적을 물을 필요는 없겠고자네 회초리 맞아 봤나?”

뜻밖의 질문에 강석진은 잠시 주춤했다. 최 보좌관이 얼른 대답하라고 눈치를 줬다. 강석진은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

부모님에게 여러 번 맞았습니다.”

몇 번이나 맞았나?”

몇 번인지는 기억에 없습니다.”

너무 많이 맞아서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아닙니다. 잘못이 있어서 맞았기에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후후후.”

김일환 장관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듣기 좋은 대답이군후일 내 아들들에게서도 그런 대답을 들었으면 좋겠네.”

장관은 보좌관을 보았다.

제대로 된 청년이군. 잘 추천했네.”

 

강석진은 그 날로 김일환 장관의 후암동 자택에 입주하는 가정교사로 결정됐다. 강석진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김일환 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이 가장 신임하는 각료 중 하나였다. 잠시 김 장관을 소개하자면 1914년 강원도 철원군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만주로 건너가 1933년 만주 하얼빈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만주 육군경리학교(陸軍經理學校)와 만주국군관학교(滿洲國軍官學校)를 졸업하고, 만주국 육군의 경리장교로 임관했다. 태평양전쟁 종전 후 귀국하여 1947년 남조선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재무처장직을 수행하였고, 1948년에는 국방부 제3국장을 거쳐, 1950년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에는 육군 소장으로 승진하였다. 19516월부터 195311월까지는 장경근 차관의 후임으로 국방부 차관 직을 수행하였고, 1954년 중장 진급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 방문 때 수행원으로 한미회담에 참가하였으며, 대한석탄공사 군 파견단장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55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후 동년 9월부터 19588월까지 상공부 장관을 역임하였는데 그 사이 56년에는 경제조정관 서리를 겸임하기도 하였다. 상공부 장관직을 그만둔 뒤 곧바로 제17대 내무부 장관직을 수행하였고, 이어 제8대 교통부 장관에 임명되어 장관직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강석진이 만난 1958, 김 장관은 45세의 젊은 장관인데 자식 교육에 남다른 철학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에게는 고1과 중2 두 아들이 있었다.

강석진은 김 장관에게서 얻은 무언의 영감을 아이들 교육에 적용, 공부를 게을리 하거나 바르지 않은 행실이 눈에 띌 때는 장관의 아이들을 회초리로 다스렸고, 장관은 강석진의 그런 담대한 행동을 칭찬하며 기회 있을 때마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2

 

1950년대의 우리나라 경제는 세계 최 하위그룹이었다. 6.25 전쟁 이전, 그러니까 정부수립 후 이승만 정권에 의해 작성된 산업부흥 5개년계획은 자립경제의 기반을 조성하는데 필요한 전력, 교통을 비롯한 사회간접자본을 건설 확충하고 경제부흥과정에서 그 수요가 빠르게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는 철강, 비료, 시멘트 등 기간산업을 새롭게 건설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625 전쟁이 터지면서 계획은 무산되었고, 산업은 더욱 황폐화되었다.

 

전쟁 이후에는 소비재산업의 재건과 같이 민생안정에 중점을 두는 형태로 크게 변하였는데, 이는 산업전체의 생산기반을 파괴시킨 6.25 전쟁의 영향도 중요하지만 원조 의존적인 수입대체공업화가 갖는 한계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는 더 많은 부담을 떠안아야 되는 기간산업 중심의 수입대체공업화보다 긴급한 생활필수품 생산의 확대에 중점을 두었다.

 

이승만 정권은 3선 개헌과 부정선거로 장기집권을 꾀했지만 1960년의 419 학생혁명에 의해 무너졌고, 새로 들어선 임시정부는 1961516 쿠데타로 붕괴되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 정부 때 만들어진 계획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추진했다. 이승만 정권시절의 계획 입안 중심에는 김일환 장관이 있었다. 국제연합 한국부흥단(UNKRA)과 산업개발위원회와 협력하여 처음으로 만든 한국경제 재건계획이었다.

 

김일환 장관은 정부 청사에서만 일하는 것으로 모자라 자택에서도 이틀이 멀다하고 회의를 했고 무수한 내외 인사들과 교류했다. 방문 인사는 대부분 한국 경제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때 입주 가정교사인 강석진은 때로는 김 장관의 심부름이나 비서 역할도 하면서 경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고 듣고 느꼈다.

 

대학교 1학년을 마쳤을 때 강석진은 약학 공부를 포기하기로 했다. 생각이 바뀐 것이다. 그는 곧 학과장 백영우 박사를 찾아 전과를 청원했다. 학과장은 일언지하에 안 된다고 했지만 강석진은 매달렸다. 가라고 해도 가지 않고 두 시간을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으니 학과장이 물었다.

최고 인기학과를 그만두고 무엇을 공부하려고?”

경제학과를 희망합니다.”

경제학과를? ?”

개인의 안녕보다 나라 경제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 형편에선 지금 능력 있는 젊은이라면 경제건설에 매진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기특하군. 어쩌다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하게 됐나?”

학과장은 약간 비아냥거리는 조로 말했다.

사실은 제가 현재하고 강석진은 상공부 장관 댁 입주 가정교사임을 밝히고 그곳에서 지내다보니 그런 생각을 갖게 됐다고 했다.

학과장은 잠시 생각한 후 물었다.

자네, 우리 학교 임영신 총장이 초대 상공부 장관이었던 것을 아는가?”

, 그 점도 고려했습니다.”

묘한 인연이군. 우리 대학도 국가 경제를 우선하고 있기는 하네. 기다려 보게. 내가 총장님께 자네 문제를 건의해 보겠네.”

 

2학기가 시작되기 2주 전에 전과가 허락되어 강석진은 경제학도가 되었다. 뒤늦게 그런 사실을 안 김 장관은 강석진을 크게 격려하며, 집을 찾는 사람에게 마다 강석진을 훌륭한 경제학도라고 소개했다. 덕분에 강석진은 경제 관료는 물론 당대 최고의 기업인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김 장관은 강석진에게 이런 저런 사람을 소개하는 이유를 얘기해 주었다.

인연처럼 소중한 것이 없네. 삶의 질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첫째 요소는 내가 어느 그룹에 속하느냐 야. 개인의 능력이나 자질은 두 번째 세 번째야. 물론 자신이 선택하는 거지. 내 집에 있으면서 알게 되는 사람들과의 인연도 소중히 하면 훗날 도움이 될 거네.”

강석진은 장관의 말씀을 가슴에 깊이 새겼다. 그를 장관에게 소개한 보좌관도 강석진이 신임 받는 것을 크게 기뻐했다.

 

3

 

강석진은 대학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육군에 자원입대했다. 재학 중에 군에 자원입대하면 복무기간을 절반으로 줄여주는 엄청난(?) 특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논산훈련소의 기초훈련을 마친 후 (잠시나마 약대를 다닌 경력 덕을 보아) 마산에 있는 군의학교에서 X-Ray 촬영 보조기사 교육을 받았다. 일등병 계급장을 달고 육군사관학교 X-Ray과에 근무했다. 그는 행운이라고 여겼다. 그 무렵의 군대는 폭력과 갈취가 난무하던 시절이어서 사고가 끊이지 않았는데 육군사관학교는 그렇지 않겠지, 하는 안도감에서였다.

그러나 여기도 무리 중에 힘든 대상이 있었다. 다름 아닌 선임하사(상사)가 주정뱅이에다 난폭했다. 툭하면 사병들을 집합시켜 줄빠따를 치게 했다. 3개월쯤 지났을 때 더는 참을 수 없는 날이 왔다. 내가 맞을 차례가 왔을 때 취해서 휘두르는 상사의 방망이를 요리조리 피했다.

허 요놈 봐라. 일등병 놈의 새끼가!”

흥분한 상사는 강석진의 머리를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는데 강석진이 피하자 중심을 잃고 스스로 몽둥이를 안은 채 나가떨어져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다치고 말았다.

이튿날 상사는 강석진을 하극상으로 헌병대에 고발했다. 헌병대에 끌려간 강석진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영창을 가느냐. 아니면 최전방 소총중대로 가느냐.

영창을 갈 수는 없었다. 강석진의 선택은 최전방 근무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최전방인 1사단 수색중대로 보내졌다.

수색중대 생활은 사관학교 생활과 천양지차로 음산하기까지 했다. 매일 같이 훈련이요 아니면 수색과 매복이었다. 힘든 일과를 마치고 내무반에 들러와 잠시 휴식을 취하려하면 또 진상인 고참 상병이 있어 들들 볶고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집합과 매질을 일삼았다.

잘못하면 회초리를 맞고 자랐고, 또 가정교사를 할 때 바르지 않은 행실을 보면 장관의 아들이라도 사정없이 회초리를 들었던 강석진이지만 그런 되지못한 놈의 위협과 폭력은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들을 동료 사병에게 시키는 일이 계속되고 급기야 공갈 협박에 갈취하는 일까지 벌어지자 더 참지 않았다.

거꾸로 매달아 놔도 세월은 간다.’ 라는 말이 있지만 이대로는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한 강석진은 그에게 들볶이는 졸병을 대표해서 고참 상병과 불어 버렸다.

, 계급장 떼고 한 판 하자.”

상병은 일편 놀라며 가소롭다고 웃기도 했다.

그래? 내가 누군 줄 아직 모르는 모양이구나. 제주도에선 이 흑곰 하면 모두들 벌벌 떠는데. 하긴 네가 알 리가 없지.”

둘은 붙었다.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라 강석진은 이리 터지고 저리 밟히고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 덤비고 또 덤볐다. 코피가 터져 범벅이 된 얼굴로도 또 덤비고 또 일어났다. 아무리 강자라도 지칠 만큼 긴 시간 그렇게 끈질기게 싸웠다. 그러나 끈기로 되는 싸움이 아니었다. 강석진은 결국 크게 다쳐 후송을 가야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마지막까지도 강석진은 후송을 안 가겠다며 저 자식이 성질을 고치든 내가 죽든 같이 있으면서 싸움을 계속하겠다고 버텼지만 상태가 상태인지라 후송되고 말았다. 병원에서 2달 반을 보낸 뒤 복귀하니 뜻밖에도 상병이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상병은 누구보다 강석진의 건강 회복과 복귀를 진심으로 반기며 과거 일을 반성하고 사과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둘 사이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사이로 지냈다.

강석진의 18개월 군 생활은 그렇게 파란만장했는데, 그것이 그때까지는 몰랐던 ­ 불의를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의협심이나 두려움을 겁내지 않는 용기, 안이함에 안주하지 않는 모험심과 도전정신 등이 자신에게 있다는 정체성을 아는 계기도 되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강석진은 군대에서 419516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4

군대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니 김일환 장관은 교통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고 아들들의 가정교사는 다른 학생이 입주해 있었다. 최정식 보좌관은 그대로 상공부에 남아 있었다.

강석진은 복학해서 공부에 열중하며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 보았다. 한 달인가 지났는데 학교로 삼호무역 정재호 회장 비서가 찾아왔다. 정 회장은 김일환 장관 댁에서 지낼 때 인사를 드린 일이 있는 분으로 당시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기업인이었다. 용건은 김 장관 때와 마찬가지로 입주 가정교사였다. 정 회장 역시 회초리를 드는 훈육을 원했기에 눈여겨 보아두었다가 강석진이 군에서 제대한 것을 알고 연락한 것이었다.

후반기 대학생활은 그렇게 돈암동에 있는 삼호무역 회장 댁에서 지냈다. 정 회장이 강석진을 아끼고 신뢰하는 것은 김 장관 보다 더 했다. 김 장관은 집에 드나드는 인사를 소개하는 데 그쳤지만, 정 회장은 집에서 간부회의나 중역회의를 할 때 강석진을 아예 옆에 앉혀놓고 했다. 덕분에 강석진은 간부들이 모여 토론하는 것을 많이 보고 기업경영이나 경제, 특히 무역에 대한 지식을 축적할 수 있었다.

이때에 그는 김일환 장관이 들려준 말씀 - 삶의 질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첫째 요소는 내가 어느 그룹에 속하느냐 야. 개인의 능력이나 자질은 두 번째 세 번째야 라는 말씀을 되새겼다. 정부 고위관료나 주요 기업 경영인들이 한 그룹처럽 여겨졌던 것이다. 스쳐가는 인연일지라도 더욱 소중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졌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졸업이 다가오는 데 졸업 후 일을 함께 하자는 등의 이야기는 없었다. 강석진은 나름대로 진로를 마련해야 했다. 서울에 눌러 살며 앞날을 설계하기 위해서는 직장이 우선 있어야 했다. 강석진은 현대건설 사원모집에 응시해서 합격했다.

 

출근 일을 일주일 남겨놓고 신변을 정리했다. 가정교사는 그만하기로 했다. 그런데, 삼호무역 회장댁에서 나와 따로 지낼 방을 마련하는 중에 최정식 보좌관의 연락을 받았다.

자네 졸업했지? 이제 뭘 할 건가? 가정교사나 계속 할 생각인가?”

아닙니다. 가정교사는 그만하기로 했습니다. 현대건설 입사시험에 붙었습니다. 며칠 후부터 출근하니 이제 독립해야죠. 그동안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현대건설? 아니 경제학도가 건설회사에 가서 뭘 해? 자네 나에게 좀 오게. 소개할 데가 있어.”

보좌관님 말씀이라면바로 찾아뵙겠습니다.”

강석진은 바로 청사로 찾아가 1층 휴게실에서 최 보좌관을 만났다.

 

자네 지금 우리나라가 온 국력을 모아 무역과 수출 증대에 힘쓰고 있는 건 알지?”

아직 학생신분이었기에 피부로 느끼진 못합니다만 방향은 그래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인구는 많고 자원은 없는 나라니까, 나라가 살 길은 무역밖에 없어. 능력 있고 안목 있는 사람이라면 무역을 해야 해.”

……

부산에 근거를 둔 쌍미섬유라고 있어. 회장이 지연구 선생인데 이북에서 내려와 성공한 분이지. 그 분이 무역을 담당해 줄 참신한 인재를 구한다면서 내게 부탁을 했다네. 자네를 추천하고 싶은데 한 번 만나볼 텐가?”

만나 뵙는 건 어렵지 않죠. 그런데 그럼 부산에 가야합니까? 근무도 부산에서 하고

가벼운 제안이 아님을 느끼기에 꺼림칙한 부분을 먼저 물었다.

그건 아냐. 공장만 부산이지 무역부는 명동에 있어, 지 회장 사는 곳도 서울이고.”

그럼 내일이라도 만나 뵙죠. 그렇게 하겠습니다.”

1964년의 일이었다. 당시 무역이라면 섬유가 주종으로 폴리에스터 원단이나 나일론 같은 합성섬유로 옷을 만들어 수출하는 게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나 더 꼽는다면 가발 수출이 인기를 끌던 때였다. 모두 값싼 합성섬유이기 때문에 어느 소재가 좋다 나쁘다 줄을 세울 수는 없고 다만 제품으로 차별하던 때였다.

지금은 세계 200여개 국가 가운데 수출과 수입 모두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무역대국이 되었지만 광복 직후는 변변한 생산시설도 없고 자원마저 없는 세계 최빈국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오늘의 모습이 기적이라는 말이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 무역의 발전을 시대적으로 구분하면 크게 광복 이후부터 경제개발이 본격 시작된 1960년대 초까지의 태동기 수출주도적인 1960년대 초부터 1979년까지의 공업화기 1980년대 초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의 균형성장기 1998년 이후 현재까지의 무역선진화기로 나눌 수 있다.

1960년대 초까지의 무역태동기에는 무역규모나 발전 속도 모두 보잘 것 없었다. 광복 직후는 정치 사회적 혼란이 심했고, 정부 수립 후에는 경제발전의 기반을 마련하기도 전인 1950625 전쟁이 터져 더욱 황폐해져 이후 1960년대 초반까지 한국무역은 원조무역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1950년대 말까지 수출금액은 2000만 달러 안팎에 머물렀다. 1960년대로 넘어오면서 농수산물과 광산물 등 1차 산품 중심으로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1억 달러를 넘지 못했다. 수출시장은 일본과 홍콩 등 아시아지역이 전체의 60%를 차지했다.

1964년 마침내 수출이 1억 달러를 돌파했다. 시골 여인네들의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가발을 비롯해 돈 되는 건 모두 내다 팔았다 이 해에 우리나라의 수출 순위는 전 세계 159개 국 가운데 90위였다. 이때부터 정부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이 빛의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쌍미섬유의 지연구 회장이 강석진에게 (주택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살 집을 마련해 주는 등 준 임원에 해당하는 대우를 약속하며 무역을 전담해 줄 것을 제안한 것이 이 시기였다.

1962년 시작된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수입 대체 산업화를 표방하였으나 계획과는 달리 단순가공품에서만 성과를 올렸을 뿐이었다. 그러자 정부는 정책을 변경하여 수출을 성장의 엔진으로 삼는 수출 제일주의 정책을 표방하였다. 국내 기업에 대한 모든 정책적 지원과 금융혜택을 수출실적에 따라 차별화하기로 한 것이다. 따라서 기업이 성장하려면 만사에 우선하여 수출에 혼신을 다해야만 했다. 하지만 앞에서 지적했듯 단순가공품이 주류여서 무역 업무에 특별한 전문지식이나 많은 인력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쌍미섬유 무역담당이 된 강석진은 혼자 바이어(Buyer)를 상대하며 주문도 받고, 원자재도 수입하고. 신용장 취급하는 무역금융도, 선박을 어레인지(Arrange)하여 선적을 관리하는 것까지 모두 혼자했다.

그때 강석진을 가장 많이 도와준 사람은 바로 옆에 있던 회사 한성실업의 김우중 무역부장(후일 대우그룹 회장)이었다. 무역에 관한 금융을 한국은행 무역부에서만 취급하는 때였기에 무역을 하는 사람들은 다 거기서 만났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서로 물어보고 가르쳐주는 분위기였는데 제일 많이 알고 또 자세하고 친절하게 가르쳐준 사람이 김우중이었다. 알고 보니 사무실도 같은 명동의 옆 건물이어서 이런 저런 일로 자주 만나졌고 이내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이때의 인연으로 강석진은 김우중 회장을 스스럼없이 나의 멘토라고 말하게 되었다. 덕분에 강석진은 무역을 제대로 배웠다. 3년 후인 1967년 쌍미섬유의 수출실적은 동명목재 다음으로 2위가 되었다. 이렇게 실적을 올려놓은 해에 공교롭게도 강석진은 호남제분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고, 김우중 한성실업 무역부장은 더 이상 월급 받는 생활은 안 하겠다.”고 선언하며 몇몇 친구들과 단돈 500만원을 들고 대우를 창업했다.

 

5

 

호남제분 이용구 회장에게 고민이 생겼다.

이 회장은 만월(滿月)표 고무신으로 유명한 군산 경성고무 전무로 재직하다가 19569월 미국에서 원조식량으로 들여온 소맥을 재료로 밀가루를 생산하는 호남제분을 설립했다.

한국전쟁(1950~1953) 이후 한국은 원조경제 체제였다. 미국에서 구호품으로 들어온 밀가루 포대에는 성조기를 상징하는 별 4개와 두 사람이 굳게 악수하는 그림, 그리고 '미국 국민이 기증한 것. 팔거나 바꾸지 말 것'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포대의 그림은 우정과 신뢰를 상징해서 '악수표 밀가루'란 이름으로 시중에 나돌았다.

미국이 국내 농산물 가격 유지와 저개발국 식량부족 완화를 위해 보내준 악수표 밀가루는 정부의 강력한 규제에도 암거래가 성행하였다. 배급소와 종교단체 등에는 밀가루를 배급받으려는 사람으로 장사진을 이뤘다. 지금이야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가 별식이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절대적인 식량이었다.

우리나라 정부는 일자리 창출과 경제 발전 등을 고려해서 완제품(밀가루)을 주지 말고 밀로 주든지 공장을 지어달라고 미국에 요청했다. 국가에서 보증만 서주면 외국자본으로도 공장을 지을 수 있던 시절이었다. 호남제분은 국내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제분 회사였다. 1957년의 하루 생산능력은 130톤이었는데 증설이 이루어진 것은 1963년이었다.

해마다 보릿고개를 겪던 시절(1950~1960년대). 지방의 작은 항구도시 군산에 밀가루와 사료 대리점이 유달리 많았고, 짜장면·짬뽕 전문 중국음식점을 비롯해 국수공장, 과자공장, 제과점, 찐빵가게 등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것도 호남제분에서 생산되는 밀가루 영향이었다.

1966년에는 생산품이 밀가루 외에 정미(精米), 정맥(精麥) 등으로 늘었는데, 그중 밀가루는 태양표(1등급) 등대표(2등급) 등으로 하루에 6000포대(22kg)를 생산하였다. 직원은 생산직 포함해서 700여 명. 기계시설도 우수했다. 점포망도 전국 주요 도시에 구축하고 있었다. 기업이 눈부신 속도로 성장할 수 있는 시기였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호남제분은 100% 내수기업이었는데, 수출실적이 없는 기업은 생산량을 통제받아야 했다. 내수도 수출실적에 따라 쿼터(quota)제였던 것인데, 그뿐 아니라 기업 확장에 필요한 지원과 혜택도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지인 중에 쌍미섬유 지연구 회장이 있었다. 625때 빈 몸으로 월남한 지연구 가족을 구원해주고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 이용구 회장이었다. 이용구 회장은 무역으로 성공한 지연구에게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토로하며 도움을 청했다.

지연구는 은혜를 갚은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쌍미섬유를 일으켜 성공한 그는 자나깨나 이용구 회장의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나 하고 기회를 찾고 있었다.

지연구 회장은 생각 끝에, 강석진을 설득할 수만 있다면 이용구 회장에게 보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강석진의 의견을 물었다.

그동안 자네가 있어 나는 행복했네. 회사도 커졌고사실 자네의 능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 미처 예상하지 못했었네.”

듣기 송구한 말씀입니다.”

아냐 정말 대단해. 문득 이런 생각도 해 보았네, 자네 능력을 더 크게 발휘해보지 않겠나?”

지금도 벅차다 싶을 만큼 절절 매는데요.”

아니야, 기회가 있을 때 한 단계 높은 도전을 해 보게.”

강석진은 지 회장이 평소와 달리 완강한 것이 무슨 새로운 계획이 있는 것으로 들렸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 솔직히 나는 자네가 내 곁에 계속 있어주면 좋겠네. 그런데 피할 수 없는 내 삶의 은인이 무역회사를 차리고 싶어 하네. 물론 같은 섬유회사지. 지금으로선 당장 수출 가능한 것이 그것뿐이니까. 우리 회사는 이제 자네가 잡아놓은 틀 안에서 움직여도 될 거야. 그러니까 자네는 이제부터 새 회사를 만들어보도록 하게.”

계열사를 하나 만드시게요?”

강석진은 그때까지도 감을 잡지 못했다.

아니, 우리 회사가 아니고, 호남제분에서 무역회사를 만들고 싶어 하는데 자네가 맡아 주면 좋겠어.”

네에?”

강석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얘기를 하자면 길지. 한 마디로 내 인생도, 쌍미섬유도 호남제분 이용구 회장의 도움이 없었으면 있을 수가 없었네. 그만큼 그분은 나의 은인인데, 수출실적이 없어 성장의 좋은 기회를 무산시키고 있다네. 자네도 알다시피 너도나도 외자도입을 통해 기업 규모를 확장하고 있는데 수출실적이 없으면 정부가 승인을 안 해 줘. 자네가 그분을 도와 무역회사를 만들어보게. 대우는 나와 지내는 것보다 훨씬 잘 해 주실 거야.”

……

강석진의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내 선택이 아니라 회장들 간의 사정으로 인해 자리를 옮겨야 한다니이것이 과연 인정인가? 그러나 지연구 회장이 진심 어린 목소리로 하도 간곡하게 권하니 마다할 수가 없었다.

 

강석진의 나이 28살 때였다. 호남제분으로 자리를 옮긴 강석진은 호남제분 계열로 하나의 회사 설립을 맡아 진행했다. 신용장이 있어야 무역회사 등록을 받아주던 시대였기에 바이어들에게 부탁, 신용장을 개설했고, 대전 동화동에 땅을 매입해 당시로서는 대전에서 가장 큰 공장을 지었다. 옷감 짜는 기계 설비 등은 유럽에서 최신형으로 구입해왔다. 일본에도 없는 첨단 시설을 갖춰야 일본 시장까지 공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회사 이름은 원미무역으로 정했다. 공장장은 삼호무역에 있던 분을 스카우트해서 앉혔다. 그 모든 걸 강석진이 담당했다.

생산 품목이나 무역스타일은 쌍미섬유와 다를 것이 없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해서 제품의 질을 두세 단계 높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이 밀려들었다. 강석진의 전략이 적중한 것이다.

원미무역 역시 불과 3년 만에 경쟁력 있는 무역회사가 되었다. 강석진은 이 무렵부터 청와대가 관리하는 경제계 주요인사 명단에 올랐다.

정부 차원에서 해외자본가들을 초청, 청와대에서의 투자유치 설명회를 할 때면 강석진도 그 자리에 불려가, 외국 특히 미국의 투자자들을 설득하는 일을 하곤 했다.

1970년대 초반까지는 국가주도의 산업화 발흥기였기에 그랬다. 국내 기업인들이 전개한 외자도입 활동이나 내자 확보와 동반된 금융기관 진출이 이 시기에 눈부신 확장을 했다.

정부가 금융배분을 장악하고 있는 구조 속에서, 자금 조달을 위해서는 대()정부 활동이 필수적이었다. 차츰 원조가 아닌, 상업차관 등의 외자도입이 신사업 투자를 위한 자금원으로 부상하면서, 해외기업을 직접 상대하고 대외 활동반경을 넓히는 기업이 늘어났다.

 

이때의 외자도입을 통한 신규투자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가는 2000년대 이후 한국경제를 이끌고 있는 30대 재벌이 하나 같이 이 시기에 기업의 인수합병 등을 통해 규모를 확장하면서 정부 정책보다 한 발 앞서 전망 좋은 투자 사업으로 진출했거나 창업했다는 사실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외자도입 승인을 얻기 위해서는 정치권의 조력자를 활용하고 승인절차에 대응하는 여러 수단을 동원해야만 했다. 외자도입 능력은 정치력을 기반으로 시장 지배력을 드러내는 영역이자, 대외활동 확대의 발판이었다.

주요 계기마다 국내 기업인들의 활동을 고취시키고 활동반경 확대를 도운 것은 미국이 주도하는 해외경제단체들이었다. 원조가 아닌 외자도입을 위한 대외개방의 진전은 국내 기업의 역할 확대를 뒷받침했다. 전경련의 민간금융회사 설립 및 외유기회 확대 역시 이 시기 외부적 지원에 힘입었다.

 

그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삼사 년 일을 하다 보니 강석진의 도전욕과 모험심이 슬슬 발동했다. 회사를 만들고 키울 때는 재미가 있었지만 어느 정도 궤도에 올려놓고 보니 열정이 남아도는 것 같았다.

강석진은 공부가 더 하고 싶어졌고 보다 넓은 세계 미국에 가고 싶어졌다. 숙고 끝에 일단 건너 가 보자, 하고 마음을 굳힌 강석진은 기회를 봐서 이용구 회장에게 말했다.

회장님, 이제 회사는 안정권에 들어섰습니다. 해서전 미국에 가서 공부를 더 해야겠습니다.”

이 회장이 허락할 리가 없었다.

? 뭔가 불만이 있나?”

그건 아닙니다. 회장님은 잘 해 주셨습니다.”

앞으로 더 잘 해 줄 텐데, 왜 그만두려고?”

말씀드린 대로 더 큰 시장을 공부하고 싶어서입니다.”

이봐. 지금이 어떤 때인가. 한국의 기업들이 눈을 뜨고 있는 때야. 이런 때 자네처럼 능력 있는 젊은이가 있어 기업을 우뚝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 회사 차원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야. 선진국에 비하면 아직 우리 기업들은 기업도 아니야. 겨우 태동하는 단계지. 아직 한참 가야 해. 기업을 키우고 확장해 세계적인 기업을 만든다면 그보다 더 큰 보람이 어디 있겠나. 공부는 그러면서 배우는 것이 진짜 공부 아닐까. 우리 함께 공부하자고.”

사실이 그랬다. 이때의 한국에는 기업이라 할 만한 기업이 없었다. 잘 나간다는 호남제분도 쌍미섬유도 원미무역도 실상 선진국 수준에서 보면 작은 공장에 불과했다.

이 회장은 그렇게 간곡히 만류했지만, 그러나 한 번 일어난 강석진의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말씀에는 공감합니다만 회장님. 제게는 지금이야말로 공부가 더 필요한 때입니다. 제가 제 판단을 따르도록 해 주십시오.”

그럼 원미무역은 어떻게 하라고. 자네가 없는 원미무역을 나는 상상할 수가 없어. 시간을 가지고 다시 생각해 보게나.”

원미무역은 이제 틀이 잡혔습니다. 쌍미섬유에서도 그렇게 해놓고 나오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제가 없어도 잘 운영될 겁니다.”

쌍미섬유가 김우중이 세운 대우에 인수된다는 소문 못 들었나? 리더가 없으면 그렇게 되는 거야.”

1967, 500만원을 가지고 동업자 4명과 무역회사 대우를 시작한 김우중이 뛰어난 세일즈 능력으로 창립 첫해 57만 달러 수출실적을 기록하자 정부는 대우를 전폭적으로 밀어주었고 대우는 고려피혁, 쌍미섬유 등을 인수하며 몸집을 불려 나갔다.

그건 저도 압니다만 다른 뜻에서 경영권을 넘기는 겁니다. 회사 재정에는 문제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좀 더 생각해보게.”

회장은 거절하고 만류하고 회유를 계속했다. 그러나 그래도 강석진이 뜻을 굽히지 않자, 마침내는 사의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6

 

원미무역에서 풀려난 강석진은 오랜만에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자유인이 되어 미국을 향했다. 퇴직금 개념이 없던 때여서 그동안 저축했던 돈을 찾아 비행기 표 사고 나니 남은 돈은 달랑 3백 불이었다. 미국으로 직접 가는 비행기도 없던 때였다. 일본 동경으로 가서 미국행을 타야 했다.

미국에 도착해서의 계획도 아무 것도 없었다. 특별히 아는 사람도 없었다. 한국에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았든, 어차피 미국에서의 삶은 바닥에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시기 미국에 간 사람들이 자국에서의 신분에 상관없이 다 그랬듯, 워싱턴에 가서 아르바이트로 접시닦이 하고 (그땐 그게 코스니까) 숙소는 값싼 YMCA 등을 이용하며 어떻게 지낼 것인가를 찾아보기로 했을 뿐이다.

홀가분한 차림으로 떠나는데 이용구 회장이 배웅까지 나와 소정(小情)이라며 봉투를 주는데 열어보니 미화 500불이 들어있었다. 제법 힘이 되는 돈이었다.

동경에 간 김에 원미무역 동경지사에 잠시 들리니 (동경지사 역시 강석진이 만든 것이었다.) 현지 지점장이 또 여비하라고 봉투를 내밀어 1,000불을 가져가게 되었다.

미국 현지에서 1,000불의 가치가 어떤지 모르는 강석진은 든든한 마음으로 워싱턴을 향했다.

워싱턴 덜레스 공항에 내린 강석진의 심정은 복잡했다. 인파로 붐비는 곳이었지만 절해고도에 홀로 서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보이는 모든 것 하나하나를 눈에 담고자 했다. 새로운 세계에서 도착하자마자 서두를 일은 없었다. 천천히 걸었고 움직임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했다.

그는 우선 매점에서 워싱턴DC 지도를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YMCA 위치를 확인하고 택시를 이용할 것인가 버스를 탈 것인가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세관을 통과해서 나오는데 한국인으로 보이는 신사 한 분이 다가왔다.

혹시 강석진 씨 아닙니까?”

하도 뜻밖이라 강석진은 놀란 눈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만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 모시러 왔습니다.”

나는 전혀 알고 있는 게 없는데요누가 나를?”

가면서 말씀드리지요.”

그는 자신을 피터 윤이라고 밝히고 지산을 보낸 사람은 워싱턴DC 한국인 교민회장이라고 했다. 알 만한 사람인가 해서 이리저리 물어보았지만 추측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워싱턴DC 중심가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강석진을 만난 교민회장 이석희(스탠리 리)는 미국 방문은 처음이냐, 잠잘 곳은 정해 놓은 곳이 있느냐, 앞으로 계획은 무엇이냐, 얼마나 있을 생각이냐, 심문하듯 여러 가지를 물었다. 강석진은 한마디로 답했다.

아무 계획 없습니다. 공부를 더 할 목적으로 무작정 미국에 왔고 바닥에서 새로 시작할 각오입니다.”

이석희는 말했다.

그럼 잘됐소이다. 나는 진작에 미국에 건너와 자리를 잡았고 밴딩머신(자판기) 사업을 해서 어느 정도 성공했습니다. 미국 내에는 공공기관 대학교 등 상당히 많은 곳에 우리 밴딩머신이 설치되어 있죠. 이제 아시아지역으로 그 시장을 넓히려고 하는데 나를 도와 일할 마음 없겠소이까. 만약 강석진 씨가 무역만 잘 해 준다면 아파트도 제공하고 대학원 공부도 시켜드리지요.”

놀라운 제안이지만 강석진은 얼떨떨했다. 일본을 빼면 아시아 지역에선 냉장고 하나 못 만들던 시절이었다. 한국은 밴딩머신의 밴 자도 모르는 때였다. 언 듯 생각에 시장을 열기만하면 그 수요가 엄청날 것 같았다. 이석희는 말을 이었다.

교민 중에 무역을 아는 사람이 없어요. 미국인을 고용하자니 아시아를 잘 몰라서 그렇고적임자를 찾다보니 강석진 씨를 추천하는 사람이 있었지요.”

회장님의 말씀은지금의 저에게 얼마나 고마운 제안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를 어떻게 아시고그게 궁금합니다.”

, 그 설명을 깜박했군요. 말씀드린 대로 여기 교민 사회에 아쉽게도 무역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보름 전에 한국에 있는 친구 ­ 서울상대 출신 친구가 있어 미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 무역전문가가 있으면 추천해달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아주 무역을 잘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기다렸어요, 삼일 전에 전화를 받았는데 그 사람이 마침 미국으로 갔다는 군요. 그게 강석진 씨였습니다. 나는 잘 됐다 하고 거래 여행사에 부탁하고 비행기탑승자 명단을 훑어 오늘 도착한다는 것을 알아낸 겁니다.”

그러셨군요. 그 친구라는 분 성함을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김우중입니다.”

, 그렇습니까? 선배시죠. 무역에 있어서 저의 멘토십니다.”

아무튼 그 친구가 적극 추천하더군요.”

강석진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강석진은 더 이상 군말하지 않고 스탠리 리를 돕기로 했다.

 

이석희 회장은 자기를 스탠리 리라 불러 달라고 했다. 그의 회사에 무역파트를 만들고 한국은 물론 아시아 지역과의 교역을 목표로 준비 작업을 했다. 이 회장은 약속대로 아파트를 마련해주었다. 대학원 공부는 무역 사업이 안정이 될 때 시작하도록 했다.

강석진에게는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접시닦이로 바닥부터 시작할 각오를 다졌는데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리다니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했다.

 

7

 

강석진은 열심히 일하면서 교민들과 인사를 나누며 워싱턴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스탠리 리가 원하는 것은 한국에 지사나 대리점을 만들어 랜딩머신을 판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산량이 그리 많지 않았고 미국 내 주문에도 딸리는 편이었다. 생산시설을 확충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거액을 마련해 투자를 해야 문제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서두르지는 않고 우선 강석진의 어눌한 언어(영어)부터 해결하자며 강석진을 학원에 보냈고 무역사업은 길게 보고 차근차근 해나가자고 했다. 그것이 강석진에게는 미국에 정착할 시간을 주는 것이어서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반 년 쯤 지났을까. 뉴욕에서 전화가 왔는데 석진 캉을 찾았다.

“I'm Kang Soek Jin.”

하고 받았더니 저쪽에서 대뜸

“Nice to meet you. Jin Kang!” 하고 거의 소리를 지르듯 했다. 강석진에서 가운데 석 자를 빼고 진 캉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순간 강석진의 머리에는 3년 전 일이 떠올랐다.

 

원미무역에 있을 때 이용구 회장은 정부가 요청하는 일에는 만사 제치고 협조하라고 했다. 정부가 모든 권한을 쥐고 있던 때여서 기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정부와의 원만한 관계가 최우선이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정부가 외자유치에 힘쓸 때 미국 금융회사 대표들을 청와대로 초청, 설명회를 갖고 주요 산업시설을 시찰하게 하는 행사가 있었다. 이런 때면 청와대는 이들을 안내할 사람들을 불렀는데 강석진도 그 중의 하나였다. 강석진이 외국 바이어들과 잘 지내고 설득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는 이런 행사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청와대는 안내를 맡은 사람들에게 이번에 방문하는 사람은 미국 금융계에서도 특별한 거물들이니 어떻게든 잘 설득해서 한국에 투자하도록 만들라는 임무를 주면서, 투자가 이루어지면 5년간 면세. 그 후 5년간은 50% 감세 등 폭넓은 인센티브를 제시하라고 했었다.

강석진은 방문자 중 뉴욕투자금융회사의 CEO 유진 스코뤈(Eugene Skowron)을 담당했다. 무려 열흘을 함께 지내다시피하며 한국에 아시아 무역의 플랫 홈을 만들어라. 한국인은 손재주가 탁월하고 근면 성실하니 여기 생산기지를 만들면 장기적으로 대박이 날 거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하면서 집요하게 설득을 벌인 일이 있었다.

그때 유진 스코뤈은 강석진을 ­ 진 캉이라고 불렀다. 미국식으로 표기한다고 명함에 Soek Jin Kang 이라 했더니 Soek 자는 가운데 이름인 줄로 짐작하고 생략한 것이다.

열흘에 걸쳐 여러 차례 경제기획원 등 경제단체에서 준비한 투자설명회에 참석하고 주요 산업시설을 안내받는 사이 유진 스코뤈은, 진 캉의 성실성과 설득력을 인상 깊게 간직하는 것 같았다. 떠나기 전날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그는 말했다. 만약 차후에 내가 아시아 지역 사업부를 만들고 투자를 한다면 그때 당신을 중용하고 싶다고 하면서 그러면 당신이 맡아주겠냐고 물었었다. 강석진은 그렇다면 영광으로 알고 맡겠다고 선선히 대답했었다. 그러나 미국으로 돌아간 후 연락이 없어 잊어버렸던 일인데 그때의 일이 생각난 것이다.

“are you Eugene?”

강석진은 상대를 확인했다.

“That's right. I'm Eugene Skowron.”

유진 스코뤈이 맞았다. 분명 그였다. 반가움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났다.

“Nice to meet you. Long time no see.”

수화기 저편의 유진 스코뤈은 안도의 한숨까지 내쉬는 것 같았다.

“I searched a lot of Korea and America looking for you.”

강석진을 찾느라고 한국 미국 다 뒤졌다고 했다. 한국 정부에 알아봐 달라고 해서 겨우 연락처를 알아냈다는 것이다.

 

그는 아시아지역을 두루 돌아보고 숙고 끝에 이제 아시아지역 사업부를 만들기로 했다 면서, 우리가 전에 약속했던 대로 진 캉에게 그 사업부를 맡기려고 하니 뉴욕에 와서 인터뷰에 응해 달라고 했다.

강석진은 난처한 입장이 되고 말았다. 스탠리 리의 밴딩머신 아시아 영업소를 거의 만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강석진은, 뉴욕에 가서 인터뷰를 하되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일을 해도 2, 3년 후에 하자고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 3년이면 스탠리 리의 아시아 사업도 자리를 잡을 것이고 대학원 공부도 끝날 것이라는 계산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건 나중 일이고 지금 당장은 스탠리 리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해야 했다.

 

강석진은 차분하게 커피를 나누면서 스탠리 리에게 유진 스코뤈과의 있었던 일을 그대로 이야기하고, 전화 온 내용도 이야기했다.

하지만 저는 그냥 회장 님 사업을 도우면서 공부를 하겠습니다. 일단 석사 과정을 마칠 때까지는 요.”

강석진은 단호한 어조로 그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스탠리 리의 반응을 달랐다. 뜻밖에도 손을 저었다.

아니야. 뉴욕투자증권의 프로포즈라면 이건 스케일 자체가 다른 이야기네. 그렇게 간단히 생각할 사안이 아니네.”

차원이 다르다니요?

뉴욕투자증권의 유진 스코뤈이라고 했나? 그렇다면 뉴욕 금융계에서도 최고 거물에 속하는데

그렇습니까?”

뉴욕투자금융은 미국을 대표하는 금융재벌의 하나야

그렇게 대단한 그룹입니까? 전 몰랐습니다.”

그런데서 자네를 찾는다는 건 자네 개인이 아니라 한국의 입장에서 주목해야할 사건이야. 이야기를 들어보고 거취를 결정하세. 가난한 조국도 생각해야 하지 않나?”

너무 과대하게 생각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니야

스탠리 리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고향을 떠나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미국에 온지 몇 달 안 되는 강석진에게는 아직 그런 애국심이 피어나지 않았지만, 그러나 오래 전에 떠나온 스탠리 리는 가난한 조국이 늘 마음 한 편에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사업도 사업이지만 고국의 발전에 힘을 보탤 수 있는 길을 더 열망하며 찾는 것 같았다. 스탠리 리는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한국인으로써 미국 금융재벌에서 그런 특이한 프로포즈를 받은 사례가 아직은 그 누구도 없네. 나도 유진 스코뤈 같은 미국금융계 거물을 아직 만나본 일이 없네. 그게 사실이라면 고국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줄만한 기회이네. 어떤가? 나랑 같이 뉴욕에 가 보자고. 가서 이야기 나눠보고 판단을 해 보도록 하지.”

저야 그래주시면 고맙죠. 그런 자리라면 영어도 딸릴 테고그렇게 하기로 하시죠.”

강석진은 무역 영어는 좀 했지만 네이티브 언어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이틀 후 그들은 뉴욕으로 날아갔다.

 

8

 

뉴욕투자금융사는 월 스트리트가 아닌 뉴욕 센트럴 파크 아래, 그러니까 렉싱턴 에비뉴 57번가에 있었다.

유진 스코뤈은 강석진을 포옹까지 하면서 반겼다. 강석진은 동행한 워싱턴 교민회장(스탠리 리)을 자기 보스(Boss)라고 소개했다.

“Boss? You got a job?”

유진 스코뤈은 보스라는 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It doesn't matter.(그건 중요하지 않다.) It's a temporary job for a small company.(중소기업의 임시직이니까.)”

스탠리 리는 큰 프로젝트에 영향을 안 주려고 유창한 영어에 제스처까지 보이면서 얼버무렸다.

그들은 미팅실 테이블에 마주앉았다. 스탠리 리는 우선 투자금융의 사업에 대해서 물었다. 스코뤈은 친절하게 설명했다.

뉴욕투자금융은 은행처럼 대출이나 예금을 취급하는 곳이 아니라 사업에 투자를 하는 곳이다. 어떤 사업을 선정해 어떤 방식으로 투자하느냐, 또 투자했을 때 그 기업 경영에 어떻게 관여하는가, 기업이 성장해서 이익을 내도록 해야 하고, 그래서 열 배 스무 배 키우는 것이 목적이다. 즉 전략적 경영(Strategic Management)이요, 파이낸셜 매너지먼트(Financial Management) 개념이라고 했다.

스탠리 리는 또 물었다.

그런데 당신이 원하는 진 캉은 무역은 베테랑이지만 금융전문가는 아닙니다. Financial Management(재무관리)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 아닙니까?”

노 노 노 노.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유진 스코뤈은 손을 내 저었다.

우리 회사에 금융전문가는 넘고처집니다. 그러니까 금융전문가가 아니라 참신한 아이디어로 성장 가능한 사업을 찾아내 일으킬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아시아 경제가 눈을 뜨고 있습니다. 매년 7, 8% 이상 급성장하고 있는데 우리는 한국이 선두주자의 하나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진 캉은 한국의 정부가 인정하는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한국 정부 초청을 받아 갔을 때 가장 설득력이 돋보였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를 선택해서 한국에 유망한 사업을 펼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

유진 스코뤈은 내부적으로는 이미 어느 정도 결정을 내린 사안이라고 했다.

스탠리 리는 또 물었다. 강석진은 계속 옆에서 듣고만 있었다.

그럼, 진 캉이 이 회사의 일원이 된다면, 직책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V.PVice President”

스코뤈은 주저 없이 말했다. V.P.Vice President, Chief 바로 밑의 부사장을 말한다. 스탠리 리는 믿기지 않는 듯 “Really?” 하고 재확인했다. 유진 스코뤈은 고개를 끄떡이며

“It's already been agreed internally.”(그 사항도 이미 내부적으로 최고경영회의에서 합의가 된 겁니다.)

하고 확실하게 말했다.

순간 스탠리 리는 벌떡 일어서서 앉아있는 유진 스코뤈에게 악수를 청했다. 유진 스코뤈이 손을 잡자 스탠리 리는 말했다.

“Thank you for being the boss of Jin Kang. Jin-gang will work for your company.”

(진 캉의 보스로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진 캉은 당신네 회사를 위해서 일할 것입니다.)

유진 스코뤈은 악수를 한 채 일어난 뒤 밝게 웃으면서 말했다.

“Thank you for making concessions.” (양보를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어 스코뤈은 진 캉에게 손을 내밀었다. 진 캉도 일어나며 손을 잡자

바로 뉴욕으로 오시오.” 했다.

진 캉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워싱톤에 보스가 마련해 준 방이 있습니다. 뉴욕에 오면 어디서 지내야 하나요?”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가 아파트도 마련해 줄 겁니다.”

 

뉴욕에서 워싱톤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스탠리 리는 강석진에게 말했다.

우린 해외에 살고 있지만 조국을 사랑한다네. 어떤 의미에선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보다 더 애국자일 거야. 가난한 조국을 위해서 할 일이 없을까 늘 염두에 두고 있고. 내가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해서 친구 통해 만났지만, 우리나라에 더 큰 도움을 줄 투자금융 쪽에 부사장 자리가 생겼다면 가야지, 지금 조국에는 그런 쪽도 절실히 필요하거든. 내가 양보를 하지. 이번 케이스는 내가 진 캉을 뉴욕투자금융에 양보하는 게 조국을 위해서 해야 될 일 같아요. 내 걱정 하지 말고 워싱톤 생활 정리하고 뉴욕으로 건너가시오.”

 

강석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쌍미 회장이 호남제분 회장을 위해 강석진을 양보할 때가 생각났다. 내 인생에는 왜 이런 일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 생기는 것일까.

 

9

 

뉴욕투자금융의 부사장이 된 강석진에게 떨어진 과제는 아시아 지역 ­ 우선 한국에 투자를 하려는 데 무슨 사업이 좋을까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한국의 경제기획원에 타진한 결과 100% 외국자본 투자기업이 들어설 수 있었다.

6개월 동안 조사하고 궁리한 끝에 그는 반도체 사업을 생각해 냈다. 1972년 기준에서 반도체 사업은 첨단 중의 첨단이었다. 당시 한국에는 물론 일본에도 반도체 공장이 없었다.

한국에 진출해 있는 반도체 회사는 두 곳, 시그네틱스와 모토로라가 있었는데 미국에서 만들어 가져온 ChipWiring(배선)만 하는 수준이었다. 여공들이 현미경 들여다보며 아주 가는 선을 board에 연결하는 것인데, 강석진의 사업계획은 Chip 자체를 만드는 공장을 한국에 만들어서 일본은 물론 동남아에 수출하고 한국의 수요에도 부응하자는 것이었다.

한국에 반도체 공장을 만들면 대박이 날 것 같습니다.”

강석진이 제시한 사업계획서를 본 스코뤈은 한 마디로 굳 아이디어라고 칭찬해 주었다. 그러나 그러자면 반도체 기술을 담당해줄 회사가 필요했다.

“Do you have a technology partner company in mind?”

스코뤈은 미국에서 가장 반도체를 잘 만드는 회사와 조인하면 좋겠다면서 진 캉에게 염두에 둔 기술파트너 회사가 있느냐고 물었다.

강석진은 군수 기업인 실베니아(GTE Sylvania)를 추천했다. 전기 전자 가전사업 중전기 제품을 다 생산하는 실베니아는 미국에서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반도체 회사였다. 레이더 파를 흡수하는 보이지 않는 전투기 스텔스의 기술 개발도 그들 것으로, 베트남 전쟁을 통해 엄청난 기술과 부를 축적한 기업이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규모도 제일 크고 기술력도 제일 탄탄한 데가 실베니아였다.

실베니아와 합작회사를 만들 수 있겠는가?”

스코뤈은 물었다. 실베니아가 우리 제안에 응할까를 묻는 것이었다. 강석진은 용기 있게 말했다.

부딪혀 봐야죠. 해내겠습니다.”

좋아요. 추진해 보시오.”

유진 스코뤈은 강석진의 사업계획서를 승인했다.

 

실베니아 반도체 디비젼은 보스톤에 있었다. 강석진은 뉴욕투자금융 부사장 자격으로 보스톤에 있는 실베니아를 찾아가 경영자들에게 이야기했다.

접촉을 해보니 유감스럽게도 실베니아 경영진 중에 코리아가 어디 있는지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정도이니 더 이상의 대화가 될 리 없었다.

어떻게든 그들을 설득하여 제휴를 맺어야만 하는 강석진에게는 이보다 난제가 없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며 TV를 보는데 유머러스한 한 프로에서 실베니아 사람들은 대학교수를 좋아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미국의 정치가나 기업인들은 대체로 대학교수를 존경하고 자문을 많이 받는 경향인데, 보수적인 실베니아 사람들이 특히 더하다는 것이었다.

강석진은 이것이 사실일까? 한번 시험해볼 필요를 느꼈다.

그렇다면 한국인 대학교수를 찾아보자.’

보스톤 교포사회를 수소문하니 보스톤대학 경영대학에 필립 최란 한국인 교수가 있었다. 강석진은 바로 바로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했다. 뉴욕투자금융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서 도와달라고 청하며 강석진은 자신의 반도체 사업 프로젝트를 필립 최에게 자세히 브리핑했다.

브리핑을 마치자 필립 최는 아주 좋은 프로젝트입니다. 하며 박수를 쳤다. 그리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미국에 와서 살면서 늘 조국을 위해 할 일이 없을까를 찾았는데잘됐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적극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강석진은 스탠리 리에 이어 필립 최에게서 해외 교민의 가슴에 담겨있는 진한 애국심을 느낄 수 있었다.

필립 최와 함께 실베니아 경영자를 다시 만났다.

필립 최가 나서서 한국의 간략한 역사와 지정학적 위치를 설명하고, 625로 맺어진 혈맹관계, 이후의 동맹관계도 설명한 뒤 한국인의 근면성 정직성 등 기질을 유머를 섞어가며 이야기하니 분위기는 달라졌다. 이어 지금 아시아 경제가 일어나려고 기지개를 펴는 현 시점이 한국에 투자할 적기라고 설득하니 실베니아 중역들의 반응이 기적처럼 반전됐다.

일주일 후 실베니아 측에서 답이 왔다.

“Okay, let's do it together. (좋소, 함께 합니다.)”

협력하는 쪽으로 방향이 정해지자 그들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 같았다.

유진 스코뤈은 강석진이 쉽지 않은 일들을 척척 해결하는 것에 쾌재를 부르며 계속 전폭적으로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강석진은 이후 미국과 한국을 수시로 오가며 일하는 사업가가 되었다. 강석진은 일차적으로 뉴욕에 한국 진출을 목적으로 하는 회사를 뉴욕투자금융과 실베니아 합작으로 만들었다. 보다 적극적인 실베니아 사람들이 회사이름을 미국의 명문대학 이름을 따 다트마우스 일렉트로닉(Dartmouth)이라고 했다. 카네기재단이 다트머스를 매우 높은 연구활동을 하는 대학으로 분류한데서 같은 이미지를 갖게 하려고 그랬다고 했다. 강석진은 다른 생각을 하며 미소지었다. 과연 실베니아 사람들이 대학교수를 좋아하는 게 맞구나 싶었던 것이다. GTE(실베니아) 사람과 GE(뉴욕투자금융)사람이 공동 회장을 맡고 강석진은 부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그 회사 이름으로 한국에 들어와 명동에 다트머스 일렉트로닉 간판을 달았다.

우선적인 것을 정리하고 나서 경제기획원을 찾아가 국장에게 프로젝트를 설명하니 경제기획원 전체가 그게 정말이냐며 크게 반색을 했다. 경제기획원은 즉시 사무관 한 명을 강석진의 숙소가 있는 사보이 호텔 2층에 배치해서 그 복잡한 정부 차원의 5개년 지원책을 만들도록 했고, 일주일 만에 장관 승인까지 나도록 해 주었다. 프로젝트 자체는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되었다.

강석진은 수원에 공장 터를 마련하고 건축설계를 의뢰하는 등 사업을 진행시켜 나갔다. 한국 최초의 외국인 100% 투자기업이었다.

 

10

 

대한전선 설경동 회장이 반도체 공장을 짓는다는 소문을 듣고 강석진을 찾아왔다. 대한전선은 금성사와 더불어 국산 가전제품을 만드는 선두기업이었지만 수출할 엄두는 내지 못하던 때였다.

강석진을 만난 설경동 회장은 반도체 사업의 한국 파트너가 필요하다면 자기를 붙여달라고 진정성 있게 의사를 밝혔다. 강석진은 처음에는 우리 사업은 100% 외국인 자본이 확정이라며 설 회장의 제안을 무시했다.

제안은 무시됐지만 설 회장은 강석진에게 호감을 느껴 자주 만나길 희망했다. 호감을 느끼기는 강석진도 마찬가지여서 두 사람은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설 회장은 70대요 강석진은 30대여서 아버지뻘이었으나 그것이 친분을 쌓아가는 데 걸림이 되지는 않았다.

 

평안북도 철산 출생인 설경동 회장은 주로 수산업 발전을 위해 일해오다가 1954년 대한전선을 창업하여 419혁명 전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5·16군사정변 이후 정부의 기간산업 건설에 참여할 기회를 얻어 대한전선의 시설확충에 전력하였고 1960년대 중반부터는 텔레비전 냉장고 등 전자제품을 생산했는데, 이의 호경기에 힘입어 그의 기업은 재벌로 분류되었다. 국내에서는 그랬지만 수출에서는 이렇다 할 인재를 만나지 못한 그였다.

사업을 추진하면서 강석진은 100% 외국자본 회사이긴 하지만 한국에서의 사업인 만큼 한국기업이 파트너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강석진은 본사에 설경동 회장의 제안을 다시 품의하며 대한전선이란 회사도 소개했다. 그러자 본사는 단서를 붙여 받아들였다. 단서는 공장을 다 짓고 난 뒤에 하라는 것이었다.

단서에 달린 거지만 어쨌든 대한전선을 파트너로 하기로 는 한 것이어서 두 사람의 교류는 더 자연스러워졌다. 설 회장은 미국의 전자 전기 상품 시장과 분위기, 앞으로의 전망 등을 많이 궁금해 하면서 강석진과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다.

 

수원공장 설계까지 마치고 착공에 들어가려는 찰라 미국에서 전문이 날아들었다. 실베니아(GTE) 측에서 사업을 접는다는 청천벽력 같은 내용이었다.

19731월 월남 전쟁이 막을 내리자. 상승일로였던 군수산업이 내리막길로 돌아섰고, 군수산업에 의존하던 반도체 사업이 문을 닫을 처지에 놓인 것이었다.

실베니아 측의 결론은 반도체 산업은 미래가 없다.’ 였다.

반도체가 주였던 회사들은 이때 가전제품 쪽으로 방향을 바꿔 비틀거릴지언정 유지는 했지만 반도체 비중이 높지 않았던 회사들은 반도체 사업을 중지했는데, 실베니아가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강석진에게는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기술을 담당하는 파트너가 물러나면 뉴욕투자증권도 진행할 수 없는 사업이었다. 한국 최초의 반도체공장 프로젝트는 그렇게, 베트남전쟁의 휴전과 더불어 중단되었다.

 

투자 사업이 무산되었으므로 강석진은 한국 사무실을 정리하고 미국 본사로 돌아가야 했다.

허탈했다. 뉴욕투자금융 부사장이 되어 야심차게 준비한 첫 프로젝트가 실베니아의 철수로 이렇게 중단되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물론 그의 책임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만든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그는 허탈하고 그를 지원한 모두에게 미안했다. 뉴욕에 돌아가 유진 스코뤈을 대하는 것도 예전 같지 않을 것 같았다.

 

이때 대한전선 설경동 회장이 강석진을 붙잡았다. 미국 가지 말고 우리 회사 사람이 되어 무역부를 만들고 수출을 총지휘 해달라며 간곡히 붙잡았다. 전기나 전자 등 가전제품용으로 반도체 사업도 살리자고 했다. 강석진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가 빈약한 국가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설경동 회장은 10위 안에 드는 능력 있는 재벌이었다.

하도 간곡히 붙잡는 바람에 강석진은 뉴욕 본사 복귀를 앞두고 전화를 걸어 스코뤈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의논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가전업체이자 반도체 사업의 한국 파트너기업이 될 뻔한 대한전선에서 2년간만 무역업무 지도를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데, 시간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유진 스코뤈은 트인 사람이었다. 우리의 다음 사업으로 가전제품 사업을 염두에 두고 있는 때에 참 좋은 제안이라면서, 한국 제일의 가전제품회사에서 2년 정도 그런 경험을 쌓는다면 나중에 크게 활용될 것이라고 반기며 강석진이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면 승인을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선택은 어디까지나 강석진의 몫이었다. 강석진은 본사 복귀를 위해 쌌던 짐을 다시 풀렀다.

 

강석진은 유진 스코뤈의 말을 그대로 설경동 회장에게 전하고 2년 간 대한전선 가전제품 무역총책을 맡기로 했다. 여전히 수출에 온 국력을 모으는 때였다. 정부의 금융정책과 산업배분이 수출실적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여전했다. 당연히 기업마다 수출을 늘리는데 혈안이 되었었다. 어떤 면에서는 더 강화된 감도 있었다. 국내 판매도 수출량에 따라서 링크제로 허가했기 때문이었다.

 

11

 

강석진은 대한전선 시흥공장에 내려가 현재 생산하고 있는 제품을 살펴보았다. 전선이나 통신기계, 철제철선 등 대한 전선의 주종 제품은 경쟁력이 탄탄한 수준급이었지만 ‘TEC’라는 상표로 시장에 내보내는 텔레비젼, 선풍기, 냉장고, 에어콘, 라디오, 탁상용전자계산기 등은 미국 시장을 아는 강석진이 보기에 수출을 생각을 할 수 없는 조악한 제품들이였다. 강석진은 설 회장에게 느낌을 그대로 말했다.

현재의 제품들로는 수출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최소한 일본의 소니나 파나소닉 미쓰비시 제품들과 경쟁할 수 있도록 새롭고 독창적인 제품을 독자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설 회장은 그간의 고충을 털어놨다.

총체적으로 봐야 하네. 현재의 우리 기술력으로 해낼 수 있는 선이라는 게 있어. 필수적인 협력사들과의 수준도 맞춰야 하니까. 금성사 같은 경쟁사들 제품도 알고 보면 일본에서 폐기하는 구 모델 금형을 갖다가 만드는 게 대부분이야.”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걸 해 내야지요, 일본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경쟁에서 뒤지지 않을 작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일본이나 유럽에 가서 샘플 삼을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알았네. 내 자네에게 백지 권한을 주겠네. 뭐든지 생각나는 거, 원하는 거 다 시도해보게. 다 지원할 테니까.”

설 회장은 강석진에게 백지권한을 주었다.

 

강석진은 곧바로 일본에 건너가 소니 파나소닉 등 일류기업의 최신 인기 제품들을 다 사왔다. 또 유럽에 가서 필립스 등 유명제품 최신모델을 다 사서 모았다. 그리고 대한전선 내 정예요원으로 개발팀을 만들어 자가 모델 개발을 시작했다. 자가 모델 개발은 그때까지 어느 회사도 시도가 없었던 작업이었다. 개발팀의 목표는 다른 회사의 상품을 분해하여 생산 방식을 알아낸 뒤 보나 낫게 복제하는 것이었다.

케이스부터 디자인을 혁신해 개발했고 보드도 새로 만들어 나갔다. 다만 회로 같은 것은 기술력이 담겨 있는 만큼 외국 것을 그대로 베꼈다.

금형을 만드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 도장하는 것 또한 까다로웠다. 그러나 하면 된다 는 의지로 개발팀 전원이 똘똘 뭉쳐 부족한 기술력을 극복해내고 7개월 만에 자가 모델을 출시했다. 선풍기 라디오 TV 냉장고 등이었다.

강석진은 제품 못지않게 카다로그 제작애 신경을 써 아주 고급스럽게 만들어 해외 영업에 나섰다.

일본과 유럽의 제품을 reverse engineering 했으므로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바이어들을 먼저 타켓으로 삼아 사전 판매에 나섰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값싸고 보기 좋고 성능이 뒤지지 않으니 주문이 쇄도해 신제품만으로 시흥공장을 빵빵하게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대한전선은 축제분위기가 되었다.

 

남아프리카에도 라디오를 수출했다. 그런데 남아프리카로 보낸 50만 불 어치의 라디오에 크레임이 걸렸다. 대한전선의 강석진에게 이 크레임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남아프리카는 1961년 독립을 했으나 영국의 영향력은 지속되는 상태였다. 따라서 영국방송을 들어야 하는데 그러러면 단파 수신이 필요했다. 그런데 단파방송이 안 들린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그런 요건이 있어 단파방송 수신용을 수출하기는 했다. 그런데 기술적으로 보면 단파수신은 3.510MHz대의 2밴드형과 822MHz대의 3밴드형으로 구분되는 것이었다. 대략해서 4, 5Km 이내 거리는 2밴드형으로 충분하지만 그 이상의 원거리, 특히 해외방송을 듣기 위해서는 3밴드가 필요한데 수출한 라디오가 2밴드였던 것이다. 기술적 분석을 해 보았을 때 영국방송을 들을 수 없었다.

강석진은 기술팀장과 함께 남아프리카로 달려가 요하네스버그에 아예 코리아 대한전선 A/S센터를 설치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단파의 파장은 10~100m 정도이므로 안테나의 조합을 많이 만들어 한 평면 위에 세우면 이와 직각방향으로 대단히 강한 전파를 보낼 수 있었다. 또한 동조회로의 코일 또는 콘덴서를 전환하면 LF(장파)부터 HF(단파), 나아가서 VHF(초단파)FM방송까지 수신할 수 있었다.

적극적인 A/S로 문제를 해결해주자 남아프리카 정부까지 감동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저런 화제의 사연을 만들면서 대한전선의 제품이 세계 곳곳에서 각광을 받자 세계 최대의 전기소비기구 회사인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이 OEM 방식(위탁자 주문생산방식)으로 대한 전선에 제품 생산을 주문했다. 아시아에서 판매되는 GE상표의 제품들을 대한전선에서 처음으로 생산하게 된 것이다. GE는 제품 규격(도면 포함)과 함께 생산기술도 일부 제공했다.

GE는 집안 구석구석에 들어가는 가전제품부터 CT, MRI, PET, 초음파 등의 의료기기, 자동차 엔진, 심지어는 비행기 엔진까지, 전기가 들어가는 것들은 거의 다 만들고 있는 세계적인 대기업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한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회사였다. 강석진도 전연 접촉이 없었던 회사였다.

GE와 거래를 하게 되면서 살펴보니, GEGE가 만드는 주력 제품들의 특성상 B2C(business to consumer 기업과 소비자 간의 거래) 방식보다는 B2B(business to business 기업과 기업 사이에 이루어지는 거래) 위주의 회사였다. 워낙 고가품인지라 리스 등의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GE캐피털을 자회사로 둬서 거래를 돕게 하고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는 형국이 되었으므로 시장의 평판은 그리 좋지 않았다.

GE 상표의 가전제품만 주문자 요구대로 생산하는 대한전선은 GE캐피탈과도 관련 없고 시장의 평판은 더더욱 상관없었다. 그저 주문 받은 상품만 열심히, 하자 없이 생산하다보니 물량이 늘어나 2년 차에 들어서서는 대한전선 매출의 50%GE 제품이 차지하게 되었다.

전망했던 것보다 거래가 빨리 늘어나자 GE는 다른 포부를 품었다. 한국 시장을 다시 보게 된 것이고, GE Koorea 설립의 필요를 느낀 것이다.

12

 

강석진은 GE와의 거래에 있어서도 한 치 오차 없이 성심성의를 다했다. 덕분에 거래량은 급속도로 늘어났다. 거래 단위가 커지다보니 GE 본사를 왕래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GE CEO인 레지날드 존스(Reginald jons)와 만찬을 하기도 하고 파티에서도 만나는 절친한 사이가 되어갔다. 존스 회장은 아직 미답의 지역인 아시아에 관심이 많았다.

어느 하루 존스 회장은 강석진에게 당신이 GE의 아시아권 영업을 맡아주면 좋겠다. 당신 생각은 어떠냐?”하는 제안을 했다.

강석진은 마음 동하는 제안이지만 지금은 답할 수 없다. 보스와 의논을 해 봐야한다고 즉답을 피했다. 존스 회장은 물었다.

“Who's the boss?”

“My boss is Eugene Scoruwon.”

강석진은 대한전선이 아닌 뉴욕투자증권의 유진 스코뤈을 보스라고 했다. 실제가 그랬기 때문이다. 존스 회장의 눈이 커졌다.

“who is he?”

“He is the CEO of New York Investment Finance.”

강석진이 대한전선이 아닌 뉴욕투자금융 사람이라는 사실에 존스 회장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그렇다면 Capital(자본) 운용이나 Strategic Management(전략적 경영) 등의 개념을 알고 있냐고 물었다.

강석진은 웃으면서 당연히 잘 알고 있지 않겠냐고 응수했다.

허허실실 제안을 했던 존스 회장은 돌변하여 적극적이 되었다. 자기가 정식으로 프로포즈하는 것이니 보스와 꼭 의논하고, 결과를 바로 알려달라고 했다. .

강석진은 유진 스코뤈에게 또 전화를 했다. GE가 나에게 아시아 총책을 맡아달라고 하는데 어쩌면 좋으냐, 하고 물었다. 유진 스코뤈의 답은 이번에도 좋은 기회라면서,

“I hope you have a meaningful time.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기 바란다.)”며 승인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 속에는 이제 강석진을 자기 사람 명단에서 지우는 기운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강석진이 승인을 받았다는 내용을 존스회장에게 전하니 존스 회장은 크게 반기며 필요한 조치를 하겠다고 빨리 정리하고 미국에 돌아오라고 했다.

설경동 회장과 약속한 2년이 되었다. GE의 제안도 있고 해서 강석진은 이제 대한전선을 떠날 시간이 되었다며 설경동 회장에게 인사를 했다. 미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설 회장은 누가 언제 2년 약속을 했냐며 딱 잡아떼며 펄쩍 뛰었다.

절대 안 돼네. 이제 막 시작했는데 어딜 가려고 그래.”

그러나 강석진은 한번 약속한 것, 마음먹은 것은 그대로 밀고 나가는 고집이 있었다. 강석진은 이렇게까지 설득했다.

제가 이번에 가면 GE에서 일할 활률이 더 높습니다. 우리 수출의 반 이상을 GE하고 하고 있는데 내가 GE로 가면 대한전선을 더 잘 챙길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까지 말하며 끝내 가겠다고 하니까 설 회장은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좋네, 정히 가겠다면 소속은 대한전선에 두고 파견형식으로 가게나. 시간을 충분히 줄 테니 거기 가서 많은 걸 배우고 돌아오게나.”

파견이라면 빌려주겠다는 말이다. 그것을 경영자 렌탈이라고 한다면 아마 한국 최초의 일이 아닐까?

어쨌든 설 회장의 고집도 강석진이 꺾을 수 없는 일이어서 결국 소속을 대한전선에 남겨두겠다 하고 미국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다.

강석진이 미국에 가서 GE의 임원이 되어 실체를 보니 전략적 경영(Strategic management)을 운영하는 차원에서는 경쟁자가 없을 정도로 다방면이요, 독보적이었다.

 

13

 

존스 회장은 강석진을 아시아 지역 부사장에 앉히면서 아시아지역의 전략경영을 맡아달라고 주문했다. 아시아지역 도처에 유망한 합작회사를 만드는 것이 임무였다. GE는 발전시스템도 있고 의료기기도 있고 항공기 엔진에다 가전제품도 다양했다. 한마디로 후진국은 물론, 개발도상국이나 중진국 발전에 필요한 모든 기술 갖고 있고 투자할 여유도 있으니까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아시아를 대하는 분위기는 소비시장 쪽이었다.

강석진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경영진을 설득했다.

“GE가 아시아 지역을 소비시장으로만 여기는 것은 바뀌어야 합니다. 달라져야 합니다. 동반자 관계로 격상시켜 함께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아시아지역 전략경영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여러 아시아 나라에 돈을 투자해서 합작회사 만들고 기술을 주어 그 나라 산업발전에 기여도 하는 계획을 만들어 반복적으로 프리젠테이션을 했다. 그러나 그래도 GE의 최고 경영자들은 쉽게 동의를 안 했다.

우리가 왜 그래야 되나. 아직은 그런 거 안 하고 제품을 파는 것만으로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는데.”

강석진은 같은 계획을 수정해서 또 내밀고 또 수정해서 내밀었다.

 

1년 반을 노력해서야 반응을 얻어낼 수 있었다. 최고경영자 회의에서 존스 회장은 말했다.

진 캉, 네가 가자고 하는 방향이 맞긴 맞는 거 같다. 그러나 우린 아직 아시아를 상대로 그런 경영을 해본 일이 없다. 미국의 어느 회사도 그런 경험이 없다. 다른 나라도 없다. 해 보지 않은 걸 시작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정히 믿음이 있고 뜻이 있다면 너의 나라 한국에다 성공모델을 만들어라.”

참석자들 모두 자기 의견을 말했다. 결론은 존스 회장의 말대로 진 캉에게 맡겨, 우선 한국에서 성공모델을 만들어보게 하자는 것이었다.

 

강석진은 첫 사업으로 한국에 아직 없는 의료기기 합작회사를 고안해 회의(meeting)에 올렸다.

그런데 미팅이 시작되기 전 진 캉을 찾은 존스 회장은

진 캉. 당신 잭 만나본 적 있나? 없으면 따라와.”

하고 옆방으로 데리고 갔다.

잭은 잭 웰치를 말하는 거였다. 존스 회장이 물러나고 잭 웰치가 차기 회장으로 결정 난 상태였다.

두 사람을 세워놓고 존스 회장은 말했다.

“This is Crazy Korean and This is Crazy American”

강석진을 미친 한국인이라 하고 잭 웰치를 미친 미국인이라 칭하며 두 사람을 소개시킨 것이다.

두 크레이지sms 그렇게 만나 첫 악수를 나눴다. 강석진은 38세 잭 웰치는 45세 때였다.

강석진이 만든 GE와 한국 삼성과의 의료기기 합작회사 안에 대해 경영자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잭 웰치가 질문했다. 차기 회장으로 확정된 상태여서 발언이나 질문에 무게가 있었다.

삼성이 어떤 회사냐? (삼성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을 때였다.)”

한국에서는 인정받는 회사입니다.”

한국 같은 후진 나라에서 의료기기 생산 판매로 돈 벌 수 있느냐.”

잭 웰치는 “Can you make money?” 하고 직선적으로 물었다. 강석진도 같은 스타일로 대답했다.

“You can earn a lot. It's for sure.(많이 벌수 있다. 확실하다.)”

무엇을 우선 하겠는가? CT? MRI?”

그런 거 사업계획서에 다 있는데 여기서 물어야 하나?”

경영회의 하러 오려는 순간에 사업계획서가 책상에 올라왔다. 그래서 앞부분 요약만 훑어봤기에 내용은 아직 보지 못했다.”

If so하고 강석진은 그 자리에서 설명을 했다.

다 듣고 난 잭 웰치는 즉석에서 참석자들의 찬반을 모았다. 찬성이 다수로 나오자 잭 웰치는 성큼성큼 강석진에게 다가와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강석진이 영문을 몰라 하며 손을 잡으니 잭 웰치는 말했다.

“Let's do it right now that it's decided. We'll give you the most advanced technology. (결정이 났으니까 바로 하자. 우리가 최첨단 기술을 줄 테니까)”

 

1976, GE와 삼성 최초의 합작회사가 태동하는 순간이었다. 이와 함께 GE Korea도 출범했다. 출범 이후 한국의 전력과 발전 등 한국기간산업 육성에 필요한 제품과 기술 지원이 폭넓게 전개되었다. GE는 발전, 항공, 헬스케어, 조선해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 정부 및 기업들과 협력하며 파트너십을 추진했고, 국내뿐만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의 동반성장 기회를 발굴하고 확대하고자 적극 협력했다. 현대캐피탈도 현대차그룹과 GE캐피털 합작으로 태어났다.

 

14

 

돌이켜보면 강석진의 인생여정은 잭 웰치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잭 웰치를 만난 이후 여기저기 흩어졌던 행적들이 한 곳으로 모이며 하나하나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잭 웰치도 성공한 CEO로 꼽히지만 그 역시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회장으로 퇴임하기까지 41년간 많은 오판과 실수를 하는 인생여정을 살아왔다. 수많은 위기를 극복하고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상사, 동료, 부하들과 누구보다 더 원만하게 지낸 인품을 바탕으로 위기 때마다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했고, 용기를 잃지 않았으며 자신감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어려움이 닥치면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노력에 있었다. 훌륭한 조력자들이 잭 웰치의 성공을 이끄는 데 일조한 것인데 그 조력자 중에 강석진 진 캉도 있었다.

 

잭 웰치가 회장에 취임한 날 강석진은 물었다.

아사아엔 가 봤는가? 한국엔?”

잭 웰치는 웃으며 답했다.

아시아에는 몇 번 갔는데 한국에는 안 갔다.”

강석진은 힘을 주어 말했다.

흐름으로 볼 때 GE의 체어맨이라면 매년 아시아를 몇 번씩 가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시아의 경제가 빠른 속도로 성장할 것이니까, 그러니까 GE의 미래는 아시아와의 협력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나도 동의한다. 알았다. 매년 가겠다.”

아시아에 오면, 올 때마다 한국에 꼭 들려야 한다.”

그러자 잭 웰치는 어림없는 소리 말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노노노. 아시아는 동의하겠는데 한국은 왜 가야 하느냐? 아시아. 그 많은 나라 중에서 GE의 회장이 결정할 것이 있는 나라만 가는 것이지 한국을 매번 왜 가야 하느냐.”

강석진은 자신감을 얹어 말했다.

한국이 아시아에서 가장 성장이 빠를 것이니까.”

순간 두뇌 회전이 빠른 잭 웰치는 진지해졌다.

좋다. 그럼 조건이 있다. 한국 GE를 책임진 진 캉이 회장인 내가 직접 결정해야만 할 프로젝트를 매년 하나씩 만들어라. 약속할 수 있느냐?”

오케이. 그렇게 하겠다.”

사실은 강석진의 입장에서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약속이었다. 그러나 강석진은, 이번엔 먼저 손을 내밀어 약속의 악수를 청했다.

농반 진반일 수도 있었던 이날의 약속이, 그러나 실제로 이루어졌다. 1980년 회장에 취임한 이래 매년 10월 한국에 왔고, 그때마다 새로운 큰 프로젝트를 결재했다.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신용어가 유행처럼 번질 때였다.

매년 1월 첫째 주 경영회의를 하는데 1986년 오프닝 스피치에서 잭 웰치는 이렇게 말했다.

“GE의 글로벌제이션은 진 캉이 만들어 실현하고 있다. 이를 모델로 하면 된다.”

강석진이 GE의 글로벌제이션 가이드라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잭 웰치는 그렇게 강석진을 신임했다. 그 신임에 힘입어 한국으로의 기술 도입, 산업 발전에 강석진은 큰 공헌을 했다.

항공기 엔진기술, 엔지니어 플라스틱 기술, 동양실리콘의 실리콘 기술GE에서 다 전수받았다. OCI가 태양광발전소 만드는 것이나, 두산중공업도 GE의 발전설비 터빈설계 기술을 가져온 것이다. 강석진이 다 어레인지 했다.

 

그에 비례해서 수익이 좋았다 첫해 300만 불 정도였던 것이 몇 해 안가 4억불로 높아졌을 정도로 누렸다.

2000년 잭 웰치가 은퇴할 때까지 강석진도 일했는데, 매년 10월 잭 웰치가 올 때쯤 되면 청와대에서 미리 강석진에게 전화를 해 청와대 방문일정을 잡아달고 했다. 그래서 올 때마다 청와대를 초대받아 갔고, 올 때마다 이병철 회장도 만났고 (후에 이건희로 이어져) LG 한국중공업 한국전력 등 많은 기업들하고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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