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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언제 읽어도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위선이나 불의에 대항하여 정의를 세우면서 인간성을 옹호하고 정신을 이끄는 따위는 다음 이야기입니다. 잔잔한 물결처럼 다가와 가슴을 파고드는 반취 이기윤의 소설들에는 독특한 향기가 있습니다.

단편
2022.07.03 12:45

런 바이 두잉 (Learn by do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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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단편소설


1

 

왜 그만두려고 그래?”인사부 김 차장은 고개까지 갸웃하며 물었다.

어디 다른 데서 프로포즈라도 받았어?”

1990. 시중 은행들이 연간 보너스를 1200% 이상 지급하며 호황을 누리던 때였다. 너도나도 은행에 들어가려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터에 한참 일 잘하던 행원이 사직원을 제출해서 하는 말이다.

그런 거 없습니다. 개인 사업을 해보려고 합니다.”

박윤근은 분명하게 말했다. 결심이 확고하다는 표시였다. 그러나 김 차장은 박윤근 대리의 말을 못 미더워했다.

박 대리. 지난 5년 동안 자네를 지켜본 사람들이 있어. 여러 면에서 행 내에서는 힘이 있는 사람들이에요. 나도 그 중의 하나고. 혹시 다른 은행이나 금융기관으로 옮길 생각이라면 그냥 우리 은행에 있어요. 뒤를 확실히 챙겨줄 테니까.”

그는 박윤근 대리의 인사고과표를 찾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업무지식이나 수행능력, 업무처리속도, 협조능력, 조직기여도, 책임감, 적극성 등등 평가항목의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는 행원이었다.

말씀은 고맙습니다, 다른 데로 옮기려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 사업을 해보려는 게 맞습니다.”

개인 사업을 해 보겠다고?

그래도 미심쩍은 박 차장이다. 호황은 사람들에게 더 큰 수익을 원하도록 부추긴다. 호황 속에서 금융기관끼리 수익률 경쟁을 하다 보니 유능한 인재를 스카우트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들의 소속은 조흥은행이었다.

무슨 사업을 하려고?”

현재 입장에서 딱히 이거라고 말씀드릴 건 없습니다. 닥치는 대로 할 생각입니다.”

거 봐 이 사람.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지

절대 아닙니다. 사실을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분명한 계획과 자본을 가지고 해야 하는 게 사업인데, 닥치는 대로 해보겠다고? 멀쩡하게 좋은 직장 팽개치고? 그런 말을 누가 믿겠나.”

하지만 그게 진실입니다.”

다시 생각해 봐요. 5년이면 은행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는 때에요. 은행생활에 익숙해진 사람이 밖에 나가 사업해서 성공하는 예는 흔치 않아요. 은행이라는 데가 사실 땅 짚고 헤엄치는 식의 사업 아닌가. 바깥은 약육강식의 거친 바다처럼 살벌하다고. 그런데 닥치는 대로 사업이라니일단 가서 일해요. 나중에 다시 얘기합시다.”

소파에 마주 앉았던 박 차장은 먼저 일어나 자기 자리로 갔다. 따라 일어선 박윤근은 돌아서는 박 차장에게 던지듯 의지를 밝혔다.

차장님이 뭐라고 하셔도 저는 이 달까지만 근무할 겁니다.”

 

자리로 돌아오니 옆 자리 동료 여직원이 집에서 전화가 왔었다고 한다. 집이라면 아내다.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하니 아내도 불안해하며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엊그제, 걱정하지 말라며 저녁 내내 나의 결심을 이야기해서 이해를 한 줄 알았는데 왜 또 직장에까지 전화를 했을까? 평소에 남편의 직장으로 전화를 하지 않는 아내였기에 얼른 전화를 걸었다. 기다렸다는 듯 아내가 얼른 받는다.

전화했었어?”

. 어머니가 오셔서 요술 잡숫지 말고 일찍 오셨으면 해서요.”

엄마한테 나 직장 그만둔다는 거 얘기 했군?”

했죠. 어떻게 안할 수가 있어요.”

에이 참, 그만큼 걱정하지 말라고 얘기했건만알았어. 일찍 들어갈게.”

박윤근은 답답했다. 왜 그렇게 자기를 믿지 못하는 걸까? 샐러리맨 생활을 접고 사업을 한다는 것은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 보려고 그러는 건데.

박윤근의 생각은 그랬다. 그의 생각은 그저 더 많은 돈을 벌어 보고 싶은 게 전부였다. 땅을 갖고 싶다거나 호화로운 집에서 외제차 굴리며 잘 살아보겠다는 따위 어떤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단순히, 자기 능력을 테스트해 보는 차원에서 좀 더 많은 돈을 벌어보고 싶고, 그래서 어느 날 일억 원 정도 통장에 쌓이면 현금으로 찾아 아내에게 주며 마음대로 써요.’하고 호기(?)나 부려보고 싶은 게 전부였다.

그러나 아내의 입장이 같을 수는 없었다.

 

2

 

박윤근의 아버지까지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살았는데 육이오 전쟁 때 월남하여 서천에 둥지를 틀었다. 서천에 간척지를 만드는데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한다 해서 일자리 찾아 서천으로 간 것이다. 박윤근의 기억에 있는 아버지는 그렇게 모든 재산을 해주에 남겨놓고 내려와 간척지 노동자로 살았다. 새로운 시작이었지만 아버지는 직계 가족만이라도 다 데리고 내려온 것에 만족했다.

형과 누나는 해주에서 태어났다. 다만 4남매 중 막내인 박윤근은 휴전이 되고도 3년 뒤인 1956년 서천에서 태어나 자랐다.

간척지 노동자의 임금은 형편없었기에 어린 시절이 몹시 가난했다. 그러나 다른 형제는 몰라도 박윤근은 가난이나 돈에 한이 서리지 않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기 필요한 돈은 벌어서 쓸 수 있는 DNA라도 품고 태어난 양 마음 먹고 움직이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든 그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돈이 생겼다고 해야 할까. 벌었기 때문이다. 물론 장사를 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장사도 아니요,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돕자고 하는 장사도 아니었다. 그냥 눈에 띠고, 할 수 있어서 하다 보니 용돈이 생기니까 이거 재미있네.”하며 한 장사였다.

중학교 다닐 때부터 그랬다. 서천에 살면서 자전거타고 대천중학교를 다녔는데 가는 길에 제빵 공장이 있었다. 당시 빵 하나에 10원 하던 때였다. 가는 길에 공장에서 6원을 주기로 하고 받아 자전거에 싣고 가 학교에 가서 8원에 파니까 금세 팔렸다.

자본이라는 게 필요 없었다. 등굣길에 받아 싣고 가 학교 가서 팔고, 하교 길에 빵 값을 주면 되었다. 잘 팔린다고 해서 많이 싣고 가는 등 무리하진 않았다. 언제나 자전거에 실을 수 있는 만큼만 가져갔다. 조금 모자랄 때가 많았는데 박윤근은 어린 나이에도 그 약간 모자라는 정도를 즐겼다. 빵을 팔아 번 돈으로 중학생 시절 용돈은 웬만큼 부자 집 아이들보다 풍족하게 썼다. 박윤근의 신용은 이때부터 뿌리를 내렸다.

 

그런 식의 그 특유의 장사는 대학교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동고를 거쳐 건국대 법대에 진학했는데 대학생 시절에는 엉뚱하게도 쌀장사를 했다. 마찬가지였다. 서천간척지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쌀을 약간만 남기고 교수들에게 거의 산지 값으로 팔았다. 품질 좋은 쌀을 시중보다 싼값에 파니 소문이 났고 주문이 쇄도했다. 주문량만 처리해도 등록금이며 용돈이 되었다.

박윤근은 대학 4년 동안 그의 쌀을 먹지 않은 교수는 한 분도 없었다고 술회한다. 이때도 그에게 자본이나 물류창고 같은 시설은 필요 없었다. 그가 키운 자산이 있다면 오직 하나 신용이었다.

군 생활 때도 그런 식으로 돈을 벌었고 짧은 휴가 때도 같은 방법으로 필요한 돈을 벌어서 썼다. 전역 후 잠시 공백이 생겼을 때는 고향에서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잠시도 놀지 않고, 주변에서 남이 생각하지 않는 엉뚱한 아이템을 찾아 밑천도 없이 필요한 돈을 쉽게 벌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선까지는 돈 버는 일을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찾는 동물적 감각 같기도 했다. 배가 차면 먹을 게 남아있다 해도 미련 없이 그만두는 동물의 습성처럼 그에겐 저축 개념도 없었다. 더 많은 돈을 벌려는, 벌어서 쌓으려는 욕심도 없었다. 그렇게 욕심을 부리지 않은 탓인지 돈을 벌면서 한 번도 트러블이 없었다. 그러나 큰돈이 아니었다. 그저 자기에게 필요한 등록금이나 용돈 정도였다.

졸업 후에는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심심풀이 같은 가벼운 장사 따위 잊어버리고 평범하게 살 생각을 했다. 그래서 첫 직장으로 대한통운에 입사했는데, 다녀보니 그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망설일 그가 아니었다. 얼른 그만두고 85년 조흥은행에 들어가 대출이며 여신관리 등 영업을 하며 지냈다. 내 돈이든 남의 돈이든 역시 돈이 움직이는 곳이 그가 있을 곳인 것처럼 은행 일을 하는 마음이 편했다.

 

조흥은행 시절에는 사내 동료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강좌 시간에 스쿠버다이빙 과목을 넣고 강사를 맡아 부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1980년대는 스쿠버다이빙이 우리나라에 겨우 소개되던 때였다, 스쿠버다이빙 강사를 육성하는 곳도 패디(PADI) 한 곳 뿐이었는데, 특이한 안목의 박윤근이 일찍 관심을 갖고 한 발 앞서 자격증을 딴 것이었다.

3

 

그래도 은행에 있던 기간은 한 눈 팔지 않고 비교적 충실하게 은행일 만 했다. 5년이 금세 지나갔는데 돌이켜보면 그 시절(1985~1990)이 우리나라에선 은행원 전성시대였다.

당시 우리나라 은행들의 BIS 비율은 3% 이하였다. BIS 비율은 국제 결제 은행(BIS)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돈을 빌리고 투자하는 은행들에게 지키도록 한 필수규정으로, 요약하면 금융 기관의 안전성을 나타내는 자기자본 비율인데 그게 3% 내외였다.

풀어서 설명하면 은행에 3만 원만 있으면 그걸 자본으로 백만 원까지 대출 운용이 가능했다. 대출이자가 연 12%를 넘나드는 때였으니 결국 3만원 쥐고 앉아 연 12만 원 이상을 벌어들이는 구조였다. 신용대출은 하늘의 별따기요, 99% 담보대출이니 은행은 땅 짚고 헤엄치는 장사였다. 돈이 막 들어와 쌓이니 은행마다 보너스를 연 1200%나 주었고 그래도 이익금이 넘쳐 어떤 연말에는 월급의 400%를 보너스로 지급하기도 했다.

자본 없이 돈 버는 은행의 그런 생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박윤근의 타고난 생리와 꼭 맞아 떨어졌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찾고, 남이 보지 못하는 걸 찾아내 실험하는 박윤근이 5년이나 꾹 눌러앉아 은행원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절에 결혼하여 딸 둘을 낳아 기르던 행복감도 작용했지만 그보다는 은행과 자신의 생리적 동기감응(同氣感應)에서 기묘한 쾌락을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5년이 한계였다. 어느 날 문득 생각하니 비슷한 생리를 가진 은행이 이렇게 쉽게 버는 데 자기라고 못 벌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은행에서 주는 월급이나 보너스로는 양이 차질 않았다. 매여 지내는 것도 그랬다. 그는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었고 자유롭고 싶었다. 기업을 만들고 싶은 게 아니었다. 몇 백 억, 몇 천 억 재벌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하겠다는 목표가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현재보다 는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었고, 얼마만큼 돈을 벌 수 있을까 자신의 능력을 테스트하고 싶었다. 거기 플러스 알파로 역마살이랄까, 타고난 보헤미안(Bohemian) 기질이 그를 은행에 눌러있게 놔두지 않았다.

 

그런 생각에 젖어 지내던 하루 염료도매를 하는 M 사장이 수입신용장을 개설하고자 해서 서류를 검토하는데 박윤근의 호기심이 작동했다. 액수가 생각보다 크기 때문이었다. 수입신용장은 은행이 국내 수입상의 요청에 따라 해외 수출상에게 지급을 보증하는 일종의 확약서인데 상대 수출상은 영국이었다.

무슨 염료를 취급하세요?”박윤근은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가죽 염료에요. 가죽제품 염색에 쓰는 겁니다.”

, 그걸 영국에서 들여오는 군요. 가죽제품하면 스페인이나 이탈리아가 떠오르는데그쪽은 아닌가요?”

에이, 그건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가죽이 많이 생산되는 곳은 남미죠. 그러나 남미에는 이렇다 할 염료가 없어요. 염료는 반대로 인도나 모로코 등이 좋은데 직접 거래할 라인이 없어요. 인도의 알짜는 아직도 상당부분 영국이 주무르니까

그래서 영국에서 수입한다고 한다. 인도와 영국의 역사적 관계를 생각하면 수긍이 간다.

영국에서 수입하는 게 본래는 인도산이라는 말씀입니까?”

어떻게 아세요? 맞습니다. 이탈리아나 일본에서도 수입해봤어요. 근데 영국 게, 아니 인도 것이 제일 괜찮습니다.”

재수출도 하시나요? 국내는 피혁 제품 수요가 이렇게 많지 않지 않나요?”

아유 국내도 가죽 수요는 많죠. 의류 가방 구두부터엄청 많아요. 수요는 많은데 질 좋은 염료를 구하기가 힘들어요,”

그렇게 힘들어요?”

정보가 없으니까 그렇죠. 원산지 정보가 없어요. 해외출입도 원활하지 않고

1988년 서울올림픽 이전에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다.

인도가 원산지라는 소리가 있는데 영국이 갖다가 깡통갈이 해서 팔기 때문에그 이상의 팁이 없어요.”

깡통갈이가 뭐에요?”

원액에다 중화제를 섞어 양을 부풀린 거죠. 다들 그렇게 하니까 이상할 건 없어요. 아무튼 우리나라가 수요도 많고 디자인 등 제품 가공도 부족함이 없는데 양질의 염료를 구하지 못해 결국 세계시장에서의 품질 경쟁에서는 밀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질 좋은 원액이 구해지면 여러모로 좋겠군요.”

아유 두말이 필요 없죠. 이 계통에선 염료질만 좋으면 부르는 게 값이고 돈 버는 거 금세에요.”

그렇군요.”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M사장이 원하는 서류 처리가 끝났다.

, 다 됐습니다.”

M사장은 자신이 원하는 업무를 박윤근 대리가 시원하게 처리해 주자, 고맙다며 언제 식사라도 한번 대접할 기회를 달라고 했고, 박윤근은 점잖게 사양했다.

 

4

 

1989년 말의 일이었다. 국내 가죽제품은 수출에만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니라 국내 시장에서도 일본이나 이태리 스웨덴 등 유럽제품에 밀려 찬밥 신세라고 했다. 국내 최대의 염료 공급업체인 아폴로나 태양염료 등에 알아보니 그들이 수입해 공급하는 것도 대부분 원산지 표시가 없는 깡통갈이 제품이라고 했다. 원액을 들여오지 못하는 이유는 공급처에서 생산지 정보를 사업비밀로 여기기 때문이었다.

박윤근의 호기심은 그 특유의 안테나를 세워 원산지를 찾아보았다. 수소문 끝에 세계에서 제일 양질의 염료를 생산하는 나라가 인도라는 사실을 알아낸 뒤 주한 인도대사관 상무관과의 접촉을 통해 인도의 염료시장 자료를 모아 분석하고 탐색했다. 알아본 즉, 서인도 봄베이시 근교의 구자라트 지방이 주된 공급지라는 걸 알아냈다, 거긴 마하트마 간디의 고향이기도 했다. 인도가 넓어 봄베이시 근교라 하지만 봄베이에서 비행기로 1시간 20분이나 가야하는, 서울에서 부산가기만큼의 거리였다.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박윤근은 내친 김에 국내에서 제일 많이 쓰는 염료의 종류를 파악한 뒤 같은 성분의 염료 원액 가격을 알아보았다. 결과는 박윤근을 자극할 정도였다. 현지 가격 대비 국내 가격은 보통 5~10배였다. 특수 염료는 20배에 달하는 것도 있었다. 영국이나 제3국에서 들여오는 경우는 그 중간을 보면 되었다.

박윤근은 머리를 굴려보았다. 인도에서 천만 원 어치를 가져오면 순식간에 그것이 오천만 원이나 일억 원이 되는 것이었다. 수요도 적지 않았다. 기존 수입업체들 자료를 보면 국내에서 유통되는 것만도 년 20억 원 시장이었다. 본봉 백여만 원에 보너스 1200%라고 좋아하는 인기 직종인 은행원이라지만 연봉 3천만 원도 안 되는 수입과 총량적 비교를 하니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박윤근은 고민할 것도 없었다. 염료를 수입해 국내 도매상들에 넘기기만 해도 은행원 봉급의 다섯 배 이상은 벌 자신감이 생겼다. 물론 박윤근은 법학도로써 화학은 몰랐다. 그러나 그런 것을 걸림돌로 삼지 않는 게 또한 박윤근이었다. 염료 하나에만 승부를 걸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하다보면 얼마든지 다른 아이템이 생겨날 수 있다. 다만 은행을 그만두는 동기로서의 아이템이 염료인 것이었다. 그는 은행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사직원을 낸 것이다.

 

은행문은 4시 반에 닫지만 잔무가 많아 보통 7시나 되어야 퇴근한다. 창구 직원들은 현금 잔고까지 맞춰야 하니까 먼저 퇴근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는데 여신관리팀은 융통성이 있어 조금 일찍 퇴근했다. 집에 가니 무엇보다 딸들이 좋아한다. 아내는 저녁 준비를 다 해놓은 표정이다. 장모도 거실에서 나와 문간에서 맞는다. 박윤근은 아내에게 말했다.

미리 전화를 할까 하다가 시간이 넉넉한 거 같아서 그냥 부지런히 왔는데 우리 나가서 먹읍시다. 어머니도 오셨는데

저녁준비 다 됐어요. 당신 좋아하는 찌개에다 돼지갈비도

왜 나 좋아하는 걸 해. 어머니 좋아하시는 쇠고기 쪽으로 준비하지.”

아유 박 서방 나는 괜찮네. 나도 돼지갈비 좋아 해.”

어쨌든 오늘 저녁은 나가서 먹읍시다. 패밀리레스토랑 가지. 가서 등심 먹자고.”

준비한 건 어쩌고요.”

그거야 내일 먹으면 되지 뭐.”

박윤근은 자기 주장대로 아내와 장모, 그리고 두 딸을 데리고 패밀리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그 자리에서 장모의 걱정하는 소리는 자연스럽게 나왔다.

은행 그만두고 사업하려고 한다면서? 남들은 들어가지 못해 안달하는 은행을 왜 그만두려고.”

걱정 마세요. 장모님.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어서 그래요.”

박윤근은 웃으면서 말했다. 자신감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아내는 끼어들지 않고 듣기만 한다. 전날 열심히 설득을 한 덕분인 것 같기는 한데, 그러나 아내가 궁금해 했던 걸 장모가 다 묻는 걸 보니 헛 설득이 된 것 같다.

사업이란 게 자본이 있어야 하는데 자넨 그런 게 없지 않은가.”

처가는 좀 재산이 있는 편이다. 그리고 사위 집안은 가난한 것을 아는 장모다.

그것도 걱정 마세요. 전 자본 없이 사업 잘 합니다.”

에이, 그건 말이 안 되지.”

장모님. 거대한 은행도 사실은 자본 없이 하는 사업이에요. 몰라서 그렇지 자본 없이 굴러가는 사업이 우리 사회에는 많습니다.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은행이 왜 자본이 없어. 난 그런 소리 처음 듣네.”

하하하하 모르셔서 그래요. 은행이란 데가 사실 자본은 별로 없는 데에요. 제도의 힘이죠. 대신 사고가 없어야 하니까 담보를 철저히 잡는 겁니다. 아무튼 장모님 걱정하시는 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장모님 앞에서 아내에게 약속할게요. 3개월 후부터는 지금 은행 월급의 두 배를 매 달 아내 통장에 넣어주겠습니다. 그럼 되겠죠?”

“3개월은 뭐하고?”

해외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얻어야 해요. 그 동안은 퇴직금 나눠 쓰면 되고요.”

그렇게까지 자신 있어 하니 더 말하지 않겠네만 멀쩡한 직장 그만두고 자본도 없이 사업을 하겠다는 게 난 이해가 안 되네. 여자에겐 남자가 안정적인 직장 갖고 있는 게 최고거든.”

당신도 그래?”

박윤근은 조용히 고기만 굽는 아내를 끌어들였다. 아내는 주저 없이 말한다.

그럼요. 불확실한 사업가보다 은행원의 아내가 더 낫죠.”

……

박윤근은 뒤통수를 맞은 격이 되었지만 웃음으로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야기 하는 중에 식사가 끝났다. 디저트로 열대과일 소스를 곁들인 케이크가 나오고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서로의 생각만 확인한 자리였다. 박윤근은 사업 의지가 확고함을 보여주었고, 아내와 장모는 불안한 심정을 드러냈는데, 장모는 거기에 붙여 사업하다 힘들어진다 해도 행여 자기 딸에게 돈 구해오라는 따위 심부름 시키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고 했다. 처갓집 덕 볼 생각일랑 아예 말라는 말과 같았다. 박윤근은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하고 단단히 약속드렸다.

 

5

 

은행을 그만 둔 그는 동대문 운동장 근처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화신무역이란 무역회사 간판을 내걸었다. 회사 이름에 염료를 특화하지 않은 것은 닥치는 대로 무역을 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다만 일차로 염두에 둔 아이템이 염료인 만큼 자료를 최대한 수집했다. 법학을 전공한 그에게 화학은 생소한 분야여서 얼른 얼른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다만 염료가 어떻게 쓰이고 대중적인 것은 무엇이며 또 어떤 염료가 고급인지 살펴보았다.

국내에도 태너리(tannery)로 불리는 가죽무두질 공장이 많았다. 무두질은 가죽이 썩지 않게 만드는 작업을 일컫는 말이다. 도축장에서 고기를 발라낸 뒤 고기 위쪽의 생가죽을 썩지 않게 소금을 뿌려 염장해서 보내는 곳이 태너리이다. 태너리에서 생가죽 위쪽은 털을 뽑아서 매끄러운 표피층만 남기고, 아래쪽은 북실북실한 단백질섬유 조직 밑에 아직 남거나 묻어있는 지방 조직을 제거한다. 그 후 단백질을 화학적인 공정으로 썩지 않게 만든다. 태닝은 크롬 태닝 작업과 베지타블 태닝 작업이 가장 많이 사용되는데 내열성, 내수성 차이 때문에 크롬 태닝 가죽 제품이 성능 쪽에서는 우수하다고 여겨진다. 무두질 방법에는 식물성, 크롬, 유성, 광물성 등이 있다.

가죽에 염색만 하고 코팅처리를 하지 않는 풀 아닐린, 최소한의 코팅처리만 하는 세미 아닐린, 그 외에 피그먼트, 바이캐스트 등에 염료 작업을 한다. 가죽이나 인조가죽 염색은 제품 특성상 보통 염료를 덧칠한다. 일종의 색상교정코팅이다. 가죽코팅은 수성염료를 구입해서 자가 코팅이 가능하다. 구두 가방 소파 자켓 카시트 등 용처도 많고 칼라도 다양하다. 화이트 파치먼트 라이트그레이 다크밍크 블랙 아이보리 핑크베이지 비스킷 라이온 헤이줄 코코아 로드 엠버 브라이트레드 클래식블루 포레스트그린 다크 블루등등 염색도 알려고 하면 알수록 그 세계는 더 깊고 넓어졌다.

대충 공부를 했다 싶은 박윤근은 세계에서 가장 질 좋은 염료를 생산한다는 인도의 구자라트에 가서 샘플을 구입해오기로 마음먹었다. 샘플을 가져와서 염료도매업체에 뿌리고, 주문이 오면 일부 선금을 받고 수입해서 납품해주는 방식을 구상한 것이다. 그것은 박윤근 스타일의 자본 없는 사업이기도 했다.

부족한 지식은 현장에서 보충하는 것이 지름길이라는 게 그의 철학이었다. 사전지식이 꼭 필요한 건 아니다. 구매에 진정성이 있으면 파는 사람들이 더 자세히 설명해주는 법이다. 이건 산성 이건 알칼리 이건 어디 쓰는 거박윤근의 사업 방식은 자본 없이 진행하는 특징도 있지만 그 보다는 일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일하는 런 바이 두잉(learn by doing) 자세에 더 큰 특징이 있었다.

 

6

 

구자라트에 가려면 봄베이로 가야하는데 직접 가는 항공편이 없었다. 홍콩에서 갈아타야 하므로 박윤근은 홍콩행 비행기를 탔다. 자유무역도시 홍콩은 처음이었다. 88 서울올림픽에 즈음하여 우리나라도 해외여행이 자유화 되었으므로 항공사나 트랜스퍼(Transfer) 시간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었다. 특히 홍콩은 비자가 필요 없기에 더 자유로웠다. 그는 홍콩에 가는 김에 3일 정도 머무르며 다른 무역거리가 있나 둘러볼 생각을 했다.

 

비행기 여행은 사람을 들뜨게 하고 뭔가를 찾아보게 만든다. 비행기를 많이 타지 않은 사람은 둥근 기창을 통해 구름바다를 보고 싶어 창가 자리를 원한다. 그런데 창가에 앉다 보면 본의 아니게 통로 쪽 승객을 자주 불편하게 만든다. 식사 때도 그렇고 화장실 오갈 때도 그렇다. 그러다보면 웬만큼 낯을 가리는 사람도 이야기를 하게 된다. 박윤근도 그랬다. 한 차례 신세를 진 뒤 박윤근은 중년의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Where do you live? (어디 사세요?)

I live in Hong Kong. What about you? (홍콩 삽니다. 당신은?)

I am Korean. (나는 한국인입니다.)

대부분의 한국인처럼 10년 이상 영어를 배우긴 했지만 활용이 없어 능숙하지 못한 박윤근은 대화를 더 끌어갈 수 없었다. 그때 옆의 옆 사람이 물었다. 박윤근이 탄 비행기는 보잉 747기로 양 사이드에 좌석이 3, 가운데에 4개가 있었다. 박윤근과 나란히 앉은 둘은 일행이었다.

Where are you going? (어디 갑니까?)

To visit India. (인도를 다녀오려고요.)

Is that soWhat business are you in? (그렇군요. 무슨 사업하세요?)

We'redoing Trade (무역을 합니다.)

Trade? something? (무역? 어떤 물건?)

something? 하하하. 박윤근은 웃으면서 더듬더듬 말했다. I do everything that makes money. 하하하 (돈 되는 건 다합니다)

so soIs that soIf thenDo you have heavy construction equipment?

(그러면 중장비건설장비 같은 것도 취급합니까?)

Of course. I'm doing everything I can. (물론이죠. 돈 되는 건 다한다니까요.)

그러자 홍콩인들은 진지해졌다. 명함을 내밀며 자기소개를 하는데 키가 크고 마른 사람이 데이빗, 보통키에 비만 끼를 보이는 사람이 티씨우엉이었다. 우연히 비행기에서 만났지만 우연 같지 않은 만남이라면서 반가워했다. 그들은 한국에서 중고 중장비 건설장비 등을 홍콩에 들여오고 싶어 했다.

박윤근은 자신이 전직 은행원(former banker)임을 밝히고 재직 당시 무역금융 파트에서 일을 했기에 수출입이나 외환 업무에 밝고 다방면에 발이 넓어 중계무역에는 적임자라고 했다. 언어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지만 손짓 몸짓에 글씨를 쓰고 그림까지 그려가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런대로 의사전달은 되었다. 그는 무엇보다 한국 은행원 출신들은 신용이 짱이라며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조달할 수 있다고 했다. 데이빗이 말했다.

건설장비가 값 싸고 품질 좋아 한국산을 선호하지만 시스템이 다른 게 문제입니다. 한국은 운전석이 왼쪽이죠. 홍콩에서는 오른쪽에 있어야 합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박윤근은 주저 없이 말했다.

그거야 얼마든지 가능하겠죠. 왼쪽 오른쪽 운전석만 바꾸면 되지 않습니까? 주문할 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한두 대 경우도 가능하겠습니까?”

어쨌든 주문하시면 최대한 맞춰드리겠습니다.”

중장비는 박윤근이 모르는 분야였다. 그러나 중장비는 뭐 별거인가. 여기면서 시원하게 말해 주었다.

우연이지만 아주 능력 있는 분을 만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크레딧 박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박윤근은 잠깐 생각했다. 일감에도 무역을 하는데 매우 흡족한 영어 애칭이 얻어진 것이다. 그는 흔쾌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좋네요. 이제부터 나는 아임 크레딧 박입니다. 하하하하 그러십시오.”

크레딧 박. 필요한 장비 목록이 정해지면 연락하겠습니다. 건설장비 장사 같이 잘 해 봅시다.”

데이빗이 새삼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옆의 티씨우엉도 손을 내밀었다. 박윤근도 손을 내밀었다. 우연히 비행기에서 만난 셋은 도원결의라도 하는 듯 손을 굳게 쥐었다. 여행 중에 만난 그들이지만 자세가 너무 진지했다. 박윤근 또한 가볍게 여길 약속이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설명했다.

“19977월 홍콩이 중국에 반환됩니다. 그때를 대비해서 중국과의 접경인 신계(新界)지구 개발 건설이 한창 추진되고 있습니다. 덤프부터 시작해서 굴삭기 불도저 그레이더 페이로다 압축징계차 압놀 스트리트스위퍼 진동로더 등등 필요한 게 많습니다. 홍콩 신계뿐이 아닙니다. 그 접경지역인 중국의 선전 시 또한 도시 전체가 공사장입니다. 우리 셋이 손잡고 건설장비 장사 제대로 해 봅시다.”

그들이 원하는 방식은 자기네가 필요로 하는 장비를 제값에 구해주면 리베이트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박윤근이 자본을 마련하고 회사를 만들고 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고용관계도 아니요 동업도 아닌 자유업. 그러면서 경험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 그건 박윤근 스타일에 맞는 사업이기도 했다. 뜻밖의 행운 같은 일이었다.

김포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3시간 40분을 날아 홍콩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박윤근은 예정했던 대로 3일간 홍콩에 머물렀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데이빗과 티씨우엉과 함께 보냈다. 그들은 홍콩의 심장과도 같은 빅토리아 하버에 사무실을 갖고 건설장비 중계매매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때였다. 각종 입찰에도 참여하고 있었고, 계획대로 잘 풀리면 건설장비 중계매매를 넘어 장비임대업까지 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박윤근에게 한참 진행 중인 신계지구 건설개발 현장도 보여주었다. 신계는 카우룽 반도 북부에서 중국과의 접역에 이르는 곳. 선전과의 자연 경계지가 되는 선전강 사이의 넓은 지역으로 홍콩 전체 면적의 70%를 차지하지만 인구는 채 10%를 못 넘는 곳이다. 그런 곳이 신흥 주거지역으로 주목받으면서 도처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고 있었다.

 

7

 

홍콩에서 3일을 보낸 박윤근은 인도 봄베이로 갔다. 봄베이에서는 지체할 일이 없어 바로 비행기를 갈아타고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염료의 고장이라는 구자라트의 주도 아마다바드로 갔다. 서인도에서 봄베이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유명 관광지나 유적지는 없어도 인도의 순박한 모습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사막 상태의 건조지대와 강우량이 많은 몬순지대 사이 평원에 있어 예부터 면화를 재배하여 풍요를 누린 곳이다. 인도는 영국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영어가 통했다.

박윤근은 우선 관광안내소를 찾아 한국인임을 알리고 가이드를 신청했다. 서울올림픽의 효과는 여기서도 톡톡했다. ! 서울올림픽. 알아요. 코리아. 안내소 직원은 그렇게 코리언을 반기며 방문목적을 물었다.

“I'm here to get my dye. a good dye (질 좋은 염색 염료를 구하러 왔어요.)”

“Leather?(가죽염료)”

안내소 직원은 대뜸 알아차렸다.

“yes. real leather.”

“Okay. Wait.”

한 시간쯤 기다리니 20대로 보이는 약간 작은 듯한 여성이 빛깔 고운 사리()를 산들바람에 휘날리며 다가왔다. 발랄한 생기가 느껴졌다. 인사를 하고보니 20대가 아니라 36살의 주부라고 한다.

그녀의 안내로 박윤근은 구자라트의 염료 판매상들을 돌아보았다.

구자라트는 염료의 고장답게 인도 면직물의 중심지이기도 했고 인도 독립의 아버지 간디가 이 도시 출신인 관계로 독립 사상이 가장 강한 곳이기도 했다.

그녀는 인도 제일급의 염직물이 모여 있는 카리코박물관으로 먼저 안내했다. 마하라자(王侯)가 애용한 명품은 패널에 보존하고 있었다. 화려한 장식과 현란한 채색의 면직물, 손으로 그린 카라무카리. 목형프린트된 천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인공 화원에 둘러싸인 느낌이었다.

거리를 돌아다니니 노천에서 면직물을 세탁하거나 말리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가죽 천연염색 하는 곳도 둘러보았다. 수많은 웅덩이가 있었는데 웅덩이가 곳 팔레트였다. 대부분 회색이었는데 이유는 석회 또는 비둘기 똥을 희석시켜 가공하지 않은 소와 양의 원피를 며칠 담갔다가 꺼내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죽의 거친 성질을 유연하게 만들기 위한 공정이라고 하는데 '비둘기 똥'까지 사용된다니

 

그녀의 안내 덕분에 박윤근은 곳곳을 돌아보며 염료와 염색작업에 대해 많이 보고 배울 수 있었다. 가죽 염료는 균일하게 건조되고 혼용성이 좋아야 다채로운 색상조합이 가능하다라든가 염료의 색상을 구별하는 방법, 염색 후 가죽성질 저해하지 않는 특징을 지닌 것이 어떤 종류인지도 알았다.

대표브랜드로는 다이론 타라고(퀵컬러) 콜럼버스(컬러리페어) 등등을 꼽을 수 있었다. 슈칼라 같은 제품은 가죽위에 덧칠하는 방법으로 염색이 가능해 많이 쓰인다고 했다. 칠하는 도구에 염색제 묻혀 고루 칠해주고 건조되기 전 부드러운 천으로 문지르며 염색약이 가죽표면에 고루 번지게 한 다음 건조하면 되는데 가죽표면 코팅은 물론 잔여 이물질이나 낡은 염색제를 제거해 준다고 했다. 염색 안 된 부분은 반복하면 되고 색 바랜 가방 코팅만 가능하고 탈색처린 못했던 것도 ­ 굿이라고 했다. 심플하면서 이전색상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건조 후 부드러운 천으로 문지르며 광택 내는 작업도 한참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현장을 두루 돌아보고 이틀째에는 무역을 할 수 있는 도매상들을 찾아보았다. 구자라트의 인도 상인들은 유명관관지가 아니라서 그런지 순박하고 친절했다. 박윤근은 염료의 종류와 종류별 특성을 가르쳐주는 대로 일일이 메모하며 갖고 있는 돈을 모두 (최소한의 돌아오는 경비만 빼고) 샘플 구입에 썼다. 생각보다 염료 값이 싸서 다양한 종류를 구할 수 있었다. 샘플을 구입하면서 한국에서의 주문방법과 배송 결제 방식을 확실하게 협의한 것은 물론이다.

 

8

 

8일 만에 귀국하여 사무실에 염료 샘플을 전시해 놓고, 국내 염료도매업소에 홍보했다. 전시된 샘플을 직접 시험 사용해 보고 주문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박윤근은 수입가격의 5배를 공급가로 고시했다. 그가 시장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래도 제3국에서 들여오는 가격보다 싸고 품질은 최상급이었다. 특히 깡통갈이 제품하고는 비교가 안 되었다.

주문할 때 30%, 물건을 받을 때 잔금을 내도록 했으니 선금 받는 것만으로 물품 대며 물류비용이 다 해결되고 잔금은 모조리 수익이 되는 구조였다. 역시 기본 자본 없이도 잘 되는 사업이요, 직원이 필요한 일도 아니었다. 똑똑한 여직원 한 명이면 모두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염료에서 첫해 거래량이 억 단위로 올랐다. 원가와 경비를 제하고도 은행원 봉급의 몇 배 이상 수익이었다. 박윤근은 아내와의 약속, 장모와의 약속을 착실히 지키면서도 여유를 누릴 수 있었다. 집에서는 더 이상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염료 도매상을 상대하다보니 M 사장도 다시 만났다. 그는 박윤근의 변신이 놀랍다고 반가워하며 기왕지사 이 길로 나섰다면 남미를, 특히 아르헨티나를 가보라고 했다. 자기가 알기로 남미는 염료를 생산하지는 않지만 수요는 엄청 많은 곳이라고 했다.

염료장사는 수입이 짭잘한 것에 비해 그렇게 바쁘지 않았다. 무역을 하면서 시간도 돈도 다소간 여유가 생긴 것이다. 박윤근은 자유인이 된 것을 만끽하며 남미 행 일정을 잡았다. 그런데 가는 데 비행기에서만 서른여섯 시간 이상이 걸리는 여정이었고 당시의 비행기 좌석에는 스크린이 없었다. 그는 멍하니 앉아 있는 게 싫어서 궁리 끝에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을 한 질 가지고 갔다. 비행기에서 읽기에는 대하소설이 좋았기 때문이다. 남미를 갔다 오면서 그 한 세트를 다 읽었다. (이후 그의 비행기 여행은 독서실이었다. 삼국지 수호지 토지 등을 다 여행길에서 섭렵했다. 시드니 셸던의 소설도 모조리 읽었다. 그러고 나니 읽는 힘이 강해졌다. 슬슬 다른 분야 인문이나 철학 책도 읽기 시작했다. 몇 해 지나지 않아 책이 곁에 없으면 마음이 헛헛해지는 사람이 되었다.)

남미는 정말 가죽 천국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만 사육되는 소가 5천만 마리라고 했다. 브라질 우루과이 파라과이 볼리비아 칠레까지 합치면 몇 억에 이를 것 같았다. 가죽 자재는 넘고처지는데 염료공장은 물론 가공이나 생산시설은 별로 없이 소비만 일삼는 곳이었다. 품질 좋은 인도산 염료를 비싼 값에 거래하기에는 매우 좋은 시장이었다. 힘들게 남미까지 간만큼 시간을 가지고 인근 국가를 두루 돌아보았다. 어디를 어떻게 방문하고 누구를 만날 것이냐 하는 것은 철저하게 현지 대사관에 파견되어 있는 상무관이나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등 국가기관의 정보를 이용했다.

어디를 가건 구시가지 전통시장은 빼놓지 않고 둘러보았다. 뭐 수입할 물건 없나 독특한 시각으로 살펴보았고, 이거 재미있겠다 싶은 것은 사거나 정보를 목록에 적었다.

자기 필요한 말만 하는 여행영어 정도의 언어실력으로 스페인어나 포르투갈어를 쓰는 남미를 돌아다니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냥 여행도 그럴진대 박윤근의 여행은 비즈니스였다.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는 진리를 여기서도 체험했다. 알고 보면 무역은 정말 단순한 것이 물건 좋고 가격 좋으면 더 따질 일이 없었다. 물건을 어떻게 주고 받고 돈을 어떻게 지불하느냐 뿐이기 때문이었다.

 

9

남미 출장에서 거래처를 확보해놓고 돌아오니 홍콩에서 보내온 여러 장의 전문이 팩시밀리에 길게 달려 있었다. 잠시 염료 판매에 몰두하면서 홍콩에서의 일은 잊고 있었는데 건설 중장비 주문이 실제로 시작된 것이었다. 우연히 비행기에서 만나 홍콩에서 함께 다니기도 하며 굳은 약속을 나누기는 했지만 이렇게 실제로 주문이 이루어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홍콩의 바이어들이 처음 주문한 것은 1992년 중장비 3대였다. 박윤근의 능력과 신용을 시험하는 듯한 주문이기도 했다. 그들은 오른 쪽에 운전석이 있는 것을 원했다. 박윤근은 (염료는 잠시 밀어두고) 현대자동차, 아시아나자동차, 대우중공업 등을 섭외했다. 당시 현대는 일본의 미쓰비시, 아시아는 일본의 히노 사로부터 부품을 수입해 조립, 완성차를 만들고 있었다. 국산화율이라야 20% 미만이었다. 그런데 일본 역시 운적석이 오른쪽에 있는 시스템이라 굳이 한국식으로 변경하지 않고 그대로 보내달라고 해서 조립하면 되므로 하등의 문제될 것이 없었다.

홍콩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가는 것은 (중국은 우리와 같은 왼쪽 시스템이다.) 한국에서 조립된 장비를 보내면 되니까 이 또한 문제가 없었다.

돈이 문제였다. 3대를 사서 보내주려면 1억 원이 있어야 했는데, 그 돈이 수중에 없었다. 처가에 그 정도 돈은 넉넉히 있지만 생각조차 안 했다. 아내에게 그런 류의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기로 다짐했기 때문이다.

현대나 아시아자동차에서는 박윤근과 같은 류의 개인 사업가에게 외상으로 중장비를 주지 않았다. 은행은 예외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궁리 끝에 은행 선배를 찾아가 상황을 이야기하고 도와주기를 요청한 끝에 신용으로 1억을 빌려 해결할 수 있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홍콩의 미스터 데이빗과 티씨우엉과의 관계는 돈독해졌고 중장비 거래가 활발해져 홍콩 드나들기를 내 집 드나들 듯 하게 되었다.

 

이후 홍콩인들은 선금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돈을 보내주었다. 리베이트도 인색하지 않았다. 기업을 세워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거액의 자본을 투입하는 것도 아닌 만큼 박윤근의 중계무역은 중학생 시절 학우을 상대로 빵장사를 했던 듯 것과 같은 식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만일에 대비한 보험만큼은 확실히 들었다. 거래가 계속될수록 홍콩의 바이어들은 정말 좋은 파트너를 만났다고 쾌재를 불렀다.

 

차츰 경력이 쌓이면서 입찰에도 참여했다. 취급하는 중장비도 건설을 넘어 페이로다 스트리트스위퍼 (도로 청소차) 환경쓰레기 수거 특장차로까지 영역이 다양해졌다. 입찰에 참여할 때는 그들(현지인)의 이름을 빌려서 했다. 박윤근의 능력은 입찰 장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그가 나타났다 하면 낙찰은 거의 그였기 때문이다.

홍콩은 자유무역지대인 만큼 입찰 때 참여하는 기업도 다양했는데 이 무렵 시청이나 자치단체 입찰 장에서 부딪치며 알게 된 것이 독일에 본사를 둔 오토(Otto)사 였다.

오토사는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쓰레기자동분리수거 시스템에 관련하는 종합상사였다. 싱가포르에 아시아 브렌치(branch)를 개설하고 한국 필리핀 홍콩 대만 등지에서 영업을 펼치고 있었다. 음식물쓰레기부터 환경쓰레기를 수거 압착하는 쓰레기 전용수거차, 압축징계차, 엘프청소차 캐터필러나 불도저 등 특장차를 모두 취급하는 상사인 데 박윤근과 자주 부딪쳤다.

박윤근이 이 시장에 나타나기 전에는 오토사의 입찰 성공률이 육할 이상이라고 했다. 그런데 박윤근의 등장 이후 홍콩에서 오토사의 성공률은 고만 제로가 되어버렸다. 오토사에서는 자연히 박윤근을 최대의 라이벌로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중장비나 특장차 부문에서 박윤근이 두각을 나타낸다는 것이 알려지자 KOICA(한국국제협력단)에서 필리핀 시장에도 진출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연락이 왔다. 때마침 홍콩의 바이어들도 필리핀 건설업자 제이씨와 헨리 등을 소개했고 그들을 통해 메트로마닐라 파직시티 유세비오 시장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해외시장 입찰정보는 국제무역센터(ITC)에서도 제공해 주었다. 조달청 ITC Procurement Map을 통하면 세계 190여 개국 정부조달 입찰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ITC(International Trade Centre)는 개발도상국과 후진국 중소기업의 수출과 무역역량을 강화할 수 있도록 UNWTO가 공동으로 집행하는 기구로 세계 여러 나라 정부조달시장의 최신 입찰, 낙찰, 조달제도 정보를 담고 있어 기업과 공공기관뿐만 아니라 국민 누구라도 별도로 등록절차 없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길만 알면 그렇게 모든 정보가 널려있었다. 각 나라별 수입 관세나 품목별 시장 접근 정보도 얼마든지 가능했고 현지에 가지 않고도 낙찰 공고를 클릭하여 상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입찰 시장에 눈 뜬 박윤근은 마치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필리핀 시 정부 입찰에서도 자주 독일 오토사와 부딪혔다. 환경과 하수처리에 관한 특장차들, 압축징계차 압놀 스트리트스위퍼 진공과 압착 기능의 차들이었는데 여기서도 결과는 마찬가지로 매 번 박윤근에게 밀렸다.

 

그 무렵 대학동문회에서 화학을 전공한 후배를 만났는데 염료에 큰 관심을 보였다. 사업을 하고 싶어 했다. 박윤근은 마침 잘됐다 싶은 생각으로 수입과 남미수출을 제외한 염료 국내 판매 사업은 일단 그 후배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중장비에 전념했다. 그의 발길은 홍콩을 넘어 광저우로 중국으로 또 필리핀을 넘어 태국 중동으로까지 넓어졌다.

 

10

박윤근은 그렇게 세계를 돌고 무역을 하면서 돈을 벌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가 아는 기업인은 아니었다. 규모나 수익 역시 개인이 해낼 수 있는 정도의 중계무역이었다. 은행을 사직하고 개인 사업을 하면서 국제사회에서 그가 쌓은 것은 시장을 보는 안목과 신용이었다.

나는 안목과 신용으로 사업한다. 안목과 신용이 있기에 자본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상황을 분석하는 일이나 시장정보 수집 능력은 누구 못지않게 탁월하다. 그래서 내가 손 댄 아이템은 물건 좋고 가격 싼 장점이 있다, 대신 자본 없이 사업하는 타이프이라 수출이든 수입이든 계약금이나 보증금을 받아야 진행한다. 그러니 나와 거래를 하는 데는 믿음이 첫째다.

그러나 이 논리는 해석하기에 따라 아전인수 격일 수도 있고 독불장군 식일 수도 있어 자칫 오해되고 외면당할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그의 사업이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자유롭고 낙천적인 기질로 소화했을 뿐이지 긴장의 연속이었다.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걸 어려움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게 박윤근 이랄 수도 있었다.

여직원 한 명 데리고 해온 사업이기에 부담이 없어서일 수도 있었다. 그의 무역은 오파 같으면서 오파가 아니었다. 오파는 생산자 이름으로 거래될 때 사용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주문을 받으면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입찰보증금이 필요할 때는 현지 업체를 끼고 들어가기도 했다.

국제 거래도 방식은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믿는 그였다. 실제로 그는 모르는 사람들과의 모든 사업을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선에서 했다. 그때 그때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그와 거래한 염료 도매상들은 박윤근이 이윤을 적게 보고 넘겨주는 덕분에 중간에서 마진을 톡톡히 챙기는 재미가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중장비에서도 그랬고 그가 관여하는 사업이 모두 그랬다. 돈이 되겠다 싶은 것이면 닥치는 대로 손을 댔다는 측면에서 보면 그는 욕심이 많은 사람처럼 보였다. 염료와 중장비 플랜트 외에도 의류에 손을 댔고 심지어 콘돔도 수입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정작 돈에 욕심을 내지는 않았다. 그의 요심은 일, 즉 사업 욕심이었다.

그런 그를 정의 하자면 사업가라기 보다 브로커(broker)가 맞을는지도 모른다. 독립된 사업자이긴 하지만 타인 간 상행위의 매개를 업으로 하면서 그 대가로 마진이 아닌 커미션(commission)을 받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특히 건설장비가 그랬다. 때문에 그는 세계를 60바퀴나 돌며 많은 거래를 했지만 돈을 쌓지는 못했다. 필요한 만큼 이상의 재물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그랬다고 할 수도 있었다.

 

11

 

2000년 가을, 한동안 부딪침이 없었던 오토사 아시아지점장이 박윤근에게 전화를 했다.

“Mr. Park, long time no see.”(박 선생, 오랜만입니다.)

의아하면서도 반가운 상대였다.

“How have you been. Mr, Otto”(어떻게 지냈습니까. 오토 선생)

지점장 성씨도 오토였다. 오토는 독일의 가족 기업이었다.

오토는 만나서 긴히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했다. 박윤근은 고개가 갸웃거렸지만 호기심도 일었다. 중장비 입찰 장에서 자주 만나다 보니 입찰 전후 차나 식사를 함께한 적도 있지만 따로 약속을 해서 만난 일은 없는 사이였다. 엄밀히 말하면 라이벌 관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상대가 무슨 일로?

어쨌든 마침 시간도 있고 해서 시간을 정해 플라자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만났다. 오토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제안이 있어서 왔습니다. 아무래도 박 선생이 적임자인 것 같아서.”

뜬금없이 무슨 제안 요? 말씀이나 들어봅시다.”

우리 회사가 한국에서 철수하기로 했습니다.”

?”

무슨 얘기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미리 말하지 않았다.

오토사가 우리나라에 대리점을 열고 영업을 시작한 것은 1993, 우리나라에서 정책적으로 쓰레기 분리수거가 시작되는 때였다. (유럽이나 선진국에선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시작된 쓰레기 분리수거였다.) 하지만 이때는 계몽 단계여서 정부가 주도하지는 않고 계몽하는 단계였다. 환경부가 그 계몽을 담당했는데 조달청이나 자치단체 등 정부 주도가 아니라 아파트나 빌라 등 건설사나 주민단체 등으로 하여금 쓰레기 분리수거함을 구입해 곳곳에 설치하도록 독려하던 때였다.

오토사는 쓰레기 분리수거에 필요한 중장비 특장차까지 취급했지만 보다 주된 것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쓰레기분리수거함 자체였다. 그러나 정부가 나서기 전이어서, 정부가 아닌 건설업체나 조경회사, 주민단체 등을 타겟으로 마케팅을 해야만 했다. 그래도 1997년 초 국내시장 점유율 50%를 넘길 정도로 성공적인 영업을 했다.

그런데 그해 말 한국이 외환위기를 맞았다. 흔히 IMF 또는 IMF사태 라고 부르는 위기의 한가운데 서게 된 것이었다.

 

모두가 아는 이야기지만 외환위기를 요약하자면, 80년대 초반의 과잉 투자는 해외 경기 호조 속에 수출 증대로 해결되었지만 90년대 중반의 과잉 투자는 그렇지 못했다. 투자는 마구 늘렸지만 수출은 부진하니 경상수지 적자가 쌓여갔다. 빚내서 공장 짓고 아파트 짓고 시설 확장했는데 만든 물건이 안 팔린 것이다. 결과는 부도였다. 1997년 초, 6조 원 가까운 빚을 진 한보그룹이 부도 처리됐다. 이후 11월 초까지 삼미, 진로, 대농, 한신, 기아, 해태, 뉴코아 등 대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했다. 특히 7월에 발생한 기아그룹 도산은 10조 원에 육박하는 부채를 남김으로써 금융권 부실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렇게 되자 97년 중반부터 돈을 빌려준 해외 금융기관들이 만기 연장을 거부하고 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종금사들이 동남아 위험자산에 투자한 돈도 큰 손실을 봤고, 돈을 빌려간 국내 기업들이 부도 위기에 처하며 빌려준 돈을 떼이기도 했다. 종금사가 해외에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하게 되자 정부는 보유하고 있던 달러를 투입해 대신 갚아나갔다. 그러나 한국 금융기관의 부실이 알려지며 해외 금융기관들은 대출금 회수에 더욱 박차를 가했고, 결국 당장 갚아야 할 액수가 정부 보유 달러로도 다 해결하지 못할 만큼 늘어났다. 나중에는 종금사뿐만 아니라 시중은행이 빌린 외화도 마찬가지였다.

금융기관과 대기업의 부실을 정리하기 위해 정부는 공적자금을 투입해야 했다. 9864조 원을 시작으로 총 1687000억 원 당시 GDP30%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가 투입되었다. 그 돈은 끝내 3분의 2만 회수되고 나머지 60조 원 넘는 국민 세금은 금융기관과 대기업이 저지른 사고 뒤치다꺼리하느라 사라졌다.

공적자금 투입에는 구조조정이 뒤따랐다. 금융기관 구조조정의 결과는 대량의 합병과 퇴출이었다. 97년 말, 2천 개 넘는 금융기관 중 절반 가까이가 합병 또는 퇴출되었다. 33개 은행 중 16개가 영업을 중단했다. 36개 증권사 중 15, 50개 보험사 중 20개 역시 정리되었다. 가장 문제가 컸던 종금사는 30개에서 8개로 줄었고 그 뒤에도 종금사는 계속 퇴출되었다. 그 밖에도 저축은행과 신용협동조합 수백 곳이 사라졌다. 당시 금융계 퇴출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이 10여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

이 와중에서 오토사 역시 어음이 부도를 맞는 등 많은 손실을 입았고, 그 결과 한국 시장에 대한 희망을 접은 것이었다. 그들은 IMF 상황이 길게 갈 것으로 판단해 철수를 결심한 것이었다. 철수를 결심한 그들에게는 정리되지 않은 외상매출금과 창고에 쌓여있는 재고물량이 고민이었다. 이에 고민 끝에 박윤근을 지목, 인수 의향을 타진하러 온 것이었다.

 

박윤근은 처음에는 나는 그만한 기업을 할 의사도 없고 인수할 돈이 없다고 거절했다. 흥정할 여지도 보이지 않고 거절하자 오토사는 다른 사람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찾지 못했는지 가을에 또 연락했고 11월에 또 찾아왔다. 이른바 삼고초려 꼴이 되었다.

그제야 박윤근은 특유의 시각으로 쓰레기분리수거 관련 시장을 조사해 보았다. 시장성도 있고 안정성도 있고 사업성이 있다는 판단이 섰다. 헐값에 인수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대박이 되는 거였다. 그러나 실제 그에게 오토를 인수할 자금이 없었다. 그는 오토의 제안에 이렇게 답했다.

인수할 의향은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정말 없습니다. 다만 약속은 드릴 수 있습니다. 나에게 맡겨준다면 3년 이내 재고를 모두 청산하고 돈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미정산 외상매출액과 부동산, 재고 물품 등 모두 합쳐 15억 원이었다. 그러나 그 액수도 외상매출금 따위는 인수 못하고 재고 물량과 부동산 대금만 책임지겠다고 했다.

오토는 본사와 의논 끝에 이듬해 봄, 깨끗하게 빈손으로 회사를 넘겼고, 박윤근은 선투자 한 푼 없이 오토를 인수했다.

많은 사람에게 재앙이 된 IMF가 박윤근에게는 횡재가 된 것이었다.

2001년 봄에 오토를 인수했는데, 바로 그해 말 한국은 기적적으로 IMF 구제금융 상황을 벗어났다,

박윤근은 약속대로 3년이 되기 전에 오토사에 청산 완료하고 사명을 오토코리아로 개명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글로벌 회사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하늘이 또 도왔는지, 박윤근의 오토코리아가 출범하면서 쓰레기 분리수거함은 전량 정부가 구입 관리하는 정부조달 물자가 되었고 관리는 지자체가 하도록 시행령이 제정되었다.

 

12

 

오토코리아는 직원이 50명이나 되는 중견 중소기업이 되었다. 여직원 한 명 데리고 염료나 중장비 등을 취급하고 입찰 장을 드나들던 개인 무역과는 전혀 다른, 어엿한 환경관련 중견 중소기업이 된 것이다.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쓰레기 분리수거함만으로 경영은 안정적일 수 있다. 국내 시장의 규모는 1,000억 정도인데, 점유율을 50%로 잡으면 500억 원이다. 쓰레기 분리수거함의 수명을 4년으로 보아 넷으로 나누면 연 125억 원 매출은 보장되는 사업인 것이다. 그것도 상대가 정부, 조달청이요 지방자치단체다. 우여곡절 속에서의 결실이지만 비로소 안정을 느끼게 된 것이다.

박윤근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세를 바꾸는 새로운 공부의 필요를 느꼈다. 기업인 정신과 자세를 배우고 다듬고 정립할 필요를 느낀 것이다.

어느 듯 나이도 50줄에 접어든 때였다. 그의 좌우명인 learn by doing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는 미련 없이 염료 사업을 후배에게 물려주고 중장비 무역에서도 손을 뗐다.

 

그동안 소홀했던 가족에 대해서도 미안한 생각을 가질 만큼 여러 면에서 여유가 생긴 덕분일까.

하루는 퇴근길에 한 잔 하고 성취감에 싸여 좋은 기분으로 집에 가 중학생인 막내딸의 방에 들어갔는데 딸이 공부를 하다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옆에 휴대폰이 있어 무심코 열어보니 친구와 주고받은 문자가 있었다.

딸의 문자를 본 박윤근의 가슴은 철렁했다. 가정적인 아빠를 둔 친구에게 보낸 문자일 것이었다.

우리 아빠는 무늬만 아빠야. 네가 너무나 부럽다.

……

휴대폰을 제자리에 가만히 놓고 딸의 방을 나오는 박윤근의 눈에 순간적으로 눈물이 스쳤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지, 아내가 묻는다.

아냐. 좀 피곤해서

잠자리에 누었는데 천정에 문자가 떴다.

우리 아빠는 무늬만 아빠야. 네가 너무나 부럽다.

눈을 감아도 문자는 지워지지 않았다. 스치고 말 것 같았던 눈물이 고이더니 한 방울 옆으로 흘렀다. 그는 다짐했다.

정리를 끝낸 아내가 불 끄고 옆에 눕자, 박윤근은 아내의 손을 더듬어 꼭 쥐었다. 그리고 속으로 비장한 다짐을 했다.

그래 이제는 달라지자. 기업인 정신 못지않게 자상한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되자.

 

13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의 변신에는 자유기업원의 열린사회포럼이 방향을 잡아주고 큰 힘이 되어주었다.

자유기업원은 사회주의의 몰락과 복지국가의 쇠퇴를 보면서, 이념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대단히 취약한 상황에 놓여있던 박윤근이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 지 명백히 방향을 제시해준 단체였다, 소득은 나아졌지만 삶의 질에 대해서는 진정한 반성을 하도록 도와준 기관이기도 했다.

기업가정신과 시장경제에 대한 본격적이고 심도 있는 접근도 열린사회포럼을 통해서 가능했다.

한 해에 여덟 달은 선정된 책을 읽고 저자를 초청해 토론하고, 나머지 네 번은 회원이 주제를 잡아 스스로 연구한 후 발표하는 리더스 포럼에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리더의 읽기는 세상을 두 번 바꾼다는 사실도 새삼 깨달았다. 리더는 이끄는 사람(Leader)이자 읽는 사람(Reader)이어야 한다는 말을 가슴에 새겨 넣었다. 그는 책을 읽는 힘으로 조직을 이끌고, 조직을 이끄는 정열로 책을 읽는 경영인이 되기로 하면서 독서는 경영자의 의무라는 말을 어디서나 서슴없이 하게 되었다.

열정은 민들레 홀씨 같다. 바람이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온 들판으로 씨앗을 퍼뜨린다. 거대한 용기를 이룩하고 드넓은 아량을 마련하여 자꾸자꾸 일을 추진한다. 이후 십 수 년 독서를 통해 기업가 정신을 더욱 다진 박윤근은 경영자들 사이에서 독서 전파자로 이름이 높아졌다. 책을 읽다 감명을 받으면 수십 권씩 구입해 지인들한테 선물하는 일을 자주 하기 때문이다.

 

환경기업 오토코리아의 대표가 되기 전까지의 그의 삶의 여정에는 남다른 노력도 있었지만, 한편에서 보면 행운의 연속이었다.

아마도 자본금 없이 세계를 누비며 무역을 하고 중견 기업을 인수한 사실로 말하면 드문 사례로 꼽힐 일이다.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살면서도 술술 일을 풀어갈 수 있었던 것에는 운이 따랐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다. 서천간척지 노동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에게는 타고난 안목과 부지런함이 있었다. 가난을 충분히 체험한 위에 어려움을 어려움으로 여기지 않는 낙천적인 기질이 얹어져 어려움을 어려웠다고 말하지 않는 것뿐이다.

긴장되고 힘든 여정이었기에 삶의 질이나 가족의 시각에서 보면, 이제금 사업적으로 성취를 이뤘음에도 순기능 못지않게 역기능도 많았음을 뒤늦게 느끼는 것이기도 했다.

행복은 가족 친구 친지 등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것이고, 성취 역시 가까운 주변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라고 했는데 나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어느 선일까?

스스로 자문하며 늦게라도 반성하는 삶을 살기로 한 박윤근은 행운에 버금가는 사회적이고 기업적인 소명을 찾아 남은 열정을 헌신하기로 마음먹고 하나씩 실천해 나가고 있다.

 

어쨌든 오늘의 박윤근은 말한다.

세린디피티(Serendipity)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대한 발견의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뉴턴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萬有引力)이라는 위대한 발견을 했으며, 아르키메데스는 목욕탕에서 부력(浮力)에 관한 물리법칙을 알아냈고, 윌리엄 퍼킨은 키니네를 합성하는 과정에서 인조염료의 원료가 되는 청 아닐린을 발견했습니다. 이러한 위대한 발견들은 세린디피티라는 말처럼 정말로 우연한 기회에 얻어졌을까요? 내 대답은 'NO, 아니다'입니다. 우연이 아닌 필연적 결과들입니다. 뉴턴은 정신병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몰입했고, 퍼킨도 끊임없이 오랜 시간 계속해서 골몰히 연구하고 노력해서 얻은 필연적 결과입니다. 몽중일려 염염생생(夢中一慮 念念生生)이라고도 합니다. 꿈에서도 오직 하나만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얻어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발견은 결국 연속되는 연구와 노력의 결과입니다. 기업 또한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는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21세기는 초()경쟁시대입니다. 서퍼티션(Surpetition)이라는 새로운 영어가 탄생하듯 경쟁을 뛰어넘어야 생존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빌 게이츠와 마크 주커버그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하버드대를 중퇴한 IT산업의 영웅으로 순식간에 세계적 갑부 대열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천문학적 규모의 재산을 자기 가족 소유로 삼지 않았습니다. 거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재단을 세우고, 미래 세대를 위한 난제를 해결하는 데 기금을 쓰도록 했습니다. 히피 정신을 바탕에 깔고 있는 실리콘밸리 문화의 본류를 보여 주는 한 모범으로 여겨집니다. 물질을 초개로 여기면서 인간을 돈에 앞세우는 일은 어지간한 정신적 두께 없이는 상상조차 어렵습니다. 두 사람 모두 독서로 다진 내면의 힘이 없었다면 아마도 가능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빌 게이츠는 매주 두 권 정도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서 공개하는 파워블로거입니다. 마크 주커버그 역시 2015년을 책의 해로 정한 후, 두 주에 한 권씩 묵직한 책을 읽고 소개함으로써 전 세계 독서 열풍을 이끌고 있습니다.

 

기업의 규모나 활동에서 세계적인 경영자와 비교하기는 이른 박윤근이지만 열정의 크기나 마음 자세는 그들에 못지않다고 보여진다.

그는 오늘도 독서를 통해 기업가정신을 탄탄히 다져가는 한편 장학금 사업이나 사회단체 기부활동을 통한 세계적인 불우이웃돕기에도 헌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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