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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가도 사람이 산다. 살아가는 근본 모습도 같다. 다만 역사와 환경이 다름에서 풍습과 생활형식이 다를 뿐이다. 여행의 참 목적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해하는 것으로 상식을 넓히고 지혜와 슬기를 익혀 나름대로 구김살 없는 풍요한 삶을 구가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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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중국 장백산) 白頭山의 일몰


민족발상의 성지 백두산. 단군탄강(檀君誕降)의 성지, 근역산하(槿域山河)의 조종(祖宗)-이런 신비적인 수식어가 붙는 만큼 백두산은, 한국인이라면 일생에 한번은 다녀와야 하는 곳이요, 많은 전설을 가지고 있는 성지이다. 가장 오래 전의 전설은 거대한 신의 배설물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천지창조 신화이다.

…장길손이라는 거인이 있었다. 그는 한번에 쌀을 수십 섬씩 먹어야 했기 때문에, 항상 배가 고팠다. 한번은 너무나 배가 고픈 나머지 돌이나 흙, 나무를 닥치는 대로 주워 먹었다. 그러다 탈이 나서 아픈 배를 움켜쥐고 딩굴다가 뱃속에 든 것을 모두 토했다. 그가 토한 것이 큰산이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백두산이다. 그의 눈물은 동서로 흘러 압록강과 두만강이 되었고, 설사를 하여 흘러 나간 것은 백두대간을 이루었다. 이 때, 똥 덩이가 튀어 멀리 떨어져 나간 것이 제주도가 되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동포들이 수집 발간한 전설집에는 <백두산의 목동과 선녀> <백두산의 사냥꾼과 호랑이> <백두산의 화마> 등이 있다. <백두산의 목동과 선녀>는 우리 민족 발상과 재미있게 연관시켰으며, 우리 민족이 백두산을 신앙처럼 숭상하고 좋아하는 이유를 잘 말해주고 있다. 단군의 개국신화 외에 고려 태조 왕건의 탄생 설화도 품고 있다.

노래에도 같은 무게로 등장한다. 애국가를 제쳐놓더라도 1931년 공모에서 당선된 조선의 노래는 “백두산 벋어내려 반도 삼천리/ 무궁화 이 동산에 역사 반만년…으로 시작하고 있다. 광복직후 유행했던 최남선 작사 김영환 작곡의 조선 유람가도 백두산 예찬이다.

대지의 거룩한 힘 기둥이 되어/ 한울을 버티고 선 백두의 성산/ 맹호의 수파람이 울리는 거기/ 성인이 나셨고나 영웅 길렀네…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1985년 진태하가 작사하고 황문평이 작사한 아! 백두산도 있다.

홍익인간 터잡은 백두산, 이 지구의 정수리/ 단군왕검 태어나신 천지연, 오색으로 넘치고/ 바위마다 새겨진 배달의 민족 역사, 드높다/ 아아, 민족의 성역 백두산에 모여서/ 남북의 아들딸아 민족의 정기 높이자…

진태하 씨는 국토분단 이후 한국국적으로서는 최초로 84년 7월 백두산을 등정하고 그 감격을 시로 남기기도 했다.
…아득한 신비의 빛을 따라/ 신들린 걸음으로/ 민족의 성지, 국토의 시원/ 백두산을 찾아/ 장강을 넘고 황하를 건너/ 잃어버린 우리의 땅/ 만주벌 수만리…

이렇게 백두산은, 우리 배달 겨레에게 단순한 산이 아니다. 가슴 깊숙이 새겨진 민족의 영산이요, 국토의 성역이요, 불가침의 신앙이다. 유구한 역사의 뿌리가 이곳에 터잡고 있음을 믿어 왔기에 반만년 애환 속에서 언제나 동경의 성산(聖山)으로 숭상되어 왔다.

홍콩을 거치거나 상해로 가야하는 불편한 길이었지만, 그나마 중국쪽 백두산 길이 열리자 한국인은 열광했다. 너나없이 한사코 오르려 했고, 올랐다하면 장만해 간 술과 포와 과일을 진설하고 산제를 지내거나,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펼쳐들고 만세를 부르거나, 통일을 기원하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천지 건너 북한 땅을 보면 비장감이 일어나고, 행여 북한 동포의 모습이 보이면 소리쳐 인사라도 나누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누구나 보였다.

우리 땅으로 해서 올라가는 길은 까맣게 잊은 채, 남의 땅 남의 비행기로 와서 메아리도 없는 소리를 외쳐대고 정체모를 감동과 흥분에 휩싸이는 이 상징적인 몸짓… 우리에겐 절실한 것이지만 제3자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까. 안타깝고 슬프게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습다, 이상하다, 고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 같다. 그것이 지금은 장백산을 찾는 관광객에게 가이드가 들려주는 주의사항이 되었다.  

“여긴 백두산이 아니라 장백산이에요. 주의 사항을 말씀드리니 꼭 지켜 주세요. 정상에 올라 가서 이것이 우리 땅이라는 말 하지 마세요. 태극기를 꺼내 펄럭이며 사진을 찍으면 안됩니다. 소리높여 통일을 외치거나 애국가를 합창하지 마세요… 꼭 지켜 주셔야 해요”


특별한 사연으로 지난 달 백두산 - 아니 장백산을 다녀왔다. 필자가 열심인 모임에 한국여행인클럽(KTC/회장李利子)이 있는데 어느날 월례회에서 그랜드 캐년(Grand Canyon)이야기가 나왔다. 미국 애리조나주 서북부. 콜로라도 강의 급류가 수백만년 동안 침식해 만든 대자연의 이 조형은 빛의 이동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전망이 일품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특히 일출과 일몰 시간대에는 암벽의 요철이 더욱 돋보이고 골짜기 전체가 붉게 빛나, 숨을 죽이게 하는 신비로운 절경이 펼쳐진다. 그것을 모르는 이 없는데 이리자 회장과 이군자 부회장 왈, 그런 그랜드 캐년의 일몰이 알고보면 백두산의 일몰보다 못하다는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백두산 정상의 일몰이나 일출을 본 사람이 그들 외에는 없었다. 아무도 그들의 말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부정은 아니지만 동의하지도 않는 것이었다.

분위기가 이쯤 되자 회장은 백두산 여행을 제의했다. 이군자 부회장은 몇이 가든 여행비 일체를 내가 대겠다고 까지 나섰다. 내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순수한 마음에서의 집념이었다.  그런 일로 여행비 일체를 그들에게 부담 지울 회원은 없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백두산에서의 일몰을 보러 가기로 했다. 6월 27일~30일 다녀온 이 여행에는 이리자(한복디자이너) 이군자(재일교포/남북상사대표)는 물론 한정혜(요리연구가) 봉종현(장은경제연구소고문) 최승혜(수필가) 황인용(방송인) 하죽봉(변호사) 이준상(고려대의대교수) 백순지(서울시치과의사회장) 황경숙(경희대강사) 곽정자(디자이너) 김미숙(탤런트) 전중광(재홍콩사업가) 이복희(HIS) 김실(공인회계사) 김화중(희성금속대표), 그리고 필자 등 모두 17명이 참가하였다.

떠나는 날 김포공항에는 비가 내렸다. 예년보다 일찍 장마가 시작된 탓이다. 때문에 일부에선 일몰은커녕 천지조차 제대로 못보고 오는 것 아니냐는 소리가 나왔다. 실제로 백두산에 간 사람 중 천지나마 보는 것은 30%에 불과했다. 그러나, 목적이야 그렇다 해도, 지난 10여년간 형제자매 같은 정을 나눈 동아리가 가는 데 어찌 목적에만 연연하랴. 함께 여행한다는 자체로도 즐거움이 넘치는데.  

  
우리는 서울에서 장춘까지는 아시아나로, 장춘에서 연길까지는 중국 북방항공 국내선을 이용했다. 연길→백두산→연길은 전세버스를 이용했다. 장춘은 길림성의 성도요 동북 지방 중요 공업도시이자 교육도시라는 자랑을 갖고 있다. 26개 대학과 90여개 연구소를 갖추고 있는 곳.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가 머물던 황궁은 지금 길림성 박물관으로 변했고, 장춘영화제작소는 중국을 대표하는 하나였다. 또 제일자동차공장도 80,000명을 고용하고 있는 장춘의 자랑. 하지만 백두산 가는 길에 들린 우리에겐 주마간산의 일경(一景)에 불과했다.

연길은 습도가 높아 후덥지근했다. 우리는 대우호텔에 여장을 풀었는데 저녁 식사까지는 두어 시간 남아있어 택시를 대절해 시내를 한바퀴 둘러보았다.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주도(州都)로 인구의 60%가 조선족인 연길은 낯설지 않았다. 길 양편 상점가엔 한문과 한글이 병기된 간판이 계속되었다. 이태원이나 옛날 동두천 오산 등지에 있었던 기지촌 풍경과 흡사했다. 오가는 사람의 생김새는 물론 옷차림도 이국적이지 않았다. 즐비한 노점상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모습은 오히려 정겨웠다. 다만 역사를 삼십 년쯤 거슬러 올라간 듯, 우리 60년대의 삶을 떠올려 주었다. 중심지 빌딩가의 구두닦이들, 빙수를 파는 어린 소녀들,

가난한 살림이 비위생적으로 느껴지는 건 우리가 그만큼 사치스러워졌다는 것일까. 호텔로 돌아오니 연길에서 최고급이라는 대우호텔도 서울의 호텔에 비해 초라해 보였다. 2시간 대절한 택시에게 얼마를 주랴,고 물으니 US달러로 5불을 요구한다. 우리 돈으로 7천 원 정도. 그러나 그 돈이 아직 연변에서는 큰돈이요, 택시기사가 가장 돈 잘 버는 그룹이라 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일행은 예정대로 우선 도문으로 갔다. 도문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작은 도시로 연길에서 버스로 약 1시간 거리였다. 북한으로 건너가는 철교가 있었는데 기차는 볼 수 없었다. 두만강은 강이라기보다 천(川)에 가까웠다. 헤엄칠 필요없이 걸어서 건널 수 있어 보였다. 분단의 슬픔을 이국 땅에서 느낀다. 전망대의 망원경은 북한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오로지 한국인을 위한 것이리라.

도문(圖們)에서 버스를 돌려 다시 연길로 왔다가 장백산을 향했다. 가는 길에 화룡 봉황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이도를 거쳐 장백산에 올라 천지를 본 뒤 장백산국제관광호텔에 여장을 푸는 것이 이날의 스케쥴이었다. 버스 안에서 보내는 시간만 8시간 정도. 그러나 얼마전까지만도 홍콩을 거쳐 장백산에 왔던 것을 상기하면 불평할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나마 조금씩 단축되다보면 머잖아 더 빠른 길이 나오지 않겠는가.

연길에서 장백산까지는 약 260km였는데 비포장 구간이 절반쯤 되었다. 비포장이지만 흙이 단단하여 준포장 수준은 되어 버스가 80km/H 쯤 달리는데 무리가 없었다. 꽤 많은 구간에서 도로 포장을 위한 공사를 하고 있었다. 길 양편은 간간 언덕 같은 야산이 보일 뿐 지평선이 보이는 평야였다. “만주벌판”이란 표현이 과연 실감되었다. 두어 시간 달리다보니 화장실 있는 휴게소가 필요해졌다. 그러나 이렇다할 휴게소가 없었다. 가이드가 선택하여 세워준 휴게소라는 게 화장실은 50년 전 시골의 노천 화장실 같고 뱀술이며 과일을 파는 상점 역시 비 가리개만 있는 노점이었다.

평지를 달리는 기분인데 실제는 오르막길이라고 했다. 그래서 2,700여 미터의 장백산에 오르는 길이 전혀 오르는 것 같지 않다고 했다. 장백산이 가까워지니 양옆 백양나무 숲 사이사이에 하늘을 찌르듯 서 있는 미인송(美人松)이 보인다. 장백산 주변에만 있는 특이한 소나무다. 이윽고 중국 내음 물씬 풍기는 장백산 출입문이 보였다.          

장백산 관광지 주차장에서 천지가 있는 정상까지는 도요다産 8인승 찦차를 타고 올라가야 했다. 물론 걸어올라갈 수도 있다. 걸어서는 2시간 걸리고, 찦차로는 20분 걸리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곳 규칙은 20분 타고 올라가서 30분 천지에 머무른 뒤 내려오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찦차는 4시 반이 퇴근 시간으로 그 이후 운행은 안 한다고 했다. 백두산 정상의 믿지 못할 기상 탓에 4시 30분 이후에는 모두 철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 30분이었다. 우리의 등정 목적은 애초부터 그랜드 캐년보다 더 멋진 일몰을 보자는 것이었다. 만약 일몰을 못 보면 다음날 새벽 3시에 올라와 일출이라도 보아야 했다. 천지의 일몰은 오후 8시 전후라고 했다. 그렇다면 천지에서 4시간 이상 체류해야만 했다. 협상을 했지만 가이드도, 찦차 기사들도 응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KTC 회원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한번 정한 목표를 포기한 적 있었던가.  

찦차가 없으면 걸어서 내려오자는 각오로 모두 천지에 머물었다. 과연 4시반쯤 되니 관광객은 모두 내려가고 KTC 회원만 남았다. 장백산 기상대에서 숙식하는 직업사진사들이 있어 우리를 따라다녔다. 고요하고 장엄하고 신비로운 곳에 우리 회원 17명만 남은 것이다. 날씨에 무리가 없으니 찦차 기사들은 누그러져 팁만 더 달라고 태도를 바꿨다.

천지는 우리를 반기는 듯 그 아름다운 자태를 숨김없이 드러내 보여주었다. 하늘에는 티 한 점 없었다. 바람 같은고 할까, 연기 같은 희뿌연 구름이 간간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봉우리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천지의 5분지 3은 북한 소유요 5분지 2는 중국령이라고 했다. 눈앞에 멀리 북한 초소도 보이고 장군봉에서 천지로 내려가는 케이블카 라인도 보였다. 직업사진사들은 천지의 로칼가이드였다. 천지에 무엇이 진짜 살고 있느냐고 물으니 어떤 이는 산다 하고, 어떤 이는 없다 했다. 봤다는 사람도 있고 사진에 그 흔적이 찍히기도 했다는데, 그러나 믿지 않는 측에서는 자연의 돌연변이 현상(?)이라며 픽 웃었다.

6시를 넘기니 해는 아직 중천인데 기온이 급히 떨어졌다. 17명중 6명이 추워서 더 못 있겠다며 먼저 내려가겠다고 했다. 막을 사람은 없었다. 대기하던 3대의 찦차중 한 대가 6명을 태우고 먼저 내려갔다. 11명만 남으니 천지는 더욱 고요해졌다. 그 고요 속에서 황인용 회원이 선구자를 불렀다. 이군자 김미숙 곽정자 등 세 여류의 백댄스가 노래와 어울렸다. 한폭의 그림이요 뮤지컬 드라마였다. 천문봉은 무대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바리톤 류의 목소리가 이날은 참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날아 올라가는 소리가 아니라 밑으로 잦아들어 잔잔한 천지를 어루만졌다.

이군자 부회장은 신형 카메라로 열심히 사진 찍느라 분주했다. 옛 추억을 찍는가, 추억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분주히 움직이는가. 가만히 바위에 앉아 천지를 볼 때면 눈가가 촉촉히 젖기도 했다. 천지가 온통 붉게 용광로처럼 타오르는 일몰을 기다리는 이리자 회장…

8시가 가까워지면서 이윽고 해가 기울고 서편 하늘에 붉은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 과연 기다린 보람이 있을 듯 사위가 벌겋게 물들어 갔다. 그러나 기대만큼 절정에 이르지는 못했다. 하늘가에 걸쳐있는 잿빛 구름띠 때문이었다. 오렌지빛이 된 해가 구름띠에 이르러 묻혀들기 시작하자 붉은 기운은 아쉬움을 남기고 사그라졌고 사방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리자 회장은 체념도 빨랐다.
“이 정도 맛보기도 보통 행운이 아니에요. 우린 성공한 사람들이에요”

일행은 천지에서 내려왔다. 호텔에 도착하여 레스토랑으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이리자 회장은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렇게 보고 싶어했고, 또 일행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천지의 일몰 광경이 생생한 그림으로 그려져 큰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 아닌가.  
“저거에요. 바로 저거. 어쩜 그림을 저렇게 생생하게 그렸을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다. 천지의 일몰이 어떤 풍경인지 상상이 안 되던 회원들에게 회장은 마음껏 보여줄 수 있었다. 평양의 유명한 화가가 사실을 토대로 그렸다는 그것은 정말 그랜드캐년보다 몇 배 더 장관이었다.

“장백산 국제관광호텔”은 5월 말에 오픈 하였다 하니 한달 뿐이 안 된 새 호텔이었다. 중․일 합작호텔이어서 사장(총경리)은 재일교포였고, 부사장(부총경리)은 연변 조선족 2세였다. 식음료부 직원 중에 뜻밖에 북한 여성이 둘 있었는데 단정한 유니폼 차림에 김일성 뺏지를 달고 있었다. 20대 초반의 아가씨들이 예의도 바르고 미인이고 상냥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는데 그녀들이 선선히 받아주자 언로가 트였다. 이복희 회원이 한턱 낸다고 하여 백두산 일몰 그림이 있는 홀에 노래방을 차리고 그녀들을 초대했다. 노래도 수준급이었다. 앵콜까지 듣고 나서 황인용 회원이 물었다.

“북한 농촌에선 식량이 모자라 쩔쩔 맨다는 데 그런 사실을 아가씨들도 알아요?”
하니, 한 명이 나서서 생글생글 웃으며 말한다.
“고거이 바로 유언비어라는 겁니다. 우리 속담에 이웃이 잘 살면 배아파 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네까. 우리가 잘 사니까 시기해서 퍼트린 유언비어입네다”
전중광 회원이 김일성 뺏지를 가리키며 시침 뚝 떼고 또 한 아가씨에게 물었다.
“이 사람은 누굽니까?”
아가씨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아니, 홍콩에서 사업하신다는 분이, 전 세계인이 흠모하는 우리 수령님을 모르십네까? 무슨 공작(일)을 하시는지 모르지만 정치학습을 통 받지 않으시는구만요”

기절초풍할 일-.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뜨리는 회원도 있었고 반대로 아예 할 말을 잃어버리는 회원도 있었다. 그렇게 철저하게 교육받은 아이들인가? 호텔 부사장이 은밀히 그녀들의 배경을 귀뜸해 주었다. “평양의 고위층이죠. 당 간부 딸들입네다. 그런 신분 아니면 여기 못 나오지요. 사상교육이 아주 철저하게 되어있는 아이들입네다”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직전 이리자․이군자 두 분은 백두산엘 수차례 왔었다고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군자의 부군 남 회장이 백두산을 배경으로 호텔을 짓는 등 사업을 벌일 의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교두보를 마련하는 의미에서 장백산 쪽 천지 정상에 화장실을 지어 기증했고 (현재의 화장실이 그것) 장백폭포 관광지에도 화장실이며 반영구적인 쓰레기 수집시설을 설치해 주었다고 했다. 관심을 고조시키기 위해 이리자 회장은 이곳, 장백폭포를 배경으로 한복 패션쇼도 가졌었다고 했다. 백두산의 일몰은 그때 그렇게 머물면서 보았던 것이었다. 대단한 분들… 그때는 왕래가 자유롭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런 엄청난 행사를 치루었을까… 며칠 뒤 장백산 호텔 로비에는 한국에서 이러이러한 사람들이 와 묶고 갔다는 식의 우리 일행 사진이 걸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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