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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가도 사람이 산다. 살아가는 근본 모습도 같다. 다만 역사와 환경이 다름에서 풍습과 생활형식이 다를 뿐이다. 여행의 참 목적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해하는 것으로 상식을 넓히고 지혜와 슬기를 익혀 나름대로 구김살 없는 풍요한 삶을 구가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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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문명의 발상지

바이칼호수는 지구촌에서 가장 가보고싶은 곳의 하나였다. 태초에 이곳에서 인류 문명이 피어났는데 그 문명이 다름아닌 한인(桓人) 문명이라 비정하는 데서 필자의 관심은 시작되었다.

삼성기 전 상편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 한의 나라세움이 가장 오래되었으며 한 분의 신이 사백력의 하늘에 있었나니… (吾桓 建國 最古 有一神 在斯白力之天…) 사백력이란 시베리아를 일걷는 지명이다. 그리고 삼성기는 한민족 기록인 것이다.

삼성기 전 하편(三聖記 全 下篇)에는 또 이런 귀절이 있다. 파나류산 아래 한님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天海) 동쪽이다. 남북 5만리요 동서가 2만리니… 하면서 천해는 지금의 북해를 일컫는다고 했다. 천해(天海: 北海)는 바이칼湖의 이명이다. 시베리아사람들은 지금도 바이칼을 바다(Baikal Sea)라고 부른다.

국제적 공인 여부를 떠나 이런 일련의 역사적 기록은 우리에게 바이칼호와 시베리아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한다. 바이칼호는 "그린스카웃"에 의해 "지구 환경의 마지막 보루(堡壘)"로 선언되었다. 필자가 바이칼湖를 찾은 것은 95년 6월이었다.

역사와 전설과 샤머니즘이 엉켜있는 바이칼은 신비의 호수였다. 호소학(湖沼學)에서는 연안식물이 자라지 않는 깊은 호분(湖盆)이 있는 경우를 호수,  전면에 침수식물이 자랄 수 있는 수역을 늪, 더욱 얕아 정수(挺水)식물이 널리 자라면 소택(沼澤)이라고 정의하면서 호수는 토사의 유입이나 유기물의 퇴적으로 점차 얕아져 늪이 되고  다시 소택이 된 다음 습원(濕原)을 거쳐 초원이 된다고 했다. 따라서 호수는 일반적으로 2천5백년에서 1만년 瑛結?초원이 되고 또 다른 곳에 호수가 만들어진다고 하였는데, 그러나 바이칼호는 그 만배인 2천5백만년을 내려오면서 아직도 오염되기를 거부하고 있다. 러시아 사람들은 바이칼을 "시베리아의 푸른 눈"이라 불렀다.

넓고 깊고 맑고 깨끗한 바다같은 호수는 첫 대면에서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부드러우면서 강하고, 엄하면서 자애로운 어머니. 모든 생명을 탄생시키는 힘을 느끼게 했다.    

바이칼湖의 두 도시

바이칼호는 시베리아를 크게 나눈다. 동서 나눔이 아니라 동과 극동이다. 호수 서쪽은 러시아의 동쪽이며, 호수 동쪽은 "극동(極東 :Far East)"으로 분류된다. 러시아 사람들은 극동을 제외한 지역을 일반적으로 시베리아라 부르며 이를 다시 서시베리아 동시베리아 중앙시베리아로 나눈다. 시베리아에는 러시아인이 많이 살고 도시분위기도 러시아 풍이다. 그러나 극동지방은 하바로프스크나 블라디보스토크 같은 몇몇 군사도시 외에는 아시아계 민족이 다수이며 아시안적 삶을 살고 있다.

이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두 도시가, 바이칼호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서쪽의 이르쿠츠크와 동쪽의 울란우데이다. 바이칼호를 찾는 사람은 대개 이 두 도시 중 한 곳에 머물게 된다. 물론 같은 러시아 령이며 바이칼호를 우회해서 달리는 시베리아 철도로 연결되고 있다.  8시간의 거리이다. 그러나 인종과 생활풍습에 있어서는 전연 다른 나라인 양 차이가 크다. 그리고 그 차이만큼 이르쿠츠크에서 보는 바이칼호와 울란우데에서 느끼는 바이칼호는 느낌이 다르다. 한쪽에서는 일출을 볼 수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노을만 볼 수 있으니 차이는 당연한 것일까.

이르쿠츠크는 러시아인들이 많이 살면서 러시아적 분위기를 잘 갖추고 있지만 동쪽의 울란우데는 "브리야트몽골 자치공화국" 이라는 국호가 말해주듯 주민 다수가 몽골인이며, 우리 옛 모습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이르쿠츠크(Irkutsk)

하바로프스크를 경유해서 이르쿠츠크로 갔다. 하바까지는 아시아나항공, 하바에서 이르쿠츠크는 아에로플로트를 이용했다. 러시아의 현실은 예상보다 심각했다. 성공한 공산주의만 음산한 것이 아니다. 실패한 공산주의는 더 음산했다.

판정은 80년대에 이루어졌지만 경제나 건설은 30년전에 멈춰져 있었다. 건물·도로… 심지어 문화 예술까지 30년전 상황에서 더 이상 진전하지 않았다. 진작 폐차장에 가야할 자동차들이 영업용 택시라고 손님을 부르고 있었고. 일류 호텔 역시 마찬가지로 낡아 욕실은 커녕 화장실로 이용하는 것조차 망서려질 정도였다. 무거운 침묵이 도시를 채우고 있었다. 오직 사람들만, 그 사이에서 낡기를 거부하며 살고 있었다. 발랄한 젊은이들, 활기찬 아이들이 음산하고 우중충한 회색에도 희망이 있음을 속삭여 주었다.

인구 80만의 도시 이르쿠츠크는 바이칼호의 물이 빠져나가는 유일한 강인 앙가라강과 이르쿠츠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었다. 동시베리아의 경제중심지로 시베리아철도의 중요한 역과 앙카라강 운수의 하항(河港), 국제공항이 있고, 바이칼호수를 하루 일정으로 관광할 수 있어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도시의 기원은 1661년 강 연안에 성채가 건설되면서인데, 86년에 시(市)가 되면서 동시베리아 행정중심지, 몽골 및 중국과의 무역중계지로 발달하였다. 제정시대에는 정치범의 유형지였고 "10월 혁명"후에는 러시아 귀족들이 이곳까지 쫒겨와 바이칼湖를 건너지는 않겠다며 최후항전을 벌였던 곳이다. 하지만 결국 1920년 1월 이곳에도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섰다.

이르쿠츠크는 이렇게 패배하면서 주저앉은 귀족들의 눈물과 한이 서리면서 러시아적 교육 문화 학술의 중심도시로 거듭 태어났다. 물론 지금은 사회주의의 붕괴로 인해 다른 도시와 같이 가난과 어둠에 덮힌 낡은 도시가 되어버렸다. 이르쿠츠크는 이런 역사성으로 인해 한편에는 러시아의 자존심이 강하게 남아있고 다른 한편에는 시베리아 원주민의 향취를 느끼게 하는 도시가 되었다. 특히 동부 개척민의 고유한 습성과 타향살이로 인해 생겨난 배타적인 문화 유산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이 도시의 자랑은 이르쿠츠크 박물관이다. 무어 양식의 붉은 벽돌로 세워진 박물관에는, 토착민들의 통나무집과 의복, 무기, 추장복, 멋진 투구, 깃털로 만든 event 코트, 시베리아인의 샤머니즘과  시베리아 선사시대 고고학적 유물을 볼 수 있으며, 바이칼 지역의 신석기 벽화를 재생해 놓기도 하였다. 박물관은 그 밖에도 이 지역 탐험가들이나 조사자들의 업적 그리고 정착민과 이방인들의 문화 비교에 촛점을 맞춘 지리 사회관도 갖추고 있어 관광객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또 이르쿠츠크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 1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Obelisk가 길을 가르며 서 있는데, 시베리아 정복에 공을 세운 장군들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미묘한 것은 혁명에 대항하여 최후의 항전을 벌인 곳이건만, 다른 도시에선 사라져 버린 레닌 동상이 붉은 광장에 버티고 있고, 레닌스트리트 따위 거리이름이 버젓이 사용되고 있는 점이었다.
호텔 식당에서 만난 한 시민에게 왜 없애지 않는가를 물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訣┸暠?그것마저 없애버리면 이 도시를 지켜온 러시아적 자존심이 흔적없이 사라진다고 여기기 때문일겁니다. 아니면 바이칼 지방의 토속신앙에 감화되어 모든 것을 용서하고 받아주는 열린 마음에서일겁니다"

호수 바이칼

호수를 향해 가는 길은 왕복 2차선의 좁은 도로였다. 그러나 좁아보이지 않았고 이곳 기준에서는 고속도로였다. 이르쿠츠크에서 약 70Km 거리. 市를 벗어나니 고개길이 계속 이어졌다.

길 양편은 자작나무와 적송(赤松)의 숲이었다. 묘하게도 질서가 있었다. 한고개 넘으면 적송의 숲이요 또 한 고개 넘으면 자작나무의 숲이었다. 둘 다 추위에 강하고 햇빛 좋아하는 양수라는 점에서 이해는 가나 어쩌면 저리도 분명하게 적송과 자작나무가 대지를 나누어 숲을 이룰까,는 보는 이를 궁금하게 했다. 수령도 만만치않아 높이가 이십미터도 넘는 나무들이 빼곡히 모여 곧게 하늘을 향해 서 있었다. 춘원이 유정에서 묘사한 글이 생각났다.

…백 척은 넘을 듯한 꼿꼿한 침엽수(전나무 따윈가)들이 어디까지든지, 하늘에서 곧추 내리박은 못 모양으로, 수없이 서 있는 사이로…

유정은 1933년 발표된 소설이다. 그 유정에 묘사된 바이칼호 가는 길 풍경은 지금도 그대로였다. 춘원은 이 때 이르쿠츠크를 거쳐 바이칼湖를 다녀간 게 분명했다. 직접 답사하지 않았다면 묘사할 수 없는 표현들이다. 다만 그가 다녀간 계절은 이 지방에 눈이 오고 바이칼湖가 얼기 시작하는 10월이나 11월 쯤으로 짐작되었다.

…꿈에서 깨어 창 밖을 바라보니 얼음과 눈에 덮힌 바이칼호 위에는 새벽의 겨울 달이 비치고 있었오. 저 멀리 검푸르게 보이는 것이 채 얼어붙지 아니한 물이겠지요. 오늘 밤에 바람이 없고 기온이 내리면 그것마저 얼어 붙을는지 모르지요. 벌써 살얼음이 잡혔는지도 모르지요. 아아 그 속은 얼마나 깊을까. 나는 바이칼의 물 속이 관심이 되어서 못견디겠소…

…인제 바이칼에 겨울의 석양이 비치었소. 눈을 인 나지막한 산지는 햇빛에 자줏빛을 발하고 있소. 극히 깨끗하고 싸늘한 광경이요…    

춘원은 이르쿠츠크에서 마차를 타고 바이칼호를 갔다고 했다. 6월에 방문한 필자가 그의 작품에 나타난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수는 없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대목은 그의 체취를 느끼게 했다.

…경사지를 올라서서 보니 그것은 한 산등성이었다. 방향은 알수없으나 우리가 가는 방향에는 더 높은 등성이가 있는 모양이나 다른 곳은 다 이보다 낮은 것 같아서 하얀 눈바다가 끝없이 보이는듯 하였다…

이르쿠츠크에서 호수까지는  44개의 고개를 넘어야 했다. 44번째 고개마루에 올라서니 비로소 바다같은 호수가 시야에 펼쳐졌다.
"아아, 바이칼..."
그것은 잔잔하고 부드러운 바다였다. 물결이 일때면 별빛보다 더 영롱한 빛을 반사시키는 바다였다. 그것은 감탄을 발하게 하는 장관이었다.

버스는 44번째 고개 위에서 멎었다. 고개마루에 서낭당이 있었다. 신수(神樹)에 무수한 헝겁조각이 걸려 있었다. 서낭당은 서낭신의 거소로 어떤 기원(祈願)을 담은 돌이 쌓인 돌 무더기거나 신수(神樹)에 당집이 복합된 형태인데, 얼마전까지 중국 성황(城隍)에서 유래되었다고 했으나 차츰 우리 고유의 것으로 고쳐 보기 시작한 풍속이다. 일행 중에 몇 사람이 가족의 무병장수와 사업번창을 기원하며 이곳 신수에 헝겁조각을 걸었다.

서낭당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시베리아 토착민들의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야외 민속박물관이 있었다. 적송을 이용한 원주민의 전통가옥 통나무집이 가득한 곳이었다. 교회도 카페도 모두 통나무로 지어져 있었다. 집도 마구간도 통나무였고 문은 하나같이 제주도 삼장문 형태였다.

민속촌을 둘러싸고 있는 숲에는 민들레며 쑥갓 난초 등 우리나라 길 가에 흔한 꽃들이 똑같은 모습으로 피어 있었다. 다만 다른 꽃으로는 노란 양귀비 꽃이 심심찮게 있어 다른 땅임을 느끼게 했다.

이곳을 대표하는 민예품의 하나인 목인형은 참 재미있었다. 인형 속에 또 인형이 있고 그 속에 또 인형이 있어 보통 10여개 이상 같은 모습을 속에 품고 있었다. 어떤 모델은 옐친 속에서 고르바초프가 나오고 고르바초프속에서 브레즈네프가 나오는 식으로 역대 서기장을 담고 있기도 했다.

이윽고 바이칼 호수에

이윽고 우리는 바이칼호안에 닿았다. 호수와 강은 샤먼바위로 경계된다고 했다. 전체는 거대한 바위이지만 수면 위에 보이는 것은 보일까 말까 한 주먹만한 바위 섬이었다.  

호수를 우측에 끼고 나 있는 도로를 20분쯤 달려 "바이칼 호텔"에 닿았다. 볼수록 바이칼은 바다같은 느낌을 주었다. 맑고 고요하고 포근하고 깨끗했다. 세상에 이렇게 평화로운 곳이 있다니… 이곳에서 며칠 쉰다면 세속의 피로가 거짓말처럼 씻겨질 것 같았다.
"그래, 이것은 옛글에서처럼 호수가 아니라 신성한 바다야였다"
호수 넘어로 만년설을 머리에 인 고산준령이 아스라히 보였다. 날씨가 약간만 흐려도 안보인다는, 40Km 밖 호수 저편 산이 그렇게 선명하게 보일 수 없었다.

정원에서 먹는 피크닉 런치를 주문해놓고 호텔내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나무로 만들어진 곰이 곳곳에 있었다. 곰을 토템으로 하는 신앙이 이곳 원주민에게도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전망 좋은곳에 전망대가 있었는데 벽에 장식된 조각이 눈길을 끌었다. 그건 바이칼 전설을 담고 있는 조각이었다. 호수에 사는 민물고기가 아닌 바다 생물이 조각되어 있었다.
맨 윗자리엔 인어의 아름다운 자태가, 아래는 전설의 바이칼 노인이 받치고 있었다. 지배인까지 만났지만 아쉽게도 이 작품의 내력을 하나하나 이야기해줄 사람을 만나지는 못했다.

양고기 바베큐를 메인 디쉬로 한 피크닉 런치를 마친 일행은 바이칼 유람선 선착장으로 갔다. 관광객은 우리일행 뿐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유람선 선착장은 한산했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호수에 손을 담그고 또 호수 물을 손으로 떠서 마시기도 하였다. 유람선이 바로 옆에 정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물은 맑고 투명했다. 물 맛도 일품이었다.

그러나 발을 담그니 3분을 버티지 못 할 정도로 차가왔다. 바이칼湖의 수질은 염분농도가 거의없는 약알칼리성으로 일년 내내 수온이 15℃를 넘지않는다고 했는데, 6월의 수온은 8℃ 내외였다. 그것은 습기가 많지않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40Km 떨어진 호수 건너 산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보다 물 속 40m까지 육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필자를 더 황홀경에 빠지게 했다. 유람선이 출발하기 직전 국민학교 학생들로 보이는 어린이 30여명이 배에 탔다. 3명의 인솔 교사와 함께였다. 러시아계 아이들 모습은 인형처럼 예뻤다.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분주히 갑판을 오르내리며 돌아다녔다.
아이들은 부침성 있게 우리를 잘 따랐다.

물망초 꿈꾸는…의 고향

유람선을 타고 바이칼호수를 가로질러 가는 동안 현지 가이드는 재미있는 표현을 했다.        
"백과사전에서는 바이칼湖를,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3개의 호수가 이어지며 초승달 모양이라고 소개합니다. 남북의 길이가 636Km라는 것, 폭은 평균이 40Km요 넓은 곳은 80Km나 되어 총면적을 따지면 3만1,500평방미터로 세계에서 9번째 규모의 호수라고 합니다. 수면의 높이는 해발 455m로 아프리카에 있는 빅토리아호, 탕가니카호에 이어 3번째이지만 깊이는 중앙이 1,749m로 세계 1위이며, 담수량은 세계의 24%라고 적고 있습니다. 같은 말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곳의 소개방법은, 면적은 네델란드와 벨지움을 합한 것만 하고, 남북의 길이는 모스크바
에서 성페테스부르크까지의 거리이며, 수량(水量)은 나이아가라의 5대호를 모두 합한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바이칼호 면적이 남한 면적의 3분1쯤 된다면 그 규모를 느끼시겠습니까?"

그는 웃으면서 계속 말했다.

"흘러드는 강은 336개이고 빠져나가는 강은 앙가라 강 하나입니다. 그러나 336개 강에서 흘러드는 물이 400년 이상 고여야 호수를 채우고 넘쳐 비로소 앙가라강으로 물이 흐를수 있습니다"

여기 전설이 있었다. 옛날 바이칼이란 노인에게 337명의 딸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예니세이(Yenisai)와 사랑에 빠져 달아났다. 노한 바이칼은 도망가는 딸을 향해 거대한 바위를 집어 던졌는데, 이로 인해 바이칼호의 물이 빠져나가는 한 줄기 물꼬가 트였다는 것이다. 그 딸의 이름이 바이칼호의 물을 예니세이강에 보태주는 앙가라이며 이때 바이칼 노인이 집어 던졌다는 샤먼바위(Shaman Rock)로 바이칼湖와 앙가라江의 경계를 삼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또 "이곳의 기후는 11월에 간혹 태풍이 있을뿐 4계절 언제라도 다채로운 자연이 관광객을 반긴다"고 했다. 1월에서 4월까지는 얼음이 10m 두께로 얼어 천연의 스케이트장을 이루다가 봄이 되면 마치 수정의 파편처럼 투명한 조각으로 갈라지고 녹아내리는데 보는 사람마다 탄성을 내지르지 않을수 없는 장관이라고 했다.

5월부터 10월까지는 쾌청한 날씨가 계속되며 다시 겨울로 접어드는 11월 쯤은 더할 수 없는 고요함이 매력적이어서 사람을 사정없이 끌어 들인다고 하였다.

유람선은 푸른 물을 가르며 30분쯤 달려 건너편 호안에 닿았다. 가는 동안 인형처럼 예쁜 러시아 아이들과 사귀려고 웃으며 말도 걸고 볼펜을 선물로 내밀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받지 않았다. 묻는 데는 대답했으나 무언가 주려고 하면 등을 돌렸다. 인솔교사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었다.  

호수가 깊은만큼 연안은 모두 급경사인데 유람선이 닿은 곳은 약간 비스듬한 경사와 좁은 호안평야가 있어 호수를 감상하며 걸을 수 있고 피크닉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유람선이 닿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현지 아이들이 선착장에 모였다. 국적이야 러시아겠지만 종족을 알 수 없는 튀기들이였다. 백인계도 아시아계도 순종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몽골계로 보이는 아이들 몇만 선명할 뿐이었다.    

호안은 모래가 아닌 자갈밭이었다. 손안에 서너개씩 쥘 수 있는 작은 조약돌인데 유심히 보면 독특한 모양도 많았다. 한 사람이 인어 모양이 새겨진 돌을 주어들고 탄성을 질렀다. 그러자 탐석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저마다 기념될만한 희귀한 돌을 찾느라 분주했다.

그때였다. 유람선을 함께 탄 아이 하나가 내게 희귀한 돌 하나를 가져왔다. 볼펜을 주어도 받지않던 니콜라이라는 아이였다. 니콜라이는 이것이 마음에 들면 볼펜과 바꾸자고 했다. 참 예쁜 돌이었다.

나는 일부러 한참 돌을 살펴본 뒤 고개를 끄덕이고 볼펜을 주었다. 니콜라이의 기뻐하는 모습은 대단했다. 친구들이 니콜라이곁에 모여 볼펜을 돌려가며 구경했다. 다른 아이가 또 돌을 가져왔다. 볼펜을 네 개 가지고 있던 나는 또 하나를 주었다. 그랬더니 또 다른 아이가 또 돌을 가져왔다. 공짜는 받을 수 없지만 물물교환은 인솔선생이 허락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주어온 돌은 기념이 될만한 것이었다. 필자 일행은 아이들 덕분에 독특한 돌을 몇 개씩 얻었고, 아이들은 저마다 이국적인 선물을 얻어들고 좋아했다.
한 남자아이는 한 아름 꽃을 일행 중 한 여성에게 바쳤다. 놀랍게도 노란 수선화 사이에 물망초가 있었다. 사랑과 정성의 상징으로 노래되는 꽃. 도나우(다뉴브) 강 전설 속에서 "forget me not"로 한시절 우리 마음을 촉촉히 적셔준 꽃이었다.

독일 낭만파 시인 노발리스는 물망초를 인간의 가장 깊은 동경의 상징이라고까지 했다. 젊은 남자가 바지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마법(?)의 꽃 전설도 있고, 민간 신앙에서는 이 꽃이 땅 속에 매장된 보물을 열어보인다고 했는데, 이런 물망초를 바이칼湖에서 만난 것이다. 뒤에 안 일이지만 물망초는 바이칼호를 비롯 유라시아 대륙이 주분포지였다.

호수 안에는 27개의 섬이 있었다. 이중 가장 큰 섬인 올혼(Olkhon)섬은 오래동안 브리야트인과 예벤키족의 聖地로 숭배되어 왔다. 몽골의 영웅 징기스 칸의 어머니가 태어나 자란 고향이기 때문이었다.

올혼이란 브리야트 말로 "숲"을 의미했다. 바이칼호는 올혼섬 북쪽 끝에서 보는게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이 섬 뒤쪽의 일명 "작은 바다(Maloe More)"는 수영하기에 매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올혼섬까지 가볼 수 없었다. 아니 웬만큼 넉넉한 시간과 충분한 교통수단을 갖고있지 않으면 가기 힘든 곳이었다.

다시 이르쿠츠크로 나온 일행은 앙가라강 유출구에 소재한 리스트비앙카로 가서 과학아카데미 호소학연구소(湖沼學硏究所)를 둘러보았다. 바이칼호에 관심있는 여행자에게 보다 학술적이고 전문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이칼이 호수냐 바다이냐는 여기서도 답을 얻기 어려웠다. 물범처럼 바다에서나 볼 수 있는 특이한 생물이 바이칼호 살고 있었다. 더구나 약 1천 2백 종류에 달하는 생물 중 이 호수 고유의 생물이 3/4이나 된다고 하니 태초의 생명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나올만도 한 일이었다. 호수 연안 사람들의 생활수단은 연어 송어 용상어 등 어업이 태반이었다.

통일호 같은 시베리아 횡단열차

이르쿠츠크에서 울란우데로 갈 때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이용했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깊은 인상을 주었던 그 열차였다. 좌석은 없는 100% 침대차였다. 하긴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시간으로는 166시간, 날자로는 만7일이 소요되는 열차를 앉아서 간다는 건 무리일 것이었다. 바이칼호의 이쪽에서 저쪽 가는 것만도 8시간 15분을 가야하는 정도였다.

4인 1실 구조여서 일행을 나누다보니 공교롭게 여성 한분이 외톨이로 남게되었다. 승객이 채워지지 않은 칸이었다. 곤란해진 가이드가 조를 다시 짜려고하자 혼자 남게된 여성이 나서서 괜찮다고 했다. 농반진반 멋진 왕자를 만나 달콤한 이문화 체험을 하게될지 모른다는 기대라도 가졌던 모양이다.  

기차가 출발하여 이르쿠츠크를 완전히 벗어나기까지 그 여성의 객실 동반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일행은 차라리 잘됐다며 끼리끼리 모여 차창에 어리는 노을을 안주삼아 술잔을 기울였다.

오후 10시에 출발하였는데, 이곳에서는 그 때가 저녁 노을이 한창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한참 풍광에 젖어 여행기분을 만끽하는데 옆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혼자 있던 여성이었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지르며 손지갑만 들고 뛰쳐 나왔다. 꿈에 보일까 무서운 시커먼 인종의 동승자가 뒤늦게 제 객실을 찾아온 것이었다. 시베리아 벌목장에서 십장노릇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제서야 그녀는 일행중 한 남성에게 자리를 바꾸자고 간청했다.

객차 한량에 한명씩 제복입은 승무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전형적인 비만체질의 여성이 대부분인 것은 정책같았다. 유혹하고 싶은 마음이 일지않는 타잎이라면 우선 풍기사고(?)는 안심해도 좋지않을까.

사회주의 국가가 다 그렇듯, 근무자세는 몸에 배어 있었다. 힘들지않은 사무적인 일은 여성의 일이요, 힘이 요구되는 일은 남자 차지인 것은 기차여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열차는 통일호와 같았다. 침대는 객차를 따라 길게 놓여진게 아니라 가로로 놓였고, 그래서 누우면 옆으로 흔들려 피로가 쉽게왔다. 11시 반쯤 되니 어두워졌다. 객차 한귀퉁이에 보온통이 있어 뜨거운 물을 구할 수 있었다. 사발면에 뜨거운 물을 담는데 여승무원이 유심히 본다. 침을 꿀꺽 삼키는 것 같아 하나 주었더니 얼굴이 온통 환해지며 고마워 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정말 순박한 사람이란 사회주의 국가의
서민들이란 말이 새삼 실감되는 장명이었다.

러시아도 몽골도 아닌 제3국가 브리야트공화국

브리야트 자치공화국의 수도 울란우데역에 닿은 것은 이튿날 새벽 6시였다. 우리 상식에나 새벽이지 현지 분위기는 아침이었다. 울란우데의 첫인상도 싸늘했다. 회색빛 콘크리트 육중한 건물이 도시를 짓눌렀다.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사람은 눈에띠지 않았다.

로칼 안내자는 브리야트자치공화국의 외무장관을 지낸 김중길씨였다. 그는 고려인 2세임을 크게 자부하는 우리 동족이었다. 일행이 역사를 빠져나오자 그는 "카레스키야"하고 외치며 환한 웃음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외무장관을 지냈다는 근엄한 모습은 아무데도 없었다. 포장마차에서 소주 나눌 수 있는 부담없는 친구로 보였다. 그는 브리야트공화국의 산업시설을 자랑삼아 소개했다.  

그런데 일행중에도 소련의 연방체제나 자치행정 체제의 상식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김중길씨는 이부분을 잘 설명해 주었다. 소련의 지방행정은 크게 공화국, 자치공화국, 지방(크라이), 주, 자치주 등으로 내려가는 데, 일반적으로 외국인은 공화국과 자치공화국 구별을 잘 못하는 것 같다고 했다.

"소련은 러시아 백러시아 카자흐 우크라이나 투르크멘 키르키스 등 16개 공화국의 연방체였습니다. 공화국은 주권이 분명한 나라로서 독자적 헌법과 최고회의 및 최고법원을 갖고있고 외교권이며 분리권도 행사합니다. 다만 연방 가입절차만 있고 탈퇴방법은 명시된 것이 없어 공화국이 탈퇴하려면 반 스탈린주의로 몰리곤 했던 거죠. 일단 소련이 붕괴하자 기회를 놓칠세라 카자흐나 우크라이나 등이 독립한 것은 이러한 체제에 근거합니다.
각 공화국은 다시 저마다 십수개 또는 수십개의 자치공화국을 안고 있습니다. 자치공화국도 독자적 헌법과 최고회의 및 최고법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화국으로부터의 분리권은 없다는게 특징입니다. 자치공화국은 경제적 독립만 인정되는 체제지 정치적으로는 독립국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러시아가 강한 무력을 동원하고 그 많은 희생을 치루면서 체첸의 독립만은 막았던 것도 체첸은 분리권이 없는 자치공화국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러시아에는 타타르스탄 추와시아 야쿠찌아 브리티야 체첸 등 21개 자치공화국이 있는데, 체첸의 독립이 허용되면 자치공화국이 모두 독립운동을 벌릴 것이고, 그렇게되면 소련처럼 러시아도 붕괴 위기에 직면하는 것이라고 했다.

울란우데 붉은 광장에는 세계최대의 레닌 두상(頭像)이 있었다. 기네스북에 올라있는 두상이었다. 이르쿠츠크와 마찬가지로 이 도시에서도 레닌은 살아있었다. 도시는 우중충하고 기성인들은 얼굴은 어두었다. 어쩌면 그렇게 30년전 모든 건설이 멈춰진듯한 분위기가 같을 수가 있을까. 하바로프스크도 이르쿠츠크도 이곳 울란우데도, 모두 30년전에 역사가 맞춰져 있었다.

공산주의 70년 중 40년차까지만 건설을 활발히 하고 멈췄다면, 그 종주국 소련의 붕괴는 자연현상이었단 말인가? 울란우데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4, 50년전에는 이지역 최고의 휴양소였다는 곳으로 안내되었다. 장성급이거나 영웅들만 드나들 수 있었던 곳이라고 했다. 숲에 싸여있는 것이 겉보기에는 과연 그럴 듯 하였다. 그러나 내부 시설은 하루도 지내기 힘들만큼 물도 안나오고 화장실도 더러운 그런 곳이었다.

왕년의 공훈자들이 노인이 되어, 그곳에서 나라가 베푸는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들도 카레이스카야를 연발하며 우리를 반겼다. 그들은 고려인 2세가 외무장관 지낸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켰다. 브리야트에는 이렇게 고려인(Korean)을 자처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노인이 된 영웅들은 카레이스카야(高麗人)와 브리야트스카야(蒙古人)는 형제라며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곳에서 보는 바이칼호수는 보다 원시적 형태였다. 곰도 많아 웅담이며 사향 구하기가 어렵지않은 곳이었다. 바이칼민속사박물관(民俗史博物館: 민속인종박물관)을 돌아보았는 데 보고난 뒤의 심경은 착잡하였다. 문명의 발상지에서 막연히 보고싶었던 것을 모두 본 것과 같았다.

이곳에는 우리 옛 모습뿐 아니라 베링해협 건너 아메리카 인디언과 유사한 토템풀, 텐트촌, 샤머니즘(통나무에 고기와 짐승의 문양을 새겨 제사지낸 흔적 등)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그것은 동양문화의 상고사적(上古史的) 원류가 이곳이라고 하는 현지학자들의 학설을 훌륭하게 뒤받침하는 살아있는 사료들이었다. 일행 중 한 분이 문득 말했다.
"허허. 이 정도면 세트 만들지말고 서부영화 여기서 찍으면 훌륭하겠네"
일행은 약속이나 한 듯 그를 보았다. 이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일행은 모두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겹쳐 필자에게는 다시 마르코 폴로가 떠올랐다. 13세기 초 이곳 사람들 모습을 그는 동방견문록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들은 초르차와 바르구(Bargu:Baikal)의 동쪽과 남쪽에 살고 있었는데 일정한 주거가 없었다. 그곳에는 넓은 평야와 무성한 목초와 큰 강이 있어 모든게 풍족했다. 그들에게는 국왕(國王)이란 것도 없었고 내가 들은 바와 같이 그들의 말로 웅칸(Ungkhan)이라고 부르는 유력한 군주에게 조공(朝貢)을 하고 있었다...

초르차(Chorcha)가 어디인지 또 웅칸(Ungkhan)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직 밝히지 못하고 있지만,지구촌 환경의 마지막 보루라는 바이칼호수의 동쪽과 남쪽은 오래전부터 그들의 땅이요, 그들은 우리와 생김새도 같고 생활풍속도 같은 몽골리안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여행은 바이칼호수에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좀 더 찾아야한다는 암시를 받았고, 이것이라고 딱히 꼬집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어디서도 느끼기 힘든 진한 고향감정같은 것에 흠씬 젖어 돌아와야 했다.

<95년 6월/ 그린스카웃 회지, 국제생명 사보, 한국은행 사보 등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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