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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가도 사람이 산다. 살아가는 근본 모습도 같다. 다만 역사와 환경이 다름에서 풍습과 생활형식이 다를 뿐이다. 여행의 참 목적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해하는 것으로 상식을 넓히고 지혜와 슬기를 익혀 나름대로 구김살 없는 풍요한 삶을 구가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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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콧대 꺾은 베트남

인도차이나 반도 동쪽에 있어, 용이 거꾸로 선듯 남북으로 길게 S자 형상을 하고 있는 베트남. 베트남은 몰라도 베트남전쟁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최대규모로 치뤄진 전쟁이었다.

전반적인 규모에 있어서는 세계대전에 못 미친다 하겠지만, 그러나 동원 병력, 사상자 수, 항공기 손실, 전쟁비용 면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을 웃돌고, 사용 탄약량, 투하 폭탄량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규모를 훨씬 초과하는 역사상 가장 큰 파괴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세계 최강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진 미국의 콧대가 여지없이 꺾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베트민은 전쟁의 승패가 힘에 의해 좌우된다는 논리를 깨뜨렸다. 과다한 전쟁비용이 유럽 경제의 뿌리를 흔들어 "유럽의 세계경제 지배시대"도 막을 내리게 했고, 열악한 조건에서 끝내 민족의 독립운동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아시아 "민족주의"의 강인함과 정당성을 실증으로 보여주었다.

베트남전쟁은 우리에게도 가볍지않은 역사의 한 장이었다. 전쟁이 격화되면서 미국은 용맹한 한국군의 파병을 요청했었다. 정치적으로는 어떤 거래가 이루어졌는지 모르지만 당시 당국은 이데올로기 전쟁이라는 측면을 강조함으로서 국민들의 반공정신에 호소했고, 육이오 남북전쟁을 경험한 많은 국민들은 베트남의 처지를 우리와 같은 것으로 여겨 파병을 지지했다. 그러나 베트남의 상황은 우리와 달랐다.  

한국군은 64년 9월 22일 비둘기 부대를 시작으로 해서 차츰 전투병력까지 파견하게 되었는데 가장 많을 때는 일시 주둔군의 수가 6만에 달하기도 했었다. 73년 1월 27일 파리평화협정 조인에 의해 휴전이 발효되면서 미군과 함께 주월한국군의 철수가 이루어지기까지 8년 6개월 동안, 연인원 30만명이 건너가 "베트남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피를 흘렸다.

불구가 되거나 아예 돌아오지 못한 숫자도 만만치 않았고, 무사히 돌아온듯 했으나 고엽제 후유증으로 지금도 고생하고 있는 사람 또한 적은 수가 아니었다. 그 희생의 댓가로 건설된 대표적인 하나가 경부고속도로임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전쟁만도 못한 휴전 당시 한국의 언론들은 베트남에서의 한국군 활약을 연일 대서 특필했다. 한국군이 가고 올 때마다 성대한 환영 환송행사가 베풀어지고, 한국군에게 고마워하는 베트남 국민들의 마음 또한 각별한 것처럼 보도되었다.  

그러나 실제도 그러했던가? 필자가 참전용사로서 나트랑에 도착했을 때 환영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깃발을 흔들기는커녕 우리를 향해 웃는 다만 하나의 간절한 모습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우리가 미국을 돕는 것이라고 여겼지 저희를 위해 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미국의 영향을 잘못 받은 나라들이 대개 그렇듯이 사이공 정권은 부패해 있었다. 본디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보다 더 엄격한 청렴성과 준법정신을 요구하는 제도이며 그것을 지켜지 않은 권력자에 대한 심판도 더 준엄한 것이다. 사이공 정부는 이런 원칙을 망각했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권력자들은 부의 축적에 골몰했으며 향락적인 경제문화와 유착해서 중심을 잃고 미국이 이끄는대로만 가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의 당사자는 넷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미국과 사이공 정부가 한편이요, 북베트남과 베트콩(남베트남인민전선)이 다른 한편이었다. 그런데 시각을 달리하면 판도가 달라지는 것이 외세(外勢)와 외세를 등에 업은 권력자들이 한편이고, 베트남 민족주의가 다른 한편이었다. 그렇다면 베트남 전쟁은 애당초 전선이 형성될 수 없는 성격이었다.

오랜 전쟁에 시달린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전쟁을 하는 모두가 적이었다. 옳다면 모두 옳고 적이라면 모두가 적인 형국이었다. 때문에 민중은 누가 이기고 지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가족을 위해서는 낮 시간 베트남 민병대원 노릇을 하다가 밤이 되면 민족을 위해서 베트콩의 일원이 되는 이중생활자가 부지기수였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은 언제 어디서든 가면만 벗기면 "접전(接戰)"이라는 상황이 전개될 수 있었다. 이념전쟁 못지않게 내부의 부정부패나 무질서도 그들에게는 심각한 전쟁상황이었다.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전쟁은 생활이 되었다.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는 가운데 그런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생활이란 반복적인 것이어서 인내와 끈기를 요구하는 대신 감정적으로는 무뎌지는 특성이 있다고 했는데, 그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그렇게 되어갔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열악한 조건 하에서 서둘러 끝을 보려했다면 베트남 전쟁은 십중팔구 짧은 시간에 미국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그건 미국이 원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베트남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에서 보듯, 미국은 그들의 감정을 폭발시키고자 빌미만 있으면 싹쓸이 방법도 마다않을 정도로 갖은 시도를 다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인내와 끈기에 굴복하고 말았다.    

73년 1월 27일 24:00시 필자는 백마부대 상황실에서 직접 사령부로부터 휴전발효 전통을 받아 예하부대에 하달했다. 그때 우리는 "차라리 전쟁만도 못한 휴전"이라는 용어를 썼다. 75년의 사이공 함락은 사실, 이때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승리라기보다 민족주의의 승리였고, 나아가 미국에의 승리였다. 1천년 중국의 지배, 3백년 프랑스의 지배, 이어 일본, 다시 프랑스, 그리고 미국으로 이어진 열강의 집요한 침략과 지배와 간섭에 맞서 싸운 베트남 - 민족주의의 힘으로 세계 열강을 차례로 물리친 베트남은 국토통일과 더불어 인도차이나 반도의 리더로 떠오르게 되었다.

새출발의 구호는 "도이모이"

문자 그대로 아비규환의 상황을 연출했던 사이공 함락이 75년 4월 30일의 일이니 베트남이 공산화 된지도 21년 여가 지났다. 그동안 베트남은 어떻게 변했을까. 베트남을 처음 찾는 사람에게는 문제가 덜 되겠지만 미국과 사이공 정부를 도와 그들에게 총을 겨누었던 참전용사들은 - 역사란 그런 것이라고 넓게 생각하려해도 - 입장이 애매했다. 물론 첫 발을 디딜 때만 약간 그럴지 모른다. 일단 발을 딛고 웃으며 손을 잡으면 또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 인간들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 가슴에 새겨진 베트남 전쟁의 상처만 해도 쉽게 잊혀질 정도의 작은 것은 아니다. 참으로 많은 친구들이 그곳에서 팔다리를 잃었고 인생을 잃었다.

그들은 그들대로 아픔에 시달렸다. 가장 큰 적은 바깥이 아니라 내부에 있었다. 적화통일을 완수한 민족주의자들이 자본주의에 젖어버린 인민을 온통 심판하고 개조하는데 10년 이상을 소비했을 정도로, 서로를 부정하는 미움의 골은 깊었다. 헤아릴 수 없?많은 사람들이 새국가 건설이라는 미명하에 희생되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보트피플 신세가 되어야 했다. 그것이 새역사 창조를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라면 베트남은 숙청을 종료함으로서만이 새로 태어날 준비를 마치는 셈이었다. 그래야만 한국 미국을 비롯한 과거의 적들과도 관계를 개선할 수 있었다.

적화통일 11년째인 86년 12월, 베트남공산당 제6차 대회는 그 신호로써 "도이모이" 정책을 채택했다. 내부 정리를 끝낸 베트남이 새로운 각오로 내건 중흥(中興)의 깃발이었다. 쇄신(刷新)이랄까 유신(維新)이랄까 "베트남식 페레스트로이카"러고 할 수 있는 "도이모이"는 식료품과 소비재, 수출품의 세 분야에 있어서 증산 개혁을 기치로 내건 "새마을 운동"이었다.

그 결과 우선 쌀 생산량이 급증하여 식량수입국이던 베트남은 단숨에 세계 제3위의 쌀 수출국으로 변했다.  

이어 88년 12월 베트남 국회는 헌법전문의 수정을 결의했다. 과거 전쟁의 상대국이었던 중국 프랑스 일본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표현을 삭제한 것이다. 그리고 91년 중국과의 관계를 정상화 했고, 92년에는 이스라엘과, 95년에는 우리나라와도 국교를 맺었다. 머잖아 미국과도 정상화가 이루어질 전망이다. 이런 일련의 개방조치와 함께 통제경제를 축소하고 시장경제 도입을 실시하자 프랑스를 필두로 EC(유럽공동체)의 침투가 급속히 이루어졌고, 우리나라는 물론 아시아 여러나라의 투자도 활발해졌다.  

관광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도시마다 상점 레스토랑 호텔 등이 폭발적으로 늘어 거리풍경이 서구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특히 호치민시에서는 외국자본의 호텔 건설이 활기를 띠고 있으며 교통수단도 비행기 철도 버스 등 선택의 폭이 넓어져 유럽의 관광명소 못지않게 발전하고 있다. 외국인 요금을 적용하고 있는게 아쉽지만 어쨌든 어렵지않게 이용할 수 있는데, 일례로 아직 나이트클럽이나 환락가는 허용되지 않지만 젊은 여성 접대부가 있는 단란주점이 있어 관광객의 말초신경을 충족시켜주며 성업중인 것이다.

전쟁 당시 치열했던 전적지는 모두 관광지로 단장되었다. 총 길이가 200km를 넘는다는 호치민시 부근의 땅굴(쿠치)도 베트남에서 빼놓을수 없는 볼거리의 하나가 되었다. 지하 300m에 있는 옛 베트콩사령부 사령관 책상 앞에 차례로 앉아서 깔깔거리며 기념사진을 찍는 여행자의 모습은 역사를 모르는 어린아이의 천진남만함처럼 보인다. 이대로 간다면 호치민시는 머지않아, 다시금 옛 사이공의 모습을 그대로 회복할 것 같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다만 성장이 잠시 멎었던 것 뿐이고, 다만 권력자만 바뀌었을 뿐 아닌가.  

1단계 "도이모이"가 성공했다고 하는 지금 국민소득은 겨우 US$500 수준이다. 푸른 야자수 사이를 롱(삿갓)을 쓰고 하얀 아오자이 자락을 너플거리며 걷던 자존심 강한 아가씨들이 단돈 5불에 헤픈 웃음을 팔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호치민시에서보다 하노이시에 이런 모습이 더 흔하고, 여행자의 부담(?)도 적은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거리를 가득 메운 자전거와 오토바이의 무질서한 흐름. 그 사이를 산듯하게 빠져나가는 대우자동차의 모습은 한국인 여행자의 어깨를 공연히 으쓱하게 만들어 준다.      

2천년 중국과의 전쟁에서 버티고, 프랑스를 150년만에 물리치고, 이어 일본을 패퇴시키고, 미국의 콧대를 꺽어버린 뒤 새로 시작하고 있는 베트남. 그러나 새롭게 파고드는 열강의 "자본과 기술"을 앞세운 침략에는 또 어떻게 맞서 싸울 것인가. 베트남 여행은 또다른 의미에서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가볼만한 곳

베트남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나라이기에 종단하는데는 시일이 꽤 걸린다. 시간이 있다면 열흘 정도는 보람있는 여행이 될만큼 볼거리는 많다. 베트남 입국은 하노이이거나 호치민(사이공) 둘 중의 하나이다. 하노이를 기점으로 하면 바다의 계림이라는 하롱베이와 디엔비엔푸, 사파 등의 도시를 도는 북부지역 여행을 삼사일 한 후 호치민시로 내려와 달라트 붕타우 메콩델타 등을 둘러보면 훌륭하다. 또 중부에도 후에 다낭 나트랑 등 가볼만한 도시들이 많다. 일정에 여유가 없는 경우에는 국내선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이 좋지만 그렇지않은 경우라면 철도여행도 권할만하다.

인도차이나란 인도와 지나(支那;중국)의 문화가 공존하는 땅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추옹송 산맥을 천연의 국경으로 하여, 나란히 그 동쪽에 위치한 베트남은 4분의 3이 산악지대인데 북쪽으로는 중국, 서북으로는 라오스, 서남으로는 캄보디아와 접해있고, 남지나해에 면한 동쪽 해안선의 길이는 3,260km에 이른다. 면적은 남한의 3.4배나 되며 인구는 7천만명(92년).

베트남은 이런 지형적인 특성으로 인해 크고 작은 여러개의 강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며 하류에서는 델타를 형성한다. 하노이는 북부지방의 젖줄인 홍강의 델타지역안에 있으며, 호치민은 광대한 메콩델타에 인접해 있고 중부에는 천연의 양항(良港)들이 있다.  

비행기에서 메콩델타를 보면 그 광대함에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 진흙범벅같은 대지에 뱀이 엉켜있듯 흐르는 대하(大河). 부분만을 경작지로 개발하고 있음에도 이 델타는 이미 아시아 최대의 곡창지대로 떠올랐다.

메콩델타 동북쪽을 흐르는 사이공강 오른쪽으로 호치민 시가가 펼쳐지는데 원색의 꽃들이 사철 피어있고 남국의 정서가 넘치는 도시다. 이곳은 년중 최저기온이 26도C나 되는 더운 곳이다. 델타지대의 해안은 모래사장이 끝없이 펼쳐지는 곳도 많은데 특히 붕타우는 1년 내내 수영할 수 있는 아름다운 하얀 모래의 유명한 해안이다.    

이에 비해 북부의 전원 풍경은 우리 눈에 낯설지 않을 정도로 한국과 비슷한 곳이 많다. 하노이 교외의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다보면 철근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다리(昇龍橋)를 지나게 되는데, 그 아래 흐르는 강이 홍강(紅江)이다. 중국 운남성에서 발원하지만 강줄기의 대부분이 베트남 영내를 돌고 있다. 밀림에 뒤덮힌 상류에서는 격류를 이루지만 하류에서는 강폭이 넓어지며 흐름도 완만해진다.

북부에서는 델타만이 아니라 다양한 풍광을 즐길 수 있는데 대표적인 명승지가 하룡만(下龍灣;하롱베이)이다. 석회암질로 된 크고 작은 3천여개의 바위섬이 저마다 특이한 모양을 자랑하고 있어 "바다의 계림"이라 불리운다. 통킹만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해남도 삼아(三亞)의 기이한 풍광과 연결지어보면 어떤 영감인가가 잡힐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여행정보

직항편이 있어 서울에서 3시간 반이면 하노이에 갈 수 있다. 대한항공이 주1편, 아시아나항공이 주3편, 그리고 베트남항공이 주3편 서울과 하노이, 서울 - 호치민을 운행한다. 홍콩이나 방콕, 마닐라, 쿠알라룸푸르에서는 매일 1편 이상이 있다. 프놈펜에서 호치민까지는 버스가 있지만 정세가 불안해서 피하는 것이 좋다. 라오스나 중국 국경 역시 육로로 넘나드는 일은 아직은 조심스럽다.

비자가 필요한데 초청장이 있어야 한다. 단순 여행자를 위해서는 베트남의 여행사들이 이를 대행해 준다. 비자의 유효기간은 1개월이며, 한국에서 취득하는데 5일 정도 걸린다. 여행중 방콕이나 홍콩 등에서도 비자 취득이 가능한데 유효기간이나 비자취득에 소요되는 시간은 마찬가지이다. 주한베트남대사관은 감사원 앞에 있다.  

음식 숙박

베트남인들은 쌀로 무엇이든 만들어 낸다. 대표적인 것은 포(Pho)라고 부르는 우동인데 쌀로 만든 고유한 것이다. 아침 길가의 노점에서 후루룩 거리며 먹는 것이 이 포이다. 쌀 껍질로 감싼 소고기말이 차 지오(Cha Gio) 또한 대표적인 베트남 요리이다. 그 밖에 반 세오(Banh Xeo)라고 부르는 튀김요리, 소고기나 염소고기를 이용한 찌게류도 있어 별미로 꼽힌다.
소스로는 생선을 썪혀 만든 장유인 누크마무가 있는데 대체로 우리 입맛에 잘 맞는다. 고기와 야채를 넣은 샌드위치를 파는 노점이 의외로 많은 것은 빵과 커피만으로 아침식사를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개인여행이 허가된지 얼마 안된 나라이다. 입국지점과 출국지점이 비자에 명기되는 사실에서 보듯 숙박도 외국인 전용호텔에서 해야 한다. 호텔은 3등급이 있는데 고급은 US$100-250, 중급은 US$30-80, 싼 곳은 하룻밤에 US$6 짜리도 있다.

민족 종교

베트남은 다민족 국가이다. 몽골계와 말레이계의 혼혈인 킹족이 84%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타이계 크메르계 말레이계 등의 소수민족인데 54종족이나 된다. 화교도 1백만명쯤 된다. 대나무 목재 벽돌 등으로 땅 위에 직접 집을 세우고, 여자는 아오자이라는 민족의상을 즐겨 입는다. 산지에 사는 소수민족은 화전농경을 하며 가축도 기른다. 가장 높은 고지대에서 사는 중국계 몬(메오)족은 양귀비를 가꾼다 해서 유명하다.  

베트남 속담에 "왕의 법도 촌락의 질서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국가에 대한 촌락의 자립성을 반영한 것이다. 오랜 전쟁에 시달리는 과정에서 이러한 자립성이 민족성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종교의 주류는 대승불교이지만 유교 도교도 생활에 깊히 스며있다. 가톨릭교도도 6백만명쯤 되어 어떤 마을을 가더라도 훌륭한 성당이 하나씩은 있다. 가톨릭교도들은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 아침 미사에 참여하고, 불교도들은 음력 1일과 15일, 가까운 절에 가서 향을 피우고 참배하며 소원을 빈다.

언어 교육

월남어, 혹은 안남어(安南語)로 불리는 베트남어가 있다. 1천년간에 걸쳐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13세기 한 때 한자로부터 "추놈"이란 베트남 문자가 만들어졌으나 어려워서 생활화되지 못했다. 중국어로부터 차용한 어휘에 민족어의 어휘를 보충하는 형태로 베트남어는 형성되었고 17세기 초까지는 한자가 유일한 공식문자였다.

현재의 국어인 보조부호를 사용한 로마자 체계는 17세기 선교사에 의해 발명, 보급된 것이다. 베트남어의 특징은 전치사와 여성명사, 남성명사 등에 따른 어형 변화가 없고 동사와 형용사에 시제의 변화가 없는 것이다.

번거로운 존칭어 표현도 없어 의외로 배우기가 쉬운 언어이다. 북부지방 발음은 탁음이 많고, 남부로 내려오면서 부드러워지는데 문법과 단어는 차이가 없다. 과거의 역사가 반영되어서 베트남어 외에 중국어 프랑스어도 널리 쓰이고 영어나 러시아어에 유창한 사람도 제법 많다.

교육은 국민학교 9년, 중학교 3년의 12년간이 의무교육이다. 식민지 시대에는 학교도 아주 적었고 교육을 등한히 여겼으나 현재는 학교도 많아졌고 학구열이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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