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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맑게 하고 소화를 돕는 차. 차는 인간에게 무한한 활력을 주며 오묘한 사색의 숲으로 인도한다. 성품이 부드러워 늘 마셔도 부작용이 없는 인생의 반려. 색향미를 음미하며 눈을 감으면 나도 모르게 조금씩 용서와 이해와 조화의 심미안이 열린다.

한국차문화사
2002.02.02 03:57

한국의 차문화/ 그리고 남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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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많은 사람들의 글로서 였어졌다. 다만 집필자의 의도하는 바에 따라 정리되었을 뿐이다. 차잡지 다원(茶苑)과 다담(茶談)에 기고했던 1백여 필진의 글이 골간이 되었다. 인연을 따지자면 집필자가 월간 다원(茶苑) 편집장, 월간 다담(茶談) 초대 발행인 겸 편집인이었던 관계다.

필자의 의도란 저널리스트로서의 객관적 시각임을 미리 밝혀두고 싶다. 새 옷을 입히려고 하지도 않았고, 이리저리 색칠하지도 않았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자연 그대로의 이야기로 엮었다. 마무리과정에서는 칠, 팔십 년대 차생활운동 일선에서 헌신적으로 노력했던 거의 모든 분의 조언을 들었다.

그 과정(過程)에서 필자는 정말, 차는 보배로운 음료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차는 수단이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평소의 신념도 다시한번 다질 수 있었다.

다소 엉뚱하다 할 지 모르나 차가 우리 삶에 공헌하는 정도를 추리함에 있어 걸맞는 비교물은 돈으로 여겨졌다. 돈이 물질생활의 중요한 수단이듯 차는 정신생활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중심수단으로 여겨졌다. 희노애락고(喜怒哀樂苦)는 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차에도 있었다. 어떤 성취에 있어 기쁨과 보람이 함께 하는 모양은 차나무가 꽃과 열매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과 같아 보였다.  

하나하나 유사성을 찾아보면 우리를 더욱 흥미롭게 했다. 수단에 그쳐야 할 것이 목적으로 잘못 인식되기도 한다던가, 사람마다 견해를 다르게 가질 수 있는 대상이라는 점. 또 직접 벌어봐야 돈의 귀하고 어려움을 알게 되듯, 차도 직접 만들어 봐야 그 오묘함을 터득하게 되는 등 흡사한 부분이 많았던 것이다.

물질(돈)을 앞세우기 시작하면 인간이 추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차)이 너무 강조되면 조선시대와 같은 도덕 제일주의가 되어 필주(筆誅)가 난무하는 메마른 사회가 될 지 모른다는 점도 같았다. 차생활을 멀리한 탓에 이미 그런 풍조가 사회 일각을 얼룩지게 하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돈과 차, 어느 것이 현대생활에 더 중요한 가를 묻는다면 답은 어려워 진다. 그런 식의 질문은 은연중 성인용이기 때문이다. 대상을 달리해 어린이에게 묻는다면 답은 자명해 진다. 돈은 없어도 인간일 수 있지만, 정신이 들지 않으면 인간 축에 끼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 사회이기 때문이다.

돈이 없으면 못 살지만 돈 자체를 내세우지는 않듯, 차 역시 겉으로 드러낼 것은 못된다는 점도 같다. 기본으로 있어야 하는 것이 빠져 문제가 되는 것이지, 그것 만을 가지고 따로 성취를 이루거나 자랑삼을 일은 아닌 것이다.  

살펴보면 우리 사회는, 화폐로써 물질사회의 합리적인 질서를 이룩하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정신생활의 중심 수단으로서 차를 선택하는 데는 철저하게 무지(無知)했다. 그래서 말 그대로 정신없이 사는 사회가 되었다. 지나침도 모자람도 경계하라는 차생활의 교훈 중정지도(中正之道)는 실제(實際)여야 하는 것이 이상(理想)이 되어 버렸다. 세상이 갈수록 건조해 진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물뿌리개가 되겠다는 사람은 드문 이기적인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가운데 원인을 분석하고 중구난방 처방을 외쳐대는 학자들만 기하급수로 늘어났다.

본문에서 충분히 살펴 보았듯이 조선을 지배했던 주자의 도덕론은 차생활을 통해 집대성된 윤기있는 학문이었다. 그런 것을 조선의 위정자들은 차생활은 소홀히 하고 학문만을 중시하여 물끼없는 불협화음 천지를 만들어 버렸다. 아무리 이가 잘 맞는 톱니바퀴라 하더라도 윤활유가 없으면 소리나게 마련이고 쉽게 마모되는 것과 같은 이치의 사회였다.      

끝내는 국권을 상실하게까지 만든 그 건조함은, 광복이 되고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치유되지 못 하고 있다. 도덕 제일주의가 물질 제일주의로 바뀌었을뿐 정신없는 사람들이 설쳐대는 것은 오늘날의 사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런 상태로는 잘 사는 것이 진실로 잘 사는 것이 아니요, 안다는 것이 진실로 잘 아는 것이 아니다. 어디서 열풍이 불어 조금 더 말라버리면 바스락 부서져 버리고 말 나약한 부귀요 공명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바른 차생활이 하루빨리 부활되기를 바라며, 동시에 사회 질서와 정의를 확립하는데 차가 중심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오늘도 신앙처럼 되새겨 본다.  
  

필자가 차세계(茶世界)에 입문한 것은 미묘하게도 월간 다원(茶苑) 편집장을 맡으면서였다. 다원에서의 여러 가지 경험은 내게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앨빈 토플러의 예언처럼 아무리 세상이 다양화·전문화 되어 간다지만 여러 음료도 아니요, 차 하나만을 가지고 3백 여 페이지에 이르는 잡지를 매월 발행한다는 것은 여간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이 아니었다. 발행인은 차에 대해 해박했지만 월간지 발행에 있어 자신만만해 보이지는 않았다. 경영은 둘째치고 내용에 있어서도 잡지를 꾸려갈 방도에 많은 우려를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시 다원은 누구의 의도에 의해 3백 여 페이지의 월간지로 정해졌던 것일까. 그것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편집장이라는 위치가 가벼운 것이 아님에도 문외한에게 맡겨진 것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일단, 발행인은 다계(茶界)가 인정하는 전문가였다. 다음 편집장이 있어야 하는데 다인 중엔 적당한 사람이 없었다. 차 전문가에게 편집을 가르쳐 만드느냐, 편집 전문가에게 차를 알려주느냐,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다원은 후자를 택한 것이고, 이에 편집이 차에 문외한인 필자에게 맡겨질 수 있었다.

기자들도 하나같이 출중했으나 차에는 문외한이었다. 때문에 우리는 전문잡지를 만들면서도 차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저희도 아직은 차가 뭔지 잘 모르지만요…"를 한동안 서두에 달아야 했다.  

다도(茶道)냐, 다례(茶禮)냐 하는 논쟁도 그 안에서 겪었고, 지회마다 원조다 정통이다 하는 혼란도 그 자리에서 지켜 보았다. 어느 한 쪽을 편들거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위치는 아니었다. 그때 우리가 지향했던 자세는 모든 이의 주장을 다 잡지라는 광장에 모이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 뒤 천천히 정립의 방안을 모색하고자 하였었다.

83년은 차생활 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다. 격조높은 명예가 차선생들에게 금방이라도 주어질 것 같았고, 알토란 같은 실리도 따를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차는 수단이기보다 다분히 목적격이었다. 인품이나 수양의 정도는 제쳐놓고 언제부터 차를 마셨는가를 앞세웠고, 차 몇 잔만 공개된 자리에서 마시면 스스로 다인(茶人)이라 칭하는데 주저함이 없는 풍조가 만연했다. 그까짓 차가 별건가…하면서 차 단체에서는 서열다툼·권위다툼을 일삼는 모순이 난무했다.  

월간 다원은 그런 분위기에서 발행되었다. 이해 못 할 반응에 우리는 일차 어리둥절 했고 다음엔 혀를 내둘러야 했다. 이 사람 주장을 싫으면 저 사람이 거부하고, 저 사람 글을 실으면 이 사람 외면했다. 토론이나 타협의 여지가 조금도 없는 부정과 외면이었다. 그러면서 개인적으로는 다원을 통해 어떻게든 한마디 주장은 펴는, 난해한 현상이 계속되었다.

결국 다원은 얼마 지탱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고 필자는 그 무렵에 창간된 또 다른 전문지 월간 여행(旅行)의 편집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회상하면 조금도 미련이 남지 않는, 시원한 전직(轉職)이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원을 아쉬워하는 소리가 내외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필자는 필자대로 특별한 이유없이 차에 그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감미로운 뒷맛 만큼이나 은근히 가슴을 파고드는 그리움이었다. 서로 부정하고 다투던 모습도 그 그리움 속에서는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필자가 차에 대하여, 남다른 애정을 갖기 시작한 것은 사실상 이 때부터였다.


차생활의 세계를 새로운 시각에서 냉정하게 조명해보고 싶은 필욕(筆慾)은 그로부터 2년 후에 발동했다. 바쁜 삶이었지만 다원에 근무할 당시 인연맺은 분들과의 교유(交遊)는 계속하고 있었는데, 그분들의 권유도 있었다.

한국일보 김대성 기자는 "그것은 피할 수 없는 당신의 일"이라고 부추기기도 했다. 차츰 다인(茶人)을 만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메모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갔다. 전국을 여행한 것도 꽤 여러번이었다. 서울은 물론 광주, 해남, 보성, 부산, 마산, 진주, 울산, 대구, 안동을 두루 돌며 차생활 운동의 일선에 이름이 알려진 분은 거의 빠짐없이 만나 보았다. 그 분들의 가르치는 모습도 유심히 보아 두었다. 86년에는 자원봉사 식으로 차인회 회보 주간을 맡으면서 송지영(宋志英) 회장과 가까이 지내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특히 고마웠던 분은 인천 길병원의 이귀례 여사로 일부러 시간을 내어 많은 이야기를 자상하게 들려 주었다.

그 무렵 강남에서는 국내 최초의 지역신문이라는 "리빙뉴스"가 주간으로 발행되고 있었고, 곡절 끝에 필자는 또 자리를 옮겨 리빙뉴스의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발행인은 한국일보 정치부장, 주일특파원, 서울신문 전무이사를 역임한 임삼(林森)씨였다. 리빙뉴스는 당시 아파트촌에 무료로 배부되던 신문이었는데 꽤 인기가 있었고 발행부수도 수만부가 실했었다.

차 이야기 연재를 의논드리니, 임삼 씨는 좋은 착안이라며, 호암 문일평의 차고사(茶故事)를 구해 주는 등 관심을 베풀었다. 이 글은 그렇게 리빙뉴스 지면을 통해 "기호음료로서의 차"로 시작되었다. 회를 거듭하면서 독자의 반응은 의외로 커져, 그것 때문에 리빙뉴스를 찾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게 되었다. 9개월 동안 연재하는 사이 신문사의 경영 규모가 2배로 커지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전혀 모르는 다인들로부터의 초대도 심심치 않았고, 강연을 의뢰받기도 하였다. 글의 폭이 넓고 재미있다고들 평했었다. "글에서처럼 차는 시끄러우면 안 되는데 왜 그리 요란법석인지 모르겠다"고 공감인지 불만인지를 털어놓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때면 필자는 언제나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알고보면 애국하는 차원에서 묵묵히 차생활 운동하는 분도 많습니다. 어느 조직에서나 그렇듯, 시끄러운 것은 소수의 소리이죠"라고 답해 주었다. 그러나 상대는 대개 고개를 저었다. 소수의 목소리가 어찌 그리 크냐는 것이었다.


어쨌든 옛날 이야기는 다양한 자료 섭렵을 통해 그런대로 정리가 되어갔다. 그러나 현대의 다도열풍(茶道熱風)을 취재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가장 큰 애로는 유파(流派)와 인맥(人脈)을 살피는 데 있어서의 불확실한 연대(年代) 증언이었다.

필자는 차운동의 출발점을 1979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진주에서 70년을 전후해 차모임이 결성되고, 또 서울에서 72년 차모임이 만들어졌다고 하나 동호인 성격이지 "운동" 차원은 아니었다. 73년 효당의 "한국의 다도"가 발표되고, 이어 74년 독서신문에 "한국의 차·다론"이 연재되면서 관심층이 생겨나기 시작한 뒤, 75년 해남에 차인회가 조직되지만 역시 사회적 관심을 모으지는 못했었다.

해남차인회 주장으로 초의(艸衣)를 성인화(聖人化)하는 구상이 마련된 것은 78년이었다. 그들은 동다송·다신전의 가치를 극대화 시키면서 일지암 복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 주장이 전국 다인들의 뜻을 하나로 모으게 했고, 이듬해 실업가 박동선(朴東宣)씨가 물심양면으로 적극 참여하면서 비로소 조직적인 차생활 운동의 기초가 마련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전국 다인들이라고 하지만 숫자가 많은 것은 아니었다. 차생활 인구가 숫적으로 급증한 것은 80년 대 이후였지, 70년대에는 서울에 십여분, 부산에 대여섯분, 진주에 십여분, 광주에 몇 분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86년에 만난 사람들은 모두 20년 30년씩 차생활을 해온 분들이었고, 만날 때마다 몇 년이 더 보태어 졌다. 일부는 아예 부모·조부모 때부터 차생활을 했다며, 복잡한 집안 가계를 소상히 밝히기도 하였다. 물론 그것이 사실인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경쟁하듯 연대를 올려 말하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다.

사실 필자에겐 언제부터 차를 마셨느냐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껍데기보다는, 차생활을 통해 이룩한 감동적인 자기 완성(完成) 같은  사례를 더 원했었다. 차생활을 통해 성취한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가, 형식적으로 오고간 국제차문화교류 따위와 비교될 수 없다고 여겼고, 그런 감동적인 스토리는 차를 마시는 것과는 무관한 내용이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나는 언제부터 차를 마셨다는 주장과 함께 펼쳐놓는 것은 편견이 짙게 깔린 예절 법도 이야기 일색이었다.  

차생활을 통해 도달하려는 각성(覺醒)의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외면하는 사람은 철저히 외면했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무언지 뚜렷하지 않은 목적에 바쳐지는 제물 정도로 차 인식은 변질되고 있었다.


삶에 다툼은 있되 상대에게 상처를 주어 원한을 사지는 말라는 격언이 있다. 그러나 열풍이 몰아친 다도의 세계에서는 서로 깊은 상처를 주고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 상처를 내는 무기는 다름아닌 왜색시비였다.

생각하면 현재 우리 형편에서의 왜색시비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구별될 수 없는 누워서 침뱉기일 뿐이다. 누가 뭐래도 차문화는 한국에서 일본에 전해준 것이다. 동시에 다도가 오늘의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도 없다. 우리가 오늘날 차생활 문화를 부활시키려는 노력 또한 - 우리 것 찾기라고 말은 하지만 - 일본이 차로써 문화·예술과 예의 질서 등 교육적 기품을 든든히 한 것을 본받자는 의미가 짙게 깔려있는 운동이다. .

그러나 문화는 향유하는 사람들의 것임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원산지가 어떻고, 이동경로를 따지는 따위는 학문적인 일이다. 문화로서 인정받는 기준은 현재 향유하고 있느냐 여부이지, 저 옛날에 전해준 것이라는 희미한 사실이 아닌 것이다. 그것을 근거로 천년 만년 그 문화의 주인인양 목에 힘 주는 것은 우습기만 한 자화자찬이다.  

이 시대에 필요한 문화라면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향유하면 된다. 널리 즐기다 보면 우리나름의 독특한 다풍은 자연스럽게 정립되게 마련이다. 이질적인 미국의 커피문화 인스탄트문화도 한쪽에서 이미 우리 문화화 되었는데, 본디 우리 것이었던 차문화가 낯설 까닭은 없는 것이다. 워낙 기본을 다 잊어버려 역수입과 모방으로 재시작 한다해도 초기 일시적 혼란을 거치고나면 금세 우리 모양이 찾아질 것이다. 거긴 아무래도 비슷한 게 많을 것이다. 그 점을 우리는 시비 가리지말고 대범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필자는 이 문제에 있어서 김치를 예로 들고 싶다. 지금 일본인들의 김치에 대한 열기는 대단히 뜨겁다. 상품화하여 세계에 수출하는 양도 본고장인 한국의 그것을 능가하고 있다. 우리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으로 출발하여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반면 우리의 김치에 대한 인식은 "김치 냄새 풍기는 것을 수치"로 여겼던 때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크게 발전된 것 또한 없다. 그런 가운데 김치를 못 먹는 신세대가 늘고 있다.

이같은 추세가 계속된다면 1세기 후쯤 어떤 소리가 들릴까. 김치는 일본 것이라는 소리가 나올 것이요, 일본식 김치냐, 한국식 김치냐 논란도 일 것이다. 학자들은 사료를 들춰 보이며 "김치는 우리 고유의 것"이라고 힘들게 설명할 것이다. 일본인들에겐 그들의 특질이 있는만큼 상당부분 그들음식문화에 맞게 변화 발전될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다도 시비와 똑같은 김치시비가 되는 것 아닌가.    

차는 애당초 우리 것이었다. 말차는 일본 것이란 소리도 스스로 무지를 드러내는 소리일 뿐이다. 우리 역사에 흥건한 차 이야기의 90%가 알고보면 말차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왜색시비는 다음다음의 문제여야 한다. 왜색시비로 시간을 허비하기보다 차라리 그 왜색 속에 본격적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우리 것을 건져내는 일이 더 시급하고 보람있는 일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어떻게든 정부가 차생활의 중요성을 공감하여 하루빨리 차가 국가의 장래에 공헌할 수 있도록 길을 열게 해주십사 - 하는 기도는 다인 모두의 소망이 된지 오래이다. 불신과 반목이 날로 팽배(澎湃)하여 점점 더 메마르고 영악(獰惡)해지는 사회에서 "떠내려가는 지성(知性)"을 되살리는 데 "차생활 보급만큼 적절한 선택"도 드물다고 믿기 때문이다.  

차를 하나의 기호음료로만 여긴다면 물론 할 이야기가 없어진다. 그러나 차생활의 실체(實體)를,  우리들 의식의 본질을 파악하듯 현상학적(現象學的)으로 분석하면 그 숨겨진 가치가 은근한 빛을 발한다.  

정신을 맑게 한다는 것은 자기 각성을 불러와 인간 본연의 품성을 회복시키니 곧 철학이 된다. 차생활로서 철학적 사고가 일상화되어 사물의 근본이 합리적으로 정리되고, 그 결과로서 사회생활의 지침을 삼는 세상이 된다면, 그 때도 반목과 불신, 투기가 난무할까? 그보다는 화합과 질서, 이해와 긍정이 샘처럼 솟아 누구보다 먼저 자기 자신이 편안하고 넉넉한 감정에 감싸일 것이다.

바른 차생활의 지주(支柱)는 당연히 역사의식이다. 삶의 중심은 언제라도 현실이지만, 그러나 현실은 항상 변화한다. "영원한 것은 변화하는 것뿐"이라는 말은 그래서 생겨난다. 현실은 삶의  중심으로서보다 과정으로서 보다 큰 역할을 담당한다. 차생활에서 중요시하는 것 역시 바로 이 과정이다.
과정을 다듬는 정성, 나아가 과정을 사랑하는 마음을 기르는 일이차생활의 목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목표를 가지고 매진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종의 목표에 이르지 못하고 과정 속에서 죽어간다. 십중팔구 필자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정작 소중해지는 것은 과정이 되는 것 아닌가. 과정 자체가 목적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마음 착한 노력일 것이다. 그것은 또한 언제나 불완전한 상태일것이다. 이런 마음 착한 불완전을 수용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기르는 일 - 차생활의 요체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이 있어야만이 작게는 단체나 조직, 넓게는 사회나 국가가 내면에서부터 풍요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하면 나랏일 하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우습게도 우리는 목에 힘주는 정도와는 달리 역사조차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우리것 아니라고 했던 남의 것이 "알고보니 우리 것"이었다는 경우를 무수히 겪고 있다. 고대 한국의 영토가 어디까지였느냐,도 의견이 분분한 정도이다. 학교에서는 한사군이 평양 부근에 있었다고 가르치고, 신문은 중국의 요동 동쪽에 있었다고 특필한다, 진시왕의 만리장성이 다름 아닌 우리 선조들과의 경계였다고도 한다. 임진왜란도 지금와서는 승전(勝戰)이었다고 고쳐 말한다. 한국 사학의 대부라는 대학자가 단군을 신화적 인물이라고 그렇게 끝까지 우기더니, 종말에 이르러서야 실존 인물이었음을 진작부터 알았다고 실토하며 타계했다.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수모의 역사만을 지나치게 들쑤성거려 오히려 민족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있음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바톤을 이어가며 일년 내내 방송되는 TV 안방사극에서는 외침에 시달려 갈팡잘팡하는 장면들이 너무나 비참하게 극화되고, 조선의 사대주의 역시 사실보다 더 사실화(?) 되어 독자를 비분강개(悲憤慷慨)하게 만들기 일쑤이다. 신문들은 또 일제 하의 암흑기를 한시도 잊지못하게 상기시키는 일에 그렇게 열심일 수가 없다. 정신대 이야기만 해도 - 아직 종결되지 않은 탓이지만 - 너무 자주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나마 사실 그대로이면 모르겠는데 대개는 식민사관이 가미되어 있다.

작가의 시각(視覺)을 탓할 수도 없게 되어있다. 어려서 배운 학교 교육이 그랬고, 지금도 상당부분 그대로인 까닭이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역사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곤혹(困惑)스러울 정도이다. 아픈 이야기 싫컷 한 뒤는 기쁜 이야기도 전하고, 자존심 상하게 한 뒤에는 자긍심도 갖게해주면 좋으련만, 우리 역사에는 권선징악도 사필귀정도 없었다. 부조화(不調和)에 익숙한 우리에게 그런 것은 뒷전의 문제였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이 어느 게 정의인지, 어느 게 진짜 우리 것인지 모르게 되었고, 저마다 다른 사관(史觀)을 갖게 되고 말았다. 이어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6·25를 이데올로기 전쟁이라고 말하지만 필자 생각엔 그것이야말로 통일된 사관, 하나여야 하는 뿌리의식이 열갈래 백갈래로 갈라짐으로서 터진 비극이었다.

포성은 멎었지만 그 비극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사관이 정립되어 구심점(求心點) 역할을 하지 못 하는한 비극은 계속될 것이고, 한국인은 "개인은 우수하지만 단체는 모래알 집단같다"는 평가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역시 차생활이다. 물론 추측으로 역사를 만들어갈 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는 소설보다 더 우연이 통하지않는 필연의 세계이다. 문득 나타나는 것도 저절로 나타나는 것도 없는 세계이다. 한결같이 모색하는 것이며 사유로 빚어지는 상황의 연속이다. 그렇다면 사유로써 접근이 가능하지 않을까. 상식의 범위를 비웃는 난해한 기록, 어설프게 신화로 포장된 민족의 자주성, 이웃의 왜곡으로 중간중간 끊어져야 하는 우리 문화사 등… 관심을 갖고 살피면 살필 수록 의구심만 더해가는 역사의 문제를 푸는 열쇠는 사유에 있다고 믿어진다. 사유로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하나하나 증거해 나간다면 엉킨 매듭들이 모두 풀리리라 믿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사유(思惟)는 어떻게 하는가, 차를 마시면 그것이 곧 사유가 된다. 생각하는 생활의 훌륭한 벗이 곧 음미하는 차생활(茶生活)인 것이다.


끝으로 하고싶은 이야기는 화경청적(和敬淸寂) 시비이다. 이는 일본 다도의 특성을 잘 설명해주는 네 글자인데, 여기서 일본을 지워버리면 "다도의 특성"을 잘 설명해주는 네 글자가 된다. 센리큐(千利休)는 이 네 글자에 다도 정신을 담아 참으로 깔끔하게 정리를 잘 해 놓았다. 화·경·청·적을 아예 모르면 별문제인데, 한 번 접하고 나면 이것을 피해서 다도를 설명할 방법을 잃고 만다. 시비는 그래서 생겨난다.

화경청적이 애초에 우리 것이었다고 주장한 인사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큼은 무리인 것이 지난 4, 5백 년간 그 네 개의 글자만큼 일본이 애지중지 해온 것도 드물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글자들을 사용했던 시기가 실제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차생활에 결부시켜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차정신을 네 글자에 담아 정연한 논리의 철학으로 발전시킨 것은 일본이었다. 그런 것을 하루아침에 우리 것이었다고 하며, 송두리채 넘보는 것은 아무래도 억지일 것이다.  

생각을 바꾸면 몇 개 글자에 연연하는 자체가 우리다운 모습이 아님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에 와서 뚜렷해진 우리와 일본인의 차이점을 보자. 우리에겐 창의력은 풍부하지만 다듬어 발전시키는 노력은 부족했다. 반면 일본인들은 창의력은 부족하지만 한 번 손에 쥔 것을 가꾸고 발전시키는 데는 탁월한 합심과 재능을 보여왔다. 무엇이든 정성으로 가꾸고 다듬는 것으로 "창의보다 나은 응용"이란 평가를 받는 민족이 되었다.  

다도가 사회성 짙은 철학이라면 화경청적은 결국 일본인의 정서를 대표하는 글자가 된 지 오래다. 이미 수백 년전부터 문화생활의 지표(指標)로 삼아 향유해 온 글자인 것이다. 때문에 그것만큼은 우리 입장에서 근원을 따질 일이 못 된다. 따지기보다 그들의 노력을 인정해 주고, 성단(聖壇)에 올려진 글자에 함께 경의를 표해주는 것이 옳은 자세라고 생각된다.  

필자의 눈에는 어차피 그런 일본의 특징과 우리 차생활은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인다. 일본류의 다도열풍(茶道熱風)이 아무리 불어도 - 일시적으로 부분에 영향을 줄 수는 있겠지만 - 끝내 우리 사회는 일본식이란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창의력이 있는 민족은 생리적으로 틀이나 구속을 거부하기에 일본식 형(形)의 문화는 우리와 상관이 없어지는 것이다.

선인들이 대법하게 그래왔듯, 화경청적을 말할 수도 있고, 말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게 우리의 참 모습이지 그것에 연연해 시시비비 하는 것은 우리 모습이 아나라는 말이다.

우린 사실 중정(中正)이면 족하다.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것. 너무 심취해 사로잡히는 것도 경계하고, 너무 가볍게 여겨 뜨거운 물에 손대듯 하지도 않는 것. 그것이 우리의 중정(中正)이요, 그것이면 우리 차생활의 지표로서는 충분하지 않을까. 그 이상의 것은 개인이 만들어 가는 수밖에   없다. .  

우리가 진짜 시정하고 반성해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 다름아닌 차 소비량이다. 선진국 국민과의 비교는 거론조차 할 수 없을만큼 부끄러운 지경이며, 아프리카 사람들만큼도 차생활을 하지않고 있다. 커피나 술·담배 소비량이 상위권인 것과 반대적 현상인 것이다. 유엔의 통계, FAO(세계보건기구)의 통계가 하나같이 그 모순을 지적한다.  

결론적으로 하는 말이지만 이는 사회가 그만큼 건조하다는 이야기와 같다.
소득이나 지식 수준과는 관계없이 정서적으로는 후진국 국민들보다 더 드라이한 삶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와 같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성분의 차가 생산되는 나라에서 일인당 소비량은 웬만한 후진국보다 적다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면서 그 우수함을 가치있게 살리지는 못하고 있는 현실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두들 오늘의 사회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심각하다고 표현하는 이도 적지않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감히 말한다.

"모든 문제는 차생활을 멀리한 데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차생활 부활 여부가 곧 열쇠이다. 세계 속에 우뚝했던 한민족의 재건 여부도 차생활 부활 여부에 달려 있다"라고.

이제 이 책을 덮고나면 조용히 차 한 잔을 음미해 보도록 하자. 차의 색향미를 감상하면서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가 노래한 한 편 시를 음미해 보자.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대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 한국,
그 등불 다시 켜지는 날
너는 동방의 찬란한 빛이 되리라..    

그는 시인인 동시에 사상가요, 사학자였다.





                                  1997년 1월

                                  화인재(華仁齋)에서 반취(半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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