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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맑게 하고 소화를 돕는 차. 차는 인간에게 무한한 활력을 주며 오묘한 사색의 숲으로 인도한다. 성품이 부드러워 늘 마셔도 부작용이 없는 인생의 반려. 색향미를 음미하며 눈을 감으면 나도 모르게 조금씩 용서와 이해와 조화의 심미안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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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후반 - 사실 이때까지 우리나라 차 산업계엔 이렇다할만한 회사가 없었다. 의재가 경영하는 삼애다원의 춘설차, 사원의 승려들이 만드는  죽로차, 반야차. 화개 주민이 만드는 쌍계차, 화개차 등이 있었지만 모두 가내수제품 수준을 벗어나자 못하는 것이었고 그 양도 보잘 것 없어 유통이라는 단어를 쓸 형편도 못 되었다.  

태평양 그룹도 뛰어들기 전이었다. 대한다업(大韓茶業), 한국제다(韓國
製茶) 등이 있었지만 녹차가 아닌 홍차에 주력했고, 그나마 음용(飮用)이
아닌 공업용(工業用)이었다. 음용으로서의 홍차는 제다 기술이 뒤져 인도
스리랑카(실론)만 못했지만, 공업용으로서는 어느나라 홍차보다 품질이 우
수했다. 기술이 뒤졌음에도 품질이 뛰어나다는 것은 그만큼 원료(茶葉)의
성분이 뛰어나다는 것인데, 수요가 적어 대량생산 체계는 갖추지 못 하고
있었다.

국산 홍차(공업용)는 영국 홍차(음용)보다 값이 형편없이 쌌고, 그래서
70년대 후반 주요 도시의 다방(茶房)들이 공업용 홍차를 구입해 손님에게
파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방업자들의 비열한 상행위는 여기 그치지 않았다.
때마침 대한홍차가 일본 마루베니와 합작하면서 그나마 전량 일본에 수출
하게 되자, 감나무잎이나 고구마잎을 물들인 가짜 홍차(화학차)까지 범람
시켰다.

이러한 사실이 일간지 사회면을 통해 크게 보도되자 국민들은 분노하여
그나마의 차 애호가를 또 잃고 말았다. 모두들 커피로 돌아섰다. 다인들의
차생활 운동은 할 수 없이 커피와의 전쟁(?)을 겸하게 되었다. 차생활 운
동을 위해서는 차산업도 함께 일으켜야 했다.


그 무렵 국내 최대의 차밭은 보성에 있었다. 보성 다원은 1942년에 조
성되었다. 전쟁을 확대하면서 군량미 조달에 급급해진 일본은 자국내 기존
의 다원을 하나하나 논밭으로 만들어 갔고, 차나무들은 한국으로의 이전을
추진했다. 그 일차 계획으로 이전 조성된 것이 보성다원이었다. 그것은 재
래종이 아니라 일본이 만들어낸 개량종, 즉 야브기타였다. 야브기타는 차나
무의 성분을 그대로 갖추고는 있지만, 뿌리가 직근성도 아니요 가지치기로
심을 수도 있는, 일종의 생명력 질긴 튀기같은 차나무였다. 따라서 이 나무
는  …차는 직근성으로 뿌리가 곧게 밑으로 뻗기 때문에 옮겨서는 살지 못
하는 천명을 받고 태어났다. 이에 여자에게는 정절의 상징이 되어 시집갈
때 차 씨를 가져가 뒷 뜰에 심는 풍습이 생겨났고 남자에게는 불사이군 충
절의 상징이 되었다… 라고 말하는 우리 토산 차나무와는 종류가 달랐다.

어쨌든 일본은, 보성에 다원은 조성했으나 수확을 올리지는 못하고 물
러가게 되었다. 그 뒤 이 다원은 한동안 아무도 돌보는 이 없어 폐허가 되
다시피 했었다. 그것을 대성목재 대표이던 장영섭(張榮燮) 사장이 인수한
것은 1959년이었고 홍차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후반부터였다.

60년 대 일본은 대만으로부터 년 수만톤의 녹차를 수입했었다. 그런데
70년 대로 접어들어 대만과 국교를 단절하게 되자, 일본은 한국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들은 곧 최대 면적의 다원을 소유한 대한홍차와 합작회
사를 추진했다. 이리하여 대한다업은 일본 마루베니사와 합작에 동의하게
되었고 생산 전량을 일본에 보내기 시작했다.
  
보성 차는 대만 차보다 2배 정도 비싸게 일본에 수출되었다. 차 수출은
순조롭고 해마다 물량도 늘었다. 몇 해 안 가 다 수출해도 모자라는 형국
이 되었다. 그러자 보성군은 농민들에게 특작물 재배 차원에서, 버려진 땅
산기슭 같은 곳에 차나무 심기를 장려했다. 자금도 융자해 주었다. 대한홍
차의 차밭이 30만평쯤 되는 위에 농민들이 조성한 차밭이 또 30만평쯤 되
게 되었다. 이로써 보성은 일약 한국 최대의 차 산지로 변모했다.  

그러던 때 일본 대만간 교역이 국교와 상관없이 재개되었다. 싼값에 차
를 수입할 수 있게되자 마루베니는 2차 계약을 하지않았다. 이것은 보성
차농들에게 큰 충격이 되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넘치는 상황이 되니 값
도 떨어지고 일시에 소비도 어려워지고 만 것이었다.  

화장품을 주력업종으로 국내 재벌기업의 하나가 된 태평양이 숙고 끝에
녹차 시장에 뛰어들기로 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정치적인 뒷거래가 있었
는지 여부는 제쳐놓고라도, 안목있는 사업가로써 뛰어들만한 시기였다.

우선 명분이 좋았다. 화장품으로 얼굴과 피부를 아름답게 하고, 차생활
로는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아름답게 한다는 것이니 화장품 사업에도 도움
이 되고, 기업 이미지도 나아질 수 있었다. 둘째 제다시설만 갖추면 당장
생산과 판매가 가능하여 투자기간을 최소화 할 수 있었다. 보성 차농들의
차엽을 얼마든지 싼값에 공급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그렇게 하면서
대규모 다원을 새롭게 조성해 나가면, 시장이 넓어지는 데 대한 대비도 되
고 부동산 투자 면에서도 손해날 일은 없는 사업이었다.

태평양은 꼭 그대로 실행한 위에 ▲차생활 예절 보급에도 힘썼고 ▲다
서의 출판 보급에도 앞장 섰으며 ▲다예박물관까지 만들어 당시의 차문화
부흥 운동가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현상공모를 통해 "설록차(雪綠茶)"를 상
표로 정하고 제주도와 호남 월출산 부근에 수십만평씩 대규모 토지를 사
들여 다원을 조성했다.

모든 것은 재벌기업다운 술수를 동반했다. 자체에서 조성한 다원의 차
나무가 자랄수록, 그것은 보성 차농들에게 위협이 되었다. 자체에서 생산되
는 차엽만으로 충분해지는 시기가 온다면 보성의 차나무들은 다시 쓸모없
어질 것이 뻔했다. 이를 예고하기라도 하듯 보성 차농들이 태평양에 납품
하는 차엽 가격은, 물가상승폭에 의해 해마다 오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해마다 떨어졌다.  

결국 이 문제는 86년 쯤 현실로 닥쳤다. 태평양은 자체적으로 모든 것
을 해결할 수 있게 되자 보성 차농들은 여지없이 외면당했다. 이에 최연호
씨등이 보성 차농을 대표하고 나서서 당국에 선처를 호소하는 등 뛰어다
닌 결과, 당국은 다소 여건이 미흡하지만 제다공장 허가를 내주게 되었고,
각각 독립하는 것으로 더 악화되진 핞고 수습 종결되었다.

지엽적으로는 이러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러나 태평양의 참여는 차
를 널리 알려 차생활 인구를 늘리는데 결정적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심리
적 측면에서 차생활 운동가들이나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든든한 의지가
되었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다인들의 가장 고민스러워 했던 또 하나의 분야는 다기(茶器)였다. 지
금은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마다 다 다기를 만들지만, 70년 이전에는 다기
(茶器)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도대체 차를 아는 도공이 드물었다. 해인사
아래에서 요(窯)를  경영하고 있는 토우 김종희의 회상을 들어보자.

…6·25 후 효당스님은 국회의원 그만두고 해인사에 계셨지요. 요에 자
주 오셨습니다. 차를 마시고 싶은 데 그릇이 없는 고민이 있었던 겁니다.
효당스님이 만들어 보라는 대로 만들어 보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
운 모양들이었습니다…

도자기에 대한 인식이 말할 것도 없이 희박했던 때 전차(煎茶)용 다기
만들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토우(土偶)라는 이름은 그때 효당이 지어준
것이라고 했다. 엉성한 그릇이나마 만들어주니 스님은 매우 기뻐했고 차를
보내왔다고 했다. 그러나 토우는 맛이 없어 마시지 않고 두었다가 버렸다
고 했다.

…77년 쯤일 겁니다. 이방자 여사, 광주의 의재선생, 효당스님과 더불어  
차모임을 처음 만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차를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그후 해
인사에 차마시기 바람이 불었습니다. 도범, 여연 등 많은 스님들이 그때 해
인사에 있었습니다. 스님들은 매일같이 찾아와 다기를 만들어 달라고 청했
지요. 만드는 족족 스님들이 다 가져 갔습니다. 도범이 갖고 간 것만 천 벌
은 넉넉할 겁니다. 스님들은 그 대가로 차를 가져왔었어요. 그때쯤 저도 꽤
나 차를 즐기는 사람 축에 들게 되었었지요. 그렇게 지내는 사이 차는 참
좋은 음료라는 데 사람들의 의견이 모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좋은 차
를 우리만 마실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마시도록 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
게 되었고, 그래서 어느 정도 형태가 정립되자 다기를 본격적으로 만들게
되었고, 값은 싸게하자 하여 80년까지도 한세트 1만원만 받았습니다…

여기서 잠시 도자기 쪽을 회상해 보면, 도자기 역시 아무도 거들떠 보
지 않는 버려진 분야였다. 차와 도자기가 불가분의 관계이기에 차문화 상
실은 곧 도자기의 침체를 뜻했다. 한국의 도자기가 다시 기지개를 켜는 것
은 일본인들에 의해서였고, 그것은 다완(茶碗)으로부터 시작되었다.

64년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진 뒤 일본의 다인들은 슬슬 한국을
방문했다. 그들은 한국의 옛도요지 지도를 가지고 지방을 누비고 다녔다.
그들이 노린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조선다완(朝鮮茶碗)"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오늘날까지 다도는 줄곧 일본 사회를 지배해 왔기에, 다도를 모르면
수치로 여겨야 했고, 다인 행세를 하려면 조선의 다완 하나는 가지고 있어
야 하는 게 야릇한 일본 사회였다.  

센리큐(千利休) 이래 다두(茶頭) 그룹이 예찬을 아끼지 않은 것은 모두
조선다완이었다. 그들은 조선의 다완에서 편안한 선, 소박한 질감, 자연의
멋, 넉넉한 공간(包容力) 등 인생에 교훈을 주는 20여가지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다완 감상"을 다도의 중요한 절차에 포함시켰다. 특히 최고의
명품으로 여긴 것은 임진왜란 때 빼앗아간 이도(井戶)다완으로 그중 대표
적인 것은 국보(國寶)로 지정되어, 박물관내에서도 방탄유리 안에 모셔지
는(?) 대접을 받고 있었다. 다인들 간에 거래되는 다완의 금액도 수천만엔
(円)을 홋가하는 등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한국의 시각에서 보면, 그건 전혀 특별할 것 없는 막사발이었다.
심하게 표현하면 개밥그릇 같은 거 였다. 도공들이 제몫의 일을 끝낸 뒤,
이웃이나 머슴들 청에 의해 잠시 물레질하여 만들어 주는 정도의 가볍고
용도많은 그런 사발이었다.  

가난한 한국의 도공들 중에는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이들의 요청에 의
해, 그릇 만들기보다 그릇 구해주는 역할을 한 사람이 많았다. 구해주는 정
도에 그치지 않고 아예 호리(盜掘)꾼으로 나선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일
본 실정을 알 리 없는 이들은 하찮은 막사발에 몇천원씩이나 처주는 그들
을 희한하게 여겼다.

까짓거, 하며 만들어 준 사람도 있었다. 70년대 초 문경의 천한봉, 서성
길 씨 등이 다완을 대량으로 만들었고, 신정희 씨는 그것을 일본인에게 팔
았다. 73년까지 한 개 1백원이었는데 하루에 3백개 정도를 만들었으니 대
단한 수입이었다. 그들은 이 그릇이 어떻게 쓰이는지도 모르면서 만들었다.
이들 세 사람은 이 때의 인연으로 다완(茶碗)의 명인이 되는 데 그 과정이
라고 우여곡절이 없을 수는 없었다.  

도천(陶泉) 천한봉(千漢鳳)씨를 예로 들면, 판매를 맡았던 신정희 씨가
가마를 따로 만들고 독립하자 다른 활로를 찾아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74
년 미도파화랑에서 유근형, 위군섭 씨 등과 다완전시회를 갖게 되었다. 그
것이 인연이 되어 일본의 동양미술이 천한봉 일본초대전을 기획했다.

그들은 전시장 한 가운데 물레를 설치하고 천한봉이 다완을 만드는 모
습을 직접 보여주도록 청했다. 전시회는 대성황이었는데, 천한봉 씨 회고에
의하면 그 순간까지도 자신은 차를 몰랐고 차완의 존재의미나 용도를 정
확히 몰랐었다.          

…일본의 다도를 접한 건 그때였지요. 다인들이 제 그릇에 열광하며 다
회에 초대했습니다. 그들의 다회하는 모습은 굉장한 충격이었습니다…

이후 도천은, 그저 기계처럼 똑같은 다완을 만들던 자세에서 벗어나 그
릇 하나하나에 혼을 담기 시작했다. 한 개 1, 2백 원이던 그의 다완은 10년
후인 84년 쯤에는 한 개 이십 만원에 팔렸고 일본에서는 20만 엔의 정가
가 붙게 되었다.

다완으로 명성을 얻은 도공들은 차츰 그 업계의 귀족으로 부상했다. 비
슷한 시기 다완으로 명성을 얻은 조령요 신정희 씨의 회상도 들어보자.

…그것은 우리 상식으로는 서민대중이 쓰던 사발이었습니다. 그러나 자
칭 골동품 애호가라는 일본인은 그 막사발 앞에서 무릎을 끓었습니다. 방
석을 가져오게 하고 그 위에 사발을 올려놓고 감탄을 연발했습니다. 오오,
훌륭하십니다. 이것이 조선다완이지요. 가락지를 뺀 두 손으로 들어올려 보
배처럼 감상했습니다. 그때, 그러니까 70년대 초 내가 만들어 재현에 성공
했다는 것은, 차를 담으면 그릇 안에 반점같은 꽃이 피는 분청 사발이었습
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들이 각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기능적인 면보
다는 흙에 있었다. 일본이 기능이 뒤져서 조선다완을 끔직하게 여기는 것
이 아니었다. 그들이 예찬하는 순수·질박한 다완의 성질에는 시생대(始生
代) 토질(土質)의 고령토(高嶺土)가 있어야만 했는데, 그런 흙이 일본에는
없었던 것이다.

도자기 세계에 있어서 다완의 예는, 소수 도공만이 참여했지만 일본을
시장으로 하여 도자기 업계를 급신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전차용
다기(茶器)는 그렇지 못 했다. 전차용은 일본인들이 그렇게까지, 한국의 그
릇을 원하지 않았다.

다기를 어떻게 만들어야 좋을지 몰라 힘들었던 것은, 다기만큼은 일본
과 다른 모양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일반 다기도 다완처럼
그냥 생각나는대로 만들면서 차츰 우리 것, 우리의 그릇 선을 찾아 나갔으
면 편했을 것을, 일본 것을 모델 삼기는 하되 흉내낸다는 소리 듣기는 싫
었던 것이었다.

전체적 모양이나 그릇의 기능에서 달라져야 할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뚜껑의 모양이나 주둥이 형태, 몸통 선 등에서 특징을 달리 하려고 하다보
니 여간 그릇이 우스워지는 게 아니었다.  

다관에서 제일 문제가 되었던 것은 손잡이였다. 귀처럼 둥글게 하자니
중국식이 되고, 일자로 만들자니 일본식인양 여겨졌다. 그렇다면 남는 건
보통 주전자의 손잡이 모양 위로 둥글게 엮는 것 뿐인데, 그렇게 하는 것
은 끈이나 다른 재질로 하여야 했고, 해보니 차내기(行茶)가 불편했다.

우리 고유 모델로 다관과 비슷한 것에 약탕관(藥湯罐)은 있었다. 또 쇠
주전자나 은(銀) 동(銅) 제품은 많았다. 그러나 도자기로 만든 차우림 주전
자는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었다.

선조들은 대체 어떤 용기에 차를 우려 드셨는가.

어쨌든 일부에서는 급한대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방법을 찾아봐야 마
땅치 않으니까 그냥 비슷하게 우선 만들었다. 토우(土偶)도 그 중의 하나
였다. 아무리 연구해 봐야 차주전자(茶罐)가 더 특별해질 수 없었다. 같은
형태이되 선(線) 만 한국적인 특징을 살려가는 쪽으로 시도한 것이다.

과연 어떤 것이 한국의 선이냐는 문제도 사실은 나중이었다. 급하니까  
개의치않고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단 그들이 택한 손잡이는 일자였다.
차를 해보니 녹차에는 일자 손잡이가 가장 편했던 것이다. 그들은 일자 손
잡이를 "멍텅구리"라고 불렀다.

재미있는 것은 한·일간 문화교류가 잦아지면서 이 손잡이를 저희 것이
라고 주장한 일본인들이 있었다. 차시범을 보이는 중 그들은 일자(一字)형
손잡이를 가리키며 "이것은 일본식인데 왜 한국의 전통문화에 포함시키는
가"하고 주장했다. 그는 그 증거로서 16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다관을 내
보였다. 그 무렵 마침 인천 길병원의 이귀례(李貴禮) 원장은 귀한 다관 하
나를 손에 넣었는 데 6세기 가야 말기의 것이었다. 그 주전자 손잡이가 일
자형이었다. 그것을 본 일본인 다인들은 그후 다시는 그런 주장을 하지 않
게 되었고, 다기에 있어서의 왜색 시비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이 형태의 다기는 우리 것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도공들은 저마
다 다기를 필수 품목의 하나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초기의 다기는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몸체와 뚜껑이 제멋대로 노는 것이
허다했고, 차를 모르는 도공이 만든 것에는 다관 안의 체구멍이 막혀 물이
나오지 않든가, 주둥이에서 물길이 끊어지지 않는 것도 많았다. 또 광물성
은 차와 상극임에도, 광물성 유약을 잔뜩 입혀 번쩍거리는 다기를 내놓고  
내 것이 최고라는 도공도 생겨났다. (지금도 그런 제품은 많다)

그러나 날로 확산되는 차생활운동에 힘입어 다기 시장은 수직 상승했
고, 생각있는 도공들은 품질향상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여 다기의 결점은
속속 보완되어 갔다.  


다기 다음에는 다구(茶具)가 개발 대상이 되었고, 그 다음에는 다실과
정원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다실과 정원이 연구의 대상이 된 것은, 어
쨌든 다인들이 일본의 형식을 참고하면서 한국의 본래 모습에 접근해 갔
기 때문이었다. 정원과 로지(露地)는 같은 개념에서 이해될 수 있었다.

옛 것이랄까, 우리 것을 되찾자는 분위기는 이렇게 차근차근 앞으로 나
가며 열기를 더해, 골동품(骨董品)과 서화(書畵)쪽으로도 번졌다.
그러던 중 우리 것의 가치가 상승하면서 투기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00%라고 해도 좋을만큼 한국인들 끼리의 투기바람이었기에 작전 시비도
일고, 가짜가 등장하여 물의를 빚기도 하였지만, 그 바람이 우리 것을 귀하
게 여기는 풍토조성 측면에서는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옛것이라면 다기구류도 엄청난 값에 거래되었다. 웬만한 가정에는 다
있던 다식판(茶食板) 하나가 수십만원에 거래되고, 무쇠 솥, 무쇠 주전자,
화로 등 하찮은 생활용구도 옛것이라면 귀하고 비싸졌다. 특히 다성(茶聖)
초의(艸衣)의 유품은 부르는 게 값이 되었다. 여기서 일부 차생활 운동가
들은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골동품에 더 골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다인들은 그런 투기나 들뜬 분위기에 초연했다. 그들은
점점, 정말 순수하고 진정한 애국자들이 되어갔다. 그들이 말하고 가르치는
차정신(茶精神)에서, 누구보다 먼저 교화(敎化)된 것이 자신이기 때문이었
는지 모른다. 그들은 모든 옛 것의 가치를 새롭게 부활시켰다. 판소리 국악
도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나아가 전통예술문화 전반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새롭게 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물론, 70년대 후반에 일어났던 모든 움직임이, 하나같이 차생활운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을 고루 살펴
볼 때, 차생활운동가들의 기여는 적은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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