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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맑게 하고 소화를 돕는 차. 차는 인간에게 무한한 활력을 주며 오묘한 사색의 숲으로 인도한다. 성품이 부드러워 늘 마셔도 부작용이 없는 인생의 반려. 색향미를 음미하며 눈을 감으면 나도 모르게 조금씩 용서와 이해와 조화의 심미안이 열린다.

한국차문화사
2002.02.02 03:52

한국의 차문화/ 추사 김정희와 초의 장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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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이 강진을 떠나면서 조선의 차 이야기는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로 이어진다. 이는 생활문화가 사람이나 시대에 의하기 보다 대지, 즉 토양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말해주는 좋은 예가 아닌가 싶다. 다인으로서 선인의 풍모를 보였던 정약용이지만 강진을 떠난 이후 그에 의한 차 이야기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만다.

이조판서 김노경(金魯敬)의 부인 유씨는 임신 24개월만에 사내아이를
출산하니 이름을 정희(正喜)라 지었다. 하도 오랜만에 낳아 필시 기형일
것이라고 염려했는데 바르게 태어나 기쁘다는 뜻이었다. 정희는 박제가(朴
齊家)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박제가는 규장각이 신설되었을 때 검서관
(檢書官)에 뽑혀 승문원 이문학관(承文院 吏文學官)을 겸했던 실학파 북학
(北學) 계열의 인물로, 시문과 서화에도 능한 문사(文士)였다. 특히 규장각
신설 때는 정약용과 더불어 낮과 밤을 보낸 고우(故友)였다. 김정희의 인
생에는 이 박제가의 영향이 컸다.

그는 1786년에 태어나 1814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입신은 늦은 편이
었다. 그러나 부친의 사랑이 커서, 아버지는 김정희를 어디든 데리고 다녔
다. 순조5년인 20세 때에는 동지사(冬至使)로 청(淸)에 가는 아버지를 따라
연경(燕京:北京)에도 갔는데, 이때 당대 거유(巨儒)로 명성을 떨치던 완원
(阮元) 옹방강(翁方綱) 조강(曹江) 등과 알게 되었고, 아울러 차생활의 진
수를 몸에 익히게 되었다. 완원은 김정희의 필치(筆致)가 뛰어남을 보고
자기가 지은 소재필기(蘇齋筆記)를 초(抄)해서 김정희에게 선물하기까지
하였다. (소재필기는 전서와(篆書)와 예서(隸書)의 내력을 고증한 책이다)
후일 김정희가 고증학자·금석학자·서도가 등으로 이름을 남기는 데는
이들의 영향 또한 적지 않다.

귀국 후 그는 고증학의 도입을 시도하면서 많은 친구들에게 차 마시기
를 권하며 스스로를 승설학인(勝雪學人)이라 하였다. (승설은 중국차 이름
의 하나이다) 그는 완당(阮堂), 추사(秋史), 예당(禮堂), 시암(詩庵) 등 많은
아호를 사용한 인물로도 유명한데, 승설(勝雪)은 초기에 즐겨 사용하던 호
였다. (이 글에서는 추사로 통일하기로 한다) 그런데 이 때는 조선에서 차
를 구하기 힘든 때였다.

추사와 초의가 처음 만난 것은 이 무렵, 그러니까 1816년 전후로 유산
과 운포의 주선에 의해서였다. 따라서 추사가 초의에게 차를 배웠다는 것
또한 잘못된 주장이다. 쌍계사 만허스님으로부터 직접 만들었다는 차를 얻
자 "그 절묘한 제다 솜씨, 용정 두강(頭綱)보다 낫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도 추사의 차생활은 중국에서 이미 영향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산 초당에서 인사를 나눈 유산이 상경한 뒤 초의에게 서한을 보내 한
번 다녀갈 것을 권유했고, 이에 한양에 방문한 초의는 남문 밖에 머무르며
유산과 초의를 중심으로 많은 선비들과 교분(交分)을 맺었다. 후일 이조판
서를 지낸 학고도인(鶴皐道人) 윤정현(尹定鉉)과의 만남도 이 때의 일이다.
그러나 이들이 무엇을 주제로 서로 만나고 소개하고 교분을 맺었는지 구
체적인 것은 알 수 없다.

한양에 왔던 초의가 떠나면서 학고도인에게 올린 글을 보면 "허술한 차
림의 일납(一衲) 다시 남쪽으로 갑니다. 좀더 오래 받들지 못하고 총총 떠
나가게 되어 한탄스럽습니다"는 간결한 내용뿐이다. 윤정현은 7년 연하였
는데, 무엇을 왜 받들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이때 한양 선비들 사이에
선 초의가 차 산지인 해남에 산다는 데 큰 관심을 가졌었던 것 같다.

전국을 두루 돌고 해남에 돌아온 초의는 봄이면 차를 만들어 추사와 유
산에게 보내 주었다. 매년 잘 하다가 어떤 해 게으름을 피우면 추사는 신
랄하게 다그치는 편지를 썼다.
        
…행다(行茶) 때가 되면 어김없이 과천정(果川亭)과 열수장(烈水庄)으로
새 차를 보내더니 금년에는 곡우(穀雨)가 지나고 단오(端午)가 가까워졌는
데도 두륜산(頭輪山) 납자(衲子)는 소식조차 없으니 어찌된 일인가. 신병
(身病)이라도 난 것인가. 말 꼬리에 매달아 보낸 것이 도중에 떨어진 것인
가, 아니면 유마송(維摩頌)에 열중해 계절 분간도 못하게 되었는가. 만약
더 지체하면 마조(馬祖)의 갈(喝:욕질)이나 덕산(德山)의 봉(棒:몽둥이)으로
그 몹쓸 게으름을 징계하고 원인을 다스릴 터이니 이쯤에서 그대 깊이깊
이 깨닫게나… 한 뒤에 추사는 "차 빨리 보내기를 거듭거듭 당부하네"하고
덧붙였다.

과천정은 추사의 집이요, 열수장은 한강변 집으로 유산이 아버지(茶山)
를 모시고 살던 곳이다. 당시 초의가 어떤 이유로 매년 때만 되면 차를 올
려보냈는지 역시 알 수 없다. 다만 차를 선물받아서 기쁘다거나 감사하는
내용의 글은 전연 없는 것으로 보아 초의가 자진해서 선물한 것 같지는 않
다.

차나무 있는 곳에 초의가 살았고, 그래서 추사는 초의에게 차 양식을
의존했던 것 같은데, 그 요구가 너무 당당하기만 한 것은 왜였을까. 우정이
돈독한 나머지 격의(隔意)없이 적은 글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다산이
혜장에게 보낸 걸명소나 이규보가 노규선사에게 차를 선물받고 흔열함을
이기지 못해 답했던 시에 비교하면 추사의 글은 너무나 그 내용이 살벌(?)
하다. 고맙다는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는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추사와 유산에게 보내진 차는 한양 선비들에게 널리 퍼
졌다. 차를 나누는 자리마다 초의 이야기가 전해졌고, 이에 초의는 본인의
뜻과 상관없이 다승(茶僧)이라는 명성을 갖게 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초의도 점차 차에 관심이 깊어지기 시작한다. 그건 자
연스러운 일로 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때 초의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다도를 물어온다. 그는 스스로 표현한 그대로 "총림(叢林)에 조주
풍(趙州風)이 있어 다도를 알고자 함에, 중국의 역사 서식 오락 풍속 명구
해몽 복서(卜筮) 등을 망라한 만보전서(萬寶全書)에서 차 부분을 초출(抄
出)하여 따로 엮으니 그것이 다신전(茶神傳)"이다. 내용은 모두 22개 항
(項)으로 되어있는 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채다(採茶)는 시기가 중요하고, 조다(造茶)는 정성을 다해야 한다. 또
저장(貯藏)은 요령을 잘 지켜야 한다. 차의 품질이 좋고 나쁨은 물을 끓인
뒤 차를 넣을 때 시작되는 데 물이 노수(老水)가 되지 않게 해야 하며, 불
을 잘 다뤄야 한다. 색의 맑고 흐림은 물과 불의 영향이다. 차를 넣는데는
순서가 있고 마시는 규범(規範)을 지켜야 한다. 차는 그 스스로 참된 향과
색과 맛을 지니고 있으니 조심을 게을리하여 오염되면 곧 참됨을 잃는다.
변질된 차는 마셔서는 안된다. 또 차는 물의 신(神)이요 물은 차의 몸(體)
이니, 진수(眞水)가 아니면 다신(茶神)이 나타나지 않고, 진차(眞茶)가 아니
면 수체(水體)와 조화를 이룰 수 없다. 다구는 차의 성품을 해치지 않는
것으로 선택해야 하며 차 마신 전후에는 세마포(細麻布)로 씻어 청결하게
하여야 한다. 이것으로 다도(茶道)는 완수되는 것이다…

초의가 대흥사 사찰 내 유천(乳泉)이 솟는 곳에 한 암자를 짓고, 일지
암(一枝庵)이라 이름지은 것이 41세 때(1826)이고, 다신전을 초출(抄出)한
것은 43세 때(1828)인데, 이를 정서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은 45세
(1830) 때이다. 후미의 글을 보자.

…무자년(戊年子) 어느 비오는 날 스승을 따라 지리산 칠불아원(七佛啞
院)에 이르러 이 책자를 등초(騰抄)하여 내려왔다. 곧바로 정서(正書)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고자 하였으나 몸이 괴로워 뒤로 미루었다. 사미승 수홍
이 시자방에서 노스님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다도를 알고자 하여 다시 정
초(正抄)를 시도하였으나 역시 몸이 괴로워 끝을 맺지 못하고 그대로 두었
다. 뒤에 좌선하면서 틈틈이 붓을 들어 완성하였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
어야 함이 어찌 군자의 일이기만 하겠는가. 총림(叢林)에도 조주풍(趙州風)
이 있어 이제껏 알지 못했던 다도를 탐구하고자 함에 외람되이 옛글에서
초하여 보인다. 경인(庚寅) 중춘(中春), 눈서린 창가에서 화로를 안고 삼가
씀…    
  
조주는 다도(茶道)의 깊은 뜻을 널리 편 당나라의 고승이다. 조주풍이
란 다도를 알고자 찾아오는 사람에게 한결같이 "끽다거(喫茶去)"로 응한
것을 말한다. 후기의 내용으로 보아 아마도 초의는 이 다신전을 등초하면
서, 비로소 차 세계의 깊이를 느낀 것 같다.

다신전에 이어서 6년 후에는 정조(正祖)의 사위인 해거도인(海居道人)
홍현주(洪顯周)의 청탁을 받고 동국(東國)의 차(茶)를 노래하는 "동다송(東
茶頌)"을 지어 다서(茶書)의 불모지에 빛나는 업적을 남기게 된다.

후황(后皇:하느님)께서 귤(橘)의 덕을 지닌 가수(嘉樹)를 전하니
옮겨서는 살지 못하도록 명(命) 받아 남쪽에서만 자라네
부드러운 잎, 싸락눈 내리는 겨울에도 그 푸르름 거뜬하고
서리에 씻긴 하얀 꽃, 신선 살결처럼 희고 맑은 그 옆엔
염부주(閻浮洲) 단금(檀金)같은 고운 열매 맺혔네,          
밤이슬에 씻긴 벽옥(碧玉)같은 푸른 잎
아침 안개 자욱한 속 지저귀는 푸른 새의 혀와 같아  
사람 신선 귀신 모두 애중(愛重)하게 여기나니
그 성품의 기이하고 절묘함을 누가 감히 의심할까.

일찍이 맛 본 염제(炎帝:神農氏) 식경(食經)에 기록하여
제호 감로와 함께 그 이름 전하니
뉘라서 족히 알랴, 그 참된 빛깔과 향기와 그리고 맛을.

그 참됨 완전케 하려는 도인(道人)의 맑은 욕심 있었으니
일찌기 몽산(蒙山) 정상에 올라가 손수 가꾸기도 하였다네

건양 단산 벽수 등등 물맑은 고장에서 생산되는  
천하 일품 중에 운간월(雲澗月)이 있는데
우리나라 차가 이와 본질이 같아
색향기미(色香氣味) 일체가 한가지이니
육안차(陸安茶)의 맛과 몽산차(蒙山茶)의 약효를 겸하고 있어
마른 나무에 싹이 나듯 늙은이를 젊게하는 신험이 빨라
팔십 노인 얼굴에 복숭아꽃 피게 하네  

내게 유천(乳泉)있어 그 물로 수벽(秀碧) 백수탕(百壽湯) 만드니
이것을 어떻게, 그대로 남산의 해옹(海翁)에게 전할 수 있을까.
또한 구난(九難) 사향(四香)의 그윽한 묘용(妙用) 있는 것은
어찌 가르치랴, 옥부대(玉浮臺)에서 좌선(坐禪)하는 무리여.

보아라, 신령스런 뿌리 신령스런 산에 의탁하였나니
선풍(仙風) 옥골(玉骨)이 절로 특별할 것이로다,
푸른 싹(綠芽) 자주빛 순(紫荀)이 운근(雲根)에서 자라
철철 넘치는 맑은 이슬 흠뻑 마시니        
어린 움 찧는 삼매(三昧)의 손에 기이한 향기 피어나네
그 가운데 현묘(玄妙)함 표현하기 어려우니
참된 것은 가르치는 일도 어렵구나

체(體)와 신(神)이 온전하다 할지라도 불 다룸이 염려되니
중정(中正)을 지키면 건강과 신험을 함께 얻는다.
        
옥화(玉花) 한 잔 기울이니 겨드랑이에 솔솔 바람 일어
몸 가벼이 하늘로 오를 것 같네
밝은 달 다가와 촛불되고 겸하여 벗도 되고
흰구름은 자리되고 아울러 병풍도 되네
대숲에 이는 솔바람 소리에 모든 게 시원하니
맑고 서늘함 뼈 속까지 스며 마음 깨워주네

아아, 오직 흰구름 밝은 달 두 분이 손님이니
도인(道人)의 자리 이만하면 족하지 않을까.
초의(草衣) 녹향연(綠香煙)에 싸여 자욱한 향기 마시니
곡우(穀雨) 전 어린 움 새의 혀(禽舌)인양 미동(微動)하네
어찌 단산(丹山)의 운간월(雲澗月)만 손꼽힐손가
잔에 가득한 뇌소(雷笑)는 천수(千壽)를 가약(可約)하네  

동다송, 해거도인 명으로 지음. 초의 사문 의순 지음
(東茶頌, 海居道人命作 艸衣沙門意恂)

초의의 동다송이 특히 빛나는 것은 당시의 다인들이 이구동성 "우리나
라 차는 중국의 차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던데 반해, 우리 차의 품격이 더
우월함을 상기시켜 준데 있다. 그리고 마시기만 했던 문사의 노래가 아니
라, 차를 직접 만들어 온 선사(禪師)의 글이기에 더욱 값진 것이다.

차만 그런 것이 아니라 수질도 어느 곳에 뒤지지 않는다면서, 이러한
자연 천수가 동차(東茶)의 효능을 더욱 높여준다고 하였다. 그리고 육우(陸
羽)나 이찬황(李贊皇) 같은 뛰어난 다인이 옆에 있다면, 반드시 나의 말이
맞다고 할 것이라며 자신있게 말했다. 우리 차야말로 "차중의 차"라고 노
래했던 것이다.

초의가 동다송을 지은 4년 뒤인 헌종 6년, 추사는 죄인이 되어 제주도
로 유배되었다. 아들과 함께 능지처참을 당한 윤상도(尹尙度)의 옥(獄)에
관여한 죄였다. 이때쯤 초의와 추사의 교분이 얼만큼 깊어졌으리라는 것은
추측으로도 가능할 것 같다. 초의의 제자 소치(小癡)가 추사문하로 옮겨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받는 것이 제주도로 유배되기 직전의 일이다. 그 후
이들이 제주도를 자주 찾았음은 물론이다. 소치는 우리나라 남종화의 시조
가 되었으며, 그 줄기는 미산(米山), 남농(南農)으로 이어졌다.

초의도 제주도를 찾았다. 제주도에 가서 추사와 함께 지내면서 다원도
조성하고 참선법도 가르쳐 주며 유배지의 외로움을 위로했다. 제주목사와
어울려 망경루에서 시 짓기를 즐긴 흔적도 있다.  

추사의 차시는 20여수가 전해지는데 대개 유배지에서 지은 것이다. 애
송되는 것은 "정좌처다반향초 묘용시수류화개(靜座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
花開)"이다. 이 시에서 다반향초는 그 뜻을 번역하기가 매우 어렵다. "차는
반쯤인데 향기는 처음과 같네" 정도로 읽는 사람도 있고, "차가 익기 시작
하니 향기 피어나네"로도 해석한다. 뒤의 해석이 제법 부드럽게 다가온다.

고요한 자리 차 반쯤 익으니 향기 피어나네
시간도 멎은 곳에 물은 흐르고 꽃은 피네

초의는 58세 때에 일지암에 귀향하여 줄곧 그곳에서 살았다. 추사 김정
희가 71세(철종 7년)로 별세하자 정의를 못잊어 비장할만큼 애절한 제문을
올렸고, 그 10년 뒤인 1866년(고종3년) 81세를 일기로 입적(入寂)했다.

차는 인류의 벗으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8세기 육우
(陸羽)가 다경(茶經) 3편을 남김으로써 비로소 존재의 빛을 갖추기 시작했
다. 그는 육자(陸子)로 불리우며 공맹과 격을 같이하게 되었다.

조선에는 늦게나마 초의가 있어 동다송으로 우리 차를 노래하였으니 그
를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받드는 것이 어색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다산
과 그의 두 아들 쌍정(雙丁), 추사와 그 주변의 선비들과 교유했던 사례
외에 그가 특별히 다도에 심취했던 흔적은 없는 것이 아쉬음을 준다. 시문
에 능했음에도 생활이나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 지은듯한 감동적인 표현
은 드문 것이다.    

그가 만년에 기거했던 일지암(一枝庵)은 후세 다인들에 의해 "성지(聖
地)"가 되어, 순례(?)의 발길이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초의선사 추모제도
매년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 선사가 41세 때 일지암을 결암하고 스스로 만
족해 했던 노래에 일지암의 모습은 잘 담겨있다.

연기도 안개처럼 가로눕는 이곳에 오랜 인연 있어
병발(甁鉢)의 어설픈 세간살이, 석가래 몇 개로 떠 받쳤네
돌 털고 흙 파낸 곳에 물 고여(沼) 하늘 생기고 달 잠기니
속 빈 나무 길게 이어 백운천(白雲泉) 끌었네
이제, 향보(香譜)에 새로 올릴 영약(靈藥) 찾으면서
때로 원기(圓機:敎法)에 연하고 묘련(妙蓮:부처님說敎)도 펴려하네
눈 앞 가리는 꽃가지들 조심조심 자르니
모습 드러내는 산봉우리들, 저녁 노을에 아름답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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