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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맑게 하고 소화를 돕는 차. 차는 인간에게 무한한 활력을 주며 오묘한 사색의 숲으로 인도한다. 성품이 부드러워 늘 마셔도 부작용이 없는 인생의 반려. 색향미를 음미하며 눈을 감으면 나도 모르게 조금씩 용서와 이해와 조화의 심미안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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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감상(藝術鑑賞)


거문고 길들이기

도교(道敎)에 「거문고 길들이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용문(龍門 : 중국 洛陽의 龍門山) 계곡에 숲 속의 왕이라 일컬을 만한 거대한 오동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나무는 머리를 높게 들어 별과 대화하고, 청동(靑銅)으로 감고 있는 뿌리는 깊은 땅 속에서 잠들고 있는 은(銀)의 용(龍)을 휘감고 있었습니다.
한 마법사가 이 나무로 거문고를 만들어 황제에게 바쳤습니다.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궁중 최고의 악사를 불러 연주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나무의 정기가 너무 센 나머지, 다루기가 어려워서 어떤 악사도 거문고를 연주할 수 없었습니다. 거문고는 오랜 세월 황제에게 비장된 채, 「아아, 나를 튕기고 타 줄 명수는 이 세상에 없나 보구나」하며 비통해 했습니다.
어느 날 백아(伯牙)라는 거문고의 명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거친 야생마를 진정시키는 것처럼 거문고를 부드럽게 애무하며 살며시 줄을 튕겨서 자연의 사계절을 노래하게 했습니다. 싱그러운 바람이며, 계곡을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도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나무의 추억이 되살아났습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미풍이 살짝 살짝 가지를 춤추게 하자 얼음이 녹아 바위 위를 흘러 부푼 꽃봉오리에 웃음을 선사합니다. 여름이 되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벌레들의 꿈꾸는 소리가 조용히 내리는 빗소리에 섞였습니다.
호랑이의 거친 숨소리도 들려오고 그에 응답하는 산울림 ―.
인기척 없는 가을밤의 달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서리 내린 초원을 비춰줍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겨울의 풍정! 흰눈 내리는 하늘을 백조가 무리지어 날고, 나뭇가지에 세차게 부딪치는 싸락눈 소리….

백아는 줄을 골라서 이번에는 연가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숲은 상념에 짓눌린 열렬한 연인처럼 흔들어 댔습니다. 구름은 교만한 소녀처럼 하늘 높이 흐르면서 검고 긴 그늘을 절망인양 창에 드리웠습니다.
다시 줄을 고른 백아는 전쟁을 노래했습니다. 서로 부딪치는 칼과 땅을 차는 준마들의 포효가 영웅들의 혼을 일깨웠습니다. 순간 거문고 속에서 용문의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용이 번개를 타고 하늘에 오르자 산사태의 굉음이 온 산에 울렸습니다.
황제는 그저 황홀하게 듣고만 있다가 백아에게 물었습니다.
「명금(名琴)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백아는 말했습니다.
「폐하! 다른 사람들이 실패한 것은 자기가 연주한다며, 자신을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저는 거문고로 하여금 곡을 고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거문고가 나였는지 내가 거문고였는지 저 자신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연주를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술 감상의 깊은 의미를 잘 전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걸작이라 불리는 것들은 우리들의 뇌리에 있는 가장 묘한 마음의 금선(琴線)에 맞추어 연주되는 교향악과 같습니다.
참다운 예술은 백아이며 우리들은 용문의 거문고라 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마법의 손끝이 튕겨지면 우리들 마음속에 잠들고 있던 줄[絃]이 일깨워져, 거기 맞춰 전신이 움직이고 진동하며,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야기 되어 나갑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들은 소리 없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형태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결국 명인은 우리 의식에 없는 분위기를 불러 일깨워 오랜 동안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추억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가까이에 회귀하게 하는 것입니다.
공포로 움츠렸던 희망이, 오랜 동안 잊고 있었던 동경이 새로운 빛에 싸여 면전에 나타납니다.
우리 마음은 화가가 색채를 칠하는 캔버스입니다. 정감이 화구라면 명암의 밝음은 기쁨이요, 어둠은 슬픔입니다. 걸작이 우리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것과 같이, 우리 자신이 걸작의 원천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예술 감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서로의 마음과 마음의 상통은 상호 양보하는 정신에서 이루어집니다. 예술가는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전할 수 있는 기술을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보는 측에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충분한 수용태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종장(宗匠) 고보리엔슈[小握遠州]는 자신이 영주[大名:領主]이면서 다음과 같은 잊기 어려운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위대한 회화(繪畵)에 접한다는 것은 왕후(王侯)를 대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걸작을 이해하려면 그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숨소리마저 죽여서 그가 이야기 하는 것이라면 아주 작은 소리일지라도 놓치지 않고 들으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송 대의 한 비평가는 이런 흥미 있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젊을 때의 나는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린 예술가를 크게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감상력이 무르익어감에 따라 내가 좋아하게끔 그러준 작품을 좋아할 수 있는 나 자신을 칭찬했습니다.」
요즈음에는 예술가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연구하는 사람이 아주 적어졌습니다. 무지나 편견을 완고하게 믿고 가볍게 지나쳐 버리려하니 이것은 슬픈 일입니다. 연구해 보는, 이 단순하기 그지없는 예술가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눈앞에 펼쳐지는 풍요한 아름다움의 향응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명인은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려고 하나 우리들 측에서 맛 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항상 공복을 움켜쥐고 있는 것입니다.
걸작과 마음이 상통하면 바로 그 작품이 그 자리에 살아 있어서 친구가 되어 버리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가 만들어낸 사랑도 공포도, 우리 내부에서 되살아나 삶을 이어가는 까닭에 예술은 불노불사(不老不死), 즉 영원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호소하는 것은 손[手] 보다는 혼 ― 기술보다는 예술가 그 자신인 것입니다. 그 부름의 소리가 인간적이면 인간적일수록 대답하는 소리도 감회어린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술가와 우리들과의 사이에는 이와 같이 은밀한 마음과 마음의 만남이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시나 소설을 읽고 거기 나오는 주인공과 더불어 슬퍼하고 같이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일본의 세익스피어라고 예찬하는 지가마쓰[近松]는 극작의 중요한 법칙 중 하나가 관객에게 작가의 비밀을 털어놓는 일이라 하였습니다.
하루는 몇몇 제자들이 자기 작품을 보아달라고 가져왔는데, 그 중 지가마쓰 마음에 든 것은 한 편 뿐이었습니다.
「쌍둥이 형제가 무엇이 잘못되어 고민하는」세익스피어의 「잘못됨을 계속」과 흡사한 희곡이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작품은 극 본래의 정신을 구비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할 수 있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관중은 작가보다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어서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도 알고 있다. 죄도 없는데 애통하게 운명에 밀려내려 가는 사람들을 가장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관중이다.」
지가마쓰 역시 관객에게 비밀을 알리는 방법으로 암시(暗示)란 것을 중히 여겼습니다.
걸작이라 불리는 것은 어느 것이나 그 배후에 방대한 사상의 넓이를 갖게 마련이어서 누구나가 외경의 념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친근해지면 서로의 마음이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걸작이란 사람의 마음 깊은 저변에서 온화함을 샘솟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반대로 현대의 졸작들은 냉기가 서려서 단순한 형식적 의례 밖에는 얻어내지 못합니다.
현대인은 기교에만 부심하지, 거의 자아(自我)를 넘지 못합니다. 용문(龍門)의 거문고를 다룰 수 없었던 연주인들처럼 자기에 대하여만 노래를 부릅니다. 이런 작품들은 과학에는 가까워졌을지 모르지만, 인간성이란 관점에서는 먼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여성 세계에 「교만한 남자에게는 반할 수가 없다.」란 말이 있습니다. 그런 남자는 애정이 들어가 자리할 틈이 없기 때문인데, 예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허영이란 마음이 통해야 할 정감을, 가로막고 그르치기 때문입니다.
육친 간에 서로 마음이 통하는 정신 유대가 있듯, 예술에서는 작품과 그 작품을 보는 사람과의 사이에 그런 정신적 유대가 생겨나야 합니다. 예술은 그 때를 신성시합니다.
이 정신적 만남의 순간에,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아를 초월합니다. 그들은 존재함과 동시에 자기 존재를 떠납니다.
그들은 무궁(無窮)을 담 넘어 봅니다만, 그 환희를 말로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눈에는 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정신은 물질이란 구속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생성되는 리듬대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리하여 종교에 가까워지며 인류를 고상하게 만들어 줍니다.
때문에 걸작은 신성한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훌륭한 예술가의 작품을 무한히 숭배했습니다. 종장(宗匠)들은 그 귀중한 도구를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시켜 비장하였으니, 여러 겹으로 포장한 상자를 한 겹 한 겹 풀어 가면 마지막에는 부드러운 명주 천에 감싸인 신체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사람 눈에 띄는 일이 거의 없으며, 오의(奧義)를 전수받은 자에 한하여 보여지곤 합니다.
다도가 융성했던 시대에 무사들은 전공의 포상으로 넓은 영토보다, 진귀한 예술품 한 점 하사받는 것을 더 기뻐했습니다. 인기 있는 연극에 유명한 예술품을 잃었다 찾았다 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셋숀[雪村]이 쓴, 유명한 달마 그림을 소유한 호소가와[細川候} 별장의 화재 사건을 테마로 한 연극도 그 중 하나입니다. 별장이 한 당직 무사의 실수로 화재를 당한 즉, 그는 이 중요한 그림만은 어떻게든지 구해야겠다는 일념에서 불타고 있는 집 안으로 뛰어들어 벽에 걸린 그림을 움켜잡았지만, 출구가 화염에 싸여 길이 막혔습니다. 그림을 구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는 그는, 칼로 배를 째고 그림을 말아서 그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얼마 뒤에 불이 꺼지자 반쯤 타다 남은 그의 사체가 발견됐는데, 그 뱃속에 화재를 면한 국보급 그림이 들어 있었습니다. 무서운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신뢰했던 무사의 충의를 포함하여 그들이 얼마나 예술을 존중하였는가를 알려주는 좋은 예입니다.

예술이란 그것이 우리들의 마음에 와서 닿는 만큼 비례해서 가치를 갖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우리들과 예술가의 마음의 상통이 보편적인 것이라면 예술은 누구에게나 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유전적 본능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성질은 전통이나 관습의 힘에 지배당하고 있기에 예술 감상력의 시야는 자연히 한정됩니다.
어쩌면 외부 영향이 아닌, 우리들 개성이 우리들 이해력을 스스로 한정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인 심미안은 과거의 창작물 중에서 자기에게 닮은 것을 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술 감상의 감각은, 닦으면 닦을수록 폭이 넓어져 이제까지는 몰랐던 많은 아름다운 표현을 맛 볼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우리들은 우주에 있어서 자기 자신의 모습만 보고 있는 것이며, 개인의 독특한 성질에 의하여 그 지각(知覺)의 형식도 스스로 규정지어 지는 것입니다.

종장들은 거의가 자기의 감상안(鑑賞眼)의 척도에 도달한 것만을 모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고보리엔슈[小握遠州]에 대한 에피소드가 생각납니다. 엔슈[遠州]의 제자들은 수집품에 나타난 스승의 훌륭한 기호에 감탄하며
「어느 것을 보아도 너무 아름다워서 누구나 놀라게 됩니다. 이는 선생님이 리큐[利休] 종장(宗匠]보다 더 우수한 취미를 가지셨다는 증거입니다. 리큐 종장[利休宗匠]의 애장품은 천 사람 중 한 사람이나 알아볼까 말까 하거든요」라고 제자가 말하니 엔슈[遠州]는 슬픔어린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보다도 범인인 까닭이구나! 리큐 종장처럼 자기가 좋다고 느끼는 것만을 좋아할 용기가 없어진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대중이 좋아하는 것에 영합하고 말았구나. 리큐야 말로 천 사람 중에서 뛰어난 한 사람의 종장이다.」
슬픈 일이지만 요즈음의 표면적인 예술 애호 열기는 거의가 실감과는 거리가 먼 공허한 것들입니다.
민주주의 시대에 있어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감정과 관계없이 세속적으로 일반이 좋다는 것에 매달려 떠들어 댑니다. 그들이 욕심내는 것은 「값이 비싼 것」이지 「고아(高雅)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말로는 감탄하는 것 같지만, 초기 이태리나 아시카가시대[足利時代]의 명작을 보는 것보다 현대 기계문명의 소산인 그림 있는 잡지 보는 쪽을 더 편하게 여깁니다. 소화도 잘 되고 양식도 될 겁니다. 작품의 질보다 작가의 이름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몇 세기 전에 중국의 비평가가 개탄한 것처럼 현대 사람들은 귀로 그림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는 순수한 감상력의 결여에서 빚어진 일입니다.

또 하나 자주 범하는 과오는 미술과 고고학의 혼동입니다.
옛것을 보고 느끼는 숭경(崇敬)의 념은 인간의 좋은 습성 중 하나이며, 더욱 도야해야 할 일입니다. 앞서간 종장들이 후세에게 인심 개발이 되는 길을 개척하여 준 점은 칭찬하여 마땅할 것입니다. 그걸 위해 그들은 몇 세기에 걸친 비판을 견디어 냈으며 지금 역시 영광의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실로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의 업적이 단지 옛것이기 때문에 존중된다고 하면 그것은 대단히 바보스러운 일입니다. 옛것에 대한 향수에 젖다보면 자칫하면 아름다움을 꿰뚫어 보는 안목이 흐려지기 쉽습니다.
작가가 묘지에 묻힌 뒤에야 「참으로 훌륭한 인생이었습니다.」 하며 꽃을 바치는 것입니다. 진화론을 믿었던 19세기에 우리들은 종족을 제일이라 생각한 나머지 그 안에 있는 개인은 망각하는 습성을 기르고 말았습니다.
무엇이나 수집하고 싶어 하는 학자는, 시대의 편린이나 어느 유파(流波)의 견본 등을 조금이라도 많이 구하려고 초조해 합니다.
단 한 점의 걸작이 한 시대나 유파의 수없이 많은 졸작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많이 구해서 분류 따위나 하려 할 뿐 즐거움을 가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과학적 진열 방법은 심미적 진열 방법을 무시하기 때문에 많은 미술관에서 즐거움이 적어졌습니다. 한 시대의 기본적 생활양식은 그 시대의 예술적 요구를 무시하고는 성립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예술은 진정 우리들의 것이며 우리들 자신의 반영입니다. 이것을 경시하는 것은 자신을 경시하는 것이 됩니다. 현대는 예술이 없다는 등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은 과연 누가 책임져야 하는 말일까요.
고인을 극구 흠모하고 칭찬하면서, 자신의 가능성에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명성을 얻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예술가들 ― 냉랭한 모멸(侮蔑)의 그늘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지친 영혼들이 자기 본위적 생각에 빠진다면 무슨 말로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어 줄 수 있을까요. 과거는 연민의 정으로 우리의 이 깊이 없는 빈약한 문명을 관조 하겠지요. 미래 역시 현대판 불모의 예술을 조소할 것입니다. 참으로 현대는 우리 생활 속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을 잃어가면서 예술까지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누군가 위대한 선각자의 출현이 기대되는 때입니다. 그래서 역사란 나무로 힘센 거문고를 만들고, 그 줄[絃]이 천재 연주인의 손끝에 닿아 아름다운 선율이 사회 전체에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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