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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언제 읽어도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위선이나 불의에 대항하여 정의를 세우면서 인간성을 옹호하고 정신을 이끄는 따위는 다음 이야기입니다. 잔잔한 물결처럼 다가와 가슴을 파고드는 반취 이기윤의 소설들에는 독특한 향기가 있습니다.

단편
2011.08.06 12:21

하늘을 나는 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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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소설
성공기업, 우성 아이비의  하늘을 나는 보트


하늘을 나는 보트  ZEBEC

“와아. 보트가 하늘을 난다.”
해변 관람석에서 탄성이 나왔다. 탄성과 함께 박수가 터졌다. 물에 떠 있어야 할 고무보트가 젊은 여성 둘을 태우고 하늘을 나는 것이다. 모터보트에 매달린 고무보트였다. 모터보트 속력이 시속 20노트를 넘어서자 날다 떨어지고, 날다 떨어지고 하더니 시속 30노트에서는 제법 오래 떠 있었다. 보트 위의 여성은 황홀경에 취해 기성을 질러댔다.  
유월의 속초 앞바다. 고무보트를 생산하는 우성아이비가 신제품을 발표하고 있었다. 휴가철이 아니어서 일반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여름이면 피서객이 몰리는 유명 유원지나 해수욕장 등에서 수상 레저스포츠 관련 영업을 하는 사업자들이 주로 초청된 자리였다. 속초해변 안전관리 요원과 경찰, 그리고 응급 의료 팀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함께 있었다.  
모터보트가 크게 회전하여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하자 개발팀장 송기두는 보트를 향해 흰 수건을 흔들어 댔다. 보트 위의 여성에게 움직여 보라는 신호였다. 두 여성은 보트가 막 나는 상태에서 조심조심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해 보였다. 보트가 곤두박질치거나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가를 보기 위해서였다. 보트는 보는 이에게 전혀 불안감을 주지 않았다.
다시 방향을 바꾸었을 때, 송기두는 빨간 수건을 흔들었다. 두 명이 한쪽으로 타라는 신호였다. 기울기 테스트를 위해서였다. 초청된 사업자들에게도 미리 자료를 나눠주었기에 내용을 알고 있었다. 잘못하면 보트가 뒤집힐 수도 있는 테스트여서 모두들 긴장하고 지켜보았다.
모터보트가 다시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20노트에 이르자 날 듯 날 듯 할 뿐 아까처럼은 못 날았다. 사람이 한쪽에 몰려 타고 있는 게 부담되는 듯 했다. 23노트,  25노트에 이르자 보트는 다시 뜨기 시작했다. 30노트로 달리자 보트가 수면위에서 20M 가량 떠서 10분정도 날다가 갈매기처럼 사뿐히 수면위로 내려왔다. 하늘을 나는 보트가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두 여성은 해변의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전하다는 신호였다. 관중석에서 다시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성공입니다. 사장님.”
백수현 과장이 말했다. 임이영 상무도 성공인 것 같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이희재 사장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나머지도 모두 테스트를 해 봐야지.”
신제품 하늘을 나는 고무보트는 3종을 만들었다. 2인승, 3인승 6인승인데 먼저 2인승을 테스트한 것이었다. 2인승이 하늘을 날았다고 해서 6인승도 하늘을 난다는 보장은 없었다. 이희재 사장은 안전하게 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반면 임 상무는 성공을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말했다.
“6인승도 괜찮을 겁니다. 같은 공식이 적용되었으니까요.”
결과는 임 상무의 말대로 성공이었다. 3인승도 6인승도 가볍게 하늘을 날았다. 6명이 타고 있는 보트가 하늘을 날자 관람객은 모두 일어나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바다에서 이 정도 성능이면 청평 호반 같은 내수면 에서는 훨씬 잘 날 것이다. 신제품 발표는 대성공이었다.


“여러분. 바쁘신 중에도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희재 사장은 말했다. 그 날 저녁 속초호텔 연회장. 신제품 발표 성공을 자축하는 자리였다.
“먼저 오늘 보여드린 신제품의 수훈자를 소개하겠습니다.”
이희재 사장은 송기두를 손짓해 불렀다. 송기두는 뒷머리를 만지며 나가 사장 옆에 섰다.
“송기두 이사입니다. 공장장을 겸하고 있으며 개발팀 팀장이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어떤 아이디어를 냅니다. 이런 게 과연 만들어질까. 하면 그걸 실현시켜주는 우성아이비의 보배입니다. 하늘을 나는 보트도 같은 과정의 산물입니다. 박수로 격려해 주시고, 여러분 중에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이 자리에서 말씀해 보십시오.”
이 사장이 다소 익살스럽게 말하자 실내엔 박수와 웃음이 동시에 번졌다. 이희재 사장은 내친 김에 임이영 상무와 백수현 과장도 소개했다.
“그런 식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여기, 임이영 상무입니다. 계획수립에 천재요, 관리 경영의 체계화와 모든 데이터의 계량화 수치화를 통해 우성아이비의 고무보트 품질을 세계 정상 수준에 올려놓은 사람입니다. 그 옆에 있는 백수현 과장은 부품 개발에 있어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입니다. 우성아이비와 우리의 고무보트 ‘지벡’을 애용하시는 분이라면 이 두 분께도 격려의 박수를 주십시오”
이번에는 박수만 쏟아졌다. 소리가 가라앉기를 기다려 이희재 사장은 다음과 같이 말을 마쳤다.  
“이 자리에 다 오지 못해서 그렇지 저희 우성아이비에는, 제가 팔불출 소리를 듣는 한이 있더라도 소개하고 싶은 인재가 너무 많습니다. 이분들 덕분에 우리 보트 ‘지벡’이 업계 최초로 품질보증업체 지정을 받았으며, ISO 9002 획득 및 유럽 인증마크인 ‘CE'를 획득하였습니다. 우리 브랜드로 세계 50여 개국에 수출하고 있으며 미국 그랜드캐년 등지에서 상업용은 물론, 경기용 선수용으로 사용될 만큼 안정성에 대해 인지도 높은 제품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마음 놓고 저희 보트를 주문해 주십시오. 오늘 선보인 하늘을 나는 보트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이 사장이 말을 마치자 우뢰와 같은 박수가 또 한 번 나왔다.
“한국의 보트산업 전망을 어떻게 보십니까?”
한 쪽에서 질문이 나왔다. 이희재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가 좋아하는 질문인 것이다.
“한마디로 매우 좋습니다. 보트도 조선업입니다. 알고 보면 조선업은 우리 민족이 오천 년을 이어온 사업입니다. 잠재의식 속에 그 기술이 있습니다. 우리민족은 바다와 함께 살았고, 바다는 우리의 무궁무진한 삶의 보고이며 우리의 꿈과 희망입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바다를 활동 무대로 삼았을 때 융성했고, 바다를 멀리했을 때 쇠락했습니다.”
“수상레저 쪽에 대한 견해도 밝혀주시지요.”
또 한 사람이 물었다.
“수상레저는 레저산업의 꽃입니다. 지금의 스키나 골프 열풍은 삶의 질이 더 높아지면 틀림없이 바다로 옮겨집니다. 다만 한국은 물을 두려워하는 잠재인식을 바꿔야 합니다. 산에 있는 것은 신령이고, 물에 있는 것 귀신이라는 인식부터 고쳐야 합니다. 그런 의식 때문에 규제도 심하고 시장도 열리지 않고 있지만 머잖아 물놀이 천국이 될 것을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20세기 후반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마이카시대를 이룩했듯이,  21세기 초반 마이보트 시대도 먼저 맞을 겁니다.”
질의는 그것으로 끝났다. 성공적인 신제품 발표회를 축하하는 박수소리가 요란했다.
“축하합니다. 사장님.”
“아이디어가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하늘을 나는 보트를 생각하셨죠?”
“베이산업이 국내 1위 자리를 물려주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 같습니다.”
초청된 전국의 수상레저 사업주들은 이희재 사장 주위에 모여 찬사를 연발했다. 김양수 관리이사가 다가와 오늘 받은 주문이 54대라고 귀띔했다. 반응이 좋은 것이다. 보도가 나가고 홍보가 되면 그 수가 수백이 될지 천이 될지 모를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희재 사장은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았다. 조심하는 표정으로 연신 겸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찬사에 답할 뿐이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아껴주시는 덕분이고, 좋은 인재들을 만난 덕분입니다. 저는 1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1위가 되는 것보다는 1위가 되려고 노력하는 때가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계속해서 신제품을 개발해 나갈 겁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내 주셔서…”
“어떻게 할까요? 구매조건을 조금만 완화해 달라는데…”
김양수 이사가 물었다. 관리 이사 입장에서는 주문을 더 받고 싶어했다. 구매조건을 조금만 느슨하게 해주면 주문하겠다는 사람이 더 있는 것이다.
“이제는 조금 완화해도 될 것 같은데요. 구매자 신용을 보던가 데미지 없을 한도를 정해 그 범위 안에서 운용하는 방식으로 라도…”
내용은 뻔했다. 외상을 하거나 어음으로 결제하게 해달라는 소리였다. 이희재 사장은 일단 고개를 저었다.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아픈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시련과 도전의 세월

96년의 일이었다. 우여곡절을 무수히 겪었지만 그래도 성실하게 보트를 만들어 온 덕분에 좋은 바이어들 만나 수출량을 늘리면서 ‘지벡’ 상표가 외국 수상레저 시장에 조금씩 알려지던 때였다. 사실 품질은 완벽하지 못했다. 하지만 쓸 만은 하다고 알려진 것이고, 무엇보다 성실하고 약속을 지키는 업체로 소문이 번져 바이어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였다.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이희재 사장은 세계 주요 도시에서 벌어지는 보트 쇼나 국제스포츠용품전시회를 중심으로 마케팅을 해나가고 있었다. 추석을 전후해서 상해 보트전시회에 다녀오니 회사가 부도 위기에 몰려있었다. 공항에 마중 나온 임이영이와 송기두는 핏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요.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소?”
“국내 업자에게 받은 어음의 70%가 부도입니다.”
“무슨 소리야. 70%가 부도라니?”
“이상 기후로 인해 금년 여름 피서지 장사는 모두 손해를 보거나 망한 겁니다.”  
“……?”  
할 말이 없었다. 여름 내내 비가 오고 태풍이 지나가고 덥지도 않아 피서지를 찾는 인구가 적었고, 수상레저 업계가 착 가라앉았다는 데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받은 어음의 70%가 부도라는 것은 믿고 싶지 않았다.
부랴부랴 회사로 달려가 상황을 살펴보니 정말 위기였다. 어음을 주고 보트를 사간 업자들이 경쟁이나 하듯 부도를 낸 것이었다. 어음 부도로 우성아이비가 자금난을 겪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니 결제능력이 있는 업자도 추가로 부도를 내고 있었다. 어차피 영세업자가 많고, 우리나라에선 아직 시작 단계인 수상레저 업계의 사업주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이 많았다. 부도  내고 다시 시작하는 일 따위를 밥 먹듯 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거래 회사가 어렵다고 하면 도와주는 풍토가 되어야 하는 데 그 반대였다. 튼튼하지 못한 기업이 가장 거래하기 위험한 상대는 아이러니 하게도 한국 시장이었다.      
그런 시장임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어음 제도를 악용하는 중소 규모 사업주가 적지 않은 한국 시장의 관행이 있어 내수 공급은 처음부터 꺼렸던 일이었다. 그러나 수출만 하기에는 기본 체력이 약한 때였다. 외국 바이어들과의 거래는 샘플에서 메인 오더가 오기까지 보통 1년 6개월이 소요되었다. 해외 시장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그걸 기다리기 너무 힘들고 지루해 내수 주문을 받았던 것이다. 어떤 이는 어음을 안 받겠다 하니 ‘6일짜리요. 6일이면 현금이나 마찬가지 아니오.’ 하고 큰소리치며 가지고 갔다. 그런 것일수록 부도가 났다. 받은 어음을 가지고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이서해서 돌려썼기에 부담은 이중 삼중으로 가중되는 상태였다.
이 사장은 눈물이 핑 돌았다. 지난 5년 간 간신히 넘긴 그 숱한 고비와 피눈물 나는 고생이 모두 물거품이 되기 직전이었다. 아아. 조금 힘들어도 처음 생각대로 내수 거래를 하지 말 걸… 후회가 되었지만 늦은 때였다.
“어떻게 하지? 진행 중인 오더 물량은 어떻게 하고, 상해 보트 쇼에서 주문 받은 것도 있는데…”
“……”
“은행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을까?”
“말도 마세요. 어렵다고 하니 은행이 더 앞장서서 목을 조릅니다.”
“……?”  
비상 회의를 소집했지만 모두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이 사장은 비장한 각오를 했다.
“좋아요. 내 평소의 신념이 있습니다. 해법이 없을 때는 솔직해지는 겁니다. 사실대로 솔직히 털어놓고 거래회사에 도움을 청해봅시다.”
이 사장은 미국 스페인 덴마크 노르웨이 독일 등지의 바이어들에게 편지를 썼다. 한국 시장의 어려움을 사실대로 밝히면서 부도를 맞아 생산이 어렵게 되었다고 솔직하게 알렸다. 그리고 귀사에서 주문하신 물량의 대금을 미리 주실 수 있다면 결코 신의를 저버리지 않고 보람을 나눌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결의를 덧붙였다. 그들이 도와주리라고 기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대로 일방적으로 공장 문을 닫을 수는 없기에, 방법을 찾아보자고 보낸 것이었다. 선배 기업으로서 이러한 고비를 넘기는 지혜만이라도 일러준다면 더 이상 고마울 게 없는 노릇이었다.
결과는 뜻밖에도 감동이었다. 미국에서 15만 불을 보내주었고, 노르웨이에서 5만 불을 선불로 보내주었다. 직원들도 카드대출 등을 통해 각각 5백만 원씩을 냈다. 3억원이라는 자금이 모였다. 이 돈이면 우성아이비를 다시 일으키고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액수였다. 이희재 사장은 그들을 향해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기업이 어렵다고 소문나면 줄 돈도 뒤로 미루어 아주 망하게 만드는 국내 고객들과 비교하면 선진 사회는 확실히 신용 있는 대상에게 의리가 있었다. 그 순간 이후 이희재 입장에서 그들은 고객이 아니라 성자였다. 그렇다면 그들과의 거래는 비즈니스가 아니라 기도하는 마음으로 임하는 게 옳을 것 같았다. 이 사장은 그들에게 보답하는 뜻에서라도 앞으로는 더더욱 자식을 낳듯 제품을 만들고 출가시키는 심정으로 선적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그들이 보내준 자금을 시드머니로 하여 재 창업하는 정신으로 우성아이비를 재가동했다. 그 후 우성아이비와 거래한 바이어가 한 명도 이탈이 없는 것은 이 때의 마음가짐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96년 말의 일이었다. 위기에서 벗어났다 싶을 때 이희재 사장은 국내 거래의 원칙을 정했다. 한국은 아직 신용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절감했다. 절대로 어음을 받지 않았다. 현금 아니면 거래하지 않기로 했다. 반면 자신을 패배의 수렁에서 건져준 외국 바이어들에게는 진실과 성의를 다했고 처음 제안했던 대로 보람을 나누면서 신용을 다져나갔다. 존 그리샴의 논리대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것이요, 손자병법으로 치면 위기를 기회로 살린 셈이었다.
2년 후 외환위기가 왔다. IMF는 경악과 비탄을 몰고 왔다. 온 국민이 진퇴유곡에 빠졌던 시기. 그 시기가 우성 아이비에게는 하늘이 도운 시기가 되었다. 달러 환율이 천정부지로 치솟는데 우성이 거래하는 바이어들은 전혀 그 환율을 적용하지 않았다. 우성아이비에게는 기업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그게 첫 시련은 아니었다. 92년 창업 이후, 적어도 2년 동안은 하루하루 지나는 게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았다. 1억원의 창업자금은 1년도 안 가 바닥나고 말았다. 자금이 바닥나도록 뛰어다녔지만 희망의 손짓만 있을 뿐 손에 잡히는 주문은 한 건도 없었다. 네 명에 불과한 창업 직원에게 월급도 못 주는 상황이 가장 큰 고통이었다. 다음은 원부자재를 살 수 없는 것이었다. 샘플 작업조차 계속하지 못한다면 회사 간판을 내린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희재는 이렇게 일찍 시련이 오리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보트는 기계적 양산이 불가능한 핸드메이드 품목이었다. 눈썰미와 정성과 손재주 ― 이 세 가지만 가지면 만들 수 있었다. 원단을 선택하는 안목과 정교한 재단기술, 그리고 강력한 접착제만 잘 개발하면 세계 시장에 당당히 이름을 내놓을 수 있는 품목이었다.

대학 졸업 후 종합무역상사인 국제그룹에 들어가 해외지사 주재원을 포함 7년여 생활하면서 선진 세계의 조류를 살폈던 그는, 젊은 혈기를 유혹하는 3대 미래 산업으로 실버와 키즈, 레저를 꼽게 되었다. 레저의 으뜸이 수상레저임은 그 자신이 진작부터 모터보트나 래프팅에 심취했기에 익히 알고 있었다. 선진국일수록 사람들은 물에서 놀기를 좋아하여 수상레저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의 추리가 맞는다면 국민소득 10,000불이 삶의 질에 변화가 오는 분기점이고 레저의 흐름이 산과 들에서 물로 옮겨지는 전환점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오면 보트 만드는 사업을 하고 싶다는 꿈은 그렇게 그의 가슴에 심어졌다. 보트를 만드는 게 수공업에 속해 창업자본이 적게 든다는 것도 매력으로 작용했다.      
독립을 서두른 것은 아니었다. 이희재는 주어진 업무에 충실했고, 특히 해외시장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자 회사는 그에게 자꾸 해외근무만 맡겼다. 임기를 마치고 오면 또 다른 임무가 있었고, 내보내고, 또 명령을 냈다. 총각이었을 때는 감수할 수 있었다.
결혼 후 2주일 만에 한달 일정으로 해외출장을 가서 8개월 만에 귀국하기도 했다. 다시 아프리카 카메룬 지사로 출장명령을 받았을 때 그는 사표를 냈다.
능력이 있는 만큼 아시아자동차그룹의 자금기획부 임원으로 바로 자리를 옮겼지만, 첫 직장 같은 애착이 생기지 않았다. 경영수업이나 하자고 3년 정도 근무하다 나와 퇴직금 등 갖고 있던 재산 1억원을 다 털어 창업을 하고 말았다. 고무보트, 그것도 래프팅보트 생산을 주 아이템으로 정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보다 적극적으로 시장조사를 해본 이희재는 꿈에 부풀었다. 보트 시장은 자동차와 견줄 정도의 큰 시장이며, 프랑스의 조디악(Zodiac)社는 고무보트 하나로 년 간 매출이 1조원을 육박하는 규모였다. 수상레저에만 이용되는 게 아니라 모든 어선, 상선, 유람선 등 산업용 수요도 많고, 군함에도 필수적이었다. 매출액 기준으로 보면 프랑스 조디악, 포르투갈의 발리안트, 이탈리아 노바마린, 독일 바이킹, 일본 아킬레스 순이었다. 그러나 그 유명한 대기업도 핸드메이드에 의존하기 때문에 수량을 급격히 늘릴 재간이 없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모자랐다. 그리고 핸드메이드이기에 부가가치가 매우 높았다.
‘핸드메이드로써 고가 제품이라면 아직 한국에서 시도할 만 하다.’
이희재와 그의 뜻에 동조한 창업멤버들은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그들은 그들이 생산할 보트의 상표부터 정했다. 사전을 뒤져 찾아낸 10여 개의 단어 중 지벡(Zebec)을 선정했다. 돛대가 셋 달린 지중해의 작은 범선을 가리키는 단어인데 왠지 현대자동차가 포니(pony)란 상표로 세계 시장에 진출한 것과 같은 뉘앙스를 느꼈다. 그들은 ‘지벡’이 놓일 자리를 가늠해보았다.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이지만 1단계는 어디, 2단계는 어디, 하고 목표를 정했다. 1년에 1만 대만 생산한다 해도 수작업인 만큼 공장은 수 천 평 되어야 하고, 손재주 있는 종업원만도 수백 명 실히 있어야 했다. 보트 하나에 오십만 원씩 친다 해도 단숨에 연간 외형이 50억대에 이르는 중소기업이 될 수 있었다. 보트 한 대의 재료비는 아무리 후하게 쳐도 10만원 안팎이었다.
더 주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인천 작전동에 100평쯤 되는 공장을 임대하고 「우성아이비」라는 간판을 걸고 야망과 패기를 자축하는 샴페인을 터뜨렸다.
창업의 핵심 멤버는 4명에 불과했지만 재능과 역할이 뚜렷했다. 슬쩍 보기만 하는 것으로 그보다 좋은 제품을 만들어내는 뛰어난 눈썰미의 송기두와 우형식. 부품이나 액세서리 개발에 있어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백수현. 뛰어난 통계와 예측능력으로 관리의 귀재라 불리는 임이영이 그 핵심 멤버였다. 그들은 어떤 보트도 보다 훌륭하게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자신했다. 그러나 미처 생각지 못한 게 있었다. 아무나 소자본으로 할 수 있는 핸드메이드 업종에는 그것이 요구하는 노하우가 축적되어야 하고, 그런 노하우가 축적되기까지  고비 고비에 엄청난 시련의 함정이 있다는 것을 간과했던 것이다.
래프팅보트 생산은 벤치마킹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수치화 계량화 된 자료를 어디서도 구할 수 없었다. 벤치마킹을 통해 자체적으로 기술을 습득하고 숙련공을 길러내는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시작 단계에서는 송기두의 눈썰미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세계의 유명한 보트, 인기 제품은 다 사다 뜯고 찢어 디자인이며 원자재 분석을 하면서 시제품을 만들었다. 4개월 만에 10대를 만들어 성능을 테스트 해 보았다. 결과는 처참했다. 자체 테스트만으로도 성공작이 없었다. 모두 불합격이라는 판단이 서자 그들은 합의 하에 전량 폐기해 버렸다. 잘못된 부분을 모두 시정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것도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만들면 만들수록 보트는 더욱 어려웠다. 반년이 지나면서부터 그들은 긴장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지내다 보니 창업자금은 1년이 안 가 바닥나고 말았는데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였다.    


보트 제작을 마치 양복이나 만드는 것처럼 간단하게 생각한 것이 문제였다. 설계만 잘 하면 그대로 재단해서 바느질 대신 강력한 접착제로 붙이고 바람을 넣으면 되는 것 정도로 생각했다. 옷감이 아닌 고무 원단을 다루는 데 따른 특수성 등 노하우가 있겠지만 큰 틀에서 볼 때 형식이나 과정에 특별한 기술은 없을 것으로 여겼는데 막상 뛰어들고 보니 만만하지 않았다. 부닥치는 문제들이 하나 같이 고난도의 수학문제였다. 고무원단은 경사각도 위사각도가 몇이냐에 따라 늘어나는 신(伸)율에 큰 편차를 보였다. 공기는 원형으로 팽창하는 성질이 있어 이걸 풀지 못하면 바람을 넣었을 때 중간 중간이 불뚝불뚝 불거졌다. 갈라지는(Crack) 현상도 생겨났다. 가공 시 또는 사용 시의 외부 환경에 따라 나타나기에 오랜 기술축적이 아니면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구성물질이 다른 원단을 쓰면 뒤틀림 현상이 나타났고, 검은색에 가까운 고무가 자외선(UV)이 심한 곳에 두면 그레이로 변했다가 다시 노랗게 변했다.
알고 보니 5년 이내 변색하면 그것도 클레임 대상이었다. 선텐크림을 바르고 보트에 타면 손닿은 곳에 손자국이 남기도 하는데 그것도 안 되는 일이었다. 보트 안쪽에 대는 합판 하나도 그 재질 선택이 쉽지 않았다. 완벽한 방수가 되지 않으면 물에 젖었다 말랐다 하는 사이 갈라져 버렸다. 액세서리 하자도 클레임 대상이었다.
조건이 이렇게 까다로운 이유는 래프팅보트가 사람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동차보다 더 엄격한 안전 기준을 바이어들은 요구했다. 그랜트캐년의 급물살에서 래프팅보트를 즐기다 사고를 당했다고 가정하면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헬기로도 접근할 수 없는 험한 협곡이 많아 구조 방법을 찾기 힘든 것이었다. 보트에는 휴대품을 넣어둘 공간도 없기에 사고는 곧 생사의 위기였다. 따라서 예상할 수 있는 위험 요소를 모두 가정하여 안전테스트를 거쳐야 했다. 공기압은 220mb 이상 견뎌야 하고, 8명이 정원이라면 12명까지는 견뎌야 하고, 8명 정원보트의 부력은 1ton 이상을 견뎌야 하고, 전체 무게의 중심은 중간 이하에 있어야 하고, 높은 파도나 급한 물살에도 뒤집히지 않을 복원력, 즉 안정성(stability test)을 검증 받아야 했다.
세계의 유력 고무보트 회사들은 이런 점들. 고무보트가 갖고 있는 특성에 대한 노하우 자료로써 경쟁하고 있었다. 이희재와 창업멤버들은 그런 지식 없이 혈기와 야망만을 가지고 보트업계에 뛰어든 것이었다. 아무리 훌륭한 보트를 벤치마킹 한다 해도 그 노하우까지를 알아낼 수는 없었다. 실패하고 또 실패하면서 경험으로서 알아 낼 수밖에 없었다. 한 쪽에 결함이 있어 보완하면 다른 한 쪽에서 결함이 불거졌다. 쉴 사이 없이 머리를 내미는 두더지 게임처럼 여기저기 막고 대처하는 사이 1년은 금세 지나갔고 창업자금은 바닥나버린 것이었다. 고무보트 회사는 5년은 되어야 제품을 낸다는 말이 허튼 소리가 아님을 그들은 창업자금을 다 날린 후에야 깨달았다.
빈털터리가 된 그들에게 남은 건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오기뿐이었다. 명문대 출신의 수재를 자처하는 젊은이들이 모여 패기로 만든 회사가, 올바른 제품 하나 만들어내지 못하고 뜨거운 물에 손대듯 하다 물러난다는 것은 여간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었다. 당장 돈을 벌고 못 벌고는 나중 일이 되었다. 기업이 살고 죽는 것도 안중에 없었다. 보트시장 바이어들이 깜짝 놀랄 만한 물건을 만들어 놓고 그만 두어도 그만 두자는 데 의기가 모아졌다. 출퇴근 시간도 사라졌다. 아침 7시면 모였고, 밤  11시에 집에 가면 일찍 가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일곱 번째 10개의 보트를 또 완성하고 직접 사용해 보았다. 사용하면서 각자 알고 있는 상식을 150% 적용해  안전테스트를 가져본 결과 그동안의 하자가 현저히 개선되었음을 느꼈다. 1년하고 3개월만의 일이었다. 그들은 비로소 환호를 질렀다. 이제는 팔 수 있는 보트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들의 눈빛에 다시 희망이 어른거렸다. 이제 필요한 것은 주문이요, 주문을 받기 위해서는 세상에 알리는 작업이 필요했다. 이희재는 세계 유수한 도시에서 열리는 국제레저용품전시회나 본격 보트 쇼에 대한 정보를 KOTRA를 통해 얻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칠레 산티아고, 프랑스 파리 등 전시회마다 참가하여 마케팅을 벌렸다. 한 해 동안 아프리카에서부터 알래스카 뉴질랜드 등 15개국을 돌아다니면서 바이어를 만났다.
그러나, 기술력이 생겼다고 희망을 가졌던 것도 잠시였다. 본격적으로 바이어를 상대하기 시작하니 보트 시장의 불문율을 알게 되었다. 샘플이 오가기 시작해서 메인 오더를 받기까지 기간이 짧아야 1년 6개월 걸리는 시장이었다. 이희재는 더욱 깊은 시련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최소한의 자산이라고 할만한 기술력이 생겼을 때, 더 이상 빚도 얻을 수 없어 월급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3달치가 밀리니 숙련공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지금 그들을 잃으면 그나마 축적한 자산조차 물거품이 되고 마는 일이었다. 이희재는 앞 뒤 볼 것이 없었다. 어쩌다 이런 사업을 시작했나 후회할 겨를도 없었다. 숙련공이 견디지 못하고 나간다 하면 길거리에서 막고 큰 절 하며 두 달만 더 버텨 달라 사정했다. 결혼한 직원은 시간을 쪼개 가족까지 설득해야 했다.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인간성에 호소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희망의 손짓이 있을 때마다 그 희망을 담보로 여기저기서 융통해 끌어나갔다. 그런 능력에도 또 한계가 왔다. 주문을 받든, 신용장을 받든, 보트가 팔릴 조짐이 있어야 버틸 수 있었다. 5달치나 밀렸을 때가 있었다. 더 미룰 낯이 없어 생산과 상관없는 마지막 재산인 타고 다니던 지프 록스타를 팔아 350만원을 챙겨들고 들어갔다. 직원들은 한 자리 모여 회의를 한 듯 했다. 이희재를 본 송기두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전원이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그리 아십시오 의리도 좋지만 생활이 되어야지요? 애들 유치원 못 보낸 지가 3개월도 넘었습니다.”
“……?”
이희재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자기 역시 첫째 놈 강식이가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 유치원을 1년이 되도록 못 보내고 있었다. 늦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93년 2월의 일이었다. 이희재는 차 판 돈을 탁자 위에 놓으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어쩌자는 거야. 고무보트를 만드는 우리에겐 홍수가 났을 때 한탄강으로 래프팅 간다는 정신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요트 성능을 태풍 속에서 실험하는 거 몰라? 난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우린 지금 가장 악조건 속에서 자신을 테스트하고 있어. 생각을 바꾸면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완성해 가는 하나의 기회일 거야. 조금만 더 참자. 스페인 바이어가 공장을 방문하겠다고 했어.”

운명을 가른 안전 테스트

그는 엠메리토(Mr. Emerito)였다. 해외 보트 쇼에서 잠시 상담한 적이 있는 스페니쉬 바이어였다. 한국 나이키(화승신발)를 대량 수입해 가는 큰손이면서 한편에선 까다롭기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까다롭다는 표현에는 약간의 거부감 같은 게 포함되어 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바이어로서의 오랜 경륜에서 정리된 수칙과 신념을 철저히 지키는 완벽주의자였다. 단지 하나 그에게 약점이 있다면 감정에 약하다는 것이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인간미(人間味)이기도 했다.
우성아이비를 방문한 엠메리토는 우선 공장의 외형이며 생산시스템이 너무 열악한 데 놀라는 눈치였다. 회사의 연륜이 2년 정도라는 점도 경계하는 눈치였다. 고무보트를 세밀하게 살펴 본 엠메리토는 말했다.
“이만하면 제품은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고무보트는 생명에 직결되는 제품입니다. 부력, 공기압, 무게 중심, 파도나 급물살에의 적응력 등 안전 테스트를 해야 합니다. 지금은 겨울이니 5월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 테스트를 하고 결정합시다.”
그는 안전검사를 앞세웠다. 세계 보트시장을 두루 알고 있는 그들의 상식에서 한국은 아직 고무보트 생산 불가 국이었다. 그건 삶의 질이 격을 달리한다는 국민소득 1만 불 이상 시대에 등장하는 수상레저의 꽃으로, 고도의 기술과 인간 존중 정신의 조화 물이었다. 한국인들 끼리야  뭐라고 자화자찬하든, 밖에서 볼 때 한국은 중진국 지위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국가였다. 그런 수준에서 고도의 기술과 선진화 된 기업정신이 요구되는 보트를 생산하려면 최소한 5년 이상의 연구 개발 실적이며 기술축적은 있어야 하는 게 업계의 불문율이었다. 프랑스의 조디악(Zodiac)社는 1896년에 창업하여 고무보트만 100년 넘게 생산하고 있고, 대부분의 회사가 50년이 넘는 노하우(Know-How)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의 인식에서 미국 독일 프랑스 스페인 덴마크 일본 등에서나 가능한 산업이었다. 다만 여러 가지 조건에서 볼 때 조만간 한국에서도 보트를 생산하는 기업이 등장할 것이라는 예상은 할 수 있는 때였다. 만약 한국에서 쓸만한 보트가 생산된다면, 그래서 그걸 먼저 발견한다면 일시적으로 싼값에 구매하여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다는 메리트는 있었다. 하지만 시행착오를 수없이 겪어야 비로소 제품다운 제품이 나온다는 점도 알고 있기에 더 조심스럽기도 했다. 그런 시점에서 바이어들은 한국 정보에 귀를 기울였고, 전시회마다 부지런히 쫓아다닌 우성아이비의 보트를 눈여겨보게 되었고 반신반의하며 찾아온 것이었다.  
“5월에… 안전테스트를 하자고요?”
이희재는 반문했다. 고무보트의 시즌은 6월부터이다. 5월에 테스트를 통과한다면 금년은 꽝이다. 내년 시즌을 봐야한다. 그것은 회사를 더욱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말이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이희재는 침을 꿀꺽 삼키고, 비장한 제안을 했다.
“5월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괜찮다면 내일 원하시는 안전 테스트를 해 보이겠습니다.”
엠메리토의 눈은 둥그래졌다.            
“어떻게 말입니까? 여긴 검사할 장비도 시스템도 없지 않습니까?”
“장비나 시스템보다 직접 현장, 아예 한강에서 해보는 안전 검사가 더 낫지 않습니까?”
“물론이죠.”
“내일 오후 2시로 하지요. 한강입니다. 성산대교 남단에서 만납시다.”
“좋습니다. 기대해 보겠습니다.”
엠메리토는 믿지 않는 듯 했다. 이희재가 너무 자신 있게 말하니 어디 한 번 보자. 하는 투였다. 열악한 조건에서 훌륭한 보트를 생산해낸 그 수수께끼의 답을 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엠메리토가 공장을 떠난 뒤 이희재는 전원을 한 자리에 불렀다. 이희재는 말했다. 절망은 있을 수 없다. 하는 데까지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손을 들자. 여러분도 알다시피 고무보트는 철저한 안전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 엠메리토는 바이어 중에서도 큰손이다. 다행히 그가 우리 보트를 마음에 들어 한다. 우린 이제야 비로소 자신 있는 제품을 만들어 냈다. 문제는 안전테스트다. 그는 5월에 안전테스트를 하자고 했다. 그러면 금년시즌을 또 놓친다. 우린 지금 내년시즌까지 기다릴 형편이 못 된다. 그래서 내일 한강에서 안전 테스트를 하자고 했다. 우리 몸을 던져서 해보자는 생각에서 그랬다. 아이디어를 모아보자.
백수현은 날씨가 추운 것을 걱정했다. 늦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때였다. 어떤 방법으로 진행할지 모르지만 무리를 하다 사고라도 나면 엎친 데 덮치는 격 아니냐고 걱정했다. 송기두는 달랐다. 그의 머리에선 이미 시나리오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안전테스트를 성공적으로 해내지 못하면 우린 파산이니 죽기 살기로 해내자고 했다.  
제일 큰 문제는 부력테스트였다. 8인승 래프팅보트는 최소한 800Kg를 견뎌야 한다. 이 부력 안전테스트를 위해서 1,000Kg의 무게는 준비되어야 한다. 이걸 어떻게 해결할까. 임이영이 말했다. 사람의 체중을 70Kg으로 잡아보자. 15명을 동원하면 되지 않을까. 어떻게 15명을 동원할까. 이희재가 말했다. 아내와 아들까지 데려오겠다. 친구들에게 말하면 도와줄 것이다. 송기두가 말했다. 그럼 다음 문제다. 8인승 보트에 15명이 콩나물처럼 서 있을 수 있을까. 잡을 것이 없다. 그냥 서 있다가 중심을 잃으면 강물에 빠질 수 있다. 임이영이 방법을 바꾼다. 그냥 서 있는 건 위험하다. 포개 앉으면 된다. 날씨를 걱정했던 백수현이 생각을 돌렸다. 아이디어가 있다. 체중계를 가져가 현장에서 몸무게를 달자. 그 몸무게를 크게 써서 목걸이처럼 걸자. 그 몸무게를 합산해서 필요한 테스트 중량만큼의 조를 편성하자…  
그들은 그렇게 내일 일을 준비했다. 파도에 적응력. 무게 중심 테스트. 승선 인원의 안전도. 총 부력. 그리고 공기압 테스트. 복원 능력. 이렇게 5가지 테스트만 성공적으로 거치면 되었다. 회의가 진전될수록 차츰 신이 났다. 그들은 테스트를 넘어 한강을 래프팅하고 있었다. 항상 매사에 철저한 백수현이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그런데 엠메리토가 그런 원시적인 테스트에 동의할까요?”
그건 그랬다. 이런 식의 테스트는 눈부신 과학문명을 외면한 원시적 방법이었다. 한낱 해프닝으로 보일지 모르는 일이었다. 해프닝으로 보이면 끝이었다. 당장의 위기도 문제지만, 보트 업계 큰손인 그에게 웃음거리가 된다면, 세계시장에 우리의 이야기가 웃음거리로 번질 것이 명백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약한 소리하지 마. 현재로선 대안이 없어. 부딪쳐 보는 거야. 인간적인 호소를 해보는 수밖에… 이희재는 말했다. 우린 자식을 만들었다. 이제 사돈을 맞는 거다. 혼인이 잘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자. 엠메리토를 첫 사돈 삼는 거다. 그를 놓치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모른다. 기다릴 수 있을 지도 모르고.    
모두 준비에 들어갔다. 백수현의 제안대로 체중계를 준비하고, 몸무게를 크게 표시할 수 있는 목걸이를 준비했다. 제품마다의 사양, 유명 브랜드의 모터엔진 중량이 얼마인지 하는 자료도 챙겼다. 균형 감각이 발달한 인간이 추를 대신하는 만큼 테스트 중량을 기준보다 1.5배 혹은 2배로 높이기로 했다. 테스트용 보트는 4개를 준비했다.            


이튿날이 되었다. 약속시간은 2시였지만 멤버들은 10시에 모였다. 5℃를 밑도는 추운 날씨에 바람까지 불어 체감온도는 영하였다. 강물도 차가웠다. 부지런히 4개의 보트에 공기를 주입하고 점검을 해보았다. 11시가 되니 가족과 친구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도대체 무얼 도와달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백수현이 나서서 한 사람 한 사람 몸무게를 잰 뒤 몸무게를 적어 목에 걸어 주었다. 실험에 신속히 대처하기 위해 몸무게를 합산, 조를 편성했다. 1조 500Kg. 2조 800Kg. 3조 1톤 200Kg 식이었다. 준비를 마치자 예행 테스트에 들어갔다. 먼저 부력을 실험했다. 8인승 래프팅 보트에 15명이 올라탔다. 보트는 넉넉히 버텨 주었다. 다음은 기울기 검사를 위해 5명은 내려오고 10명이 2대 8로 왼쪽에 치우쳐 보았다. 이번에도 보트는 잘 견뎌 주었다. 아예 10명이 다 한쪽으로 치우쳤을 때를 예상해 보기로 했다. 신호와 동시 10명이 한 쪽으로 옮기자 보트는 기우뚱했다. 그러나 뒤집히지는 않았다. 그런데 순간 한 명이 중심을 잃고 차가운 한강 물에 텀벙 빠지고 말았다. 보트를 직접 만든 우형식으로 수영도 못 하는 친구였다.  
이희재와 임이영이 재빨리 손을 내밀어 그를 끌어올렸다. 그렇게 그를 건져내는 과정에서 그들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보트가 기울었다 펴졌다 하는 사이 물이 가득 채워졌음에도 견디는 것이었다. 대단한 부력이었다. 보트 면적상, 물이 가득 고이면 그 무게만도 2톤은 넘었다. 표준의 3배를 그들 보트가 거뜬히 견뎌주는 것이었다.  
우형식을 건져내고 뭍으로 나와 모두 물끼를 닦아내고 있는데 한강관리사업소 요원이 경찰과 함께 다가와 문책하듯 물었다.
“아니 대체 여기서 뭐들 하시는 겁니까.”
이희재가 나서서 자초지정을 설명했다. 그들은 알아듣질 못했다.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당신들 마음대로 한강에서 그런 테스트를 합니까. 신고도 없이? 그들은 당장 철수를 요구했다. 시간은 1시를 넘고 있었다. 이희재는 사정했다. 철수하겠소. 그러나 시간을 주시오. 조금 있으면 내가 말한 스페인 사람이 올 것이요. 무역시장에서 큰손으로 알려진 바이어요. 그런 사람이 오면 당신들도 믿을 것 아니요. 이건 우리 회사 사활이 걸린 일이요.
관리소 요원이나 경찰에게 그런 사정이 통할 리 없었다. 보시오. 그건 당신들 사정이고, 우린 사전 신고 없는 물놀이를 계속하게 할 수 없으니 당장 돌아가세요.  
옥신각신 하는 사이를 임이영이 끼어들었다. 그는 한강관리소 요원에게 거친 목소리를 쏟아냈다. 우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겁니까. 한강에서 좋은 일 좀 하겠다고 고집하면 어쩔 겁니까. 아시다시피 한강은 오염이 심해 물놀이가 금지된 지 오랩니다. 우리가 물놀이하고 있습니까. 하나의 회사 문제가 아니에요. 고무보트 하나 못 만드는 우리나라 산업의 명운이 걸린 일입니다. 한강관리사업소에 계신다니 잘 아시겠군요. 고무보트며 구명조끼, 잠수용품, 안전장비 중에 국산이 뭐 하나나 있습니까. 모두 수입품 아닙니까. 비싼 값에 수입하다보니 용품이 넉넉하지도 못하겠죠. 그런 걸 국산화하는 작업을 우리가 하고 있는 겁니다. 무지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여기 모인 사람 모두 명문대 출신이요. 산업이 없으니 테스트할 시설이나 장비도 없어 이렇게 원시적으로 해보려는 겁니다. 나라를 위해 개발하고 외국에 팔려고 이러는 거고 조금 있으면 바이어가 여기 나타나는 걸 당신들도 보게 될 거라고 하는데 당장 철수하라고 난리 치는 겁니까. 우리는 목숨을 걸었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훼방을 놓고, 이렇게 옥신각신하는 꼴을 보여서 나라 사업을 망쳐놔야 합니까. 고발하려면 어서 가서 하시오. 우린 테스트를 해야만 하오.
임이영이 막 쏟아 붓자 한강관리소 요원은 한 발 물러났다. 그러나 경찰은 물러나지 않았다. 당장 한 사람이 물에 빠졌지 않습니까. 그가 심장마비라도 일으켰다면 그런 게 사곱니다. 그런 걸 보고 있으란 말입니까?
송기두가 나섰다. 제발 좀 봐주시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나온 직원들과 그 가족들이오. 우리가 하려는 것은 물놀이가 아니라 안전테스트요. 우리가 만든 보트가 얼마나 안전한 가를 테스트하자는 것이니 위험할 까닭이 없지 않소.
경찰관은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내 임무만 수행하면 그만입니다. 신고 없이, 더구나 이 추운 날 이런 테스트는 위험합니다.
그렇게 옥신각신 하는데 엠메리토가 ‘하이’하고 손을 흔들며 나타났다. 통역을 대동하고 온 그는 경찰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오오, 경찰관까지 입회를 시켰군요. 감사합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엠메리토의 그 한 마디가 분위기를 확 바꿔준 것이다. 엠메리토가 손을 내밀자 경찰은 어색하게 그 손을 잡았다. 옆에 있던 이희재가 얼른 말했다. 그 옆에 분도 입회인입니다. 한강을 관리하는 관리소 요원입니다. 엠메리트는 또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오오, 반갑습니다. 그들 둘의 표정은 복잡하게 변하고 말았다. 이희재는 눈을 찡끗하며 재빨리 말했다. 우선은 도와주시오. 나중엔 마음대로 하시고.
함께 온 통역의 손엔 비디오 카메라가 들려있었다. 엠메리토는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많은 분이 오셨군요. 현장 안전 테스트라 생각하니 기록이 필요할 것 같아 비디오카메라를 가져 왔습니다. 이희재 쪽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들은 보여주는 데만 급급하여 기록할 생각은 못했던 것이다. 테스트는 기록이 있어야 했다.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객관적 증거가 될 수 없었다. 이희재는 곧 테스팅에 들어갔다.
자 시작합시다. 먼저 보트의 부력부터 테스팅을 합시다. 10인승 보트는 최소 800Kg을 견뎌야 합니다. 보여 주십시오. 그러자 송기두는 2조! 하고 외쳤다. 2조 12명이 일렬로 섰다. 이희재는 엠메리토를 그 앞으로 데려와 가슴에 붙인 숫자를 설명했다. 이것이 각각의 웨이트입니다. 하고 한 사람을 시범적으로 체중계에 올라서게 했다. 보세요. 72Kg이 정확하죠? 오오, 맞습네다. 엠메리토는 재미있어 했다. 통역은 그 광경을 열심히 비디오에 담았다. 72Kg+67Kg+81Kg+62Kg… 이희재의 아들까지 끼어 13명이 보트에 올라탔다. 임이영의 아이디어대로 포개 앉으니 안전했다. 보트를 저어 큰 원을 그리며 한바퀴 거뜬히 돌고 오니 엠메리토는 만족해 했다.
부력테스트, 승선인원 검증, 무게의 중심점 확인은 그런 식으로 테스트가 가능했다. 공기압 테스트는 측정기기 있어 또한 무난했다. 220mb가 합격선 인데 우성아이비의 보트는 590mb까지를 견뎌 냈다. 남은 건 Stability test인데 한강에서 보여줄 방법이 막연했다. Stability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비행기나 선박의) 안정성 복원성이라고 풀이가 되어 있다. 이를 고무보트에서는 파도나 계곡의 급물살에 휩쓸렸을 때에 비교하여 가장 중요한 test의 하나로 치고 있는 것이다. 이걸 호수처럼 잔잔한 한강에서 어떻게 테스트한단 말인가.
고민하고 있을 때 임이영이 손뼉을 탁 치며 나섰다. 조금 전 물에 빠진 우형식 곁으로 가 다시 한 번 물에 빠질 수 있느냐를 묻고 난 뒤 이희재와 엠메리토 앞에 섰다. 그는 말했다.
거친 파도를 타고 있는 듯 연기를 해 보이겠습니다. 승선자들이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고 때론 물에 빠져가면서 보트의 안정성과 복원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800Kg 1ton이 아니라 1.5ton 이상이 올라타겠습니다. 보트에 물을 담으면 2ton 이상이 됩니다. 그 정도 중량이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다 보면 테스트가 충분할 걸로 압니다.
오오, 굳 아이디어입니다. 그런 정도면 충분하겠습니다. 엠메리토는 감동하고 있었다.
임이영은 그 자리에 모인 전원을 보트에 올라타도록 했다. 모두 합하니 1,380Kg 이었다. 자신도 타니 1,445Kg. 한 사람이 더 필요했다. 그는 경찰관에게 부탁했다. 좀 도와주시오. 은혜를 갚겠소. 그러자 경찰관도 올라타 주었다. 네 명이 노를 저었고 어른 6명이 왼쪽으로 쏠렸다 오른 쪽으로 넘어졌다 를 반복했다. 보트는 뒤집힐 것 같다가 바로 눕고 뒤집힐 것 같다가 바로 눕기를 반복했다. 몇 번 그렇게 하다보니 승선자들의 생각이 달라졌다. 안 뒤집히는 것을 보여주는 게 목표인데 과연 어떻게 하면 뒤집어지는가를 실험하는 듯 했다. 그들은 정말 큰 파도를 타고 있는 듯, 보트를 뒤집어보려고 안간힘을 다 했다. 30분 이상 땀을 뻘뻘 흘리며 노력했으나 보트는 뒤집어지지 않았다. 아무도 물에 빠지지도 않았다.
실험을 끝내고 뭍에 오르자 엠메리토는 아낌없이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원더풀 원더풀. 훌륭한 테스트였습니다. 아주 만족한 테스트였습니다.    


본국으로 돌아간 엠메리토는 한 달 후 보트 100개를 주문했다. 벼랑 끝에 선 우성아이비를 살려준 것이었다. 93년 가격으로 7천만 원이었다. 이희재, 임이영, 송기두, 백수현 등은 그 주문서를 받자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주문다운 주문은 처음이었다. 모두들 그것을 첫 아이를 얻은 기쁨에 비유했다. 인생의 일 단계 성취로 여겼다. 엠메리토의 주문서 끝에는 편지가 있었다.
“귀하의 회사를 방문하여 받은 감동을 직접 리포트로 작성하였습니다. 회사의 많은 임직원 및 동료들과 그 감동을 나누었습니다. 우린 그 리포트를 공인검사기관인 ‘수상용품 안전검사소’에도 보내주었습니다. 검사소에서는 스페인 역사상 처음으로 귀사 제품에 대하여, 공식적인 재 테스트를 면제해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다만 귀사에 우선 100개의 고무보트만 주문하는 것은 첫 거래이기 때문임을 양지바랍니다.”
엠메리토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엠메리토는 감동을 했을 때는 큰 희망을 주었고, 조금이라도 방심하여 실망을 주면 클레임이라는 채찍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그러면서 기업인은 매사에 정성을 다해야 한다. 한 치의 오차도 알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 늘 겸손하고 진실해야 한다. 등등의 기업가 정신을 이희재와 우성아이비에 심어주었다. 그를 통해 이희재는 ‘고객만족에서 고객감동, 고객감동에서 고객충성’의 경영철학을 가슴에 새기게 되었다.  
새벽 6시의 계약

우성아이비는 활기를 찾았다. 주문서를 담보로 은행에서 융자를 얻고 신문에 광고를 내어 일손을 모집했다. 세계 굴지의 스페인 상사가 주문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업계에 뉴스가 되었다. 우성아이비는 기회를 십분 활용했다. 임이영은 경영 차원에서 주문서를 활용, 유망중소기업 지정이나 세계 일류화 기업 지정, Q마크. ISO9002 인증 등 기업으로서의 제반 자격 갖추기에 나섰고, 송기두는 생산 차원에서 모든 데이터를 재정리하기 시작했고, 백수현은 그의 특기를 살려 부품 액세서리의 국산화를 발 빠르게 실현해 갔다. 이희재는 이희재대로 업계에 널리 입소문을 냈다.
두 달 만에 보트 100대는 완성되었다. 완성했다는 자체만으로 그들은 성취감에 도취했다. 첫 선적, 모든 직원들의 눈가에 물기가 가득했다. 보트를 실은 트럭이 공장을 떠나고 나서도 그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두 달 동안 활기차게 일했던 공장은 일시 휴식에 들어갔다. 기대에 부푼 휴식이었다. 보트를 받은 엠메리토가 틀림없이 새로 주문서를 보내줄 것 같았다. 그때는 최소한 컨테이너 단위 이상이 될 것이다. 그 때를 대비해서, 일시적 휴식은 각종 데이터를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보트를 본격적으로 생산하다보니 미처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원단 개발이 첫 번째 과제였다. 한국의 보트생산은 이제 시작이라 보트 원단으로서의 테스트는 전무한 상태였다. 공기를 넣었을 때 나타나는 뒤틀림 현상에다 뜨거운 태양열을 받았을 때의 크랙 현상 등이 두드러진 문제였다. 공기는 원형화하려는 성질이 있어 조금만 재단을 잘못하거나 접착이 부실하면 여지없이 불거지고 뒤틀리곤 했다. 터질 듯 빡빡하게 공기를 주입한 후 뜨거운 태양열에 노출되면 표면온도가 70℃, 80℃까지 올라갔다. 바늘구멍으로 댐이 무너지는 것과 같이 한 치의 오차로 순식간에 불량품이 되어버리는 게 보트였다. 두 번째 과제는 접착제였다. 원단의 신율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원단과 원단이 하나로 응고될 수 있는 강력한 접착제가 필요한데 아무 데서도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자체적으로 이리 배합해서 실험하고 저리 배합해 찾아내는 도리 밖에 없었다. 셋째는 숙련공을 배출하는 일이었다. 보트 생산은 자동화 기계화가 불가능한 품목이어서 품질 경쟁이 곧 숙련공을 얼마나 배출해서 확보하고 있느냐가 열쇠였다.

  
스페인에서의 재주문을 기다리며 그런 작업을 하고 있는 데 미국인 바이어의 전화를 받았다. 보트 상담을 위해 왔다며 우선 ‘부평호텔’에서 만나기를 원했다. 공장에서 도보로 15분쯤 되는 거리였다. 이희재는 카탈로그와 데이터 자료를 들고 부평호텔로 갔다. 올리버 이큐이먼트(All River Equipment)社의  ‘웨인’ (Mr. Wayne)이라고 자기를 밝힌 그는 스페인과 거래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왔다고 했다. 몇 마디 나눠보니 엠메리토 못지않은 큰손이었다. 이희재는 성심 성의껏 상담에 임했다. 우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제품 하나하나를 자식이라고 생각하는 정신이 있다. 파는 게 아니라 출가시키는 것이다. 고객을 성자로 여기며 신용을 밑천 삼아 해 나가고 있다. 우리의 목표는 고객을 감동시키자는 것이다. 믿고 주문해 달라. 고 했다. 그러면서 그때까지 정리된 데이터를 보여주며 주먹구구로 만드는 게 아님을 역설했다. 웨인은 잘 찾아온 것 같다고 흐뭇해했다. 시종 고개를 주억대면서 좋은 파트너가 되어 보자고 손을 잡고 흔들었다.  
그러나 이희재의 안내로 100평정도 되는 생산시설을 둘러본 웨인의 안색은 변했다. 엠메리토가 그랬던 것처럼 너무 규모가 작고 시설이 열악한 것에 실망한 것이다. 호텔에서 한참 의기가 투합해 흐뭇해했던 것을 후회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렇다고 그냥 가기도 미안해진 상태였다. 웨인은 마지못한 듯 방문 예의상 그가 구매하고자 했던 보트 도면을 하나  던져주고 갔다. 도면을 보고 잘 만들어서 보내주면 검토하겠다며 호텔로 돌아갔다. 오늘은 늦었으니 자고 내일 간다고 했다.  
그의 실망한 표정을 본 사람들은 모두 물 건너 간 상담이라고 했다. 이희재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지푸라기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때인데다 마침 일감이 궁했던 그들이었다. 도면을 보자 곧 작업에 착수했다. 새로운 보트를 접하다 보니 모두들 재미있어 밤을 새워 그 보트를 만들었다. 이상하리만큼 일이 잘 풀렸다. 신율의 오차도 작았고, 앞뒤의 보트각도도 정확했다. 접착력도 뛰어났고, 뒤틀림도 전혀 없었다. 운이 들려고 그랬던 것만 같다. 그러나 그것이 기적 같은 결과를 낳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시차 때문에 잠을 설친 웨인은 새벽 4시가 되자 조깅을 할 생각으로 호텔을 나왔다. 부평은 처음이라 지리를 알 수가 없었다. 이곳 저곳 기웃거리다 어제 가 보았던 우성아이비가 있는 곳으로 방향을 정하고 뛰었다. 한참 달리던 그는 우성아이비 공장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이른 새벽에 무슨 일을 하는 가 궁금한 생각이 들자 웨인은 실례를 무릅쓰고 공장 문을 두드렸다. 공장에 들어서는 순간 그는 입을 벌리고 말았다. 어제 만났던 공장 간부가 모두 둘러서 있는 가운데, 어제 오후에 던져놓고 간 도면이 벌써 보트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었다. 최소한 일주일 이상 걸려야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제품이었다.
잠시 자기 눈을 의심했던 웨인은 곧 진정하고 샘플의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검수했다. 훌륭했다. 아무 곳에도 하자가 없었다. 웨인은 감동에 겨워 젖은 눈으로 이희재를 보며 말했다. 어제 나는 생각을 잘못 했었소. 이런 실력과 성의라면 주문을 내겠오. 지금 계약서를 씁시다. 웨인은 그 자리에서 미화 50만불 어치를 주문했다. 계약서에 서명을 막 마쳤을 때 시계가 울렸다. 여섯 점이었다.  
미화 50만불. 우리 돈으로 6억5천만원. 새벽 6시의 계약은 우성아이비의 신화가 되었고, 창업멤버는 신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아직 손에 쥐어지는 것은 없으나 기분은 구름 위에 올라앉은 상태였다. 적어도 6개월 물량은 주문을 확보한 것이다. 창업 1년 반만에 이룩한 성과치고는 자랑할만했다. 공장도 늘리고 인력도 충원해서 열심히 생산에 임했다. 생각 같아서는 척척 만들어 질 것 같은데 핸드메이드 제품은 역시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즐거운 걱정도 했다. 이렇게 정신없는 때에 엠메리토가 추가 주문을 하면 어쩌지?
며칠 후 엠리토에게서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이희재는 물론, 임이영 송기두 백수현 우형식이 모두 자기 눈을 의심했다. 보낸 보트에 100% 클레임을 건 것이다. 클레임청구서에서 그는 책임자가 스페인을 방문해 하자를 보상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어떻게 이럴 수가…“
식은땀이 솟고 머리털이 곤두서는 일이었다. 장시간 회의를 거듭하며 원인을 추적해보았지만 짐작도 할 수 없었다. 100대에 대한 클레임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소문이 돌면 미국인 바이어의 태도는 어떻게 바뀔지 두렵기까지 했다. 만약 이러한 클레임이, 미국인 바이어가 방문하기 전에 전해졌다면 우성은 그 자리에서 풍비박산되어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그런 점에서 보면 아직 운은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정면 돌파, 고객에 충성… 이런 단어밖에 머리 속에 없는 이희재는 주저할 것도, 지체할 것도 없이 송기두를 대동하고 스페인으로 날아갔다. 그렇게 ‘즉시’ 날아간 것에 엠메리토는 또 한번 감동했다. 화를 내려고 했던 마음을 바꾸어 아주 반갑게 그들을 맞아주었다. 100% 클레임을 놓은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친절을 보였다. 그는 핵심을 말했다.
“거듭 하는 말이지만 보트는 생명과 직결되는 겁니다. 액세서리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들이 보낸 보트의 깔판(합판)은 방수처리가 안 되어 있습니다. 젖었다 말랐다 하는 사이 모두 갈라졌습니다. 보트 생산을 계속하려면 이런 일을 결코 작은 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클레임 사건은 서로의 신뢰를 다지고 애정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인간 존중 정신이 특히 필요함을 강조했다.  
“기업하는 사람은 남을 배려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정신이 일반 사람보다 몇 배 강해야 합니다. 그런 정신을 갖추려면 어려운 이웃을 도와보면 됩니다.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죠. 그 과정에서 인간은 다시 태어납니다. 모두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터득하면 신용의 질도 달라지게 됩니다. 경제학자들은 1만불 소득이 그런 변화를 갖게 하는 전환점이라고 합니다.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아픈 곳을 찌르는 말도 빠트리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 사람에게선 그런 여유가 잘 보이질 않아요. 모두 급하고 저밖에 모르고… 한국인의 1만불 소득은 보편적인 기준과 다른 것 같아요. 인간 존중 정신이 결여된 소득향상은 의미가 없습니다.”
거래를 해봐도 그렇다고 했다. 팔기 전에는 갖은 수단 다 보이다 하자가 걸리면 묵묵부답인 경우를 수없이 당했다고 했다. 한국의 1만불 소득이 거품이라면 조만간 큰 위기가 올 것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이번 일은 작은 하자였지만 첫 거래이므로 경영자세를 테스트하기 위해 100% 클레임을 걸었다는 실토도 했다.    
이희재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경영다운 경영 수업을 받는 기분이었다. 엠메리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그 자체로 가르침이었다. 넓은 시장에서 많은 사람을 상대해본 경륜이 배어 있었다. 엠메리토는 이희재의 그런 자세가 보통의 한국인 같지 않다며 친구가 되자고 했다. 그는 보트 생산에 관한 많은 체험을 들려주고 보여주었다. 특히 송기두에게는 해외에서의 선진기술 연수를 알선해 주기도 했다.
    
유대인의 독특한 상술

우성아이비의 분위기는 일신되었다. 세계적 바이어들이 우성의 보트를 주시하는 가운데 활력 있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 번은 ‘리모르(Mr. Limor)’란 이스라엘 바이어가 수소문하여 찾아왔다. 물론 유대인이었다. 그는 방문하자마자 제품보다 생산시설을 보고 싶어했다. 현장이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는 터여서 이희재는 자신 있게 생산시설을 보여주었다. 완제품도 보여주고 한강에서 안전 테스트하던 테이프도 보여주었다. 엠메리토에게 보여주던 그 현장이었다. 이희재는 그때의 일을 교훈이자 자랑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리모르’는 다른 바이어와 많이 달랐다. 그는 흡족해 하면서도 이상하게 값을 묻지 않았다. 값을 묻지 않는 건 제품에 흥미가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세부적인 것을 계속 물었다. 액세서리는 어디 부품을 쓰느냐. 그 부품의 가격이 얼마냐. 한 달 보트 생산능력이 얼마나 되느냐, 몇 명이서 그만큼을 만드느냐…
아차, 하고 깨달은 것은 이미 늦은 때였다. 그는 마치 사업주나 되는 양 원가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로만 듣던 유대인의 놀라운 상술을 눈앞에서 실감하는 자리였다. 받아들이기에 따라 그건 월권이요, 얄미운 짓일 수도 있었다. 자기 방식대로 원가계산을 마친 그는 그제야 값을 물었다. 이희재가 가격표를 내밀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500대라는 수량을 앞세우며 그의 방식대로 역산한 구매가격을 제시했다.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이익금이 가산된 합리적 가격이었다. 이희재는 망설였다. 이스라엘과 첫 거래인 만큼 계약을 맺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이걸 받아들이는 것이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생각해야 했다. 가격이 한참 낮았던 것이다.
종합상사의 무역일선에서 잔뼈가 굵은 이희재는 세계가 얼마나 좁은지 익히 알고 있었다. 그가 리모르에게 얼마에 팔았다는 것은 아무리 서로 비밀로 하자해도 비밀이 될 수 없었다. 엠메리토나 웨인 등 바이어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사람에 따라 값이 달라진다고 알려지면 신용이 생명인 국제사회에서는 끝이었다. 장시간 고민 끝에 이희재는 거절하고 말았다.
리모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가격에 팔지 않겠다고 하는데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리모르는 자기를 납득시켜 달라고 했다. 논리와 객관성을 앞세우며 오히려 이희재를 설득하려 했다. 원자재 값이 얼마요, 부자재 값이 얼마고, 인건비가 얼마요, 액세서리 값이 얼마. 여기에 이런 저런 공과금 이익금 다 합쳐도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투였다. 리모르는 값을 깎으려는 것이 아님을 설명했다. 국제시장에서 수긍할 수 있게 합리적인 원가 계산서를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그 나라 수준의 국민소득이 감안되어야 했다. 주먹구구로 세계 시장에서 보트 값이 얼마 하니 우리 보트도 같은 값을 내라는 것은 부당하다고 따졌다.  
답변에 궁색해진 이희재는 문득 브랜드 값을 떠올렸다. 아직 세계 시장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지벡’이란 브랜드를 만들고 알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설명했다. 그 증거로 세계 유명 메이커에 보낸 홍보자료, 세계 주요도시에서 열린 레저용품쇼, 보트쇼에 참가한 실적 등을 내보였다. 리모르는 그 부분을 흔쾌히 인정했다. 결국 리모르와의 흥정은 서로 조금씩 양보하는 선에서 매듭지을 수 있었다.
이희재는 이때, 리모르와의 상담을 통해 외국 바이어의 수준이 우리와는 그 방법과 차원을 달리하고 있음을 느꼈다. 합리적 자료가 밑받침되어야 하는 세계였다. 이희재는 마음속으로 그것이 더 공정하고 투명한 거래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리모르’와의 만남을 통해 또 하나 새롭게 눈 뜬 것은 자가 브랜드의 가치였다. 만약 리모르가 OEM 방식으로 원했다면 꼼짝없이 응해야 했을 것이었다. 합당한 이유 없이 주문을 거절하는 것도 잘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행히 리모르에겐 처음부터 OEM 방식의 주문이 염두에 없었지만, 어쨌든 브랜드 가치를 내세우자 그 등등하던 기세가 꺾였다는 사실은 국제 시장이 자가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 인정하고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그때 어쩌다 브랜드 가치를 떠올렸는지 지금도 모르겠어요.”
2002년 무역의 날,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이희재는 솔직하게 그때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초기 바이어였던 엠메리토나 웨인이나 OEM을 원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리고 ‘리모르’가 일깨워준 뒤 그 방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OEM 방식이란 마치 천수답처럼 오더가 오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체제였어요. 계획생산도 어렵고 원가 절감이나 디자인 포장 문제도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헬멧을 생산하는 홍진크라운이나 에델의 파라슈트처럼 자가 브랜드가 아니면 결국 남 좋은 일만 하다 망한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죠. 공교롭게도 원칙을 정하고 나니 야마하나 스즈키, 혼다 그리고 유럽에서 OEM 방식의 거래 타진이 오더라구요. 미련 없이 거절했습니다. 우성아이비는 ‘지벡’으로만 세계 시장에서 살아갈 겁니다.”

국민소득 10,000불

지난 10년이 이희재에겐 백년처럼 긴 인생이었다. 아니 죽었다 살아나기를 여러 번 경험한 세월이었다. 스페인과 미국에 수출을 하게 되면서, 조금 여력이 생기자 국내 시장 공략에 나섰던 일이었다. 신문 방송에 이제 한국도 신용사회에 접어들었다는 계도성 기사가 심심찮게 실리는 것을 보았다. 무역을 하면서 신용사회가 어떤 것인가를 익히 아는 이희재로선 그 신용사회를 앞당기는데 할 수 있으면 일조 하자는 생각도 있었다.
이희재의 결심을 도와준 것은 그때 번졌던 국민소득 1만불 소문이었다. GNP 1만불은 삶의 질이 달라지는 분기점이라 하지 않았던가. 레저산업의 꽃이라는 수상레저가 피어나는 전환점… 이희재는 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라며 기대에 부풀었었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 신용사회가 아니었다. 속고 속고 또 속아도, 그래도 믿어야 신용사회가 온다고 나간 것이 잘못이었다. 처참하게 당하고 나서야 그는 그것을 깨달았고, 천신만고 끝에 일어나던 공장은 내수 거래 부담으로 부도 위기에 몰렸었던 것이다.


긴 회상에서 깨어나는 순간 송기두가 다가왔다.
“프랑스에서 김우택 차장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그쪽에서도 대 성공이랍니다. 현장에서 500대나 주문을 받았답니다. 우선 비행기로 80대를 실어달랍니다.”
송기두는 프랑스에서 기술 연수를 받은 일도 있어 그쪽 시장에 밝았다. 하늘을 나는 보트 신제품 발표는 프랑스와 한국에서 동시에 벌린 행사였다.
“비행기로 80대씩이나?”
80대면 보트무게만 6톤이 넘는다. 그걸 비행기에 실어달라는 것은 그만큼 시장반응이 좋다는 것이다.
대 성공이다.
김양수 이사의 눈이 커졌다. 그는 이희재를 보았다.    
“우리라고 못할 거 없습니다. 숫자를 늘릴 수 있습니다. 구매 조건을 조금만 완화하면 100대 이상 계약할 수 있습니다.”
이희재 사장이 김양수 이사를 보았다.
“미련이 남는 모양이군요”
“제 입장에서는요… 이젠 어느 정도 시장을 압니다. 외상을 준다 해도 전처럼 당하지 않을 겁니다. 삶의 질도 달라졌고.…”
김 이사는 회사가 정상화 된 뒤에 합류했다. 따라서 회사의 존폐 위기 상황을 피부로 체험하지는 못 했다. 이희재 사장은 빙긋 웃으며 김 이사를 보았다.
“삶의 질이 어떻게 달라졌어요?”
“GNP 1만불 시대입니다. 다들 잘 삽니다. 많이들 놀러 다니고… 질서의식도 나아졌고…”
김 이사는 머쓱한 듯 뒷머리를 만졌다. 이희재는 문득 엠메리토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엉뚱한 말을 했다.
“김 이사는 혹시 남을 도와줘 봤어요?”
“봉사… 라면 대학교 다닐 때 조금 했죠.”
“그런 봉사 말고, 진정으로 남을 존중하고 도와주고 해 봤습니까?”
“글쎄요. 그렇게까지는…”
“그럼 김 이사는 아직 1만불 시대 사람 아니에요.”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이희재는 엠메리토에게 들었던 말을 김 이사에게 전했다.
“GNP 1만불의 의미를 단순한 숫자로 풀어서는 안 됩니다.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 어려운 사람을 진정으로 돕는 여유가 내면에 성숙되어야 해요. 우리 사회엔 아직 그런 게 없어요. 그러니 좀 더 두고 봅시다. 현금 외엔 팔지 않는 원칙을 지키세요. 우리에게 여력이 있다면 이웃을 돕는 일부터 합시다. 그러면서 진정한 1만불 시대를 열어갑시다.”
“……”
김 이사는 명쾌하게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1만불이라는 숫자와 삶의 질과 남을 돕고 배려하는 마음과의 상관관계가 아무리 생각해도 모호하다는 표정이었다. <끝>


※ 인천에 본사를, 베트남에 현지법인을 두고 있는 우성아이비는 년산 20,000대의 고무보트와 수상레저 관련 용품을 생산, 세계 50여개국에 수출하고 있으며  2002년도 수출이 5백만불, 2003년도 수출 1000만불을 목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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