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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언제 읽어도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위선이나 불의에 대항하여 정의를 세우면서 인간성을 옹호하고 정신을 이끄는 따위는 다음 이야기입니다. 잔잔한 물결처럼 다가와 가슴을 파고드는 반취 이기윤의 소설들에는 독특한 향기가 있습니다.

단편
2011.01.05 00:00

열아홉 살의 추억, 군고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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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살의 추억, 군고구마

나이가 드니 사랑했던 추억만 남는다. 인생이란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만나고 그 문제의 답을 찾는 여행이라 했는데 가장 무게 있는 주제는 사랑이 아닐까. 삶에서 사랑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말이 갈수록 마음을 저민다. 새로 만날 사람보다 떠나고 헤어져야 할 사랑이 많아졌기 때문일까? 손을 바로 내밀면 따뜻한 햇살 담긴 흰 구름이요, 엎으면 차가운 비가 되는 경박한 감정이 넘쳐나는 세상. 누구보다 정을 주었지만 날아간 채 돌아오지 않는 백학도 있고, 사랑인지 삶인지 늘 같은 지점을 맴도는 다람쥐 같은 반려도 있다. 그런 가운데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진하게 다가오는 어린 날의 이야기가 하나 있다.
도시에서는 밤하늘에서조차 오래 전에 사라진 별빛을, 눈만 감으면 떠오르게 만드는 광희의 맑은 두 눈. 그녀가 품에 꼬옥 안고 있다가 주던 따뜻한 군고구마가 그려지면 내 마음은 그 때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곤 한다. 그렇게 내가 읽어주기를 원했던 성경. 열아홉 살 겨울의 이야기… 그 겨울 이후 사십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겨울이 되어 군고구마 장사를 보게 되면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다 한 봉지 산다. 따끈따끈한 군고구마가 담긴 봉지를 두터운 외투 안, 가슴에 품으면 광희를 품은 것만 같아진다. 껍질을 벗기면 세월의 장막이 함께 벗겨진다. 속살을 드러내면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사이로 그 때의 광경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열아홉 살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을 남긴 광희…

아버지 덕분에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집안의 뿌리는 시골이고 할아버지는 농사꾼이셨다. 경기도 마석에서 북서쪽으로 12km 쯤 들어간 축령산 자락 가장 웃마을이 선산을 이고 있는 고향으로 삼십 여호, 우리 일가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집성촌이었다. 아버지는 4형제 중 막내였는데, 둘째와 막내는 이십 대에 서울에 올라와 터를 잡았지만 첫째와 셋째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그곳에서 농사지으며 살았다. 할아버지의 형님도 그곳에 뿌리를 내렸으니 큰할아버지 자손도 많아 촌수가 다양한 일가들이 많았다. 큰어른이 그곳에 계신만큼 기제사나 설과 추석의 차례 등 조상을 모시는 문중의 큰일은 모두 그곳에서 치러졌다. 우리는 자주 시골에 가야 했다. 뿐만 아니라 학창 시절, 여름이고 겨울이고 방학이면 그곳에 가서 절반 이상을 보내는 게 상례였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마음껏 뛰어놀던 시간은 참 재미있었다. 지금은 다른 농촌과 마찬가지로 노인들만 남아 사는 곳이 되었지만 그 때는 내 또래가 많아 더욱 활기가 있었다. 시골의 형제들은 서울 도련님이 왔다고 그래서 때가 온다 싶으면 누가 시골에 가라 하지 않아도 어서 가고 싶어 안달을 할 정도였다. 학교가 방학을 하는 때는 혹서기나 혹한기여서, 산간에 밭이 있고 계단식 논이 많은 그곳도 일손을 놓고 쉬는 때였다. 여름이면 너른 마당에 모깃불 피워 놓고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웠고, 겨울이면 이 방 저 방 세대별로 화롯가에 둘러 앉아 민속놀이를 즐기거나 게임으로 밤을 새우는 게 보통이었다.

내가 시골집이라고 말하는 건 할아버지 집으로 위치적으로 마을의 중심이었다. 축령산 올라가는 길을 새로 만든 후부터 꼬부라지는 길목에 있어 새길모퉁이집이라고 불렸는데, 집 뒤뜰에 있는 수령 2백년 넘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군에서 지정하는 천연기념물이 된 후로는 은행나무집이라고 고쳐 불렀다.
그 시골집 사랑방은 거의 매일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라디오 조차 귀했던 시절, 그곳에 마을 사람들이 모인 이유는 소설 낭송을 듣기 위해서였다. 책을 잘 읽는 친척이 몇 있었는데 첫째는 큰아버지였고, 둘째는 큰할아버지 자손으로 내게는 조카뻘인 이강은 씨였다. 큰아버지는 시조타령 하듯 가락을 넣어 마치 판소리를 들려주는 듯 했지만 강은 씨는 목소리 자체가 구성진데다 내용에 따라 때론 엄숙하게, 때론 낭랑하게 무성영화시대의 연사처럼 감정을 넣어 더 인기가 있었다. 그 소리는 방안에서 듣기에는 다소 크다 싶을 정도여서 고요한 밤이면 꽤 멀리까지 퍼졌다. 다소 큰소리로 낭송하는 이유에는 안채의 여자들을 배려하는 마음도 있었다. 사랑방 소설 낭송이 한창일 때 여자들은 안채에 모였던 것이다.

현대소설보다는 고전이 많이 읽혔는데 홍길동전이나 심청전 춘향전 배비장전 따위를 나도 그때 모두 그곳에서 들었다. 강은이 조카는 슬픈 대목에서는 너무나 애통한 소리로 구성지게 읽는 바람에 듣는 이들은 눈시울을 훔치기 예사였다. 그럴 때면 안채에서도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밤이 깊어지고 분위기가 더 고조되어 갈 무렵이면 안채에서 간식을 준비해 내오곤 했다. 시원한 국물김치에 군고구마가 단골 먹을 거리였고, 가끔은 막걸리에 빈대떡, 또 가끔은 잔치국수 따위를 내어오기도 했다. 어린 시절 나는 그런 평화스런 풍경을 좋아했다. 그러나 내가 철이 들어 그런 모습에 좀 더 깊이 매료될 무렵부터 ― 말하자면 나도 소설을 낭송해보고 싶어질 무렵부터 ― 서울로의 이주가 늘어나면서 시골의 일가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아들 딸을 서울에 보내는 가정이 늘어나더니 1960년대 중반 이후는 아예 서울로 이주하는 일가가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떠난 빈 집에는 타성받이가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1967년, 대학생이 된 열아홉 살 겨울이었다. 그 해도 겨울방학을 시골에서 지냈고, 소설 낭송의 전통이 이어지던 때였다. 어른들 틈에 끼어 열심히 낭송을 듣다가 오줌이 마려워 살며시 미닫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는데, 누군가 사립문 밖에 기대어 있다가 후다닥 달아나는 게 보였다. 누굴까, 궁금해서 쫒아가 잡고 보니 여자아이였다. 모르는 아이였다. 제법 추운 겨울밤이었는데 그녀는 낡은 골덴 바지에 크고 허름한 점퍼를 입고 있었다.
“너 누구니? 왜 거기 있었어?”
여자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다만 얼굴이 붉어진 게 별빛 아래서도 보였다.
“거기서 뭐했어?”
하고 다시 다그치자, 그제야 그녀는
“책 읽는 거… 들었어요…”
했다.
“너 어디 사니?”
하고 묻자 그녀는 개울 건너 동산 밑을 가리켰다. 그곳은 중말(중간마을)로 사촌 형 ― 그러니까 셋째 큰아버지 ― 집이 있는 쪽이었다. 그곳은 구멍가게를 하는 육촌 형네와 셋째 집뿐이었다. 그런데 찬찬히 보니 그 옆에 헛간 같은 게 새로 들어선 게 보였다.  
“저기라구? 언제 이사왔니?”
하고 또 묻자 그녀는 한참 만에 대답했다.
“석 달 전에요…”
어쨌든 신원이 확인되자 나는 경계를 풀었다.
“마음대로 해. 더 듣고 싶으면 가서 들어”
공연히 겁을 준 거 같아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그냥 갈래요.”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집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나는 그녀가 자기 집이라고 말한 그 집으로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았다. 별빛이 오들오들 떨며 그녀의 가는 길을 밝혀주는 듯한 밤이었다.

이튿날 사촌형 집에 간 나는 전날 밤 일을 털어놨다. 세 살 위인 사촌형은 빙긋 웃으며
“광희 얘기구나.”
했다.
“광희?”
“응. 걔가 소설을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애. 할아버지 사랑방에서 소설 읽는 소리가 들리면 만사 제치고 가서 듣거든. 착하고 예쁜 아이야. 아버지를 보면 불쌍하기도 하고.”
사촌형은 묻지도 않은 얘기까지 했다.
“아버지가 어떤데?”
“아버지가 주태백이에다 노름꾼이야. 노름으로 가진 거 다 날렸고 그 때문에 엄마도 도망 가 버렸대. 어느 정도냐 하면 딸 이름을 광희라고 지을 정도지.”
“광희가 어때서?”
“광이 뭐냐. 화투의 광이잖아…”
사촌형이 웃자 나도 따라 웃었다.
“어디 사람인데?”
“양수리에서 살다 왔다더라. 올 가을에 이사 왔어. 집 짓는 걸 내가 도와 줬더니 광희가 어찌나 고마워 하는지… 광희가 불쌍해 죽겠어. 아버지는 노름판 전전하느라 집에 잘 오지도 않아. 일주일에 한 번 올까말까… 그런 아버지에게 광희 같은 착한 딸이 있다는 게 참 신기하지.”
“광희는 몇 살이야? 어려보이던데.”
나는 마저 궁금한 것을 물었다.
“열여섯. 니 동생 환이하고 동갑이네.”
사촌형을 통해 어느 정도 알고 나니 문득 그녀가 보고 싶어 졌다.
“그 애, 지금 집에 있나?… 이리 오라면 안 올까?”
내 딴에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사촌형은 씨익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왜 안 와. 아버지만 없으면 얼른 오지. 아마 지금 안 계실 걸.”
하더니 옆집을 향해 큰 소리로 광희를 불러댔다. 과연 광희는 곧 쪼르르 달려 왔다.
“왜요, 오빠…”
하고 달려온 광희 눈에 내가 보이자 주춤하는 게 역력했다. 나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괜찮아. 들어 와.”
사촌형이 이야기 하자 그녀는 조심조심 방 안에 들어왔다. 바깥은 제법 추웠다.
“어제… 놀라게 해서 미안해.”
하고 내가 사과하자,
“아녜요. 제가 잘못을 했죠.”
하면서 볼을 붉히는데 의복은 초라했지만 얼굴은 캘린더 속의 소녀처럼 예뻤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머리에선 상큼한 내음이 피어났다.
“소설 낭송 듣는 게 재미있어요?”
나는 또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주저함 없이
“네, 무척요.”
하면서 배시시 웃었다. 눈이 반짝이면서 금세 얼굴에 생기가 넘친다.
“노인네들이나 좋아하는 옛날 소설들인데… 내가 신소설을 읽어줄까요?”
“정말요?”
나는 이야기를 하자고 한 말인데 그녀는 온몸으로 기뻐했다.
“좋아요.”
하고 나는 사촌형을 쳐다 보았다.
“형. 아무 소설이나 없어?”
그러자 사촌형은 책상 한 구석에서 소설을 하나 찾아내 건네주었다. 김유정 소설집이었다.
“재미있는 소설이 있네. 자. 들어봐요. 내가 읽을게.”
하고 나는 앞에 있는 ‘봄,봄’을 읽기 시작했다.

…“장인님! 인제 저…”  
내가 이렇게 뒤통수를 긁고, 나이가 찼으니 성례를 시켜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 대답이 늘,
“이 자식아! 성례구 뭐구 미처 자라야지!” 하고 만다.
자라야 한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아내가 될 점순이의 키 말이다.
내가 여기에 와서 돈 한푼 안 받고 일하기를 삼 년하고 꼬바기 일곱 달 동안을 했다. 그런데도 미처 못 자랐다니까 이 키는 언제야 자라는지 짜장 영문 모른다.…

하고 읽어나가니 광희는 키들키들 웃는데 사촌형은 여러 번 읽은 책이라며 일어나 나간다. 나는 광희에게 ‘봄, 봄’을 계속 읽어주었다. 소설 속의 화자가 장인님과 옥신각신 티격태격 하는 모습에 연신 까르르 까르르 웃으며 광희는 보통 재미있어 하는 것이 아니었다. 장인이 지게 막대기로 화자의 배를 찌르고 발길로 옆구리를 차고 볼기짝을 후려갈길 때는 어머, 어머 하더니, 내(화자)가 장인님을 발 아래로 굴러뜨려 올라오지 못하게 하자 고개를 주억거렸고, 그러다가 장인님이 내 사타구니를 잡고 늘어진다 는 대목이 나오자 다시 까르르 웃는 것이었다.
하도 재미있게 들으니 나도 더 열심히 읽게 되었다. 따뜻한 온돌방에 이불을 펴고, 그 속에 함께 발을 넣고 나는 읽고 그녀는 듣고 사촌형은 들락날락하며 자기 일을 했다. 단편소설이라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지만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때 끝났다. 책을 덮는데 마침 큰어머니가 삶은 옥수수를 내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게 먹음직스러웠다.
책을 원래대로 책상 위에 던져놓고 옥수수를 하나 집어 그녀에게 주고 나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무심결에 한 마디 했다.
“이럴 때는 군고구마가 좋은데…”
그랬더니 그녀가 얼른 받는다.
“내일도 소설 읽어 줄래요? 그러면 내가 군고구마 준비할 게요.”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럴까?”
방학을 시골에서 보내는 나로선 마다할 일이 없었다. 이렇게 귀엽게 착 달라붙는 소녀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은 괜찮은 추억이 될 것 같았다.  
“좋아. 그럼 몇 시가 좋을까. 오후 3시쯤?”
“전 아무 때라도 좋아요. 좋아요. 그럼 3시에…”
“그래. 오늘 읽은 책이 소설집이니까 동백꽃도 있고 재미있는 게 여러 편 있어.”
“그럼 내일 뵈요.”
광희는 하나 가득 얼굴에 기쁨을 담도 자기 집으로 건너갔다. 그 사이 사촌형은 어디 갔는지 30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나는 터덜터덜 걸어 할아버지 집으로 왔다.

이튿날은 눈이 내려 겨울이 더 아늑하고 고요했다. 눈이 내린 뒤의 하늘은 쓸고 닦아낸 듯 했다. 나는 다른 책을 보다가 오후가 되기를 기다려 사촌형 집으로 건너 갔다. 사촌형은 아랫마을 가고 없었다. 큰어머니께 인사하고 나는 사촌형 방에 들어갔다. 광희는 내가 온 것을 확인하고 나서 잠시 후 쪼르르 건너와 쌍바라지 문을 똑똑 노크했다.
“들어 와.”
나는 어제 읽었던 김유정 소설집을 찾아 들고 어서 들어오라고 했다. 광희는 두툼한 점퍼를 꼭꼭 여미며 들어왔다.
“어제처럼 이불 속에 발 넣어. 따뜻해”
하고 나는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발을 덮어 주었다. 그때 큰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보았다.
“여기서 뭘 하는 거냐?”
20살짜리 조카와 열여섯 처녀가 사촌형 없는 사촌형 방에 들어가 있으니 조금 이상한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책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 큰어머니. 광희가 소설을 좋아하네요. 그래서 읽어주려고요.”
“소설을 읽어 줘?”엉뚱한 짓들 하는 건 아니지?”
“네. 형이 보던 소설이예요.”
나는 큰어머니는 안심시켜 드리고자 책을 높이 들어 보여주었다. 그러나 큰어머니는 조금 걱정이 되는 지 잠시 보다가, ‘엉뚱한 짓들 하면 안 된다.’ 하고 문을 닫아주었다.
나는 ‘아이, 그러믄요.’ 하는 소리를 크게 큰어머니 등 뒤어 실어드리고 광희를 보며 책을 펼쳐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 소설 ‘동백꽃’을 일어나갔다. 역시 단편이다.

…오늘도 또 우리 수탉이 막 쫓기었다. 내가 점심을 먹고 나무를 하러 갈 양으로 나올 때이었다. 산으로 올라서려니까 등뒤에서 푸드득 푸드득 하고 닭의 횃소리가 야단이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보니 아니나 다르랴 두 놈이 또 얼리었다. 점순네 수탉(대강이가 크고 똑 오소리같이 실팍하게 생긴 놈)이 덩저리 작은 우리 수탉을 함부로 해내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해내는 것이 아니라 푸드득하고 면두를 쪼고 물러섰다가 좀 사이를 두고 푸드득하고 모가지를 쪼았다. 이렇게 멋을 부려 가며 여지없이 닦아 놓는다. 그러면 이 못생긴 것은 쪼일 적마다 주둥이로 땅을 받으며 그 비명이 킥, 킥, 할뿐이다. 물론 미처 아물지도 않은 면두를 또 쪼이며 붉은 선혈은 뚝뚝 떨어진다. 이걸 가만히 내려다보자니 내 대강이가 터져서 피가 흐르는 것같이 두눈에서 불이 번쩍 난다. 대뜸 지게 막대기를 메고 달려들어 점순네 닭을 후려칠까 하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헛매질로 떼어만 놓았다. 이번에도 점순이가 쌈을 붙여 놨을 것이다. 바짝바짝 내 기를 올리느라고 그랬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고놈의 계집애가 요새로 들어서 왜 나를 못 먹겠다고 고렇게 아르릉거리는지 모른다.…

소설 낭송을 듣는 광희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했다. 어제는 까르르 까르르 웃기도 잘했는데 오늘은 잘 웃지도 않았다.
나는 읽다가 잠시 물 마시는 척 쉬면서 물었다.
“오늘은 왜 웃지도 않아? 재미가 없나?”
그랬더니 고개를 홰홰 젓는다.
“아니에요. 너무 재미 있어요.”
잘은 모르겠지만 소설 낭송 듣는 재미를 진지하게 느껴가는 것 같았다. 나는 더 묻지 않고 계속 읽어주었다.

…나흘 전 감자 건만 하더라도 나는 저에게 조금도 잘못한 것은 없다. 계집애가 나물을 캐러 가면 갔지 남 울타리 엮는 데 쌩이질을 하는 것은 다 뭐냐. 그것도 발소리를 죽여 가지고 등뒤로 살며시 와서,
"얘! 너 혼자만 일하니?"
하고 긴치 않는 수작을 하는 것이다.
어제까지도 저와 나는 이야기도 잘 않고 서로 만나도 본체만척체고 이렇게 점잖게 지내던 터이련만 오늘로 갑작스레 대견해졌음은 웬일인가. 항차 망아지만 한 계집애가 남 일하는 놈 보구….

소설을 읽어 주는 데 한 시간이 더 걸렸다. 낭송이 끝날 때까지 광희는 미동도 하지 않고 열심히 들었다. 마치 소설 속의 광경을 머리 속에 그려보는 듯 했다. 신비한 느낌을 가질 정도로 그녀는 듣기에 열중했다. 어쩌면 내가 읽어주는 것을 외우기라도 하려는 양 같았다. 동백꽃을 다 읽고 나니 그제야 배시시 웃는다.
“재미 있었어?”
“어제 봄, 봄보다 더 재미 있었어요.”
“다행이군. 그런데 궁금하네. 그렇게 소설이 좋으면 왜 직접 읽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광희는 볼을 붉히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전… 듣는 게 좋아요…”
“그래?…”
어쨌든 나는 어제보다 재미있었다는 말로 충분했다.
“내일도 또 할까?”
“어머나. 정말요?”
광희가 눈을 빛내며 반기는 표정은 참으로 인형 같았다.
“그래. 그럼 오늘과 같은 시간에 하는 걸로 하지.“
그러면서 나는 광희의 눈치를 살폈다. 군고구마 약속은 어찌 된 것일까? 책을 덮으며 내가 빙긋 웃자 광희는 그제야 상체를 바로 세웠다.
“아 참, 군고구마 드실래요?”
“군고구마가 어디 있어? 없잖아.”
그러자 그녀는 품이 넉넉한 점퍼 속에서 종이에 싼 것을 꺼내 놓았다. 군고구마였다. 품에 안고 있어서인지 따뜻했다. 나는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아니, 이걸 여태 가슴에 품고 있었어?”
광희는 또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군고구마는 식으면 맛이 없어요. 껍질도 잘 벗겨지지 않고…”
마침 사촌형이 돌어와 셋이 맛있게 먹었다. 내 기억에 그렇게 맛있는 군고구마는 처음이었다. 그날 읽기를 끝냈을 때 광희가 물었다.
“언제 서울로 가세요?”
“열흘 쯤 더 있다 가.”
“그럼 그동안 매일 소설 읽어 주세요.”
“매일 군고구마 준비 한다고?”
“그럼요.”
“좋아. 그럼 매일, 오후 세 시부터 두 시간…”
그러자 광희는 손뼉을 치며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약속해요. 내일은 더 맛있게 구워 올게요.”
광희의 반짝이는 눈에 순수함과 간절함이 담겨있었다. 그런 광희에게 나는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호감을 느꼈다.
“좋아요. 그래요.‘
광희와 나는 거듭 거듭 약속하고 확인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나는 오늘은 무슨 책을 읽어줄까 고민이 됐다. 할 수 있다면 재미도 있고 교훈적인 내용도 있는 소설을 읽어주고 싶었다. 안톤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 같은 세계명작 단편이면 더없이 좋을 것 같은데 시골에서 당장 구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 집과 기화형 집을 뒤져 일껏 찾아낸 것은 이광수의 「무정」이었다. 소설을 발견한 순간 아 이거면 오늘은 되겠다, 싶어 챙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광희가 이 소설을 이해할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광희도 꾸미면 선형이 못지않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노름에 미처 가정도 돌보지 않고 멋대로 돌아다니고, 엄마는 집을 나가고… 광희가 혹시 소설 「무정」의 영향을 받아 기생이 된다면?
그것도 그리 힘든 가정은 아닐 것 같다. 이미 그녀는 두 갈래 길에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어느 가야할 지 이 길 저 길 재보는 갈등이 있을 것이다. 아직 어리기에 남자로 인한 고민을 하지는 않겠지만 자신의 장래는 걱정하지 않을까. 나는 어디에 둘까? 영어선생은 아니지만 내가 소설을 읽어주고 가르치는 형식의 역할이 될까?…
그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두 시 반이 되었다. 이젠 더 생각할 것이 없다. 그래 무정을 읽어주자. 한 번에 읽기는 다소 기니 세 번에 나누어 읽어주도록 하자.
나는 무정을 들고 예의 중말, 셋째큰아버지 집으로 건너갔다.
세 시가 되니 광희가 왔다.
“오늘부터는 「무정」을 읽어 줄게.”
어떤 소설인데요?“
“이건 우리나라에서 근대소설의 모습을 갖춘 최초의 작품이라는 거야. 개화기… 개화기가 뭔지 알지?”
“네 알아요.”
“그 개화기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시대 적응 양식을 그린 소설이야.”
“누가 썼는데요?”
“이광수라는 분이지. 춘원이라고 부르기도 해.”
“좋아요. 읽어주세요.”
“그런데… 이건 장편소설이거든. 좀 긴 소설이란 말이지. 그래서 한 번에 다 읽을 수가 없어. 세 번으로 나눌 거야.”
“연속극처럼 요?”
“응.”
“좋아요.”
광희는 배시시 웃으면서 무조건 좋다고 한다. 나는 읽어주기 시작했다.


…경성학교 영어 교사 이형식은 오후 두 시 사 년급 영어 시간을 마치고 내리쬐는 유월 볕에 땀을 흘리면서 안동 김 장로의 집으로 간다.…

광희는 숨소리마저 죽어가며 열심히 듣는다. 이형식이 김장로의 부탁을 받고 그의 딸 선형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선형은 정신 여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가려는 지식인 여성이다.) 처음 보는 선형의 고운 자태에 호감을 느끼는 처음의 이야기. 그리고 그날 형식을 길러준 은인의 딸 박영채라는 기생이 형식의 하숙집을 찾아와 만나면서 형식과 영채의 인연이 설명될 수 있는 곳까지 읽어 주었다. 영채는 아버지와 오라비들이 어느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힌 뒤 외가에 가서 갖은 고생 끝에 자기 아버지를 구하고자 기생이 되고 말았다. 그런 고생을 겪으며 그는 형식이를 마음 한 가운데 두고 정절을 지켜왔다. 영채는 형식의 앞에서 자기가 기생이 되었노라는 말은 끝내 하지 못하고 되돌아 간다. 형식은 한편으로 영채의 순결을 의심하며 불괘함을 느끼고, 한편으로는 달콤한 그리움을 느낀다. 그러던 중 형식은 경성 학교 학감 배명식의 추문을 듣는다. 평양에서 온 기생 계월향의 꽁무니를 따라다닌다는 거였다. 그는 영채가 계월향임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그가 다시 영채를 만나려고 찾아갔을 때 영채는 배 학감과 김현수에게 이끌려 다른 곳에 가고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내가 책을 내려놓자 광희는 ‘아이…’하며 아쉬워했다.
“내일 이어서 읽으면 되지.”
“좋아요. 음. 여기 고구마.”
광희는 어제처럼 품에서 군고구마를 꺼내 놓는다. 따뜻하다. 아직까지 이렇게 따뜻할 정도면 꽤 뜨거운 걸 품에 안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녀의 정성이 참 애틋하다 여기면서 나는 맛있게 먹었다.
“영채가 어디로 간 거예요?”
군고구마를 먹는 나에게 광희가 묻는다. 영 궁금한 모양이다. 이대로 집에 가면 잠을 설칠 거 같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더 읽어주지 않았다.
“내일이면 알게 될 걸 뭐.”
“좋아요.”
광희는 더 보채지 않았다. 참을 줄도, 기다릴 줄도 아는 거 같았다.

다음 날 시간이 되어 사촌형 집에 가는데 큰어머니가 어디를 가느냐고 묻는다.
“중말 사촌형 집에 가요.”
“거긴 왜 맨날 가니?”
큰어머니의 질문이 뼈가 있는 거 같았다. 어디를 가건 통 묻는 일 없는 큰어머니가 묻는 것부터가 사실은 새삼스러운 일이다.  
“왜요?”
“너 거기서 매일 이웃집 처녀 앉혀놓고 책 읽어 준다며?”
“예… 어떻게 아셨어요?”
“이 조그만 동네에서 그런 게 소문 안 날 줄 아니? 금세 퍼져.”
“소문나면 어때요. 책 좋아해서 그냥 책만 읽어주는 건대요. 소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사랑방에서 소설 읽을 때면 울타리밖에 서서 듣곤 했대요.”“그건 나도 알아.”
“아니 알고 계셨어요?”
나는 깜짝 놀랐다. 나만 알고 있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큰어머니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나쁜 소문 안 나게 해. 알았지?”
“네…”

사촌형방에 가서 기다리며 오늘 읽어줄 부분을 미리 검토해 보았다. 오늘은 어디까지 읽어줄까.
사라진 영채의 행방을, 형식은 신문기자인 신우선의 도움을 받아 찾아냈으나 영채는 순결을 잃은 뒤였다. 영채는 형식을 위해 지켜온 자신의 정절을 빼앗긴 것이 수치스러워 죽으려고 평양으로 향하고, 편지로 이 사실을 알게 된 형식은 영채의 뒤를 따라 평양으로 간다. 그러나 영채를 찾지 못하고, 죽은 것이라 생각하고 서울로 되돌아온다. 영채는 병욱이라는 처녀를 만나 인생을 새롭게 살기로 결심하고, 병욱의 집에 머물게 된다. 그러면서 병욱의 오빠에게 연정을 느끼기도 하며, 자신의 미래를 새롭게 설계한다. 그래. 여기까지 읽어주면 되겠다. 하고 페이지를 접어 표시했다.
그런데 세 시가 넘어도 오늘은 광희가 오지 않았다. 삼십 분쯤 기다리다 쌍바라지문을 열고 광희의 집 쪽을 보았다. 마침 사촌형이 지게를 지고 돌아왔다.
“어, 형. 어디 갔었어?”
“응. 장작 패러.”
사촌형은 지게를 헛간에 두고 방에 들어왔다.
“무슨 장작?”
“겨울 땔감이지. 부엌에서도 쓰고.”
잠시 몸을 녹였다 싶을 때 나는 물었다.
“왜 오늘은 광희가 안 오지?”
“광희? 어제 밤에 제 아버지가 왔나 보던데?”
“그래?… 아버지 있으면 꼼짝 못하나?”
“술 안 먹으면 괜찮은 거 같은데, 술 먹으면 개차반야. 광희를 막 패기도 해.”
“왜?”
“제 엄마 어디 있는지 대라는 거지. 딸은 알 거 아니냐면서!”
“생활비는 갖다 주나?”
“생활비 좋아한다. 내 보기엔 돈 떨어지면 집에 오는 사람이야. 와서 그 어린 거한테 술 내라 엄마 찾아내라 하고 이삼일 달달 볶다가 또 어디론가 가는 거지.”
“그 애가 어디서 그런 걸 만들어.”
“남의 집 일 해주는 거지 뭐. 지금 한겨울이라 그렇지, 여기도 일손이 딸려. 가을만 해도 쉴 틈이 없었어.”
“그래?…”
나는 또 문을 열고 광희네 집 쪽을 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조용하다. 며칠이지만 매일 보다가 안 보니 보고 싶었다. 약속을 하고 본 보니 더 보고 싶은 것이다.
“문 닫아. 찬바람 들어와.”
사촌형이 문 닫기를 채근하여 문을 닫았다. 광희가 안 온다면 나도 여기 더 있을 일이 없다. 나는 나대로 겨울방학을 시골에서 지내는 동안 하려했던 일이 있었다. 그 일이나 하자고 막 일어서려는 데 누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문을 여니 광희였다.
“광희… 아버지가 오셨대며?”
“예. 몸이 좀 아 좋으신 거 같아요. 계속 주물러드리고 있어요.”
광희는 몹시 긴장한 표정을 보였다. 아버지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만드는 거 같았다.  
“그럼 오늘 어떻게 하지?”
“내일 아침에 또 나가실 거 같아요. 오늘은 쉬고 내일 해 주세요.”
하고 말하며, 광희는 품에 군고구마를 꺼내 놓았다.
“오늘은 괜찮아. 책도 안 읽어줬는데…”
내가 사양하는 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광희는 문 닫고 자기 집으로 갔다.
“불상한 거. 그래도 어제는 조용했다. 술 취해서 소리치고 패고 울음소리에 비명이 섞이고 하는 일 없이.”
“그렇게 심해?”
“동네서 내 보내자는 얘기도 나왔었어… 그 소릴 들었는지 그 뒤로 조금 조용해졌지. 그래도 여기 오래 살 것 같진 않아.”
  
다음 날 예정대로 아버지는 또 어디를 갔다고 했다. 오후에 광희를 만나 책을 읽어줄 수 있었다. 사촌형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장작을 패 나르는 일로 바빴다. 광희와 둘이 사촌형 방에 앉아 소설낭송을 이어갔다.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 책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이 내게도 새롭고 묘한 느낌을 주었다. 쾌감처럼 좋은 느낌이었다. 나는 나대로 차츰 소리 내어 읽는 재미를 느껴가고 있었다.
그렇게 이광수의 「무정」 중간부분을 열심히 읽어주고 있는데 오늘은 광희의 얼굴이 어두워 보였다. 집중해서 듣는 것 같지도 않았다. 눈빛이 산만한 게 어딘가 몹시 불편해 보였다. 나는 책을 덮고 물었다.
“어디 아파? 아니면 아버지가 어떻게 했어?”
나는 사촌형에게서 들은 정보가 있어 그렇게 물었다.
“아뇨. 괜찮아요.광희는 그렇게 말하며 또 품에서 군고구마를 여섯 개나 꺼내 놓았다. 평소보다 더 따끈따끈했다.
“배가 고픈 모양이군. 그럼 먹고 할까?”
하고 하나를 집어 껍질을 까 광희에게 주고 나도 먹었다. 그런데 광희가 더 못 견디겠다는 듯 두 손으로 가슴을 싸안았다. 고통스러워 했다.  
“왜 그래?”
나는 놀라 눈을 치뜨고 물었다.
“가슴이 너무 쓰려요.”
광희는 고통스러워 했다.
“가슴이? 얼마나? 내가 봐줄까?”
하고 다가가니 광희는 얼굴을 붉히며 옷을 여몄다.
“괜찮아. 아프다며. 내가 봐줄게.”
내가 다시 말하자 광희는 사방을 둘러보고, 문이 꼭 닫혔는가를 확인하고 하락했다.
“그럼…”
나는 광희를 반듯이 눕게 하고 허리까지 이불을 덮어준 뒤 바짝 다가앉아 점퍼를 열었다. 점퍼 속에 보라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고 그 속에 하얀 속옷이 있었다. 브라자는 없었다. 스웨터를 목까지 말아 올리고 흰 속옷을 올리려고 하자 광희의 손이 내 손을 잡았다.
“배만 봐 줘요. 위로 올리면 안 돼요.”
“배는 아무렇지도 않아. 가슴이 쓰리대며…”
나는 가만있어 보라는 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광희의 손을 치우고 속옷을 조심조심 들췄다. 난생 처음 보는 열여섯 소녀의 백옥 같은 속살. 맨살의 따뜻한 체온까지 느끼자 상처를 살핀다는 생각은 뒤로 밀려나고 이상한 흥분이 감싸왔다. 심장이 뛰고 손이 떨렸다. 광희의 숨소리도 커지는 게 역력했다. 눈을 감은 광희는 처음 할아버지 집 사랑방 사립문 앞에서 만났을 때처럼 모기소리로 말했다.
“괜찮죠? 아무렇지도 않죠?”
순간 정신을 차린 나는 아연 긴장하고 말았다. 젖가슴 아래가 마치 뜨거운 물에 데인 듯 온통 벌겠다. 속옷을 조금 더 올리니 그 붉은 기운은 젖가슴까지 올라가고 있었다.
“이게 뭐야. 왜 이래?”
나는 조심성을 팽개치고 속옷을 목까지 올려 가슴 전체를 한 눈에 살펴보았다. 열여섯의 봉긋 솟은 젖가슴이 다 드러나자 광희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몰라요.’ 했다. 나는 이성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이성을 느끼기엔 광희의 상처가 너무 심각해 보였다. 아직 염증으로 발전해 진물이 나는 곳은 없었지만 왼편 젖가슴 밑은 살갗이 벗겨지려 하고 있었다. 최소한 2도 이상의 화상은 되는 것 같았다.  
“왜 이래. 뭘 하다가 여길 이렇게 데었어?”
“많이 그래요?”
“심해. 최소한 2도 이상의 화상이야.”
그제야 그녀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냥 있으면 안 돼. 내가 약을 사다줄게. 약 발라야 해. 근데 왜 그랬냐구?”
나는 속옷을 내려 덮어 주며 또 물었다.
“약 바르면 낫겠죠?”
“글쎄. 다행히 수포가 생기거나 진무르진 않았으니까…”
“그럼 됐어요. 곧 낫겠죠.”
광희는 상체를 일으켜 앉으며 배시시 웃었다. 스웨터를 추슬러 입는 모습이 귀여웠다.
“왜 그랬냐니까?”
나는 기어이 대답을 듣겠다고 또 물었다.
“왜냐 하면요…”
광희가 주저하는 듯 하다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군고구마 자국일 거예요.”
“뭐라구?…”
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안쓰러움을 넘어 오히려 화가 났다. 세상이 이런 미련퉁이가 있나…
“이대로 여기 있어. 내가 당장 가서 약이든 연고든 구해올게.”
나는 바로 일어나 약을 살 수 있는 가까운 곳을 찾아 나섰다. 시골을 수없이 왕래했지만 약국을 찾아보는 건 처음이었다. 약국은 십리 밖 석고개 아랫마을에나 있었다. 부지런히 가서 바셀린을 사왔는데 두 시간이나 걸려 날이 어두워졌다. 방에는 사촌형이 있었다. 광희는 자기 집에 가고 없었다.  
“어디를 갔다 오는 거냐?”
내가 들어가니 사촌형이 묻는다.
“응. 잠시 석고개에… 광희는 어디 갔어?”
“자기 집에 갔지. 석고개는 왜 갑자기.”
“광희가 화상을 입었어. 내가 군고구마 좋아한다니까 열심히 구어 오더니… 그것 때문에 덴 것 같애.”
“심해?”
“내가 보기엔.”
“그래서 약을 사온 거야?”
“화상엔 바셀린이 제일 좋으니까… 나 때문에 그랬으니 내가 사와야지. 항생제도 사오고.”
“바셀린보다는 내게 더 좋은 게 있는데…”
사촌형은 구석에 놓인 책상 설합을 이리저리 뒤지더니 가루가 든 봉투를 찾아냈다.
“이게 느릅나무 가룬데, 화상에는 이게 직통이더라. 할아버지가 알려주신 비결이야. 이걸 발라줘.”
“아이구 그럼 석고개 괜히 갔다 왔네. 그나저나 건너가서 주나 이리 오라고 하나. 밤이 늦어서…”
“가면서 주고 가. 소문날지 모르니까 방엔 들어가지 말고. 저보고 바르라고 하면 되잖아.”
“알았어.”
사촌형 방을 나온 나는 광희네 집으로 갔다. 집이라기보다는 방 하나에 작은 부엌이 딸려있는 움막이었다. 등잔불은 켜져 있지만 조용했다. 내가 인기척을 보이자 문이 열렸다. ‘누구세요’ 하고 묻던 광희는 나를 확인하고 ‘어머’ 하며 부끄러워했다.
“괜찮아?”
“들어오세요.”
“아냐. 약을 사왔어. 전해만 주고 갈려구.”
“얼른 들어오세요.”
누가 보기 전에 얼른 들어오라는 소리였다.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방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내가 사온 건 바셀린연고야. 약국에선 화상에 이게 최고래. 그런데 사촌형이 이걸 바르래. 이게 더 낫다구.”
나는 바셀린과 느릅나무가루를 함께 주었다. 등잔불을 켰지만 방은 어두웠다.
“고마워요.”
광희는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그런데 그 순간 또 두 손으로 가슴을 싸맨다. 쓰라린 모양이다.
“내가 발라주고 갈까?”
사방을 둘러봐도 거울이 보이지 않았다. 발라주고 가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광희는 또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약을 두고 가세요. 내가 바를 게요.”
광희가 사양하니 나는 더 발라주고 싶어졌다.
“지금 그렇게 부끄러워할 때가 아니야. 어서 누워. 내가 발라 줄게.”
나는 힘으로 그녀를 눕게 만들었다.
“아이, 싫은데…”
그러나 싫은 건 아닌 거 같았다. 부끄러운 것이 맞을 것 같았다. 광희는 다시 내 앞에 누웠고 나는 가슴을 환히 열고 상처를 살폈다. 다시 보니 상처가 아까 느꼈던 거보다 덜했다. 아까는 너무 놀란 나머지 심해 보였던 것 같았다.
느릅나무 가루만 발라주긴 뭣해서 일단 바셀린 연고를 발라 주었다. 손가락에 연고를 묻혀 문지르며 발라주는데 그녀의 체온이 전류가 되어 내게 짜릿함을 느끼게 했다. 봉긋한 젖가슴은 내 눈을 어지럽게 하고 심장을 빨리 뛰게 했다. 젖가슴 아래 연고를 바르고 또 발랐다. 문지르고 또 문지르면서 말했다.
“광희라는 미련한 소녀를 만난 덕분에 내가 여러 가지 첫 경험을 하는구나. 다 큰 소녀 가슴을 보기도 하고 만지기도 하는데 정말 처음이다.”
광희의 손이 내 손 등에 얹혔다.
“저도에요. 저도 여기에 남자 손이 닿는 것은 처음이에요.”
“후후. 어쩐지 광희가 주는 군고구마 맛이 맛있다 했었지.”
“그랬으면 됐어요. 저는 그것으로 행복해요.”
광희의 표정에서 나는 순수를 보았다. 그녀의 맑음이 내 가슴에 파문을 만들었다.

이광수의 소설 「무정」을 마저 읽어주고 나는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떠나기 전날도 책을 읽어 주었다. 책이 김유정 소설집 밖에 없어 거기서 한 편을 더 읽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 물었다.
“혹시, 특별히 보고 싶은 책이 있어?”
광희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음… 있어요. 성경요. 성경을 알고 싶어요.”
“성경은 교회에 가면 공짜로도 얻을 수 있어요. 아니면 내가 하나 사서 우편으로 보내 줄까?”
“저는 듣는 게 좋은 데요?”
광희는 여전히 눈을 반짝이며 해맑게 웃었다.
“묘하군. 직접 읽는 것도 재미있는데… 아무튼 성경을 하나 선물하지. 읽어주는 건 다음에 하더라도. 그런데 왜 그렇게 듣기를 원해?”
“엄마 생각이 나서요. 어렸을 때 엄마가 늘 읽어주었거든요.”
“아, 그래서구나…”
나는 그동안의 의문이 일시에 풀리는 것 같았다.
“알았어. 책은 미리 보내주고… 여름 방학 때 오면 성경을 읽어주도록 할게. 약속.
나는 광희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

서울에 온 뒤 바로 성경을 사서 보내주었다. 그리고 편지를 했다. 그러나 답장은 없었다. 보고 싶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여 잠시 갔다 오고 싶은 충동이 여러 번 일었지만 그때는 쉽게 왕래할 수 있는 고향이 아니었다. 지금은 길이 좋아져서 한 시간이면 자동차로 갈 수 있는 거리가 되었지만 그때는 왜 그리 멀었는지… 청량리 역에서 기차를 타고 마석까지 간 뒤, 마석에서 삼십 리 되는 길은 걸어가다시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기다리던 여름이 오고 방학이 되자 나는 한 걸음에 시골로 달려갔다. 그러나 광희는 없었다. 아버지를 따라 한 달 전에 어디론가 이사 갔다고 했다. 사촌형도 행방을 모른다고 했다.
“보고 싶었는데…”내가 몹시 아쉬워하며 말하자 사촌형이 웃는다. “알아. 편지도 여러 번 하고 책도 여러 권 보내준 거…”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나는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네 편지를 내가 다 읽어주었으니까. 광희도 너를 보고 싶어 했어…”
“무슨 소리야. 내 편지를 왜 형이 읽어줬어?”
“왜는…”
사촌형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광희는 글을 읽을 줄 모르니까 그랬지.”
사촌형의 한 마디는 쇠망치가 되어 내 뒤통수를 쳤다. 아아, 그랬던가? 그래서 그렇게 읽어주기를 원했던가?

광희와는 그렇게 한 해 겨울 잠시 만났다 헤어졌다. 짧은 인연이었다. 그러나 겨울만 되면 지금도 생각나고 군고구마를 보면 그리워진다. 마치 내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군고구마에 덴 자국이 남아있는 것만 같다. 나는 광희처럼 가슴을 데면서까지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했던 적이 있었던가.  
문득 손에 들려있는 성경을 본다. 그랬지. 그녀에게 성경을 읽어주기로 했었지. 성경을 펼치니 그 안이 벌게지며 뜨거워진다. 고구마를 굽기 위해 불구덩이를 헤집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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