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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언제 읽어도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위선이나 불의에 대항하여 정의를 세우면서 인간성을 옹호하고 정신을 이끄는 따위는 다음 이야기입니다. 잔잔한 물결처럼 다가와 가슴을 파고드는 반취 이기윤의 소설들에는 독특한 향기가 있습니다.

콩트
2002.02.02 04:44

벌거벗은 주부

조회 수 11224 추천 수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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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변 고층아파트 15층 베란다. 남자가 고성능 망원경을 이리저리 돌리며 열심히 무엇인가를 보고 있다.
주방에서 요리를 만들던 주부, 에프론을 두른 채 옆에 와서 말을 건다. 여기서도 탐조에요? 철새가 보여요?
남자가 말한다. 그럼. 여기서도 한강에 철새 들고 나는 게 보이지. 당신도 한번 봐. 하고 권한다.
아내, 렌즈에 눈을 갖다 댄다. 에이구. 보이긴 뭐가 보여요. 히끗히끗 허옇기만 하네요.
그렇게 건성으로 보지말고 마음을 차분하게 가져봐요. 눈에 신경을 집중하고.

아내,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일어나며. 내 눈엔 새 비슷한 것도 안 보여요. 하고 체념하자 남자 망원경을 다시 차지하며 중얼거린다.
새가 저렇게 많은데 하나도 안 보인다니. 저런 썩은 눈 가진 사람하고 내가 사네…
그 말에 아내가 발끈한다. 뭐라구요? 썩은 눈요?
그럼. 저렇게 아름다운 것을 보지 못하는 게 썩은 눈이지 뭐야.
하며, 이리저리 망원경을 돌리던 남자, 갑자기 안색이 환해지고 회심의 미소가 인다. 건너편 아파트 거실인데 촛점을 맞추니 아릿다운 여성이 벌거벗은 몸으로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 기분까지 황홀해 진다.

주방으로 가던 주부, 분해서 돌아선다. 그래요. 당신에게 시집와서 당신 뒷바라지만 하다보니 눈이 썩었어요.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요… 하고 보는데 남편 표정이 심상치 않다. 망원경의 방향도 한강 쪽이 아닌 건너편 아파트다.

아니 여보. 지금 뭘 보는 거에요. 나도 좀 봐요. 하고 자리를 빼앗는다. 남자 망원경을 툭 건드려 방향을 바꾸며 딴청 부린다.
왜 이래. 한강 청둥오리 보고 있다니까.
아니에요. 방향이 그쪽이 아니었어요. 아내가 방향을 가늠하여 망원경으로 살핀다. 벌거벗고 춤추는 여자를 발견한다. 혈압이 오른다. 여봇! 이것이 새에욧?
남자 목소리 기어 들어간다. 뭘 보고 그래. 아무 것도 안 보인다는 그 썩은 눈으로.

주부, 성을 낸다. 끝까지 그럴 거에요? 젊은 아내가 두 눈 뜨고 지켜보는데서!
아내 눈에 금세 눈물이 고이더니 뚝뚝 떨어진다.
당신만 믿고 사는데… 당신이 내 앞에서 이럴 수 있는 거에요…
남자 마음 약해져 빌며 달랜다. 여보 잘못했어.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러나 아내는 더욱 서럽게 운다.

한참 울고 난 주부, 생각을 바꾼다. 아니지. 내 남편만 탓할 일이 아니지. 어딜 아파트촌에서 일요일 대낮에 젊은 여자가 벌거벗은 몸으로 남자를 유혹해? 이런 년을 그냥 둘 수 없지. 하고 벌떡 일어난다.
왜 그래. 어딜 가려고. 남자가 앞을 막는다.
비켜요. 그년한테 가서 사과 받고, 경고라도 하고 와야겠어요. 이대로는 분해서 못 있겠어요.
그 여자가 무슨 죄를 졌다고 사과를 해?
사과 안 하면 부녀회에 고발해서 징계라도 먹여야죠.

이런 답답한 사람. 잘못은 숨어서 훔쳐본 나에게 있다구. 우리에게.
아이구. 이제 바른 말 하시는군요.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젊고 싱싱한 여자가 알몸으로 있는데 안 볼 남자가 어디 있나.
그러니까 가서 다신 그러지 못하게 혼을 내 줘야 한다구요. 어서 비켜줘욧!

주부는 상대편 여자집을 찾아가 신경질적으로 초인종을 누른다. 안에서 누구세요. 한다.
나 건너편 사는데 할 말 있어서 왔어요. 목소리가 날카롭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안에서 말하자 여자는 코웃음 친다.
흥. 아직도 벗고 있는 모양이군. 단단히 혼을 내 줘야지. 어딜 아파트촌에서 대낮에 벌거벗고…
문이 열리고 여자가 나왔다. 나이는 너댓살 아래로 보이는데 눈이 부실만큼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에 주부는 기가 죽는다. 상냥하기까지 하다.
어서 오세요. 어디서 오셨죠?

주부, 약해지면 안 된다고 다짐하며 목소리에 힘을 준다.
나 저기 건너편에 살아요.
무슨 이야기신지…
문간에서 할 얘기가 아니에요.
어머, 그럼 들어오세요. 이쪽으로요. 네. 여기 앉으세요. 차를 한 잔 가져 올게요.
여전히 상냥하고 예의도 바르다. 집안도 여간 정갈하지 않다. 이런 여자가 왜 발가벗고?…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여자, 곧 차를 가져왔다.
드세요. 그리고 말씀해 주세요. 무슨 일이신지…
주부, 목소리를 누그러뜨린다. 생각보다 아름답고 친절하시네요.
어머. 그렇게 보이세요. 고맙습니다.
혼자 사시나요?
혼자 살다니요. 남편도 있고 딸도 있어요. 오늘은 남편이 딸 데리고 외출했어요.
어머. 젊어 보이는데…
젊긴요. 벌써 서른 셋인 걸요.
뭐에요? 그럼 나하고 같다구요?
주부 눈이 휘둥그래진다. 너댓살이나 아래로 봤는데. 그렇다면 나는 이게 뭐야… 아니지. 지금 그런 얘기 하러온 게 아니지. 맞아. 할 이야기는 해야지. 으흠. 하고 주부는 자세를 추스린다.
한 마디 해주려고 왔어요. 멀리서 보니 벌고벗고 사는 것 같아서.
어머. 하고 여자가 놀란다. 어디서 보셨는데요?
내가 본 것이 아니라 내 남편이 봤다구요. 내가 열이 안 나겠어요.

그랬어요. 그렇담 이를 어쩌지요? 이상하네요 아무리 봐도 여기를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건너편이 없는데요. 이리와 보세요. 어디 사시는 거죠?
저기요. 저어기 있는 아파트.
육안으로 보기에는 주부가 보기에도 먼 아파트다. 사람이 베란다에 서 있어도 보일둥 말둥한 거리다.
이상도 해라. 저기서 여기를 어떻게 보죠?
주부는 얼른 말을 돌린다. 남편이 탐조회원이라 우리집엔 고성능 망원경이 있다 소리를 어떻게 하나.
우리 남편 눈이 2.5 2.5라구요.

2.5라도 여기까진 못 봐요. 제 눈이 2.5인걸요. 얼핏 봤겠군요. 그러나 문제될 정도는 아닐 거에요. 저기서 여기가 어딘데… 여자는 순진하다.
하긴 여기와서 보니 그렇네요. 주부, 더 말을 잇지 못한다.
차나 마시고 가세요. 문제 아닌 것을 문제 삼지 마시고…
주부, 여자를 다시 본다. 피부도 탄력이 넘친다. 저도 모르게 감탄이 나온다.
어쩜 그렇게 피부도 고우세요. 나랑 동갑이라면서.
아름다움을 칭찬하는데 싫다할 여자가 어디 있을까. 자랑한다.
사실은 이게 바로 풍욕 덕분이에요.

풍욕요?
네. 벌거벗고 바람에 목욕하는 것을 풍욕이라고 해요. 피부가 더없이 싱싱해지고 탄력이 생긴다구요. 저 뒤에 숲이 있어요. 숲의 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트(phytoncid)라는 방향성 물질이 있는데 이 피톤치트를 마시거나 피부에 접촉하면 탄력이 살아나는 거에요. 심신이 맑아지고 안정감도 주어요.
어머. 그래요?
풍욕의 맛에 취하면 가급적 벗고 지내게 되어요. 피부에 윤기가 돌면 누가 제일 좋아하겠어요. 남편 사랑이 식을 줄 모른다구요.
어머어머 그렇군요.

아주머니도 해보세요. 저와 동감이라면 아주머니는 너무 늙었다구요.
주부, 차 잘 마셨어요. 하고 돌아온다.  
어떻게 됐어. 오히려 망신 당했지? 남편이 묻는다.
망신을 당하다니요. 당신 아내가 망신이나 당하고 다닐 숙맥으로 보여요?
그럼 한마디 해주고 왔나?
그럼 해 줘야죠. 어딜 아파트 촌에서 풍기문란하게 젊은 여자가 벌고벗고 꼬리를 쳐요… 다신 그러지 안겠다는 다짐을 받았죠.
대단하군.
나를 인정해 주는 말, 그말 진정이에요?
진정이지. 당신 억지는 알아줘야 한다구.

그리고 이튿날 새벽이 되었다.
잠옷 바람으로 거실에 나온 남자 눈에 희한한 광경이 들어온다. 아내가 벌거벗은 채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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