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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언제 읽어도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위선이나 불의에 대항하여 정의를 세우면서 인간성을 옹호하고 정신을 이끄는 따위는 다음 이야기입니다. 잔잔한 물결처럼 다가와 가슴을 파고드는 반취 이기윤의 소설들에는 독특한 향기가 있습니다.

중편
2002.02.02 0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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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문학창작지원금 대상작품입니다.




밤 열 시쯤 되었을 때, 중환자실 간호사가 우리를 찾았다.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중환자실 앞에서 기다려달라고 했다. 상태가 심상치 않은 모양이었다.  
"여기서 기다려 주시면 곧 의사선생님이 나와 말씀하실 겁니다."
간호사는 중환자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기다릴 수 없어 문이 닫히기 전에 쫓아 들어갔다. 들어가 아버지 누워있는 쪽을 보니 마치 영화촬영장 같았다. 중환자실의 의사, 간호사, 거의 전원이 아버지 병상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 가운데의 아버지는 벌거 벗기운 한 마리 늙고 털 없는 원숭이였다.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아아, 아버지!"
나는 그쪽으로 달려갔다. 두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한 명의 의사와 간호사 두 명이 재빨리 나를 막더니 문밖으로 밀어냈다.
"당신들 지금 무슨 짓 하는 겁니까?"
"일단 나가 계십시오. 곧 설명 드릴 겁니다"
"나도 옆에 있습시다. 그 분은 나의 아버지입니다"
"여긴 병원이에요. 병원 규정을 따라 주세요"
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또 나를 자극했다. 뜨거운 기운이 목을 타고 넘어왔다.
"병원이면 당신들 멋대로 해도 됩니까. 지금 내 아버지를 어떻게 하고 있는 겁니까?"
"곧 설명 드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 명의 힘이 나를 중환자실 밖으로 밀어내더니 쾅, 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이 나쁜 놈들!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아아, 아버지… 현기증이 왔다. 나는 비실비실 걸어 어머니 곁에 앉았다.
"어머니 예감대로 아버지가 정말 돌아가실 것 같아요"
"……"
어머니는 미동도 안 했다. 어둠 속의 한 곳을 응시하며 나무의자에 동상처럼 앉아 있었다. 원한이 극대화 된 나머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초리로 이모를 떠올려 보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파렴치하고 간악한 술수로,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힘에 의해 아버지 운명은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처했다고 믿는 게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어머니는 아버지 죽음을 넘어를 생각하는 지도 몰랐다. 옆에서 보는 어머니의 눈빛은 원망 보다 저주 쪽이었다. 어둠이 이모나 되는 것처럼 핏물 돋은 눈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중환자실 문이 열리더니 의사가 나왔다. 순식간에 우리 가족은 의사를 에워쌌다.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만, 끝내 출혈이 멎지 않아 이제 위급한 상황까지 왔습니다. 이렇게 8시간 이상 출혈이 계속되는 예는 거의 없는데… 어쨋든 이제 심장마비 증상도 있습니다. 시급히 수술을 해야만 합니다."
"어디서 출혈하는지는 알아냈습니까?"
"같은 말의 반복입니다만, 어디서 출혈하는지는 출혈이 멎어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수술은 어디를 어떻게…"
"짐작으로 의심 가는 곳을 열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수술하지 않으면 얼마 못 버티실 겁니다."
"……"
아무도 선뜻 말하지 못했다. 친척이 나설 일은 못 되었다. 일가 중에서도 어머니에게 우선권이 있는 사안이었다.  
"수술해서…" 어머니가 말했다. "살아나실 가망은 얼마나 될까요?"
어머니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짙은 체념이 배어있는 것이다.
"최선을 다 해봐야지요. 이 상황에서 무어라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수술을 하지 않으면, 오늘 밤을 넘기실까도 걱정됩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너무나 큰 결단 앞에서 어머니는 말을 망설였다. 내가 물었다.  
"다시 물읍시다. 원인도 모르는 채 수술한다는 것이지요?"
"원인을 찾아 출혈을 멈추게 하기 위해 수술하는 겁니다. 위기는 넘겨놓고 보자는 말이지요"
"……"
"동의해 주시면 바로 수술에 들어가겠습니다."
"수술은 누가 합니까? 참. 아까 과장님이 오신다 했는데 나오셨습니까?"
"동의를 해 주시면 과장님이 오시기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면 여태 전문의는 아무도 아버지 상태를 못 보았단 말입니까?"
또 뜨거운 덩어리가 목을 넘어왔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그 위급한 증세가 레지던트 수준의 판단에 맡겨져 온 것 아닌가. 의사는 태연하게 말했다.
"긴밀하게 전화하고 있으니까 과장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를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토요일 오후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보니 토요일 오후였다. 세간에 돌아 다니는 '자빠져도 코 깨지는 놈이 토요일 오후에 쓰러진다'는 말이 생각났다. 비로소 불길한 예감이 실감있게 머리를 스쳤다.


짧은 시간 가족회의를 했다. 수술을 하자는 쪽과 하지 말자는 쪽이 팽팽히 맞섰다. 어머니 의견이 반대였다. 이미 제 피가 하나도 없는 상태라지 않는가. 청천벽력 같고 애통하고 분하고 안타깝지만 어머니에겐 다른 의미의 체념이 있었다. 내 잘못이다. 내가 남편을 죽게 만들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수술을 해서 산다면 모를까, 살지도 못하고 가슴을 여는 수술만 한다면 육신조차 온전하게 갖고 가지 못 하는 것 아닌가. 일은 이미 저질러졌다. 아아, 이 일을 어쩐다. 어찌해야 마지막 가는 길 속죄가 될까. 괴로워하던 어머니는 이윽고 결심을 나에게 말했다.
"내 의견을 따라주었으면 한다. 수술 안 햇음 좋겠어. 어차피 가실 운명, 육신이나 깨끗하게 갖고 가시게"
"수술하지 말자구요?"
"그래. 까짓 몇 일 더 사시면 뭘 하니, 만신창이가 되어서 식물인간처럼"
"그래도 최선을 다해 봐야지요. 이대로 가시게 할 수는 없잖아요?"
"아냐. 수술하지 마. 인명이란 건 어차피 재천인 거야"

어머니는 결단을 내렸다.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며 눈물을 훔쳤다. 모두 말을 잃었다.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 그 말이 이런 경우에도 쓰이는가.
"시간을 지체해선 안 됩니다. 어서 동의를 해 주세요"
의사가 재촉했다. 어떤 쪽이든 결정을 해 줘야 했다. 의논 끝에 우리는 어머니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아내도 눈물을 보였다. 아버지의 임종이 엄연한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가족의 뜻을 의사에게 전했다. 의사는 전혀 기대 밖인 듯 어이없어 했다.  
"아니, 이대로 돌아가시게 한다는 말씀입니까? 최선을 다해 보지 않구요?"
"말을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가시기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수술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수술 안 하면 돌아가신다는 게 그렇게 확실합니까?"
"알았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할 수 없죠. 그럼 어디 가지 마시고 대기해 주십시오."
의사는 별 독한 가족 다 본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중환자실 안으로 사라졌다.


밤 열 시가 넘자 적막한 기운이 내리 눌렀다. 다른 중환자 가족은 지정된 보호자 대기실로 가거나 근처 여관에 방을 정했다. 우린 기다려달라는 말 때문에 중환자실 앞을 떠날 수 없었다. 친척 중에는 돌아가도 될 사람이 있었는데 그야말로 오늘 밤 돌아가실지도 모르는 분위기 때문에 아무도 가려하지 않았다. 조카 생질 중 몇은 병원 밖 포장마차에 앉아 있었다.  

굳게 닫힌 중환자실 문은 좀체 다시 열릴 기미가 없었다. 방송도 들리지 않았다. 십분 삼십분 한시간이 지나니 긴장이 조금씩 풀어지며 아버지 상태가 호전되는 것 아닌가 하는 희망이 한 쪽에서 피어나기도 했다.
두 시간이 지나 자정이 되었을 때 중환자실에서 우리를 찾았다. 드디어 올 것이 온 모양인가. 우린 침통한 얼굴로 중환자실 문 앞에 모였다.

당직 의사가 나왔다. 수간호사가 뒤따라 나왔다. 흰 가운 군데군데 피가 묻어있는 게 보였다. 한참 힘든 일을 하다 온 사람 같은 그는 말했다.
"한번 더 말씀드리려고 나왔습니다. 수술에 동의해 주십시오. 아니면 돌아가실 것 같습니다." 그는 이제 심장이 마비되어 회생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덧붙이며 유일한 시도는 수술뿐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몹시 괴로워했다. 내가 나섰다.
"수술하지 말라는데 자꾸 권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최선을 다해보고 싶은 따름입니다."
"수술하지 마세요. 가족회의 끝에 내린 결정입니다."

완강히 거부하자 그들은 종교가 무엇이냐, 수술을 거부하는 다른 이유가 있느냐, 물어왔다. 단 며칠이라도 더 사시게 하는 게 가족 된 도리가 아니냐 며 뒷말을 흘리기도 했다. 그것은 우리의 신경을 자극하는 말이었다.
"잠간 봅시다. 말이 지나친 것 같은데…" 나는 흥분했다. "내 아버지 일에 어떻게 당신들이 더 걱정을 합니까."
"의사이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습니까?"
"실례지만 지금 몇 년찹니까?"
의사는 자존심이 상하는지 대답하지 전에 나를 보았다.
"2년찹니다"
"수술해 봤습니까?"
"제가 하는 게 아니라, 동의해 주시면 과장이 지금이라도 오실 겁니다"
"당신 과장이 얼마나 유능한 박산지 모르지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나는 거칠어지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환자를 한번 보지도 않고 전화로 수술을 종용하는 것이 유능한 박사의 태도란 말이오? 내가 알기로 당신들은 환자의 증언에 귀를 기울인 적도 없는 사람들이오. 잘 들으시오. 하는 짓을 보니 수상쩍은 점이 한둘이 아닌데, 만약 당신들 잘못으로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요. 알겠오!"
거칠게 불신을 담아 말하자 의사는 입을 다물었다. 눈 꼬리를 치켜세운 간호사가 의사를 나꿔챈다.
"선생님. 포기 하세요. 대화가 통하지 않는 가족이네요. 뭐"
"뭐야?"
하고 쫓아가려니까 간호사 혼자 문을 쾅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런 버릇없는 것…"
용서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고정하십시오.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의사는 침착하게 말렸다. 그리고 "그럼 더 이상 수술을 권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들어가려 했다.

"잠깐 봅시다" 나는 그를 불러 세웠다. "한가지 부탁이나 합시다. 의식이 계실 때 임종을 지켜볼 수 있게만 배려해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임종까지 붙들고 있지 마세요. 회생이 불가능하면 내일 아침이라도, 차라리 환자를 가족 곁에 있게 해주세요."
어머니가 말했다. 의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또 한 번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했다.
의사가 안으로 사라진 뒤 다시 적막이 왔다. 수술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 마치 아버지의 죽음을 방조하는 것과 같은 죄첵감으로 다가와 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이 칼칼하다는 느낌이 들자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셨다.

곰곰이 오늘 일을 돌이키니 뭔가 잘못된 것 같은 의구심이 강하게 일었다. 영화촬영장 같았던 모습이 자꾸 머리를 어지럽혔다. 한편에서 출혈을 돕고, 한편에서 수혈하던 모습도 석연치 않았다. 어리고 경험 없는 의사들이 당황하여 초기 대응을 잘못한 거 아닐까. 무리한 대응으로 결정적인 실수를 범한 뒤 이를 만회하려고 갖은 방법 다 쓰는 것 아닐까. 안 되니까 악착같이 수술하려 하고… 그래, 토요일 오후에 무슨 의사다운 의사가 있겠어. 응급실에 있는 건 인턴 같았어, 그리고 레지 2년차가 중환자실에서 뭘 알겠어. 과장 놈은 골프나 치러 갔었겠지. 그동안 상황은 돌이킬 수 없게 된 거야.

의심이 일기 시작하니 가라앉지 않았다. 그 의심이 맞는 것 같았다. 날이 밝으면 여기저기 알아보자. 병원의 잘못이라면 용서하지 말자. 다짐도 하게 되었다.
그날 밤 중환자실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환자 상태가 호전되었으니 가서 자라는 말도 없었다. 우리는 서성거리면서, 혹은 긴 나무의자에 앉아 졸면서 밤을 보냈다.


자유여행사의 부도는 곧 우리 집의 파산이었다. 아버지는 쉽게 재기하지 못했다. 철도청에서 퇴직한 비슷한 입장의 동료들과 어울려 특수 자물쇠나 회전 선풍기를 고안하고 만들어 특허를 신청하는 따위 시도는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일찍 남편을 잃은 이모는 그 무렵 이십년 아래인 아들 같은 남자와 재혼을 했다. 이모는 어디서 들었는지, 건강하게 오래 살고 즐겁게 살려면 일생에 세 번 결혼하는 게 좋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십에 사십 된 남자와 살고, 여자가 사십이 되었을 땐 이십 세 남자와 살고 환갑이 넘어서는 제 또래 노인끼리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사는 게 최상의 인생이라는 논리였다.

실제 이모의 첫 남편은 열여덟 살 위였다. 그리고 두 번 째 남편은 스무살 연하이니 나중에는 모르지만 현재까지는 당신이 말한 대로 사는 것이었다. 혼자 몸이라면 스무살 연하와 살든, 서른살 연하와 살든 상관할 바 아니었다. 하지만 세 명의 자녀가 있었다. 새 남편과 큰아들의 나이차이는 네 살에 불과했다. 두 딸도 어쩔 줄 몰라 했다. 결국 큰아들과 큰딸은 결혼도 안 한 상태에서 집을 나가 버렸고, 어린 막내딸만 집에 남았다.  

이모의 그러한 고집과 처신은 친가는 물론 외가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모두들 이상하다며 외면했고 왕래조차 꺼려했다. 하지만 우리 집에는 자주 왔다. 어머니와 이모간 자매의 정이 유별났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이모를 외면하기 보다 측은하게 여기며 즐 잘 대해주었다.
어머니는 이모의 삶을 남편 복이 없는 것으로 일반과는 다르게 해석했다. 그건 어머니와 이모가 함께 용하다는 철학관을 다녀온 뒤부터였다. 이모는 남편의 명을 가로막는 운세를 타고났다고 했다. 운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명(命)을 가로막는 운세라는데 신경이 쓰였던 것인데, 첫 남편과 사별하면서 그 예언은 심각해졌다.

누가 퍼뜨렸는지 외가에서는 모두 그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이모 대하기를 꺼려했다. 그런 운을 가진 사람과의 관계는, 친지든 혈육이든 남이든 간에 해만 있을 뿐 득은 없는 일이었다. 물론 어머니도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머니만은 그런 이야기를 개의치 않았다. 아버지도 개의치 않는 편이었다. 이모에게 부담 없는 집은 우리 집이 유일했다. 그러나 이모가 아들 같은 사람을 남편으로 얻은 것에 대해서는 아버지도 관대하지 않았다.


말이 많았던 것에 비해 이모는 구순하게 살았다. 정확히 말하면 적어도 이모는 불만없이 살았다. 하지만 큰아들은 대구로 내려가 살며 이름까지 바꿔 버렸고, 큰딸은 직장을 얻지 못해 술집 호스티스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일가 친척의 반응은 더욱 냉담해졌다. 이모는 모든 것을 버려도 좋다며 그 연하의 남자와 살았다.
우리 집은 몹시 어려워졌다. 아버지의 재기 시도는 실패만 거듭했다. 끼니 간 데가 없어지자 어머니가 돈벌이에 나섰다. 장사도 하고 막일도 하고 식당 일도 거들었다. 아버지는 차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술을 마신 뒤의 언행이 난폭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에게 욕을 퍼붓는 것은 예사였고 심지어 손찌검까지 했다. 하루는 이모를 욕했다. 남자의 명을 가로막는 팔자가 이 집을 자꾸 드나들어 하는 일마다 안 되고 심지어 내 명까지 가로막는 것 같다고 윽박질렀다. 어머니는 펄쩍 뛰며 천벌 받을 소리 말라고 대들었다. 그 날의 부부 싸움은 온 동네에 소문이 났을 정도로 심했다.

그 일이 있은 이후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이모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나도 점점 이상한 기분이 들어 이모가 싫어졌다. 그러나 그럴수록 어머니는 이모를 감싸며 측은하게 여겼다. 그러다 보니 이모의 우리 집 방문은 어머니 계실 때만 살짝 다녀가는 식이 되곤 했다.
석 달인가 지났을 때 아버지는 또 술을 먹고 들어와 어머니에게 행패를 부렸다.
"야 이년아. 왜 내 말 안 듣는 거냐. 언닌지 마년지 이 집 출입 못하게 하라고 했지. 오늘 사주를 보니까 그년이 우리 가정을 해꼬지 해서 하는 일마다 안 된다고 하더라. 만나고 싶으면 가서 만나란 말이야 이년아"

아버지는 아무거나 집어 어머니를 때렸다. 어머니도 지지 않았다.
"못난 놈 같으니. 배웠다는 놈이 고작 그 모양이냐. 차라리 날 죽여라. 저 못난 탓을 왜 죄없는 언니에게 씌우니!"  
"보자하니 이 년이 제 언니 못지 않게 남편 죽이는 년이구나 이게"
"제 밥벌이도 못하는 놈이 맨날 무슨 낯짝으로 행패냐. 세상이 부끄럽지도 않냐 이 못난 놈아"
아버지에겐 이성이라는 게 없었다. 어머니도 악에 받쳐 그 자리서 맞아죽을지언정 물러서지 않았다. 그 날의 싸움은 서로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아버지의 이러한 변화를 이모도 알고 있었다. 자기를 싫어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모는 모르는 척 출입했다. 사람들은 자매의 특별한 정을 억지로 어떻게 막느냐고 어머니를 두둔했다. 사실 어머니에겐 그런데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하루하루 먹을 것을 벌어다 자식 먹이는 일이 더 급했다. 그만큼 생활은 절박할 정도로 무너져 있었다.


연하인 이모의 새 남편은 어린 나이에 온통 주역에 골똘해 있었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하여 이미 역리(易理)를 깨우쳤다는 말도 들렸다. 그는 젊지만 늙은이처럼 행세하면서 사주며 관상, 작명 등을 곧잘 봐 주었고, 그것으로 촌지나 복채도 챙겼다. 그러나 함께 사는지 오 년만에 그는 병석에 누웠다.
그는 역술가답게 자신의 병을 역으로 풀었다. 그리고 일가 친척이 이모를 외면하고 미워하는 나머지 그 원귀가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는 이모를 시켜 일기 친척 자기 병문안을 와주도록 청했다. 그러면 병이 낫는다는 것이었다.

이모가 청할 수 있는 사람은 내 어머니뿐이었다. 어머니는 시간 나는 대로 가 주었다. 혼자라도 자주 가면 형부의 병이 나을 석으로 믿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아버지와의 사이는 나빠졌다.
어린 형부는 어머니에게 아버지와 함께 와 줄 것을 청했다. 아버지가 거절하자 자기 병의 근원이 아버지의 미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병인을 짚어 버렸다. 어머니는 그런 말 저런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는 사이 어린 형부의 병은 깊어갔고, 3년 병석에 누운 뒤 저 세상으로 갔다. 이모는 남편이 그렇게 원했는데 우리 아버지가 한 번도 찾아주지 않은 게 한이 되었다. 좀 더 살 수 있는 것을 아버지 때문에 일찍 죽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아버지는 장례식에는 참석했다. 그때쯤 아버지도 인생에 지쳐있었다. 일을 한다는 것도, 다시 일어나 보겠다는 패기도 꺾이고 말았다. 이모 때문에 일이 안 된다는 따위 생각에도 지쳐 버리고 말았다. 모두 기우 같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장례식에서 아버지는 이모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이모는 이모대로 미안하다고 하면서 해묵은 감정을 화해했다. 그 광경을 누구보다 좋아한 건 어머니였다.
다시 세월이 흐르면서 옛일은 희미해졌고 다시 왕래는 잦아졌다. 홀몸이 된 이모는 사흘이 멀다하고 우리 집에 와서 지냈다.


동녘 하늘이 훤히 밝아오는 것을 보면서 나는 병원을 빠져 나왔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새벽길을 걸으면서 어젯밤 간호사과 실랑이질 한 것을 후회했다. 중환자를 맡겨 놓은 상태에서 그러는게 아니었다.
그러나 의혹 또한 떠나질 않았다. 수술하지 않으면 곧 돌아가신다고 그렇게 간절하게 동의를 구하더니 새벽까지 아무 전갈이 없는 것도 수상했다. 아무래도 저희들만 아는 무슨 실수나 과잉 처치가 있었던 것 같았다. 적어도 심증으로는 돌아가신다면 의료사고일 확률이 높았다.  

혹 지난밤의 언쟁으로 의사나 간호사들이 환자를 내버려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뻘値졔刮?숨을 거두셨다면, 그래도 연락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연락이 없는 것은 아직 살아 계신 증거이다. 아니 어쩌면, 처치를 한 것보다 그냥 내버려 둔 것을 계기로 호전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버지를 퇴원시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시계를 보니 여섯 시 이십 분이었다. 7시 면회 시간만 되면 모든 게 확인될 것이었다.

여름이지만 새벽바람은 찼다. 병원 담 길을 두어 바퀴 산책하니 날이 완전히 밝아졌다. 머리도 맑아져 왔다. 모든 걱정도 어제 밤처럼 무겁지 않았다. 이것이 새벽의 힘이라면 새벽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었다. 새벽의 신선하고 넘치는 에너지가 내 육체에 스며들어 마치 과거와 밤의 노폐물을 정화시켜주는 듯 상쾌했다.
문득 이 정도의 새벽 기운이라면 아버지를 소생시켜 줄 것이란 기대가 스쳤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면, 그리고 새벽이 모든 자연에 신선한 활력을 뿌린다면, 아침 면회 때의 분위기가 어제와 크게 다를 것으로 믿어졌다.
일곱 시에 늦지 않게 나는 중환자실 앞으로 갔다.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동생 내외는 벌써 면회복을 입고 있었다.
"어디 갔었어요?" 하며 아내는 들고 있던 면회복을 내밀었다. 면회자가 많아 가운이 모자르기 때문에 갖고 있던 것이었다.
"산책…" 하고 말하는데 문이 열렸다. 환자 가족들은 뒤질세라 우 - 들어가 각각 자기네 환자를 에워쌌다.

아버지의 모습은 놀랍게 평온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모양으로, 깊고 편안한 잠에서 깨어난 직후처럼 혈색도 좋았다. 늘 아침에 보던 얼굴 보다 더 건강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어머니의 반가움이 누구보다 컸다.
"살아났군요. 이제 괜찮으세요?"
어머니는 남편의 이마에 손을 대 보았다. 아아, 살아나셨다. 곧 돌아가실 것이라던 분이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말했다.
"이봐요, 어제 밤에 의사들이 수술해야 한다고 여러 번 그랬어요. 수술을 하지 않으면 곧 돌아가신다면서…" 어머니는 반갑고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
"수술을?"

아버지 목소리엔 힘도 있었다. 원기도 회복되었다는 증거였다.
"수술을 왜?… 절대 수술에 동의하지 말아, 나는 지금 식중독이야. 식중독. 이 병원의사들이 도대체 내게 말할 기회도 안 주고 듣지도 않아. 그냥 못살게만 굴지…"
"식중독도 심하면 수술해야지요"
"글세, 내 몸은 내가 알아, 설혹 죽더래도 수술은 못 하게 해라."
"알았어요, 알아서 할게요. 잠 좀 주무셨어요?"
어머니는 팔을 어루만지다 손을 잡았다. 팔엔 온통 주사바늘, 핏자국 투성이었다.
"응, 좀 잤어, 자고 나니 이렇게 편안하네. 마치 악몽을 꾼 것 같애"
"당신, 아직은 돌아가시면 안돼요"
"이제 괜찮은데 뭘… 괜찮아"
아버지는 주위를 보았다. 가족의 얼굴을 하나 하나 유심히 보았다. 드물게 온화한 눈길이었다.

"천만다행으로 새벽 세 시쯤 일단 출혈은 멎었습니다."
의사가 다가오면서 말했다.
"그러나 회복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출혈부위에 피가 엉겨붙어 일시 멎은 것으로 보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괜찮아지신 것 같습니다."
어쨌든 나도 기분이 좋았다. 그냥 이대로 가만히 있었으면 싶었다.
"과장님이 아침에 나오신다고 했습니다. 오시면 여러 가지 진찰을 해 보실 겁니다"
의사는 묻지도 않는데 말을 계속했다. 어제 밤 일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간호사가 면회시간 종료를 알려왔다. 나는 허리를 굽혀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이제 괜찮아지실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우리는 중환자실을 나왔다. 모두 표정이 밝아졌다. 이제 한시름 놓았으니 어디 가서 아침이나 먹자는 이야기가 부담 없이 나왔다.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아침을 먹으면서 많은 이야기가 오고갔다. 여차 하면 퇴원할 준비를 해야되지 않느냐는 얘기도 나왔다. 어제 밤의 상황과 아침 모습이 너무 기적적으로 호전된 데 대한 기쁨과 의아심이 교차되기도 했다.

의사의 판단이 잘못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젊은 의사들이 중환자실 당직을 서는 것에 불만도 나왔다. 하지만 사회구조가 그러니 어쩔 수 없느냐는 식이었다. 갑자기 쓰러져도 토요일과 일요일은 피해서 쓰러져야한다는 소리도 또 나왔다. 아버지의 회복된 모습은 가족 모두를 우울함에서의 해방 시켜 주었다.
천천히 아침 식사를 하고 병원에 돌아가니 우리를 찾고 있었다. 원무과 직원이 우리를 보더니 빨리 2층 내과로 가보라고 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위내시경 검사를 받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그렇게 심했던 출혈이 겨우 멎었다면서… 이렇게 서둘러 위내시경 검사를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들 말대로 라면 회복된 것도 아니요 피가 엉겨붙어 잠시 출혈부위를 막고 있는 것 뿐인 것을… 내과 과장은 잠시 후모습을 나타냈다.

"방금 내시경 검사를 끝냈습니다" 고 그는 말했다. "조직 검사를 해 봐야겠습니다."
"조직검사요?"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네. 위암의 가능성이 많습니다."
"가능성이 얼마나 됩니까?"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위 상반부에 무엇인가 검은 것이 잔뜩 엉겨붙어 있습니다. 수술을 하면 확실히 알 수 있겠는데…"
"수술요?…"
나는 하마터면 '이 새끼들이 수술에 환장했나' 하고 말할 뻔했다. 다혈질인 둘째가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수술 얘긴 꺼내지 말기로 했는데 왜 자꾸 꺼내는 겁니까?"
과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런식으로 말씀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수술이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잠깐 봅시다" 내가 나섰다.
"잘 모릅니다만, 지금 환자에게 내시경 검사는 무리 아닙니까? 간신히 출혈이 멎었고, 그것도 피가 엉켜붙어 멎은 거라는 데 그 식도에 내시경을 집어넣습니까?"
"조금 무리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다시 출혈이 시작되면 그땐 거의 끝장입니다."
"이보십쇼. 내가 알기로 병원이 환자나 환자 가족을 무조건 무시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도대체 이 병원은 설득력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 내시경 검사 자체로 상태가 악화되었다면 어떻게 책임지실 겁니까?"
나는 정색을 하며 대들었다. 과장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는 듯 했다.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만둡시다."
"뒤로 감추지 말고 우리가 알아듣도록 설득을 시켜달라 말입니다."
"우리의 치료행위는 언제나 실험일 수 있습니다"
"우리 아버진 실험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판단이 확실치 않은 상태에서는 절대 칼을 대서 안 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말로는 승복하지만 얼굴에는 노기가 등등했다. 그가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자 어머니는 나를 나무랐다.
"얘야! 여기가 어디냐?"
"괜찮아요 어머니, 이젠 의사도 달라져야 해요. 환자 위에 함부로 군림하던 시대는 지났어요. 그들 스스로 신뢰받도록 노력해야 해요"
"그래도 병원을 믿어야지"
"솔직히 이 병원이 믿음이 안 가요… 아버지를 옮기고만 싶어요"
"오늘 일요일인데 어디로 옮기니… 아버지가 계신 동안은 의사를 살살 달래야지. 그러지 마라"

어머니는 나를 타일렀다. 잠시 후 내과 문이 열리고 아버지를 눕힌 침대가 굴러 나왔다. 다시 중환자실로 옮겨지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지친 모습으로 신음했다. 아침과는 정반대의 참담한 모습이었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나는 아버지 의식을 확인했다. 아버지는 입술을 움직거렸다. 그러나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두 번째 남편을 잃고 홀몸이 된 이모는 몇 해 안 가 머리칼이 희어지기 시작했다. 새치가 눈에 띠는가 싶더니 수가 늘어났고 순식간에 전체가 하얗게 변했다. 손이며 피부며 얼굴은 아직 오십대로 젊은데, 그러나 머리는 눈이 부실만큼 하얗게 변화했다. 이모의 유난히 흰머리를 두고 어떤 사람은 보기 좋다고 했지만 섬쩍지근하다는 사람이 많았다. 무서운 뒷말을 흘리기도 했다.

"머리가 눈부시게 희고 빛나는 사람이 있지. 조심해야 하네. 그런 사람의 과거 행적을 보면 두어 사람 이상 희생자가 나오지. 이미 남의 기운을 빼앗아 사는 사람인 게야. 또 앞으로도 살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서슴지 않을 사람들이야."
이모의 희고 빛나는 머리와 과거의 행적을 보면 부인할 수만도 없는 말이었다. 제명에 죽지 못한 사람들의 한이 제명을 재촉한 사람에게 붙어 빛을 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 원귀를 만날까봐 더욱 죽지 않으려 하고, 살기 위해 어떠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고 했다.

이모의 우리 집 방문은 다시 잦아졌다. 아들딸로부터 조차 외면 당하는 처지이니 갈 곳이 따로 없었다. 우리 집에나 와야 잠시라도 가족 분위기에 젖어볼 수 있었다. 조금 나아졌다지만 여전히 가난하여 마음 고생이 심한 어머니에게는 위안이었다. 아버지는 많이 누그러져 싫다 소리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기는 편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직장 없이 허송세월 하는 처지여서 발언권도 없었다. 이모는 그렇게 우리 집을 맴돌았고 집안 일에 사사건건 자문역할을 했다.

나는 그 이모가 좋아지지 않았다. 아니 점점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밤에 동네 골목에서 마주칠 때면 그 빛나는 하얀 머리카락이 몸을 오싹, 하게 했다. 찬바람이 휙-휙 부는 듯도 했다. 날이 갈수록 나는 이모를 슬슬 피하게 되었다. 그런 나에게 이모는 어김없이 불만을 터뜨렸다. 어머니는 나를 꾸중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나의 느낌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갈수록 백수건달에도 지친 모습을 보였다. 술에 파묻혀 보낸 세월만 십여년이었다. 희망도 패기도 오기도 모두 사그라지는 듯 했다. 잠잘 때면 어김없이 악몽에 시달렸다. 낮잠 조차 아주 고통스러워 보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폭력을 쓰는 일도 없어졌다. 시들어 가는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죽고 싶다고 독백을 쏟아내곤 했다.

이상한 것은 아버지 입에서 '죽고 싶다'는 말이 나오면 어김없이 이모가 방문하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그 말을 자주 했고, 이모도 자주 찾아 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우연 같지 않게 맞아떨어지는 날도 많았다. 어머니는 '전생의 인연이거나 내세의 인연일 것'이라며 웃어 넘겼다.  

가난에 지친 어머니는 어느 날부터 교회를 찾았다. 그렇게 라도 해야 마음의 의지가 되는 듯 했다.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반가워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교회 다니는 꼴이 보기 싫다며 이모가 발을 끊은 것이다. 이모가 안 온다고 해서 문제될 게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늘 오던 어른이 교회를 트집잡아 발길을 끊은 것은 마음에 걸렸다.


낮 12시에 10분간 우리는 또 아버지를 면회했다. 아버지는 어제밤과 같은 참담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의사는 출혈이 다시 시작되었다고 했다.
무지한 눈에도 과잉처치가 원인으로 보였다. 수술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함부로 다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중환자실은 무슨 짓을 해도 알 수 없는 저희들의 절대 공간이었다. 아버지 양손은 다시 난간에 묶여 있었고 입에는 마우스피스가 물려 있었다. 물론 스토막튜브로 위장출혈을 돕고 있었다.

우리를 보자 아버지는 있는 힘을 다해 손을 비틀었다. 나는 재빨리 손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마우스피스를 뽑아버렸다. 그리고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다. 의사는 기겁하여 일편 간호사를 부르고, 일편 나를 제지했다. 나는 아버지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어머니도 허리를 굽혔다.
"아버지 말씀하세요"
"퇴원시켜다오, 아니면 병원을 옮겨다오, 여기 의사들은 나를 죽이려고 해!"
"의사가 왜 당신을 죽여요, 그런 소리는 마세요"
어머니가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게 애원하듯 했다.
"병원을 옮겨줘! 아니면 난 정말 죽는다"

아버지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간호사가 셋이나 달려와 나를 밀쳤다. 그녀들은 익숙한 솜씨로 아버지를 조금 전 상태로 만들어 놓았다. 아버지는 짐승처럼 온 몸으로 괴로워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점잖아 보이는 분이"
수간호사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아들이시라면서, 아버지가 한 시라도 일찍 돌아가시는게 좋겠어요?"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
심장이 끓으며 분노가 용솟음 쳤다. 생각 같아서는 따귀라도 올려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행동할 수 없는 특별한 공간이었다.  

"지금도 위독한 상황이세요. 가만히 만나보시고 나가세요. 이제 시간도 다됐어요"
그녀는 그렇게 내뱉고 돌아섰다. 나는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은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마음만 뜨거울 뿐, 겉은 얼어붙어 꼼짝도 못했다.
면회 직후 우린 다시 가족회의를 했다. 병원을 옮기자는 게 중론이었다. 그러나 일요일이어서 가야할 곳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보호자 입장에서 병원을 못 믿어 다른 병원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불신을 바닥에 깔았다는 측면에서 병원 사회가 가장 경계하는 환자일 수 있었다. 어디로 옮길 것인가 는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다시 출혈이 시작됐다면 업고 갈 수 없는 일이었다. 앰블런스가 있어야 하는데, 일요일날 병원의 요청도 아닌, 환자의 요청에 의해 다른 종합병원까지 앰블런스를 보내줄 병원이 과연 있을까. 병원이 나서서 보다 큰 병원으로 옮기는 것이라면 문제없겠지만, 이건 경우가 달랐다. 퇴원 수속을 밟기 전에 병원부터 알아봐야 했다. 친구 선후배 가림 없이 모든 가능한 사람을 떠올렸다. 나는 선배가 진료부장으로 있는 G종합병원에 전화를 했다. 동생은 서울대학병원에, 누이는 국립병원에 각각 인연을 찾아 아버지를 옮길 수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기로 했다. 우선은 의사가 딸린 앰블런스를 보내주어야 하고 입원실도 있어야 했다. G종합병원 진료부장은 골프 치러 가고 없었다. 오후 너댓 시 경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힘없이 전화기를 놓고 대기실로 갔다. 각각 알아본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대학병원도 국립병원도 입원실이 없다는 답이었다. 무엇보다 일요일이라 변변한 의사가 없으니 정히 옮기려면 내일 다시 연락하라는 답이 공통이었다. 보나마나 G병원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한참 걱정을 하고 있는데 슬그머니 끼어 드는 이방인이 있었다. 주부였다. 우리가 아버지 이야기 하는 것을 그녀는 다 들은 것 같았다.
그녀는 '아이구 우리 아버지와 꼭 같은 경우'라며 장황하게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 아주 꼭 같은 상황에서 그녀는 T라는 개인병원을 택해 아버지를 구했다는데 이야기가 실감 있었다. 아마 자기가 소개하면 앰블런스도 보내줄 것이라고 했다. 의사가 어찌나 박식하고 자상한지 모른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녀가 가르쳐주는 대로 전화해 보았다. 과연 그곳에선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퇴원 수속을 마친 뒤 다시 연락하기로 했다. 급히 의사를 찾았다. 의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였다.
"함부로 옮길 형편이 못 되는데요. 어느 병원으로 가시려고 합니까?"
"T병원입니다."
그러자, 의사는 웃음을 흘렸다.
"누군가 알려주었군요. 다시 생각하십시오. 규모나 시설이 월등한 병원이라면 저희가 막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는 사람이 아니면 현혹되지 마십시오. 그 여자가 말하는 T병원이란 형편없는 병원입니다."

의지가 약해진 보호자들 사이에 파고들어 충동질하고 특정병원을 선전하는 모객꾼이 수도 없이 드나든다는 것이다. 그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러나 어쨌든, 이 병원은 떠나야만 했다. 당사자인 아버지가 소원하지 않는가.
"지금 G종합병원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거긴 어떻습니까?"
"G병원이면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과연 앰블런스를 보내줄까요? 잘 아는 분이있으면 몰라도"

의사는 그렇게 말했지만 초조해 하는 빛이 역력했다. 이 병원을 나가게 해달라고 애원하던 아버지 모습이 또 떠올랐다. 나는 결정을 내렸다.  
"거기 진료부장을 잘 압니다. 퇴원수속을 밟게 해 주십시오"
의사는 잠시 망설이다 체념한 듯 말했다.
"알았습니다. 원무과 서류를 보내겠습니다"


원무과에선 퇴원 수속을 질질 끌었다. 일요일 오후, 그날 따라 일을 보려는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원무과 앞에 앉아 나는 계속 G병원과 연락을 시도했다. 세 시 오십 분쯤 진료부장이 연결되었다. 나는 구세주하고나 통화하게 된 듯 감사하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진료부장의 답은 기대만큼 따뜻하지 못했다.
"일단 K병원에 입원했다는 말이지요… 상황이 그렇다면 앰블런스야 보내줄 수 있는데… 그러나 우리 병원도 오늘이 일요일이라… 내일 옮기면 안 될까요"
"내일이면 늦을 것 같습니다. 웬지 그런 기분이 듭니다."
"얘기만 들어선 잘 모르겠지만, 수술하자는게 무리가 아니에요, 나도 수술을 권할 것 같은데… 가슴을 열어서 원인을 빨리 찾아내야지요"

"어쩌다보니 수술을 해도 여기선 못할 입장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좀 도와주십시오"
"알았어요. 그럼 일단 앰블런스를 보내지요"
그 사이 시계는 4시를 가리켰다. 원무과 직원에게 말했다.
"30분 이내에 G병원 앰블런스가 도착합니다. 수속을 서둘러 주십시오"
"환자 상태가 나빠졌다고 합니다. 의사가 와야만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예예. 의사도 오기로 했습니다."
"꼭 오는 거죠?"

원무과 직원은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나타냈다. G병원 진료부장에게 전화했다.
"앰블런스를 막 출발시켰어요. 곧 갈 겁니다." 진료부장은 그것부터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의사가 함께 와야만 환자를 내어준다고 합니다. 아마 상태가 나빠서 그러는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진료부장은 이해를 못했다. "무슨 소립니까. 의사가 와야 환자를 내준다는 게?"
"제 생각엔 아마… 책임소재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요."
"그건 말이 안됩니다. 일단 이쪽 앰블런스에 환자가 실리면 그 순간부터 우리 병원 책임입니다. 그런데 쫓아갈 만큼 한가한 의사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주장을 할까요"
"얘기를 들어보니 문제가 있긴 있는 것 같군요. 어쨌든 보호자가 환자 옮기는 것을 병원이 막을 수는 없습니다. 급히 보내세요. 앰블런스 도착할 때쯤 내가 병원에 나가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원무과 직원은 내가 통화 끝내는 것을 기다려 말했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진료비 계산이 안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됩니까"
"퇴원보증금을 내시고 퇴원하세요. 정확한 계산은 시간 나실 때 와서 하시고요"
"얼마를 내면 됩니까?"
에 또… 하고 대충 넉넉하게 계산을 하는데 아내가 쪼르르 다가와 가족이 모두 모인다고 알려왔다.
"얼마를 내면 됩니까. 빨리 좀 합시다."
"잠깐만 기다리시라니까요"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있었다. 아니 주먹이 근질거렸다. 더 참을 수 없어 한 마디 하려는 찰나, 원무과 전화 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직원은 '됐습니다. 오십만원만 내고 일단 퇴원하시지요'하고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나는 참고 돈을 세어 디밀었다. 그런데 전화를 받고 난 원무과 직원의 안색이 변했다.
"보호자님. 중환자실에서 급히 찾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환자가 위독한 모양입니다. 바로 올라가 보십시오"
나는 한걸음에 5층 중환자실로 올라갔다. 이미 우리 가족은 다 모여 있었다. 어머니는 울고 있었다. 동생도 통곡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앞에 있는 의사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퇴원하실 수 있게 준비를 하는데… 또 심장마비가 왔습니다"
"그래서요?"
"……"
"그래서 어쨌단 말입니까?"

동생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 개새끼들! 소리가 튀어 나왔다.
"너 왜 이래!"
하고 동생을 말렸지만 나 역시 의사 멱살을 잡고 머리로 들이받고 싶은 거친 욕망이 부글부글 끓었다. 호흡도 거칠어졌다.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동생은 더 참지 못 하고 욕설을 뱉기 시작했다.  
"이 개새끼들아. 너희들 하는 짓이 처음부터 수상했어. 너희들 뭔가 엄청난 실수를 했지. 이제 병원을 옮기면 들통이 날까봐 내 아버지를 죽인 거지. 아니면 아니라고 해 봐! 어서 말해봐 이 개새끼들아!"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뭐가 지나쳐. 아니라고 해보라니까. 너희들 교회 나가잖아. 성경에 손을 얹고 아니라고 해봐! 이 살인마들아."

"이러시면 안됩니다. 저흰 최선을 다했습니다."
"뭐야 이새끼들, 최선?"
어머니가 말렸다. 아니, 가족이 모두 나를 말렸다. 이성을 잃으면 안 된다고 했다. 의사가 일부러 그랬겠니. 일부러 환자 죽이는 의사가 어딨어.
송구한 듯, 머리 숙이고 서 있던 의사는 무겁게 말했다.  
"고정하시고 임종 준비를 하도록 하십시오."
아아, 이런 때는 어떻게 처신하나. 이 끓는 분노를! 이건 수긍할 수 없어. 이건 뭔가 있는 거야. 살인일 수도 있어. 어떻게 증거를 보전하고, 어디서부터 풀어가지?

의사는 또 말했다.  
"어디서 임종을 맞으실 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곳까지 저희 앰블런스로 모시겠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이렇게 돌아가셨단 말인가? 예순 일곱이라는 나이에… 벽 하나를 사이로 온 가족이 있었다. 그러나 혼자 쓸쓸히 돌아가셨다. 아니, 손발 묶인 털 없는 원숭이가 되어 저항하다 심장이 마비되었는지도 모른다. 이건 석연치 않아. 수긍할 수 없어. 유언 한마디 못 남기고…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비통해 하는 어머니를 위로할 여유도 그 순간의 내겐 없었다.


누나가 먼저 직장을 가졌고, 이어 내가 졸업하고 돈을 벌면서 우리 가정은 비로소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하도 극심한 가난을 겪었기에 우리는 극도로 절약하며 저축을 했다. 3년 후 동생까지 무난히 취직이 되자 형편은 달이 다르게 나아졌다.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어머니는 그 돈으로 구멍가게를 차렸다. 아버지를 제외하고 온 식구가 돈을 벌게 되었다. 그때의 어머니에게 돈이 모이는 것 이상의 즐거움은 없었다.

가게가 잘 되고 바빠지자 어머니는 교회 가는 일도 그만 두었다. 본디 독실한 신자도 아니고, 가족이 다니는 것도 아니요, 교회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분도 아니어서 나가든 안 나가든 어머니 존재를 알아줄 사람도 없었다.

어머니의 꿈은 우선 내 집을 장만하는 것이었다. 어머니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늘 사람이란 고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태어나 자란 곳을 고향이라 한다면 고향 없는 사람이 없겠지만, 가족 단위에서 보는 고향은 또 달랐다. 다만 한 뼘의 땅이라도 있어야 그곳이 한 가족의 새로운 고향이 되고 뿌리를 내리는 법이라고 했다. 뿌리 없이 떠도는 인생은 ― 비록 생활이 풍족하다 해도 ― 절대로 인간다운 삶의 흔적을 남기지 못하는 법이라고 했다. 때문에 어머니는 아주 좁은 집이라도 단독주택을 원했다. 어머니 말씀대로라면 아버지는 그것을 갖지 못했기에 떠돌이 인생으로 사는 셈이요, 아들딸까지 그렇게 살게 할 수 없다는 게 또한 어머니 의지였다.

어머니의 꿈은 나에게, 우리 가족의 고향이 어디인가를 생각하게 했다. 부모가 결혼하여 첫 살림을 차린 곳은 내가 태어난 곳과 같은 서대문 순화동의 철도관사였다. 육이오 전쟁으로 순화동 관사가 모두 파괴되자 휴전 후에는 효창동 철도관사로 옮겨 살았다. 태어난 곳은 여학교 운동장이 되었다. 세 살부터 열 다섯 살까지 효창동 관사에서 자랐다. 효창동은 나에게 가장 추억이 많은 곳이 되었다.  

관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공원이 있었다. 커다란 연못이 있고, 연못 가장자리로 넓은 둑이 있었다. 한여름이면 온 동네사람이 둑에 돗자리나 멍석을 펴고 앉아 더위를 식히곤 했었다.
우리 집 옆 길은 공덕동에서 내려오는 경사진 길이었다. 가끔 차가 다니는 이 비탈길에서 겨울이면 스키를 즐겼다. 대나무를 쪼개 머리 부분을 불에 그을려 구부린 원시 스키였다. 우린 그 스키를 하루종일 타도 지칠 줄 몰랐다.

아버지는 그때 기차로 출퇴근 했다. 집에서 기차역까지 걸어서 5분이었다. 아버지가 오실 무렵이면 나는 어김없이 역에 나가 철로변 자갈밭에서 놀면서 기다렸는데 그곳에서도 놀 거리가 많았다. 기차가 지나갈 때 레일 위에 못을 올려놓으면 납작해지면서 자석이 되었다. 자갈밭에서는 서로 부딪어 불똥이 잘 일어나는 차돌을 고르는 것이 또 하나의 놀이였다. 역을 오가는 사이엔 지름이 넓은 원형 콘크리트 관으로 이어진 하수로가 있었는데 미로 놀이에 그만이었다.  

집에서는 또 한강이 잘 보였다. 집 앞에 광이 있는데 광 지붕 위에 올라가면 더 잘 보였다. 자유당 시절 국군의 날 같은 경축일이면 한강백사장을 중심무대로 에어쇼가 곧잘 벌어졌다. 폭격기가 가상 목표에 폭탄을 투하하면 거대한 화염이 일었다. 그럴 때면 소리를 지르고 박수치며 좋아했었다. 이승만 대통령 생일날의 에어쇼가 가장 멋있었다. 그러나 얼마 뒤 효창동 우리 살던 집은 도시계획에 의해 철거되고 집터는 아스팔트 도로가 되어버렸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모양도 변해 지금은 옛 정취를 찾아보기 힘들게 변했다. 효창동을 내 고향이라 한다면 나는 고향을 잃어버린 셈이 되었다.  

물론 우리에겐 축령산 입구에 고향 마을이 있었다. 수백년 대를 이어 살아온 곳이요, 아버지가 태어나 자란 곳이며. 선산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그 고향에 우리 땅은 한뼘도 없었다. 아버지 4형제 중 땅이 없는 것은 막내뿐이었다. 땅은커녕 아버지 사업 실패 후에는 빛만 잔뜩 있어 인사차 가는 것도 부담스러운 고향이 되었다. 우리 가족은 저 태어난 고향에서도 뿌리내릴 수 없게 되어버렸다.

어머니가 집 마련에 남다른 집념을 보인 것은 그렇게 여러 가지 사연이 있었다. 그러나 월급에서 얼마를 저축하여 집을 사는 것은 짧은 기간에 되는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부동산 인플레가 심했다. 그러는 사이 나이가 드니 누나도 나도 동생도 결혼을 해야 했다. 식구가 늘고 힘이 분산되니 어머니 꿈은 더욱 요원해졌다.  

궁여지책으로 삼 년 전 고향에 이천여평 땅을 사 두었다. 할아버지가 사시던 고향집 위에 있는 땅인데 아직 심심산골이어서 적은 돈으로 살 수 있었다. 그 이천여평 안에 낡았지만 집이 있었다. 우리는 그 집을 수리하여 우리 가족만의 고향집으로 삼았다. 그렇게 고향에 땅을 마련할 때, 내 형제의 의견은, 어느덧 환갑이 지난 부모님이시니 그곳에서 여생을 한적하게 즐겼으면 하는 바램은 있었다. 아무도 아직 잘 산다 할 수는 없지만 각자 기반은 만들어진 상태여서 내려가 사시는 부모님 걱정 없이 사시도록은 해 드릴 수 있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의 뜻을 이해하고 대견해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반대였다. 아버지 사업 실패 이후 고향의 일가 친척으로부터 받은 수모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명절이거나 큰일이 있을 때 어쩔 수 없이 마주치는 것까지 피하지는 않았지만 고향에 내려가 어울려 사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도 께름직한 면은 있었다. 옛날 손가락을 잃었을 때 할머니가 하신 말씀을 잊지 않고 있었다. 육신을 잃은 사람은 고향에 돌아와 온전히 살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능 가슴에 갖고 있었다. 우리는 더 권하지 않았다.

낡은 집을 비어두면 그나마 폐가가 될 것 같아 아버지는 관리를 위해 왔다갔다하셨다. 왕래해 보니 역시 고향의 푸근함 같은 게 있는 모양으로 점차 시골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무료하기 짝이 없을 것 같은 깊은 산골임에 틀림없지만 내려가 살면서 나름대로 일을 찾아보니 용돈도 생기고 친구도 생겼다. 아버지가 고향에 내려와 산다는 말이 인근에 퍼지자 산너머 강 건너에서 무시로 옛친구들이 찾아왔다. 차에 방 하나를 고시 공부하는 청년에게 장기로 내어주니 한 지붕 아래 식구도 생겼다.    

봄부터 아버지는 아예 그곳에서 살았다. 일이 있을 때 서울을 잠시 다녀갈 정도로 생활 중심이 바뀌고 말았다. 할머니 말씀은 기우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생기기는커녕 즐겁기만 했다. 그렇게 시골에서 혼자 지내시다 쓰러지신 것이고, 고시 공부하는 청년이 병원으로 옮겨준 것이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 보니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상태였다. 인공호흡기에 의해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환자복이 수의로 보이는 가운데 앙칼지고 표독스럽던 수간호사도 꼬랑지를 내리고 옆에 서 있었다. 의사도 침울한 표정이었다. 아니 죄를 저질러놓고 처벌을 기다리는 순진한 학생 같았다. 뒤따라 들어온 어머니와 누나는 아버지를 흔들어보더니 통곡을 터뜨렸다. 동생의 얼굴은 분노로 상기되어 있었다. 맨 뒤에 들어온 아내는 G종합병원의 앰블런스가 방금 도착했다고 알려 주었다.
"아아, 이게 무슨 일인가."

나는 내 감정을 추스리기 힘들었다. 침착하자, 이럴수록 침착하자 해 보지만 혼란스럽기만 했다.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시신과 다름없는 아버지를 G병원에 모시고 갈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어디서 임종을 맞으실 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곳까지 저희 앰블런스로 모셔 드리겠습니다."
의사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물었다.
"언제 임종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송구스럽습니다만… 인공호흡기를 떼는 순간이 임종입니다."
"그럼 앰블런스로 옮기는 순간이…"
"아닙니다. 엠부를 가지고 저희가 따라갑니다. 임종 장소까지는 인공호흡을 계속 시켜드립니다."
"소생하실 확률은 전혀 없습니까?"
"… 늦었습니다."
"다만 한 마디 목소리도 들을 수 없습니까"
"… 죄송합니다. 저희도 예기치 못한 일입니다."

개새끼들. 저희들은 최선을 다했다고 하지만 내 눈에는 개새끼로 보였다. 돌아가실 기미가 있으면 미리 가족을 만나게 해 달라고 누누히 부탁하지 않았던가. 이것도 저것도 다 틀렸다. 그렇다면 결국 병원을 옮기려 한 것이 그들을 자극하여 일을 그르친 것 아닌가. 아아, 그렇다면 아버지 명을 재촉한 것은 그들이 아닌 우리가 된다. 우리…
"어디로 가실지…"
의사는 또 물었다.
"아버지 고향은 마석에서 북쪽으로 30리쯤 되는 곳입니다. 준비해 주시지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눈물 범벅이 되어있는 가족을 모두 데리고 나왔다. G병원 앰블런스는 환자가 돌아가셨다고 하니 그냥 돌아갔다. 진료부장에게도 전화로 알려 주었다.  
        
이윽고 아버지는 고향으로 가는 앰브런스에 실렸다. 일요일 하루종일 아버지 치료를 담당했던 당직의사가 앰브런스에 함께 탔다. 나도 탔고 동생은 앞좌석에 앉아 고향집 가는 길을 안내했다. 그 외 가족은 승용차를 이용했다.  
아무리 보아도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상태였다. 의사가 쥐었다 놓았다 하는 엠브에 의해서 호흡을 유지한다는 것은 허구요 형식의 짓이었다. 억지로 가슴을 들썩거리게 하면서 살아있는 사람 취급을 하고 있다니… 어느 세계보다 과학적 사고를 강조하는 의학 속에 이처럼 비과학적인 행위가 존재하는 것은 이해 못할 모순이었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닝겔 병을 붙잡아주며 나는 아버지와 의사를 번갈아 보았다. 출발한 지 10분도 안 되었는데 젊은 의사는 땀을 뻘뻘 흘렸다. 엠브의 고무공을 쥐었다 놓았다 하는 것이 힘드는 모양이었다. 그건 아버지의 몸이 굳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피도 식어가는게 보이는 듯 했다. 포도당은 그래도 한 방울씩 똑똑 떨어져 아버지 몸 속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를 뚫어지게 보기 시작했다.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아버지와 나 사이의 공간을 스쳐갔다. 불쌍한 아버지… 아주 어렸을 때엔 그렇게 멋있었던 아버지인 데 내가 철이 들어 기억하는 건 사업에 실패한 뒤의 초라한 모습 일색이었다.  
문득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고 아무 병원에나 불쑥 실어다 맡겨놓고 전화한 고시학도에게 아버지 죽음의 원죄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도 자기로선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현대적 상식으로는 그 이상의 방법이 없고, 우리는 고마워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결과를 생각하면 그 친구도 원망의 대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 같다.  

계산해 보니 아버지는 병원에 도착한지 만 24시간만에 돌아가신 것이었다. 아무리 급살병에 걸린 사람도 죽음에 임해서는 반짝 정신이 드는 법인데, 그래서 마지막 보고싶은 사람 얼굴도 보고 이제 간다 며 유언도 남기는 등 인생을 정리하는 법인데, 아버지에겐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예의 K종합병원 중환자실은 너무나 철저하게 가족과 환자를 벽 하나로 갈라놓았다. 그건 후손의 불행인가 아버지 당신의 죄업인가.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드러나는 모순, 일어나는 의문들. 우리를 감싸고 있는 모순은 모순인 채로 영원히 지속될 성질의 것인 양 보였다. 아버지를 통해 체험해 보니 병원사회도 온통 모순 투성이였다. 상식은 여기서도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이었다. 생명을 다루는 일에서 경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따라 아주 심각한 문제일 수 있었다.  

물끄럼이 아버지를 보는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내가 안 것은 앰블런스가 망우리 고개를 넘어 금곡에 이를 때쯤이었다. 문득 정신이 든 것이다. 의사는 더욱 많은 땀을 흘리면서 펌프질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규칙적인 동작으로 엠부를 다루는 의사가, 기계 인간으로 보였다. 지은 죄가 없는데 저렇게 열심일 수 있을까. 문제를 제기하자면 그의 동작 하나하나가 증거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례지만 올해 몇이죠?"
눈물이 멎고, 생각이 깊어진 상태에서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서른 하납니다."
그는 나를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환자를 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고무공만 열심히 보고 있었다.
"3년찹니까?"
"아뇨. 2년찹니다."
"힘드시죠?"
"아뇨 괜찮습니다."
"제가 좀 할까요?"
"아뇨. 이건 제가 해야 합니다."

그는 펄쩍 뛰었다. 레지던트 2년 차라면 의사로 성장하는 가장 중요한 고비일 수 있었다. 그 고비에서 우리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내 비록 의학에 문외한이지만 아버지의 죽음에는 의혹이 많았다. 어제 밤부터 하는 짓이 필시 모종의 실수랄까 약점을 지닌 언행이었다. 아마도 우리가 문제를 제기하면 피할 수 없이 한바탕 곤욕을 치러야할 입장일 것이다. 그러기에 저렇듯 땀을 뻘뻘 흘리며 비위를 맞추는 것 아니겠는가. 그는 무슨 죄인가. 다만 그 나름대로 살려는 몸짓이지 않는가.    
"지금 무엇을 하는 거지요? 우리가"
"……"
"이걸 자택에서 떼기 위해, 자택에서 별세하시라고 가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습니까?"
"…저로선 두 번째 경험입니다."

앰블런스는 금곡을 지났다. 차가 쿨렁, 할 때 아버지가 꿈틀, 하시는 것 같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황급히 눈꺼풀을 들어보니 아니었다. 동공은 이미 열려있었다. 눈도 죽어버린 것이다.    
사그라들던 분노가 다시 일었다. 나쁜 놈들, 이렇듯 완전한 죽음으로 몰아넣다니…
안 되겠어. 지금이라도 차를 돌려 문제를 제기할까….
참자. 막상 아버지가 눈을 감은 마당에 진상이 무슨 소용 있는가. 불신을 깔고 보는 나의 눈에는 모든 것이 의혹처럼 보여도 그들은 정당했을 지 모른다. 배운 대로 했다면 그들에겐 죄가 없다. 확증도 없이 시신을 부검한다고 온통 난도질하면 아버지만 두 번 죽는다. 어머니가 수술에 반대한 것도 육신이나 깨끗이 갖고 가시게 하자는 것 아니었던가.
"어떻습니까. 우리 한 번 터놓고 이야기해 봅시다."
나는 다시 말을 걸었다. 물론 시비는 아니었다.

"아버지가 이렇게 돌아가셔야만 했을까요?"
그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움찔, 했다.
"너무 출혈이 심했습니다. 피가 서른여섯팩이나 들어갔습니다."
"사람 몸에 피가 전부 얼마나 되죠?"
"글세요, 체중의 십삼분의 일 정도?"
"그럼… 피가 두 번 바뀐 셈이군요."
"그렇습니다."
"하루에 그렇게 피를 바꿔도 됩니까. 부작용이 있을 텐데… 상식적으로도 말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출혈이 멎지 않는 한 수혈은 해야 했습니다"
그는 차츰 나의 질문을 경계하는 빛을 보였다.


이윽고 고향집 앞마당에 앰블런스는 멎었다. 승용차를 타고 온 가족이 이미 도착해 방을 정리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를 안방에 모시니 밤 열 시 이십 분이었다. 의사가 또 물었다.  
"언제 임종하는 것이 좋을까요. 이제는 엠브도 뻑뻑해 졌습니다"
"엔제라뇨? 무슨 뜻이죠?…" 하는데 큰아버지가 끼어 들었다.
"자정을 넘겨서 떼 달라고 해라. 장사지낼 생각도 해야지"

그 말이었다. 자정 전에 돌아가시면 삼일장을 이틀만에 치러야 했다. 그러면 부고장을 돌리고 상복을 준비할 시간도 없다. 그러나 자정을 넘기면 하루의 여유가 생긴다. 이미 돌아가신 분의 몸에서 한 시간 반 뒤에 인공호흡기를 떼면 하루의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아버지의 입에서 인공호흡기를 뗀 것은 자정을 넘긴 영 시 십 분이었다. 엠브를 떼면서 의사는 정중하게 말했다.
"이제 운명하십니다.… 임종입니다"
그와 동시에 가족 모두는 울음을 터뜨렸다. 의사는 엠브를 떼어 가방에 넣고 돌아 갈 준비를 했다.


이모로부터 다래나무 지팡이를 부탁 받은 아버지는 기왕이면 오래 묵은 나무로 좋은 지팡이를 만들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자연과 벗하며 살게 된 아버지에게 이미 더 이상의 미움이나 한은 없었다. 이루지 못한 뜻은 많으나 그것들에 연연할 정열이 없었다.
연륜이 쌓일 수록 관용이 늘어가는 현상은 아버지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포용하고, 또 모든 일에 겸허해 졌다.

알고 보니 고향집에서 지내면서 아버지는 농사도 지었다. 어렸을 때도 해보지 않은 농사일을 낙으로 여기며 지낼 만큼 아버지는 변해 있었던 것이다. 고향집 주변 땅에 빼곡히 심어져 있는 콩 고추 참깨 옥수수 호박이 모두 아버지가 심은 것이었다.
그 마을에도 이미 젊은이는 없었다. 힘쓸만한 청년은 모두 도시로 갔고, 때문에 아이들도 없었다. 노인들만 그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그 노인들과 벗하며 아버지는 이곳에서 농사도 마다 않으며 여생을 지내려 했던 게 분명했다.  

40년 서울 생활에서 결국 패배하고 돌아온 아버지에게 고향은 그래도 어머니 품처럼 따뜻했다. 다 떠난 것 같아도, 어린 날을 함께 보낸 이웃이 외로움을 주지 않을 만큼은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고향의 흙내음이 아버지의 빈 마음을 포근하게 해 주었다.  
지팡이를 만들 다래나무를 구하려면 깊은 산을 뒤져야만 했다. 덩굴로 자라는 다래나무가 지팡이로 쓸만한 재목이 되려면 백오십 년 이상 묵어야 했다. 아버지는 유람 삼아 낫을 들고 이산 저산을 뒤졌다. 두멍안 기슭의 울창한 잣나무 숲을 지나 서리산 깊숙이 들어갔다. 첩첩이 높은 산에 둘러싸인 마을이지만 그래도 깊은 산은 두어 시간 더 올라가야 했다.

두드리면 열린다는 말이 있듯, 이윽고 서리산 기슭에서 아버지는 빛깔 좋은 다래나무를 발견했다. 한낮에도 어두울 정도로 나무가 우거진 곳이었다.
"오, 드디어 찾았구나"
아버지는 낫을 들고 그 나무에 다가갔다. 그런데 갑자기 찬바람이 불어왔다. 소름이 돋는 섬찍한 바람이었다. 일시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개의치 않고 막 나무를 내리 찍으려는데 이번에는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울음이 메아리치니 온통 산이 울리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나무 끊는 것을 뒤로 미루고 산을 내려왔다.

이튿날 어머니는 밑반찬에다 닭을 사 들고 고향집을 방문했다. 아버지가 잘 올라오지 않으니 거꾸로 어머니가 왕래해야 했다. 아버지가 눈에 띠게 변하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어머니 마음도 흔들리는 듯 했다. 고향집을 중심으로 마음 편하게 자연과 벗하며 사는 모습이 점점 좋게 보이는 것 같았다. 없을 때 설움 받은 게 한이 되어 절대로 고향에 내려가 살지 않겠다던 어머니가 슬금슬금 자주 방문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 닭고기 일부와 술을 싸들고 나이가 같은 아랫 마을 사촌을 불러 다시 다래나무를 끊으러 갔다. 다래나무는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으시시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낫을 들고 다가가는데 늑대 울음소리가 또 들려왔다. 사촌은 어째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돈다며 끊지 말기를 권했다. 아버지는 그럼 술이나 먹자고 자리를 펴고 앉았다. 그리고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고는 취한 김에 끝내 나무를 끊어 가지고 내려왔다. 정성껏 다듬어 지팡이를 만드니 그렇게 훌륭할 수 없었다.
"자 당신 언니가 부탁한 거. 아주 명품이 됐네."
아버지는 즐거운 마음으로 어머니에게 지팡이를 건네주었고, 어머니는 신이 나서 이모에게 갖다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퍼졌다. 가까이 사는 분은 동이 트기도 전에 찾아왔다. 우리 가족은 각자 임무를 분담해 한쪽에서는 상복을 준비하고, 한쪽에서는 음식을 준비하고, 한쪽에서는 부고장을 돌리고, 한쪽에서는 천막을 치며 문상객 맞을 준비를 했다. 상주가 된 나는 아버지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불효자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첫날 오후부터 조문 행렬은 끝없이 이어졌다. 나나 내 형제의 친구 선후배 직장동료는 오히려 적었다. 삼백년 가까이 살아온 덕분에 일가 친척만도 기백 명을 실히 헤아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형님들 다 놔두고 먼저 가다니…"
"도무지 믿어지질 않는군, 엊그제까지도 멀쩡하던 사람이…"
"쯧쯧…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가실 양반이 아닌데…"

조문객은 저마다 안타까움을 토해냈다. 서럽게 곡을 하는 이도 심심치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착잡해 졌다. 점점 목이 메더니 말도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마르지를 않았다.
"에이고, 평생을 밖으로만 나돌더니… 이제 고향에 와서 지내는지 몇 달이나 됐다고… 형님들 놔두고 먼저 가는 이런 불효 불충이 어디에 있나…"
유난히 정이 많은 둘째 큰아버지는 아우 사진 앞에 앉아 눈물을 쏟으며 서럽게 울었다. 둘째 큰아버지의 울음은 옛일을 떠올려 주었다. 육신을 잃으면 고향에 돌아와 살지 못한다던 할머니 이야기… 끝내 아버지는 불효자의 오명을 벗지 못했다는 말인가.

5촌 당숙이 왔다. 당숙은 아버지와는 사촌으로, 다래나무를 끊으러 갈 때 함께 간 본인이었다. 아버지가 고향에 계시는 동안 누구보다 가깝게 지낸 분이기도 했다. 당숙은 영정 앞에서 일어날 줄 모르고 슬피 울었다.
"고정하세요, 아저씨"
내가 오히려 위로해야 했다. 상주와 맞절을 끝낸 뒤 그는 말했다.
"인명 재천이라지만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에 있니…"
"저희 불효 탓입니다."
"아니야. 너 다래나무 이야기 아니? 그 다래나무 끊으러 갔다온 뒤로 그렇게 머리가 어지럽다고 하더라… 그렇게 끊지 말랬는데 기어이 끊더니…"
"그러셨나요?"
"어머니가 부탁했다고 지팡이를 만들어야 한대요. 그래 혼자 먼저 가서 끊으려고 했었대. 그런데 산이 울고 찬바람 도는 것이 기분이 이상해 못 끊고 내려오신 거지. 다음날 나와 함께 간 거야. 그런 얘기를 하길래 그런 나무는 끊지 말라고 했는데 아 꼭 끊어야 한다며 기어코 끊어왔지 뭐야. 그리고는 머리가 어지럽다고 하더니 그만 이 지경이 되었지 뭐야… 에이, 사람두… 이렇게 싱겁게 갈 줄 누가 알았나…"

그의 눈에 다시 눈물이 비쳤다.
둘쨋날 이모가 왔다. 지팡이를 짚고 새하얀 머리칼을 휘날리며 왔다. 이모를 보는 순간 나는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이모는 태연했다. 지팡이를 보았다. 다래나무 지팡이가 아니었다. 예전에 쓰던 밤나무 막지팡이였다.
"어서 오세요. 언니"
어머니는 담담하게 이모를 맞았다. 어머니도 지팡이를 살피는 눈치였다. 다래나무 지팡이가 아닌 것이 마음 쓰이는 듯 했다. 그걸 짚고 왔어도 불편할 것이지만 안 짚고 온 것도 수상했다. 만약 짚고 왔다면 빼앗아 당장 아궁이 속에 넣어 버릴지도 몰랐다.

"왜 새 지팡이는 어쩌고…"
궁금증을 참다못해 어머니가 한마디 했다. 이모는 웃었다. 보기는 좋았지만 찬바람이 도는 웃음이었다.
"그제부터 갑자기 힘이 솟는 것 같애. 다래 지팡이 덕분인가 봐. 지팡이 안 짚어도 될 것 같애. 그래 먼저 쓰던 거 가지고 왔지. 그건 귀한 거잖아. 아껴야지."
그리고 보니 이모는 건강이 회복된 사람 같았다. 혈색도 좋았다. 그런데 그제부터라니? 그러면 아버지가 쓰러지자 이모는 기운이 나기 시작했다는 건가?

어머니는 더 이상 이야기 하지 않았다. 나와 내 처를 불러 아무에게도 다래나무 지팡이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아니 아예 잊어버리라고 했다. 그런다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다시 오지는 못할 것 아니냐고 덧붙였다.
삼오제를 마칠 때까지 어머니는 말이 없었다. 60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을 잃은 미망인치고는 눈물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나도 그랬다. 머리 속을 맴도는 여러 가지 잡념은 때론 증오심을 일게도 하고 분노하게도 했다. 심장이 뛰기도 했다. 이모에게 경고하는 의미로 막지팡이를 분질러 멀리 던져 버렸다. 이모는 무슨 짓이냐며 펄쩍 뛰었지만 나는 그렇게 라도 울분을 삭혀야 했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모는 지팡이가 필요 없을 만큼 회복된 상태였다.
둘쨋날 밤 나는 아내를 꾸짖었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일 벌어지기 전에 얘기해야지 필요한 조치를 하잖아"
"저도 몰랐어요, 아버님 쓰러져 입원하셨다고 전화온 뒤 어머님이 얘기해 주신 거에요. 듣자마자 당신에게 전한거라구요"
듣고 보니 아내를 나무랄 일도 아니었다.  

"외롭지 않게 가셨으니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지. 많은 사람들이 명복을 빌어주었으니 제 명에 못 가셨다해도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야."
나는 그런 말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고향집에서 삼오제를 마친 뒤, 아버지 영정은 서울로 모셔졌다. 절에서 사십구제를 모실까 했으나, 어머니 마음이 편치 않다 하여 집에서 백일상을 모시기로 했다. 한동안 어머니는 이모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를 만나면 굿을 한 판 벌이고 싶은 심정을 털어놨다.
"굿이라뇨, 요즘 굿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나는 말렸으나 어머니는 만날 때마다 소원했다.
"사람들 말이 굿을 해야된대.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들을 위해서…. 그러니 굿을 하자. 진오귀 굿을 하자."
하도 소망하여 결국 우리는 굿을 하기로 했다. 마음이 약한 탓이지만, 그렇게라도 매듭을 짓는 게 필요했다. 진오귀굿은 아버지 돌아가신 날로부터 약 한 달 뒤에 벌어졌다.

진오귀는 억울하게 죽었거나 비명에 간 혼령을 위로한 후 이를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오구굿의 일종이었다. 비명횡사한 사람의 원혼이 갈 곳으로 가지 못하고 상가주변을 배회하면, 이로 인해 죽은 사람의 친척이나 자손이 좋지 않다는 설화를 배경으로 하는 오구굿은,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 베풀어지는 굿이었다.
굿이 흔하지 않은 시대에 굿을 한다 하니 동네에서 만도 많은 구경꾼이 모여들었다. 친척에게 일절 알리지 않았는데 이모는 왔다. 자주 왕래하는 처지였지만 그날은 그렇게 반갑지가 않았다.

이모는 신기하게도 전보다 더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것이 나의 눈에 좋게보일 까닭은 없었지만 간간 웃을 때면 양 볼이 붉어지기도 했다.
굿판의 제주는 어머니였다. 이윽고 무녀가 제단 앞에 앉았다. 주문을 외기 시작하니 대를 잡고 있는 어머니의 손이 신기하게도 떨리기 시작했다.

"기밀망제요, 기밀망제요, 여이라도 천공에 부유같이 나온 인생아, 기밀망제요 한갑동냥을 못 일우시고 초목같이 실어졌네. 기밀망제요, 기밀망제요, 공산영은 강산월이요, 이내 일신은 만두강이라…"

부녀는 제단 앞에서 눈을 지긋이 감고 아버지 넋을 불렀다. 혼을 부르는 무녀의 노래는 마당에 빼곡한 동네 구경꾼의 호기심을 돋구기에 충분했다.
무녀의 머리 위에는 천원, 만원 짜리 지폐들이 실에 꿰어져 너플거렸고, 제단 뒤 약간 높게 만든 상 위에는 종이로 만든 울긋불긋한 무화가 분위기를 신비롭게 하고 있었다.
무화 앞에는 무속의 신들인 길대부인, 오귀대왕 바리데기 그림과 명패가 걸려 있었다. 그옆에는 골매기 상이, 길대부인 옆에는 조상의 상이 놓였다. 다시 골매기상 옆에는 장판기를 몇겹 뚤뚤 말아만든 아버지의 자리가 마련되고 조상의 상 앞에는 아버지 집이 매달렸다. 종이로 만든 용선과 등이 그 모든 것을 감싸듯 둘러막고 있었다.

"기밀망제요, 기밀망제요, 여이라도 천공에 부유같이 나온 인생아…"
아버지 넋을 부르는 무녀의 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열띤 음성으로 죽은 사람의 넋을 한참 부르더니 이윽고 아버지 혼이 좌정했는지 무녀도 돌아섰다. 쾌자와 부채를 손에 들고 그녀는 '바리데기'를 부르기 시작했다.

"염불루 길을 닦아 가실 적에 오귀문을 열어, 오치문을 열어서루 극락세계루 가신답니다. 그러니께 본시 영가시는 오귀문을 열어서루 바리데기 따라 서천서역국 좋은 극락세계로 가시는구나"

무녀가 잠시 소리를 끊나 했더니 되받아 만신들의 창이 나왔다.

"옛날에 옛적아, 갓날에 정아적아, 오귀대왕님 좌정하야 삼천궁녀 거느리고 만조백관 거나리고 용상좌기 좌정하여서 금관 높이 씨고…"

한 번 시작된 바리데기는 몇 시간이고 계속되어 끝날 줄을 몰랐다. 무녀는 바리데기를 부르는 사이사이 제주를 툭툭 치기도 하고 반주자들을 건드리기도 하면서 즉흥적인 대화를 하기도 했다.
외설적인 농담도 도가 짙었고 직선적이었으며 아무에게서나 돈을 받아냈다. 신명이 나면 날수록 구경꾼들은 '잘한다'를 연발했다.
한창 신명이 나서 몸을 흔들어 대던 무녀는, 갑자기 부채를 일자로 접더니 이모를 찌를 듯 가리켰다.

"오냐 오냐, 네가 대수대명했구나 이 요망한 것!"
이모의 안색은 순식간에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하며 몸은 사시나무 떨 듯 했다.
"네가 대수대명했지 네가 대수대명 했지! 이 요망한 것아!"
또 한차례 추상같은 호통이 나가자 이모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두 손을 비볐다. 이모는 온몸을 덜덜 떨었다.
"예예 제가 대수대명했습니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무녀는 다시 신명이 나는 듯 무가를 부르며 덩실덩실 몸을 흔들었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제가 조금 더 살고 싶어서 죽을 죄를 졌습니다"

이모는 엎드려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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