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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언제 읽어도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위선이나 불의에 대항하여 정의를 세우면서 인간성을 옹호하고 정신을 이끄는 따위는 다음 이야기입니다. 잔잔한 물결처럼 다가와 가슴을 파고드는 반취 이기윤의 소설들에는 독특한 향기가 있습니다.

칼럼
2005.01.26 16:39

칼럼 - 아호 유감(雅號有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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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 아호 유감 (雅號有感)

 

인사동에서 다담(茶談)이란 월간지를 발행하며 지낼 때의 일이다. 부산 기장에 요를 가지고 있는 토암(土岩)이란 도예인이 내게 초정(草井)이란 아호(雅號)를 선물했다. 당신은 사막에 떨어뜨려도 살아갈 사람이다. 우물가의 풀을 보았다. 그 강인한 생명력이 당신 이미지와 너무 걸 맞는 것 같아 아호로 선물할 생각을 했다. 성장을 빈다. 이것이 아호를 선물하는 그의 변이었다. 생전 처음 아호를 선물 받는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이튿날 인사동에서 논어(論語) 학당을 경영하는 한학자 추전(秋田)을 만나 술 한 잔 하는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했다. 내게도 아호가 하나 생겼다고 자랑하니 그가 묻는다

 "초는 풀 초()로 짐작되는데 정자는 무슨 정자요, 정자 정()이요?"

"아니, 우물 정()자라는데."

짓궂다 할까, 독설가로 소문난 그의 눈가에 웃음기가 어린다

 "그렇다면 그건 여자의 성기 아니오. 이 선생이 당했군. 허허 부산 친구 토암이 이 선생을 놀렸어요." 

 "……?"

나는 말을 잃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여성의 심볼이 맞았다. 그 도예가가 나에게 장난할 처지는 아닌데

술맛이 확 달아날 정도로 여간 유감스러운 게 아니었다.

 

며칠이 지나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다. 잊히지도 않고 자꾸 생각났다.

그러던 하루, 문득 담배를 피우며 생각하니 그 아호야말로 내게 어울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나는 여성들에게 둘러싸이다시피 지냈다.

집에 가도 딸만 둘이니 여자 셋 데리고 사는 처지요, 잡지사에도 여기자뿐이었고, () 선생이다 다도(茶道)사범이다 하는 세계도 90%가 여성이었다. 게다가 도예인 토암의 말처럼 우물가의 풀, 하면 강인한 생명력도 연상되니 그런 기질이 있다고 여겨지는 나에게 초정(草井)처럼 어울리고 용기도 주는 아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니 나빴던 기분이 좋아졌고 다시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어졌다. 호가 마음에 들면 호턱(號施)을 내는 법이다. 호턱을 먹은 사람은 그 댓가로 나를 부를 때 아호로 불러주어야 한다.


나는 초정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가까운 친구 지인들을 이십여 명 초청해 인사동 한복판에서 호턱을 내며 그 동안 겪은 마음의 갈등을 털어놓았다. 모두 재미있다고 깔깔깔 웃었다. 그때 시집을 한 권 냈는데 나는 거기에 당당하게 밝혔다. <초정 이기윤 시집> 이라고.   (그때 호턱을 먹은 양산 통도사 잡화산방 수안(殊眼) 스님은 스스로 친 학()<위 초청 이기윤 선생(爲 草井 李起潤 先生)>을 기입하여 보내주시기도 했는데 그 편액은  지금도 반취동산에 걸려 있다.)  


그렇게 초정이란 아호를 사용하는 지 두 해쯤 지났을 때다.

()를 주제[로 한 세미나 뒤풀이 자리에서 술을 마실 땐데 한 여성이 다가와 말했다.

실례인지 모르겠는데요, 이 선생님은 초정보다는 반취가 더 어울리실 것 같아요. 한 잔만 드셔도 반쯤 취한 듯 하고, 밤새도록 마셔도 반밖에 안 취하고지나침도 모자람도 함께 경계하라는 초의선사의 가르침, 중정(中正)에 견줄 수도 있겠구요

그러자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대뜸

"이야. 그게 더 어울리겠는데요."

"반취 선생. 그거 이기윤 선생을 위한 아호 딱인 데요."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순간 내 마음에도 들었다. 초정에 대한 해석을 고쳐먹은 뒤, 다시는 기분 나쁜 해석을 하지 말자고 다짐하였지만 한문을 아는 사람들은 만날 때마다 의문(?)을 제기해서 언젠가는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담배 좋아하던 오상순 시인이 꼴초라 불리다 공초(空超)가 되지 않았던가.

나는 그 자리서 반취(半醉)를 아호로 받아들이고 2차를 근사하게 냄으로서 또 한 번의 호턱을 냈다.  그렇게 반취(半醉)라는 아호를 얻어 쓰기 시작한 것이 1987. 삼십대 후반부터 쓴 셈인데,

하지만 비록 차잡지 발행인에다 소설가라지만 (솔직히) 한동안은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했다. 젊은 사람이 아호를? 하고 뜨악해 하는 사람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다.


아호란 게 본 이름이나 자() 외에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이름일진데 왜 이리 송구한 마음을 갖게 되는 걸까. 예전에는 누구나 한 둘 가지고 있던 아호가 왜 이렇게 낯설어 진 것일까. 아니, 낯설어진 정도가 아니라 지도층 인사나 원로 예술인을 예우해 부르는 이름쯤으로 변질되었다.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바뀐 것이다. 주변을 보아도 원로 정치인이나 서예 한국화 방면의 문화 예술인, 아니면 역사적 인물들의 아호만 보였기 때문이다.


의문을 갖기 시작하면서 나는, 이런 것들이 우리 고유의 멋과 여유를 잃어 가는 실증인 것만 같아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아호는 특수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아호를 지어 주거나 받아 사용하는 뜻에는 상대를 배려하고 향토성을 지키며 자기 심성을 다듬는 등 인간적인 따뜻함이 담겨 있다. 고향 뒷산이나 마을 이름을 아호로 사용하면서 늘 고향을 생각한다던가, 수양을 목표로 삼는다든가, 성질이 급한 사람은 혜() 자를 써 순해지도록 유도하는 식으로 결점을 보완하는 의미를 담고 있어 소박한 가운데에서도 아름답게 살아가도록 이끌어주는 길잡이 애칭이 아호(雅號)인 것이다.


실제로 아호를 작명하는 데는 다섯 가지를 고려했던 게 우리 선비사회 풍습이었다. 부르기 쉽고 뜻이 좋아야 하며 향토의 기운을 담은 위에 자신의 결점을 보완하는 의미를 첨가하되 겸손해야 한다는 다섯 가지이다.


스스로 지어 사용해도 나무랄 일을 아니지만, 가까운 스승이나 선배 지인이 아끼는 마을을 담아 지오주면 금상첨화라 했다.


꼭이 한자어가 아니어도 좋았다. 일제 강점기에 민족주의를 외친 주시경(周時經) 선생은 '한힌샘', 최현배(崔鉉培) 선생은외솔이란 호를 씀으로서 자랑스런 한글을 가진 민족의 의기를 잃지 않으려 하였다. 순수문학을 지향하던 문인의 경우도 김정식(金廷湜)보다는 소월(素月), 박영종(朴泳鍾)보다는 목월(木月)이 더 인간적이고 친숙해 보이지 않는가.


성리학자 조식(曺植) 같은 이는 남명(南冥)을 호로 사용함으로서 노장사상에 관심을 가진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호가 가장 많았던 인물로 꼽힌다. 알려진 것만 약 200여 개 되는데, 이는 그가 시··화에 두루 능하였던 예술인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대표적인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선객(仙客불노(佛奴방외도인(方外道人) 등으로 유··도 삼교 사상을 망라하는 호를 사용한 것이 주목된다아호는 이렇게 당시 인물들의 세계관과 인생관도 엿볼 수 있게 하는 풍습인 것이다.


작금, 아호를 쓰는 풍습이 쇠퇴했다고는 하나 사라진 것은 아니요, 사라질 문화도 아니라고 믿는다.

이황보다 퇴계(退溪)라 부르는 사람이 많고, 이이(李珥) 보다 율곡(栗谷)선생이라 칭함이 더 많은 것을 보면 아호에 대한 향수는 바탕에 깔려 있다.


그러나 어쨌든, 실제에서는 사회가 각박해지는 것만큼이나 갈수록 아호를 쓰는 사람이 줄고 있다. 문학이나 그림, 서예 따위 우리 문화를 이어가는 분야에서나 아호 전통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아호를 사용하는 훈훈한 사회가 얼른 다시 왔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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