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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언제 읽어도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위선이나 불의에 대항하여 정의를 세우면서 인간성을 옹호하고 정신을 이끄는 따위는 다음 이야기입니다. 잔잔한 물결처럼 다가와 가슴을 파고드는 반취 이기윤의 소설들에는 독특한 향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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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 자료 다 읽었어?”
  이 태호는 양 정희에게 물었다.
  “그럼요.”
  “느낌이 어때?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원고를 써 볼 수 있겠어?”
  “방향만 지도해 주시면…”
  “우리는 지금 ‘자연사’를 큰 주제로 하는 거야. 낙태를 어떻게든 자연사와 연결 지을 수 있다면 좋겠지.”
  이 태호는 그것이 무리인 줄 알면서 시치미 떼고 말했다.
  “낙태를 어떻게 자연사 속에…”
  “봐. 지금 이 자료 속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보면, 영아에게는 ‘살해’라고 명백히 말하지만 태아의 경우는 ‘낙태’ 이외의 표현이 없어. 그렇지?”
  “예”
  양 정희는 바짝 다가서서 들었다.
  “로마시대의 논리는 뭐야.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인 선택의 문제라고 했잖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분들도 이상 사회를 위협하는 요소로 인구과잉을 꼽았고 그 해소책으로 낙태를 정당화했어. 인간다운 삶과 동물적인 생존은 엄연히 다른 거라고 하면서. 결국 그런 거 아닌가? 그렇다면 시대를 잘못 만난 태아의 낙태는 ‘자연사’로 몰아갈 수 있는 거 아닐까? 또 20세기 후반 시몬 드 보부아르의 선언이 여성해방운동에 불을 댕기면서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임신과 출산, 그리고 낙태를 결정할 권리는 신이나 남성이 아닌 여성에게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데, 태아를 생명체로 여겨 ‘낙태는 곧 타살’이라고 하면 여성운동의 주장이 약해지지 않을까? 안 그래?”
  “맞아요. 그럴 것 같아요.”
  양 정희는 눈을 반짝였다.
  “여기 자료의 끝에 잘 나와 있네.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이 낙태가 자연과 신의 섭리 이전에 현실의 문제임을 보여주는 상징적 계기가 되었다는 게 뭐야. 임신을 원치도 않고 양육능력도 없는 미혼모의 낙태에 법과 사회가 간여할 수 없다는 것이잖아. 여성의 낙태가 사회 경제적 이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현실이고 또 그래야 맞다 는 선택우선론(pro-choice)은 설득력이 있지. 생명의 존엄성과 사회 경제적 불가피성 가운데 무엇이 우선이냐? 무엇이 우선이어야겠어?”
  “글쎄요.”
  양 정희는 생글생글 웃었다. 이 태호는 양 정희가 내민 자료를 되돌려주며 도움을 끝냈다.
  “자. 그럼 이제 가서 고민하면서 논리를 만들어 봐요. 역사적 희생이든,  남성우위론과 여성해방운동 사이에서의 희생이든, 피할 수 없는 시대 환경 조건에 의해서 합법적으로 낙태가 용인되어야 한다면, 어떤 면에서는 ‘자연사’라고 할 수 있을 거야. 다소 궤변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이 태호는 자기가 말하고도 웃었다. 그러나 양 정희의 얼굴은 환해졌다.  그녀는 수습이었다. 아직은 주어진 원고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일이지 완벽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선입견이나 주관을 억제하고 냉정하고 공정한 입장에서 자료를 반복해서 읽어 봐요. 그러면 자기대로의 판단과 글 쓰는 방향이 잡힐 거야.”
  “고마워요 부장님… 그런데, 그러면 태아의 상태는 생명체인가요? 정의를 어떻게 내려야 할지…”
  “서양에서는 지상에 태어난 것을 기준으로 삼아. 로마시대부터 그랬다니까. 그러나 동양에서는, 특히 우리나라는 잉태된 순간을 생명의 시작으로 보지. 그래서 우린 한 살 더하지 않나?”
  “그렇군요.…”
  양 정희는 자상하게 도움을 준 데 대해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자 그러면 됐지?”
  하고 이 태호는 일어섰다. 잠시 걸으면서 머리를 쉬게 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만 더요.”
  양 정희는 조금 더 원했다.
  “원고는 어떻게 쓰는 게 좋죠? 이런 것도 먼저 결론을 말하고 다음에 줄거리를 요약하고 그 다음에 본문을 쓰나요?”
  “물론 그래야지. 어쨌든 중요한 건 저널리즘의 보편성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거야. 저널리즘이 뭔지 알지?”
  “예. 알지만… 한 번 말씀해 주실래요?”
  양 정희는 이 태호와 주거니 받거니 하는 데 재미를 느꼈다.  
  “저널리즘은 일상생활에 뿌리를 두는 거야. 보통 사람들의 평균적 지식 ―, 쉽게 말하면 상식이랄까 통속적이랄까 하는 선에서 독자와 교감하면 족한 거지. 전문적 지식이나 아카데미즘과는 거리가 있는 거라구. 왜 요즘 정치인들 잘 쓰는 말 있잖아. 포퓰리즘(Populism)… 대중영합주의라는 거. 그게 원래는 잡지인 들의 용어야, 정치인들의 용어가 아니구.”
  “그렇군요. 잘 알았습니다.”
  양 정희는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 생긋 웃었다.
  “애매한 부분이 많아 경험 없는 입장에서 정리하기는 좀 힘들 거야. 아직 시간은 넉넉하니까 열심히 고민해 봐요. 내일 간담회 때 김 차장을 도와 기록하다 보면 얻어지는 게 있을 수도 있을 거야.”
  “네. 그럴 게요.”
  “그럼 난 잠시 나갔다 올 게”
  “네…”
  이 태호는 사무실, 아니 잡지사 밖으로 나왔다. 잠시 거리를 산책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3층 계단을 내려와 막 입구를 빠져나가려는데 곽 재수 신부를 만났다.
  “오, 이 부장. 어디 가시나?”
  곽 신부는 이 태호 부장보다 13살 쯤 위였다.
  “오, 신부님. 찬미 예수님!”
  이 태호는 가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그렇게 인사하며 합장했다.
  “잠시 바람 쐬려고 나왔습니다.… 신부님은 어쩐 일이세요?”
  “수필 원고 가지고 왔지.”
  곽 신부는 원고 봉투를 내밀었다.
  “원고야 팩시밀리로 보내시면 되는 것을 요.”
  “허허. 겸사겸사 내일 간담회를 하자는데 주제가 어마어마하게도 죽음 아닌가? 무슨 얘길 하자는 건지 궁금해서 들린 거야. 잡지사 의도가 뭔지를 미리 알면 좋지 않겠나?”
  “아,… 죽음을 얘기하자는 게 아니라 자연사입니다. 그것도 전화 주시면 됐을 걸요”
  “괜찮아. 마침 시간도 있고, 성당도 이웃인데 뭘. 얼굴 보면서 차 한 잔 하는 것도 좋겠지.”
  “어쨌든 잘 오셨습니다. 저야 신부님만 뵈도 머리가 맑아지니까요… 그럼 모퉁이찻집으로 가시죠.”
  “그래. 모퉁이 찻집이 좋지.”
  곽 신부는 돌아서서 이 태호와 함께 인사동 네거리의 한쪽 모서리 6층 건물의 2층에 자리 잡은 모퉁이 찻집을 향했다.

  7
  “어서 오세요. 이 부장님. 어머! 신부님도 오셨네요.
  찻집 주인 윤 정숙은 반갑게 맞았다.
  “오허허. 잘 있었오?”
  곽 신부는 환한 웃음으로 답례했다. 이 태호는 거의 매일, 어떤 때는 하루 두 번도 드나들어 남 같지 않은 사이였다. 찻집에는 서른 살 된 윤 정숙 사장 외 여자종업원이 둘 있었다. 하나는 주방, 하나는 서빙인데 주방 박 영자는 30대 중반의 기혼자였고 서빙 유 재숙은 22살 아가씨였다.
  “아, 윤 선생…”
  이 태호는 윤 정숙을 사장이라 부르지 않고 선생이라 불렀다. 찻집 주인이지만 한편에선 다도(茶道) 사범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태호를 따라 찻집을 드나드는 사람은 모두 윤 사장을 윤 선생이라 불렀다.
  “내일 오후에 우리가 한 쪽 공간을 써야 해요… 여덟 분 정도 모여서 간담회를 해야 하거든.”
  찻집은 카운터를 가운데 두고 오른쪽과 왼쪽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4개의 탁자가 있는 왼쪽은 공간이 작은 대신 창가라는 이점이 있고, 두 배쯤 되는 오른쪽은 막혀있지만 넓고 네모반듯하고 아담하여 간담회를 하기 안성맞춤의 공간이었다.
  “아침에 김 미숙 차장에게 연락받았어요. 잘 준비해 드릴 게요.”
  이 태호는 기분이 좋았다. ‘역시 김 차장은 빈틈없어.’ 하고 속으로 대견해 했다.
  곽 신부와 이 부장은 윤 사장이 안내하는 대로 왼쪽 공간으로 가서 창가에 놓인 탁자 중 하나에 앉아 차를 주문했다. 이 태호는 웃으며 말했다.
  “신부님은 간담회 준비하실 거 없잖아요. 늘 낙태 반대운동하시고 또 성당에서 장례를 인도하시니까 자연사나 죽음 따위에 대해서는 아시는 게 많으실 것 같은데요.”
  “어허, 죽음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다 자기 생각을 갖고 있을 뿐이지.”
  곽 신부는 소탈하게 웃었다.
  “가톨릭… 아니 가톨릭이 아니겠죠. 성서적으로는 자연사가 어떻게 해석될까요?”
  차와 다기, 더운 물이 나오자 이 태호는 익숙한 솜씨로 다기에 더운 물을 부어 예열하고, 차를 달였다.
  “자연사 같은 용어로 성경에 접근할 수는 없어요. 그냥 삶과 죽음이지.”
  “그런가요? 그럼 죽음을 얘기해야 하나요?”
  “죽음이지. 성서적인 대전제는 인간은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이에요. 애초에 죽음이 없었으니까. 성경은 죽음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여부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어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이것이 성경에서 죽음에 관해 언급한 최초의 부분이란 건 이 부장도 아시겠지? 여기서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하게 죽음이란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불순종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어요. 죽음은 아담과 이브가 지은 죄 ― 즉 불순종의 소산이거든. 이해가 되겠죠? 사람이 죽음을 삶의 끝으로 인정하기 싫어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 있어요. 인간은 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럼 자연사라든가 안락사 같은 용어는 어떻게 해석될까요?”  “그런 건 없어요. 삶이든 죽음이든 성서적으로는 모두 주님의 뜻이에요. 이런 말이 있지요. 너의 뜻에 반하더라도 너는 살고, 또 죽을 것이다. 라는”
  “그럼 뭔가요. 결국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는 말과 같네요.”
  이 태호의 눈이 반짝였다. 곽 신부는 말했다.
  “같은 셈이지. 다만 성서에 의하면 하느님은 먼저 경고를 하셨어요. 순종해라. 불순종은 죽음을 초래한다, 라고. 이런 하느님의 경고를 거짓이라며 첫 인간 부부인 아담과 이브를 속인 것이 사탄이에요. 창세기 3장 4절에 있지.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않으리라 하면서 아담과 이브를 현혹했어. 거기 넘어가 순종하지 않았고, 그러자 하느님께선 경고하신 대로 인간을 죽게 하신 거지. 하느님의 뜻인 겁니다.”
  “그럼 영혼은 무엇이죠?”
  “성경에는 사실 영혼도 없어요. 영혼은 사탄이 만든 또 하나의 거짓말인 거지. 거짓이 거짓을 낳은 거랄까. 사람이 죽게 되자 사탄은 육체가 죽어도 영은 살아남는다는 거짓말로 거짓을 보완한 거야. 예수께서 사탄 마귀를 거짓의 아버지로 묘사하신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어요. (요한복음 8:44)”
  “들을수록 머리가 띵 해지네요… 그럼 부활은 뭐죠?”
  이 태호는 갈수록 어려워져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곽 신부는 거침없이 말했다.  
  “부활은 있지. 일어나는 것. 부활신앙을 믿는 크리스천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고백이 있어. 요한복음 5장 24절이지. 이 부장도 학생시절에 시제(時制, Tense)를 배웠죠? 과거, 현재, 미래, 과거완료, 현재완료 등등…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도 이 시제가 중요해요.”
  곽 신부는 품안에서 포켓 성경을 꺼내 요한복음 5장 24절을 찾아 읽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곽 신부는 성경을 펼친 채 테이블 위에 놓고 말을 이었다.  
  “이 구절을 잘 봐요.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라고 한 것은 뭔가요? 과거 시제죠? …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는 미래 시제에요. 그리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는 현재 시제에요. 부활신앙을 믿는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우리들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시점에 이미 구원을 얻은 겁니다. 그러니 미래에 저승에 가서 심판대 앞에 설 일이 없어요. 그럼 무엇인가요? 현재가 곧 영생을 누리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말씀 그대로에요. 믿는 사람들에겐 현재의 삶이 영생이에요.”
  “점점 모르겠네요. 그럼 부활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 태호는 솔직하게 멍청해졌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곽 신부는 그런 이 태호를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사제 입장에서는 이번 같은 간담회에서 죽음과 부활에 대해 성서적 의미를 제대로 알리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죽음도 부활도 주님의 뜻 안에 있음을 알리고 싶은 거지요. 앞에서 설명 드렸지? 불순종으로 인해 죽음이 생겼다고. 그 죽음에 대한 하느님의 해결책이랄까 격려적인 약속이 곧 부활이에요.”
  “아직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이 태호는,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흥미는 진진했다.  
  “부활로 번역되는 그리스어는 ‘아나스타시스’입니다. 직역하면 ‘다시 일어서는 것’을 의미하지요. 죽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예요. 이해가 됩니까?… 죽으면 눕지요? 그렇게 누워 있다가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능력으로 다시 생명을 주시고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그럼… 성서적으로는 죽음이 없는 건가요? 그냥 눕는 것. 그러다가 때가 되면 다시 일어서는 것…”
  “맞아요. 바로 그겁니다. 사람이 누우면 영도 함께 눕습니다. 육체와 유리되어 따로 노는 영혼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화장을 안 하고 매장을 하는 것이고…”
  그제야 조금 이해가 되는 이 태호였다. 그것은 새로운 시각이 열리는 것과 같았다. 찻잔을 들고 맛을 음미하며 성서적인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데 곽 신부가 또 말했다.
  “하느님은 다시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한 5:28, 29)고 말씀하신 겁니다. 사도 바울도 의로운 사람들과 불의한 사람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하느님께 향한 자기 희망을 표현하였고(사도 24:15), 보다 오래 전에 산 하느님의 충실한 종 욥 역시 부활에 대한 희망을 이렇게 표명했어요. 나에게 구원이 올 때까지 나는 기다리겠습니다. 당신(하느님)은 부르실 것이며, 나는 당신에게 응답할 것입니다. 하고.(욥 14:14~15)”
  비로소 이 태호의 머리에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부활에 대한 약속과 죽은 자가 영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히 다른 개념이었다. 죽은 자의 영이 어떤 중간 세계에 살아 있다면, 부활의 실현성은 없어지고 만다. 믿는 자는 죽을 때 각자 자기의 상이나 운명을 받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해가 된다. 성서적인 죽음은 무의식 상태로 누워 있는 것?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때가 되어 깨울 때까지?
  그런데, 그렇다면 죽음이 육체와 영의 분리를 의미하지 않으며 영이 계속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면, 윤회는 무엇이며 영의 세계로부터 온 통신 같은 것은 다 조작이란 말인가?
  “신부님…”
  이 태호는 신부에게 그런 질문을 해도 괜찮을까를 잠시 생각해 본 뒤 물었다.
  “그런 얘기들이 있죠. 영계로부터 오는 것으로 여겨지는 통신 같은 거… 그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요?”
  “역시 사탄의 작업으로 봐야지.”
  곽 신부는 단호했다.
  “성서에 분명한 답이 있어요. 사탄은 자신을 빛의 한 천사로 가장한다. 그의 대행자들이 선의 대행자들로 가장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라고 경고했어요. 반역한 천사들은 손쉽게 사람들을 속이고 미혹하려고 때로는 도움을 주는 체 하면서 산 자들과 통신을 하지요. 사도 바울이 이 엄청난 속임수에 대해 경고하는 대목이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 그릇 인도하는 영감 받은 말과 악귀들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디모데 첫째 4:1). 그러므로 죽은 자로부터 왔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응답이라도 선의 대행자들로 가장하여 종교적 거짓말을 조장함으로써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의 진리를 떠나 미신의 노예가 되게 만들려는 악귀들로부터 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죽은 자와는 아무 것도 말하거나 행하거나 느낄 수 없습니다.… 시편 146장 3절과 4절을 볼까요?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의 생각도 소멸하리로다. 어때요? 성서적으로는 죽음 이후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겠지요?”
  “……”
  이 태호는 말을 잃었다. 성경을 착실히 읽어본 적이 없는 비 크리스천이긴 하지만, 그래도 귀동냥으로 알고 있던 평소의 상식과는 너무 다른 해석이었다. 그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곽 신부를 빤히 보았다. 곽 신부는 이 태호의 머리가 복잡함을 읽었다.
  “정리가 안 되나요?”
  “아뇨… 한 편에선 정리되면서 한 편에선 더 미궁에 빠져 드는, 그런  기분입니다. 새롭게 정리가 될 것 같기는 합니다. 그런데 신부님, 그럼 성서에서 이야기하는 ‘영’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면 뭐가 될까요?”
  “영이라… 그건 호흡에 의해 유지되는 사람의 생명력이라고 풀 수 있지요. 분명한 것은 호흡이 끊어지면 생명도 끝납니다. 완전 무의식 상태…. 그러므로 죽은 자가 산 자를 지배하는 일은 ― 성서적으로는 ― 불가능해요. 성서는 인간의 죽음이나 동물의 죽음이나 다 죽음으로 무의식 상태에 이르며 둘 다 지음을 받은 흙으로 되돌아간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어요. 전도서 3장 19절도 잠시 볼까요.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곽 신부는 잠시 끊었다가 이었다.
  “신명기(18:10-12)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말씀이 있어요.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어렵군요 신부님. 아니, 어려운 게 아니라 명쾌하군요. 성서로 이야기하는 죽음이라는 거… 종합하면 무엇인가요. 모든 인간은 물론 아니겠지요. 선택받은 의로운 사람에게는 죽음이란 없다. 단지 누워있을 뿐이다. 그러나 호흡이 끊기면 영(생명)도 사라진다. 누워서 기다리다가 놀라운 미래를 마련해놓으신 하느님의 부름이 있을 때 다시 생명을 받아 일어나리라. 이런 건가요?”
  “브라보―!”
  곽 신부는 작은 소리지만 환호하며 손뼉을 쳤다.
  “맞아요. 훌륭합니다.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 의로운 사람들이 신세계에서 부활될 것임을 약속하신 거죠.(디도 1:1, 2; 요한 5:28)  사랑에 찬 이 부활의 약속은, 여호와께서 인간 창조물의 복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진심으로 죽음과 슬픔과 고통을 제거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는 사례예요. 그러므로 죽은 자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는 거지요. (이사야 25:8, 9; 계시 21:3, 4) 인자하고 공정하신 하느님 여호와께서 선한 자 모두를 부활시키실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셔서 죽음의 고통을 없애실 거예요. 성서에는 도처에 그렇게 약속된 신세계의 상태가 어떠할 것인지, 풍부한 묘사가 나옵니다. (시 37:29; 베드로 둘째 3:13) ▲그 때는 평화롭고 행복한 때 그리고 모든 동료 인간을 사랑하는 때가 될 것이다. (시 72:7; 이사야 9:7; 11:6-9; 미가 4:3, 4) ▲모두가 안전을 누리며 훌륭한 주택과 함께 즐거움을 주는 직업을 갖게 될 것이다. (이사야 65:21-23) ▲모두가 먹기에 좋은 것들이 풍족하게 있고 (시 67:6; 72:16) ▲모두가 활기 넘치고 건강을 누릴 것이다. (이사야 33:24; 35:5, 6)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요한계시 20:6)… 물론 모든 사람이 부활하는 것은 아니고 선택된 기념 무덤에 있는 죽은 자들이 하느님이 정하신 때에 부활하기까지 무의식 상태로 쉬고 있는 것이지요. (전도 9:10; 요한 11:11-14, 38-44) 따라서 우리의 희망과 염원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달려 있어요.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이사야 25:9)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이 명백하게 밝혀 주는 것처럼, 죽은 자는 부활 때까지 무 활동, 즉 죽어 있게 됩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영혼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서의 명백한 가르침입니다.”
  “고맙습니다. 신부님.” 이 태호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성서적 정의를 오늘에야 비로소 바르게 알게 되었네요.”
  “그랬다면 오늘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군요. 이 부장, 메멘토 모리란 말 아시나?”
  “그런 소설이 있었죠. 이 모 작가가 썼던가요? 장편소설…”
  “아, 그런 소설 말고…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그 말은 그대도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런가요?”
  “로마제국 시절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돌아와 행진하는 장군은 뒤에 노예를 한 명 세워 시내를 지나는 동안 뒤에서 ‘메멘토 모리’를 기억시키는 것이 풍습이었다고 해요. 승리에 들떠 쿠데타를 모의한 일도 있기에 승리한 장군이 군대를 끌고 입성하면 사형될 수도 있었다지 아마. 그런 상황에서 너무 우쭐하지 말고 겸손 하라. 는 뜻으로 노예를 시켜서 승리한 장군에게 메멘토 모리를 복창하게 만든 거래요. 황제가 시켰는지는 모르지만…”
  “재미있는 이야기군요. 그런데 이야기 끝에 메멘토 모리는요?”
  “죽음을 이야기하고 나니 생각이 났어요.… 성서적이 아니라 가톨릭적… 아니 나 개인적으로는 이런 생각이 드네요. 모든 죽음이 결국 자연사라는”
  곽 신부는 간담회 주제가 ‘자연사’라는 것을 잊지 않았음을 확인시키듯 개인적 소견을 밝혔다.  
  “사람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가는 거지. 어떻게 사느냐 하는 말은 어떻게 죽을 것이냐 라는 말과 같을 수도 있어요. 현대의 우리는 살아있는 것에만 목을 매달지만 삶의 최종 가치는 죽음으로 평가되는 게 맞을 거예요. 아무리 욕심 부려봤자 삶은 죽음으로 완성된다는 말이지요.… 공감이 갑니까? 이 부장.”
  “그것도 멋진 해석이네요. 죽음으로 완성되는 삶… 아니 앞뒤를 바꾸는 게 좋겠네요. 삶을 완성시키는 죽음 ―. 그것이 최선의 자연사라고!”
  이 태호는 괜찮은 헤드라인을 발견한 것 같아 기뻐서 목소리가 저절로 높아졌다.
  “역시 문장은 글쟁이가 다듬어야 제대로 되는군. 삶을 완성시키는 죽음이라. ― 맞아. 그럴 듯하네.”
  곽 신부는 만면에 미소를 지어보인 뒤 덧붙였다.  
  “하나 더 추가할까? 죽을 것을 명심하라는 뜻의 또 다른 라틴어에 호디에 미히, 크라스 띠비 (Hodie Mihi , Cras Tibi) 가 있어요. 영어로 바꾸면 투데이 포 미, 투모로우 포 유(Today for me, tomorrow for you)가 되고 우리말로 하면 ‘날 위해 오늘, 당신을 위해 내일’이 되죠. 그것을 가톨릭에서는 보통, 오늘은 내가 죽고 내일은 네가 죽는다는 뜻으로 해석해요. 메멘토 호모, 쿠비아 풀비스 에스 에트 인 풀베렘 레베르테리스(Memento homo, quia pulvis es, et in pulverem reverteris). 인간이여, 너는 흙이며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임을 기억하라. 는 말과 함께.”
  “좋은 말이네요. 그런데 같은 성서를 놓고 개신교적 해석과 가톨릭적 해석이 다를 수 있나요?”
  이 태호는 부지런히 메모를 하다가 물었다.
  “근본은 같지. 다만 각론에선 다를 수 있어요. 죽음을 삶의 연장선상에 놓고 보면 죽음의 권리장전 같은 게 선명해지지. 생각나는 대로 말하면 ▲인체의 고결을 기대할 수 있는 권리 ▲평안과 위엄 속에서 죽을 수 있는 권리 ▲혼자 외롭게 죽지 않을 권리 ▲죽음 후에 존경되어질 수 있는 권리 ▲자신에 맞는 방법으로 임종에 관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 ▲통증은 물론, 삶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
  “잠깐만요 신부님. 삶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요?”
  이 태호에겐 ‘자살’이라는 두 글자가 섬광처럼 스쳐갔다. 자살을 자연사로 끌어들일 연결고리를 찾은 것이다.  
  “물론이지, 삶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가 포함되어야지.”
  “맞습니다. 좀 더 정리가 되는 것 같네요.”
  “더 있어요. ▲사후 세계의 희망을 심어주는 자에 의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권리라던가 ▲최선의 자기 능력을 발휘해 죽음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자기 욕구에 맞도록 노력해주는 이해심이 많은 사람에 의해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권리 등등”
  “우와— 그러다보면 죽음의 미학이 되는 거 아닐까요?”  
  “그럴까? 핫핫하…”
  곽 신부는 호탕하게 웃은 뒤 오랜 시간 우러난 차를 마셨다. 이 태호도 같은 차를 마시고 물었다.
  “신부님. 그럼 ― 우문일지 모르지만 ― 가톨릭에서 ‘자연사’는 어디까지 인정될까요?”
  “처음에 말했듯이 자연사라는 용어는 아무래도 가톨릭에서는 낯설어요. 죽음이란 게 아무리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도 피할 수 없는 거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마감하느냐 하는 것은 천주께서 시간성에 대하여 우리에게 베푸시는 섭리의 일면이니까요. 사람마다 죽음의 적시성(適時性) —. 그래요. 중요한 것은 이 적시성이지요. 이 적시성에 대해 매우 교훈적이고 위안을 주는 자료로 페이버 신부의 책이 곧잘 인용되지요…”
  “오늘 정말 공부를 제대로 하네요. 죽음의 적시성이란 표현도 처음 접하는 것 같네요… 페이버 신부가 뭐라고 하셨나요?”
  “죽는 시간에 초점을 맞춰서 우리를 설득했어요. 시간이 중요하다고 여긴 거지. 믿음이 충만한 사람일수록 제일 유리한 처지에서, 알맞은 때에 죽는다고 보신 겁니다. 젊어서 죽는 경우는 오래 살면 늙어서 지옥에 갈지도 모르니 구원을 위해서 다행한 일이다. 하셨고, 늙어서 죽는 건 그로 하여금 천주 성의에 순응시켜 젊은 시절의 죄를 보속케 하신 게 됩니다. 고치지 않고 그냥 버려두면 필경 지옥에 떨어질 못된 습관을 늙어서 몸이 쇠약해지면 쉽게 고칠 수 있으니까 시간을 길게 주신 거지요. 간혹 고생 끝에 큰 재산을 모아놓고 즐기려 할 때, 또는 소원이 성취되어 크게 입신양명할 무렵에 애석하게 죽는 수도 있지요. 그것 역시 천주께서 사람의 성격이나 환경으로 보아 반드시 발전할 죄악의 씨가 영혼에 깃들이고 있음을 보시고 그 싹이 트기 전에 거두심이다. 하신 거예요. 이렇게 이해하다보면 모두 알맞은 때에 죽는 것이 되겠지요. 죽음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천주의 지혜와 사랑이 각 사람의 언제 어떻게 죽느냐에 지극히 인자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의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천주께서 각 사람의 죽음의 실정을 일일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다면 모두가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죽게 되는지를 이해하고 주의 섭리에 탄복할 겁니다. 인간 시련의 최후 고비인 죽음에 대하여 천주께서 수많은 율법과 준비를 마련해 놓으셨음을 보면 구원을 받을 복된 영혼들은 감격의 흠숭을 드리며 황홀한 사랑 중에 머물고자 할 것이다. 이것이 페이버 신부의 논지에요.”
  “이해하기 어렵군요. 죄송한 표현이지만 제가 듣기에는 말만 그럴 듯하게 늘어놓았을 뿐 모두 합리화 시킨 것뿐 아닌가요? 결국 일찍 죽으나 늦게 죽으나,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모두 천주님이 뜻이라는 거니까…”
  “그런 셈인가. 하하…”
  “일찍 죽은 사람은 착하게 살았는데 앞으로 죄 지을까봐 일찍 데려가시고, 오래 사는 사람은 죄가 많으니 노쇠하도록 두어 회개하게 하신 뒤 거두시고…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시려는 인자신가요?”
  “하하하. 나의 요지 전달이 잘못 된 것 같군.… 페이버 신부를 깊이 알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닌데…. 하하하.”  
  곽 신부는 멋쩍음을 웃음으로 가렸다.
  “아무튼 오늘 공부 많이 했습니다. 신부님. 긴 시간 좋은 말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숙제를 풀어 나갈 길이 조금씩 보이는 것 같네요.”
  이 태호는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그러면 다행이었네. 그래요. 죽음이란 건 어쩌면 살아있는 우리로선 답을 얻을 수 없는 문제일 수도 있어요.”
  “저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두 시간은 족히 흘렀다. 곽 신부는 시계를 보더니 일어설 준비를 했다.
  “어이쿠. 벌써 다섯 시 반이네. 시간이 많이 됐군. 자, 그럼 나머지는 내일 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예, 신부님.”
  곽 신부가 일어서자 이 태호도 따라 일어섰다.
  “여러 모로 고맙습니다. 신부님”  

  8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휴대폰을 살펴보니 부음을 전하는 문자 메시지가 있었다.
  …오늘 아침 한양인쇄 사장 임성길 부친 노환으로 별세. 오성병원 장례식장 지하 6호… 였다.
  한양인쇄라면 잡지를 인쇄하는 중요한 거래처였다. 바빠도 시간을 내서 문상을 가야했다. 편집실로 돌아온 이 태호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국장실로 들어가 한 국장에게 보고했다.
  “국장님. 한성인쇄 임 사장이 부친상을 당하셨네요.”
  “그래? 그럼 가 봐야지. 어때. 이 부장. 시간이 되나?”
  “국장님이 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는 내일 간담회 준비도 있고… 해서요.”    
  “장례식장이 어디래?”
  “오성병원 장례식장입니다. 지하 6호.”
  “우선 조화를 하나 보내지. 그리고 내가 약속이 있어서 그랬는데 늦게라도 가보지…”
  “예. 조화는 바로 보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나가려는데 한 국장이 물었다.
  “어떻게 돌아가셨대?”
  “노환으로 돌아가셨답니다.”
  “노환? 연세가 높으신가?”
  “작년에 칠순 잔치를 하셨죠, 아마”
  “그럼 조금 일찍 가셨군.… 그렇지 뭐. 우리나란 사인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 관습이 있으니까.”
  그 말에 이 태호는 문고리를 잡은 채 고개를 돌렸다.
  “사인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나라도 있나요?”
  “그럼… 내 미국에서 공부할 때 본 건데 미국 사람들은 사인을 구체적으로 밝혀. 헤럴드 트리뷴(Herald Tribune) 등의 부고란을 보면 ‘간암으로 사망’ ‘전립선암으로 수술했으나 3년 만에 재발하여 척추전이로 사망’ 이런 식이지.”
  “우린 왜 안 그러죠?”
  “우린 사인을 공개적으로 자세히 말하는 것은 고인에게 누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걸. 그래서 고작 부음란에 밝혀야 지병으로 타계했다거나 노환으로 별세, 급환으로 별세, 하는 정도지. 의사신문에 의사의 사망소식을 낼 때도 그렇게들 하드라고… 하긴 폐암 전문의사가 폐암으로 죽었다면 체면 구기는 일이 되겠지. 환자보곤 담배 끊어라, 계속 피면 죽는다. 하면서 자신은 피워대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겠어?”
  “말씀을 들으니 예전 일이 하나 생각나네요. 제가 아는 선생 한 분이 분명 사고로 돌아가셨는데 연락은 ‘급환으로 별세’라고 왔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별 생각을 안했는데…”
  말끝을 싱거운 웃음으로 버무리고 이 태호는 국장실을 나와 제 자리로 갔다. 책상 앞에 앉아 곽 신부와 나눈 얘기를 떠올리며 난필로 어지럽게 메모한 것을 컴퓨터로 정리했다.
  여섯 시 반이 되자 한 국장은 약속도 있고 조문도 가야하니 먼저 간다고 퇴근했다. 편집실 직원은 다섯 명 전원이 책상에 앉아 나름대로 뭔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부장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일까.    
  일곱 시가 되자 김 미숙 차장이 ‘부장님 저 먼저 퇴근할 게요.’하며 일어났다. 이 태호는 반사적으로 ‘그러지 뭐. 수고했어요.’ 소리를 먼저 한 뒤 핸드백 챙기는 김 차장을 보며 물었다.
  “정리는 좀 됐어?”
  김 차장은 예쁘게, 그러나 힘없이 웃었다.
  “잘 안 돼요. 아무리 봐도 자살은 자연사하고 상관없는 것 같아요. 자살은 그냥 자살인 거죠. 자연사의 범위도 정해지질 않아요. 그냥 죽음이 나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죽음 저런 죽음 하고 나누는 게…”
  “오늘 곽 신부님 말씀 들으면서 나도 그런 생각을 했어. 하여튼 내일 간담회 가진 후에 생각해보자구.”
  “좋은 말씀 많이 들었어요?”
  “응. 말씀이라기보다 공부를 많이 했어. 죽음의 성서적 해석 같은 거. 그런데 요지가 뭔지 알아? 어떤 죽음도 주님의 뜻인 거야. 언제 어떻게 죽어도…”
  “살인은 아니겠죠. 성서에도 살인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십계명에도 있는데…”
  “살인은 있지. 그러나 그렇더라도 죽은 당사자는 결국 주님의 뜻인 거야.”
  “그럼 자살도요?”
  “내 생각엔 그래. 참. 죽음의 권리장전 같은 게 있는 모양이야. 그걸 찾아 봐. 거기 이런 항목이 있대. 통증은 물론, 삶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 어때? 주님의 뜻과 죽음의 권리장전과 자연사를 섞어 보는 건?”
  “에이. 차라리 그런 자리에 저를 좀 불러주지 그랬어요…”
  “지금 생각하니 그러네. 근데 너무 우연한 미팅이어서 생각을 못했지…”
  “부장님은 늘 그렇죠 뭐. 알았어요… 아무튼 내일 간담회 갖고 난 뒤 정리해 볼게요.”
  김 차장이 퇴근하는 것을 신호로 남은 기자들도 하나 둘 일어섰다. 수습기자 양 정희만 끝까지 이 부장 눈치를 보며 퇴근을 망설이는 것 같았다. 이 부장은 양 정희에게 말을 걸었다.
  “양 기자는 어떻게… 낙태에 관해 정리해 봤어?”  양 기자 역시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료만 뽑아서 통계 내는 방식으로 정리했어요. 죄송해요… 낙태를 자연사에 결부시키는 일은 못할 것 같아요”
  “괜찮아. 죄송할 거 없어. 낙태가 기독교 사회에서 많았다고 했지? 오늘 신부님 만나 공부하면서 알게 된 건데, 당연하다는 걸 알았어요. 모두 주님의 뜻이라는 보자기에 싸면 되는 거였어.”
  “어머, 그렇게 될 수 있나요?”
  “될 거 같아. 다만 내일 간담회에서 견해를 유도해봐야지. 태어나지 못했더라도 일단 잉태가 된 생명이라면 주님의 말씀 안에 안길 수 있는가 여부를.”
  “어머, 그러면 저는 고민 안 해도 되겠네요.”
  “너무 걱정 마. 잘 될 거 같으니까…”
  “고마워요 부장님. 그럼 저도 퇴근할 게요.”
  “그래요. 수고했어요.”
  이 태호는 손을 흔들며 어서 퇴근하라고 했다. 그렇게 모두 퇴근하고 난 사무실에 이 태호는 혼자 남았다. 나도 퇴근해야지, 하면서도 일어나지지가 않았다.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는 것은 곽 신부와 나눈 이야기의 여운 때문인 것 같았다. 죽음에 대한 성경적인 해석이 그렇다면… 불교의 성서적 해석은 어떨까가 궁금한 것이었다. 기독교는 매장이지만 불교에선 화장을 한다. 무엇이 다른 것일까. 종교에 따라 접근과 해석이 다르겠으나 크게 나누면 성경과 불경 아닐까.…. 생각을 거듭하던 이 태호는 이웃에 있는 법왕사 주지 선운스님을 생각했다. 스님 역시 기고를 자주 하는 단골 필자의 한 분이었다. 전화를 걸었다. 마침 스님이 받았다.
  “스님, 안녕하세요. 이 태호입니다.”
  스님은 대뜸 이 부장을 기억했다.
  “오오, 이 부장. 날도 어둑한 데 어쩐 일로?”
  “내일 간담회 준비를 하다가 스님 생각이 나서 전화 올려봤습니다.”
  “허허허. 내게도 숙제를 줘서 지금 한창 얘기할 자료를 모아보고 있어요.”
  “혹시 저녁 공양 안 하셨으면 같이 하실까요? 불교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나. 말씀을 미리 듣고 간담회 사회 볼 자료를 만들었으면 해서요.”
  “아, 오늘은 안 되겠는데. 준비도 해야 하고 선약도 있어요.”
  스님은 선약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 태호는 얼른 체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지요. 하고 말하려는데 스님이 마침 생각난 듯 덧붙였다.
  “혹시 모퉁이 윤 보살이 내일 도와달라는 거 없었소?”  
  “모퉁이 찻집요? 아, 내일 서울일보가 취재 나오는데 도와달란 말이 있었습니다. 오후 1시 반쯤 만나서 한 마디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내게도 한마디 도와달라고 했어요. 그럼 어떨까. 간담회가 3시라고 하니 1시 반에 같이 만나고 나면 우리 얘기할 시간이 충분치 않을까?”
  스님은 그렇게는 시간을 내주실 요량을 보였다. 순간 이 태호는 잊고 있었던 ‘그’를 떠올렸다.
  “그건 제가 안 되네요. 2시에 누굴 그곳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도와주실 마음이시면 차라리 점심때 뵈면 어떨까요. 점심을 대접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우린 아예 12시에 만나는 걸로 합시다.”
  “네네, 스님. 그럼 내일 뵙는 걸로 하겠습니다.”
  9
  늘 일과 약속에 밀려 바쁘게 생활하고 있음에도 이번 수요일은 특별히 중요한 날처럼 여겨지는 이 태호였다. 그래서인지 퇴근하려고 하는 마음 일편에 뭔가 더 준비해야 할 것이 있어만 보였다.
  그는 일어나려다 다시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인터넷에 들어가 ‘죽음’을 키워드로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굵게는 동양과 서양, 불교와 기독교로 나눌 수 있지만 그 저변에 참고 될 만한 다양한 견해가 있겠지. 그걸 좀 훑어보고 가자,’
  하고 중얼거리며 여기저기 들어가 자료를 다운 받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우리나라 무속 신앙과 죽음을 클릭하면서 동양의 토테미즘을 살펴보았다. 우리 옛 풍습에서는 육체에서 영혼이 떠나 버리면 정말 죽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영혼이 다시 그 육체 속으로 돌아올 수 있다 했고 그러면 살아난다고 믿었다. 한 인간이 호흡을 멈추면 그 사람이 입던 옷을 가지고 지붕 한가운데로 가서 북쪽을 바라보며 그 사람의 이름을 세 번 길게 부르는 풍습도 있었다. 그의 혼이 다시 몸에 합하도록 기원하는 것이다. 이것을 고복(皐復) 혹은 초혼(招魂) 이라 했는데 이렇게 해도 살아나지 않으면 비로소 죽음을 받아들였다.
  한국인의 영혼관은 둘인데, 하나는 사람이 죽은 후 저승으로 가는 사령(死靈)이고, 다른 하나는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깃들여 있는 생령(生靈)이었다. 한국적 무교(巫敎)에서는 영혼을 평안히 모셔서 저승으로 잘 가게 하는데 특색을 두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영혼에 대한 모습과 성격 규정을 살아있는 사람과 동일하게 인격적으로 대우한 것이었다. 죽음을 '돌아가셨다' 라고 하는 것도 이 세상에서 살다가 늙어 수명이 다하면 저 세상으로 '돌아가서 살게 된다' 는 한국적 생사관의 반영이지 종결은 아니었다.  

  유교의 죽음관은 모호했다. 공자의 제자인 계로가 공자에게 ‘죽음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태어나는 것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 라고 하였다. 이처럼 유교는 내세관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죽음관도 확실하지 않았다. 다만 경천(敬天) 신앙은 있었다. 죽음 자체의 의미나 죽어서 시작하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삶과 죽음을 대자연의 법칙에 의한 회귀과정으로 봄으로써 형이상학적 문제로 돌린 것이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 때문에 앞뒤로 연장될 수 있는 상념을 애초에 차단하고, 일회적(一回的)인 인생에 몰두하도록 하였다.
  공자는 귀신과 죽음의 질문을 뿌리치고, 사람과 삶에의 정열적 관심과 사랑을 강조한 것이 독특했다. 그러면서 죽음은 인생을 마치는 엄숙한 과정이라고 했다. 생사(生死) 문제를 자기 책임 아래 인생을 엮어간다는 자율 도덕론으로 정리한 것이었다.  

  도교의 죽음은 또 달랐다. 도교는 고대 중국의 민간 신앙인 신선설(神仙說)을 중심으로 불로장생의 실현을 추구하는 현세 이익적인 자연종교였다. 따라서 도교는 죽음을 끝이 아닌 변화의 일부로서 도(道)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같은 도교 내에서도 장자의 죽음관은 다소 특이했다. 그는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삶은 죽음의 동반자요, 죽음은 삶의 시작이니, 어느 것이 근본임을 누가 알랴? 삶이란 기운(氣運)의 모임이고 기운이 모이면 태어나고 기운이 흩어지면 죽는 것인데 이같이 사(死)와 생(生)이 같은 짝을 만나면 무엇을 조심하랴. 내 생애를 잘 지냈으면 죽음 또한 의연하게 맞이해야 한다.’

  힌두교의 죽음론도 찾아보았다. 고대 인도인은 사람이 죽어서 가는 세상을 야마(Yama)라고 불렀고 이것이 불교에서 염라(閻羅)라고 음역되었다. 그러나 후기 베다시대(기원전 8세기경)에 이르면 야마의 왕국에서조차 삶과 죽음이 있다는 논쟁이 일어나서 윤회 사상이 싹트게 되었다. 인도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큰 불가사의를 죽음이라고 했다.
  인도인의 죽음관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다. 먼저 죽음이란 것을 낡은 옷을 벗고 새 옷을 갈아입듯 새로운 생명을 얻어 껍질을 벗는 새롭고도 영원한 재생으로 보았는데 이는 죽음을 생명 과정의 하나로 본 것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본질적 자아를 생사의 순환을 벗어난 존재로 이해했기 때문에 현세의 죽음을 정복할 뿐 아니라 내세의 생명과 죽음까지 정복할 수 있기를 열망했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을 때 죽음의 공포는 자취를 감추고 생사의 순환에서 자유로우며, 육신의 죽음은 깨달은 자에게 있어서는 죽음이 없다고 한 것이었다. 죽은 것은 육신이지 본질적 자아는 아니라고 믿은 때문이었다.  

  10
  예수는 삶이 끝난 뒤에도 영원한 생명의 삶이 실재한다고 가르쳤다. 그렇게 가르친 교훈은 여러 곳에 나오므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신념을 지녔던 것은 틀림없었다. 영원한 생명이란 현세와 내세를 모두 아우르는 전체적인 큰 생명, 본래적인 참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함께 십자가 처형을 받은 강도의 간청에 대해,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누가복음 23:43)’라고 했으며,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누가20:38)’ 라고 말하면서 죽은 뒤의 생명은 시집가거나 장가가는, 그런 상태의 연장세계가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자신이 숨을 거둘 때에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눅23:46)’ 라는 표현들을 보면 예수도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인 하나님 신앙과 사후의 생명에 대한 신념을 가진 것에 틀림없었다. 다만 죽음을 항상 죽이는 세력과 연관시켜서 이해한 것이 다르고, 그 때문에 죽음은 ‘마지막 원수’로 극복되고 정복되어야 할 세력으로서 이해하였던 것이다.
  대략 종합하면 모든 종교와 사상이 죽음 이후에도 영적 삶의 지속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같아 보였다. 땅 위에서 장님이었던 사람이나, 교통사고로 팔과 다리를 잃었던 사람 등 지체가 불완전한 사람도, 사후세계를 경험한 증언에 의하면 ‘온전한 몸’을 구비한 자기생명체를 보았다고 했다.
  그렇게 궁극적 실재, 삶과 죽음, 영혼 따위를 이해 할 때, 기독교가 입자형태의 유형적 종교라면 불교는 파동형이었다. 입자형은 인간과 하나님 간 주체적 인격 관계를 강조하고, 파동형은 빛이 온 누리에 파동 치는 원융회통성을 강조하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기독교에서 죽음을 자연의 질서로 보지 않고 불순종으로 비롯된 극복되어야 할 과제, 심지어 "마지막 원수"라고 까지 본 것은 생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기보다는 ‘정의로움에 대한 갈증’과 생명을 파괴하는 불의한 세력(사탄)과 죄의 권세 때문 같았다. 특히 죽음을 생물학적 과정으로서 이해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한 개체가 종말을 맞아 해체되는 과정이 아니고 하나의 엄연한 생명에 대한 횡포, 가차 없는 지배권세, 공격적인 세력, (독화살을 쏘아대는) 가시로서 표현되는 매우 부정적인 것이라는 인식이었다.
  따라서 생사에 관한 기독교적 입장은, 하나님만이 영원 자존하시는 창조주요 영존하시는 전능자이시며, 그 피조물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고 피조물 중 특히 그의 형상을 닮아 지음 받은 인간을 당신의 영원한 영광과 생명에 초청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관점이었다. 인간의 생명이 영원한 것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불멸성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고, 영원하신 자존자의 선물이며 초청이고 창조주 하나님의 영원성과 영광에 참여하도록 인간에게 허락하기 때문이라는 믿음이었다.
  
  이 태호는 그쯤에서 오늘은 그만 하자고 했다. 시간이 열 시를 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때까지 인터넷에서 뽑아 정리한 자료를 책상 위에 가지런히 해놓고, 컴퓨터를 끄고, 사무실의 모든 전등을 끄고, 출입문을 잠그고 밖에 나섰다. 그랬더니 마치 죽음의 늪에서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피곤했다. 어디 가서 막걸리 한 사발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혼자 주점에 가 본 경험은 없고, 이 밤중에 도반이 되어줄 사람도 없었다. 이 태호는 아쉬워하며 곧장 집에 가서 쉬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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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장편 두 번째 소설집 "대수대명" file 반취 2014.06.25 4806
86 장편 사랑, 그것은 영혼의 춤 file 반취 2014.06.25 4542
85 장편 이기윤 시집 - 삶이란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인생의 계절) file 반취 2014.06.15 4896
84 장편 소설 한국의 차문화 (차의 진실) file 반취 2014.06.15 4794
83 중편 축령산 연가 file 반취 2014.06.05 4437
82 단편 사람의 사랑 이야기 반취 2013.08.25 6263
81 단편 고향의 노을 반취 2012.02.26 8469
80 중편 정리없는 끝 (2) 반취 2011.09.18 7357
79 중편 모퉁이 찻집에서 일어난 일 (4) 반취 2011.09.18 6962
78 중편 모퉁이 찻집에서 일어난 일 (3) 반취 2011.09.18 7436
» 중편 모퉁이 찻집에서 일어난 일 (2) 반취 2011.09.18 7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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