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이적자

by 반취 posted Aug 06,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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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자(利敵者)

육이오 당시 나라를 구했다 할 공적을 세웠음에도, 체포되어 사형언도까지 받았던 한 병사의 기구한 이야기. 육군 중사로, 육사 11기 생도가 될 뻔하다가 의용군 인민군을 거쳐 다시 국군이 되고, 체포되어 사형언도까지 받았던 홍윤희의 인생 실화가 소설의 바탕이다. 그의 결정적인 죄는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 현장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1
“홍윤희를 찾는군. 혹시 자네 아냐?”
카드 베팅에 열중인 홍윤희에게, 옆 테블에서 맥주 마시며 TV를 보던 친구가 말했다. KBS에서 중국교포 이산가족 찾아주기 프로가 진행되고 있다.
“웃기지 말게. 엔빈에서 낼 찾을 사람이 어디 있노”
홍윤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친구는 또 말한다.

“아냐. 아무래도 자네야. 저것 좀 봐. 생긴 것도 자넬 닮았어…”
그제서야 홍윤희는 포커를 멈추고 시선을 돌린다. TV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란다. 자신의 사오십대 때 모습을 판에 박아놓은 것 같다. 아버지를 찾습니다. 유복자로 태어나 아버지를 본 적은 없고 이름만 압니다. 살아 계시다면 70세 전후입니다. 어머니는 박봉심. 지난해 돌아가셨습니다. 유언으로 꼭 아버지를 찾아 제 아이들에게 족보를 만들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홍윤희 가슴은 철렁한다. 특히 박봉심 세 글자 앞에서는 심장이 멎는 듯 하다. 옆에서 포커를 계속하자고 채근하자 그만 하겠다고 카드를 놓고 옆자리의 친구와 마주앉는다.  

“자네 찾는 게 맞지? 방송국에 전화할까?”
친구가 더 흥분한다. 홍윤희는 말없이 테이블 위의 맥주를 따라 마신다. 놀란 가슴이 쉽게 진정되지 않는다. 박봉심… 그녀가 아들을 낳았다고? 전혀 상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뭘 해. 기다 싶으면 방송국에 전화해야지”
친구가 송화기를 내민다. 홍윤희는 고개를 흔든다.
“내 기억에는 없는 일이니까 맥주나 드세. 설혹 인연이 있다 해도 지금의 나를 만나 무슨 득이 되겠는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적자(利敵者)인걸…”
홍윤희 눈에 눈물이 고인다. 그 눈물 속에 운명의 육이오가 뿌옇게 나타나더니 점점 선명해 진다.
  
2
홍윤희는 48년 국방경비대에 입대한다. 정부 수립후 국방경비대는 국군이 되고 홍윤희는 중사로 육군본부 감찰관실에 근무하다, 4년제로 거듭 태어나는 육군사관학교 11기(후일 생도2기로 고쳐부름) 시험에 합격한다. 입교식은 6월 1일, 그러나 뒤늦게 사관학교 시설의 수용능력이 도저히 부족하다고 판단되자 재시험이 실시되고, 여기에서 탈락된 일단은 보병학교로 전교 명령을 받는다. 1년 과정의 보병학교 입교는 한 달 뒤인 7월 1일. 홍윤희는 오히려 잘 됐다며 공중에 뜬 한 달을 전 근무처인 육본 감참관실 주변에서 보낸다. 이 때에 육이오가 터진다. 홍윤희에겐 돌아갈 소속 부대가 없다.        

무방비 상태에서 허를 찔린 국군은 후퇴와 사수 사이에서 갈팡질팡 한다. 잠시 후퇴했던 육군본부가 다시 서울을 사수한다며 돌아왔다. 그러나 밤에 다시 후퇴해 버렸다.
홍윤희는 미처 피난을 못 간 상태에서 서울이 인민군 수중에 들어갔다. 잡히면 죽을 목숨이 되었다. 요리조리 피하고 며칠 숨어 견디던 그는 공산당 간부로 변신한 고향 선배를 만나 의용군 추천장을 받는다. 같은 이름을 쓰면 국군이라는 신분이 발각될 것 같아 홍관희 라는 가명으로 의용군에 입대한다. 개죽음 할 수는 없으니 의용군으로 위기를 넘기고 기회를 보아 국군 진영으로 넘어가자는 계산이었다.  

의용군의 주된 임무는 선무였다. 인민군 뒤를 따라가다 목적지가 점령되면 그 지역에 들어가 공작을 펴야 했다. 따라서 의용군에도 편제가 있었고 남녀가 섞였다. 철저히 공산주의에 물든 젊은 지식인이 대부분이었다. 홍윤희는 경남부대에 배치 받았다.

서울에서 모집된 의용군은 청진동 삼국아파트 앞에 집결, 인민군을 따라 남하를 시작했다. 동대문 청량리 망우리 덕소 양평 횡성 원주 제천 단양 수안보 신풍 문경 함창 의성 군의 팔공산까지 도보로 남하한다. 남하하는 동안 무수한 시체를 본다. 노근리에서는 양민이 대량 학살된 현장도 본다.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에 대해 서로 견해가 분분하다. 탄피나 총알 흔적은 국군이나 미군의 짓이다.

경남부대는 총 60명이었는데 그중 여자가 12명이었다. 여자 중에는 이화여대 학생이 3명 있었다. 20여일을 같이 동고동락하며 남하하는 동안 홍윤희는 그 중 한 여성과 정을 나누게 되었다. 그녀가 박봉심이다. 가난이 동기가 되어 사상은 공산주의로 무장되었지만 이성에는 약한, 부드러움이 돋보이는 여성이었다. 이윽고 신풍에서 둘은 뜨거운 목소리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결합한다.

이튿날 의용군은, 인민군 2군단 1사단을 만나 합류하는 과정에서 편제가 바뀐다. 홍윤희를 포함한 5명은 사단 위생대로 배치되고, 여자들은 야전병원으로 배속되어 헤어지게 되었다.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사상자가 늘어나기 때문에 의용군을 의무 보조원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홍윤희는 1사단 위생대 일원으로 임무를 수행하면서 팔공산이 보이는 장군동까지 내려갔다. 8월8일 장군동 입구에서 공습에 의한 파편에 홍윤희는 머리를 다쳐 붕대로 머리를 칭칭 감싼다. 별로 많이 다치지 않아 행동에 지장이 없었으나 일부러 많이 다친 척하며 온통 붕대로 머리를 싸맸다. 부상자로 열외가 되고 싶어서였다.

의도한 대로 홍윤희는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열외가 되었다. 의용군은 군인도 아니어서 군복도 없었다. 기회는 이때다, 하고 홍윤희는 퍼런 옷을 입고 이 동네 저 마을을 기웃거렸다. 야전병원을 찾는 것이었다. 박봉심이 보고 싶었다. 삼사일 동안 장군동 다부동 일대를 다 뒤졌는데 찾는 박봉심은 없었다.

대신 홍윤희가 본 것은 놀랍게도 인민군의 엄청난 화력이었다. 인민군의 주력이 다부, 장군 일대에 집결해 있었던 것이다. 초가지붕을 쓰고 있는 탱크, 나무 가지로 둘러친 대포들이 총공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전혀 볼 수 없게 완전 은폐되어 있었다. 이대로 총공격이 감행되면 국군은 끝장날 것이 분명했다. 포항 쪽의 전투나 왜관 서쪽의 낙동강 교전은 위장 전술이었다. 인민군 주 화력은 다부 장군 마시 부계 신령 화산을 잇는 핫라인에 집결되어 있었다.

총공격은 9월 초순에 감행될 것이라는 설이 분분했다. 목표는 부산까지. 총공격에 대비해서인지, 아니면 사상자가 많아 병력이 부족해진 탓인지, 인민군은 그때까지의 의용군을 모두 인민군 전사로 편입시켰다. 홍윤희도 인민군 전사가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홍윤희에게 인민군 총공격은 조국의 종말을 뜻하는 것으로 들렸다.

그는 남하를 결심한다. 차일피일할 시간이 없었다. 인민군의 화력이 은폐되어 있는 사실을 지체없이 우리 군에 알려야한다는 생각했다. 왜관 따위 전혀 엉뚱한 지역이나 공습하는 것으로 보아 한국군 미군 모두 이곳에 은폐된 화력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이윽고 홍윤희는 9월 1일 밤, 붕대를 풀어버리고 장군동을 탈출, 남쪽을 향했다. 마시에서 잠시 눈을 붙이는데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 “너 이놈 뭐하고 있느냐. 어서 남으로 가지않고!”하고 호통을 쳐서, 얼른 일어나 부계로 가던 중 국군 1기갑사단을 만났다.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귀순자가 된 홍윤희는 대구 육군 정보부로 직송되어 서너시간 심문을 받았다. 의용군과 인민군으로서의 행적을 소상히 밝혔다. 남하하면서 본 양민학살 현장도 상세히 이야기했다. 육군 정보부는 “그건 인민군 짓”으로 단정했다. 인민군 주력부대의 위치와 규모, 총공격 정보도 주었다. 심문을 마친 뒤 그는 대기자가 되어 풀려났다.
대기하는 동안 그는 전에 근무했던 감찰감실 조사과에 얹혀 지냈다. 모두 홍윤희를 반가워 했다. 2시간쯤 후 유엔군사령부 정보처에서 홍윤희를 데리러 왔다. 그곳에 가서 홍윤희는 모든 진술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노근리에서 양민이 대량 학살된 현장에 미군의 흔적이 많이 있어 이상해 했다고 덧붙였다. 홍윤희는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실수였는지 몰랐다. 인민군 화력 상황까지 다시 한번 소상히 말하고, 총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도 주었다. 이튿날부터 유엔군은 그 일대에 융단폭격을 가했다. 인민군의 총공격은 이일로 좌절된 것이나 같았다.  

유엔군 사령부에서 돌아온 때는 밤이었다. 그런데 육군본부가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부산으로 간다는 것이다. 감찰감실은 이럴 때 선발대였다. 감찰감실 팀을 따라 홍윤희도 그날 밤 부산으로 내려왔다. 대교동에 감찰감실 분실이 마련되니 역시 거기 얹혀서 지냈다. 8월 5일 후발대가 도착, 범일동에 육군본부가 들어앉았다. 철수가 완료되자 홍윤희는 인사국을 찾아갔다. 앞으로의 일을 물었다. 인사국 인사담당 최상범 상사는 홍윤희의 여러 가지 경력을 살펴본 뒤 종합학교로 명령내 주었다. 입교일자는 10월 1일이었다. 할 수 없이 그때까지는 감찰감실에 얹혀지내야 했다.

하루는 조용히 있으니 의용군 시절 사랑을 나눈 박봉심이 떠올랐다. 그녀는 경남고녀 출신으로 부산에 집이 있다고 했었다. 수소문하니 주소가 있었다. 홍윤희는 혹시나 하는 설레는 가슴으로 그녀 집을 찾아갔다. 박봉심의 부모는 홍윤희를 집안에 들여 눈물을 글썽이며 딸의 소식을 여러 가지로 물었다.
박봉심의 집을 나온 홍윤희는 대교동에서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홍윤희는 아차 했다. 공산주의자를 찾아다닌 정보가 헌병대에 접수된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심문 방법이 달랐다. 헌병대는 그의 인민군 전력을 들이대며 무조건 간첩으로 몰았다. 고문을 견디지 못해 홍윤희는 거짓 자백하고 말았다. 만 하루만에 홍윤희는 간첩으로 결론지어져 고등군법회의에 송치되었다. 그래도 홍윤희는 박봉심을 만나려한 것이 원인이었다고 생각했다.

16일 열린 고등군법회의는 홍윤희에게 가차없이 사형을 언도하고 부산형무소로 보냈다. 그러나 얼마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다시 10년으로 줄고, 진주교도소로 옮겨 복역하던 중 다시 5년으로 감형되어 55년  9월 출소하였다. 그의 구명과 감형은 감찰감실 전우들이 뒤에서 노력한 결과였다.
군검찰관이 그에게 적용한 죄목은 국방경비법 제27조 적전비행, 32조 이적행위, 33조 간첩행위 등이었다. 재판일에 임해서 간첩행위는 검찰관이 취소하였고, 27조는 재판관이 무죄 처리, 32조만을 적용했다.
  
출소 후 그는 이적행위자라는 오명을 쓰고 힘든 인생을 살아야 했다. 버티다 버티다 고향에서는 살 수 없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억울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 같아 체념하고 살았다. 그 오명은 자식들의 출세에도 적잖은 지장을 주었다. 그러면서 7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어느 날 신문에 노근리 양민학살의 주범이 미군이었다는 폭로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렸다. 순간 옛일이 떠올랐다. 의용군 시절 남하하면서 본 현장이 미군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미군의 태도는 50년이 지난 임일에도 그 사실을 부인하고 감추려는게 역력했다. 그런데 나는 그 사실을 미군 앞에서 털어놓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의 머리는 빨리 돌아갔다. 그렇다면 자신의 인생은 그 일로 미군에 의해 망쳐진 것일 수 있었다. 자신이 바보로 여겨졌다. 그는 의지를 세웠다. 아직 인생이 남았다. 이대로 체념할 게 아니다.

내 죄는 누구보다 내가 안다. 당시 인민군이 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죽음을 무릅쓰고 전선을 넘어 “나라를 구했다”고 해도 좋을 만큼 중대한 정보를 넘겨준 것이다. 그런 애국자에게 “이적행위자”라는 오명을 씌워 사형 언도를 내릴 이유가 없었다. 이건 미군의 짓이다. 왜 그걸 눈치채지 못했던가. 그렇게 고생스런 삶을 살면서, 자식들에게 못난 아비가 되면서, 왜 이제껏 진실을 밝혀볼 생각은 안 했던가.  

홍윤희는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재판기록을 찾아내고, 육이오 전쟁비사에서 인민군 총공격을 전후한 9월 초순 상황을 모아봤다. 볼수록 자신이 던져준 정보로 인민군 주화력이 분쇄되고 남북 전쟁의 대세가 전환된 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기록에는 그 때에 월남하여 정보를 넘겨준 사람은 인민군 전사 홍윤희가 아니라 인민군 소좌 김성진으로 적혀 있었다. 같은 부대로 되어 있는데 홍윤희는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김성진을 추적해 보았다. 아무 곳에도 그는 없었다. 추적할수록 가공 인물이라는 사실만 뚜렷해 졌다. 김성진 소좌는 홍윤희를 대신한 가공인물일 수 있었다. 전사를 소좌로 바꾼 것은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서로 보였다. 상식적으로도 인민군 말단 전사의 진술로 전세를 바꿀 수 있었다는 건 설득력이 약했다. 역사 기록은 의도적으로 왜곡할 경우 더욱 합리성을 찾게 마련 아닌가.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보도가 확대되는 분위기 속에서 홍윤희는 당시 한국군 정보부와 유엔군 정보부에서 자신이 진술한 기록을 찾아 나섰다. 그 진술 기록만 찾으면 홍윤희는 “이적행위자”의 오명을 벗을 뿐 아니라 1급 국가 유공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육군본부도, 또 미군사령부도, 그 정보에의 접근은 허용하지 않았다. 미군이 문서에 빗장을 채운 것은 이해되는 일이나, 한국 육군이 문서에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3년 동안 한국 미국 일본을 오가며 갖은 노력을 다 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홍윤희는 기진하여 포기 상태가 되었다.

그러한 때에 TV에서 자신을 찾는 아들의 모습을 본 것이다. 홍윤희와 박봉심의 아들… 족보를 갖고 싶어하는 그 아들 앞에 과연 홍윤희는 나서야 하는가. 그는 깡마른 손으로 손수건을 꺼내 눈을 닦았다. 그러나 눈물은 이미 마르고 없었다. <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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