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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언제 읽어도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위선이나 불의에 대항하여 정의를 세우면서 인간성을 옹호하고 정신을 이끄는 따위는 다음 이야기입니다. 잔잔한 물결처럼 다가와 가슴을 파고드는 반취 이기윤의 소설들에는 독특한 향기가 있습니다.

칼럼
2005.01.26 15:57

칼럼 - 한국문단의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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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윤(소설가, 한국소설가협회 사무국장) 2002년


저에게 시간을 주면서 준 제목이 한국 문단의 현주소입니다. 문단(文壇)이라면 문인들의 사회를 일컫는 말이니, 그 현주소가 어떻다고 말하기가여간 조심스럽지 않습니다. 보고들은 것이 아직 적기 때문입니다.

한국소설가협회 사무국장을 맡아 지내는 게 7년 되었으니, 소설가 사회를 중심으로 하라면 작금의 문인 사회 이야기를 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는 우리 모두 피부로 느끼다 시피 매우 어려운 시기입니다. 원로 중견 신인 구별 없이 모두 어렵습니다. 작가는 글만 써야 하는데, 소설가조차 글만 써서는 도저히 먹고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밖에서는 나라 경제가 IMF에서 벗어났다고 하나, 문단의 IMF는 아직 그대로입니다. 아니, 그대로가 아니라 더 나쁜 방향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우리가 문화 국가라고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부는 새 천년을 문화의 세기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진정 문화의 세기를 맞으려면 문학을 살려서 준비를 해야 합니다. 문학이 문화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문학이 없이는 아무리 문화를 발전시키려고 해도 발전되지 않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문학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역사를 앞서 엽니다. 볼테르나 루소의 작품은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되고, 톨스토이나 투르게네프의 소설이 제정 러시아에 커다란 충격을 주고, 입센의 ‘인형의 집’이 여성 운동의 서막이 되고, 스토 부인의 ‘엉클 톰스 캐빈’이 남북전쟁의 한 발화점이 되었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문학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만 같습니다. 학창시절 인문과정을 소홀히 여긴 사람들만 있는 것 같습니다. 문학이 살려면 우선 시장이 건전해야 하는 전제가 있는데, 아무도 그 시장의 현황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문학 하면 우선 작가를 떠올리는 것은 고맙지만 말입니다.

주요 월간지에서 소설이 사라지더니 이젠 주요 일간지에서도 연재소설이 사라집니다. 출판사들도 책 만들기를 기피합니다. 몇몇, 상품적 가치가 공인된 작가 외에는 투자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외국의 경우처럼 출판사가 유망 작가를 발굴하는 노력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권위를 내세우는 문학상 뒤에는 예외 없이 상술이 숨어 있습니다. 옛날에는 고도의 상술 같았는데 요즘 보니 눈 가리고 아옹 하는 식입니다. 당선작은 물론 후보작까지 다른 데는 경선에 나가지도 않아야 하고, 발표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중앙일보는 신춘문예 자체를 없앴습니다. 물론 그에 상응한 “문학상” 공모를 따로 하고 있습니다만 중앙일보를 필두로 신춘문예라는 용어 또한 머잖아 역사에 묻힐 것만 같습니다.

인터넷이 또 하나의 세상을 이루면서 속속 문학 사이트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옛날에 발표했던 작품을 주십시오” 하는 편지 전화가 하루에도 몇 건씩 걸려옵니다. 이미 300여 개나 되는 전자 책방이 경쟁하고 있습니다. 모든 작가에게 원고를 달라고 하며 감언이설로 포장하여 말하지만 실제는 대부분의 전자책방이 신뢰하기 곤란한 수준입니다. 십중팔구 이용이나 당할 뿐입니다.

온통 입시 위주가 되어버린 학교 교육에서도 문학은 이제 완전히 수능의 한 과목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영향력 있는 특정 교수의 추천 작품 몇 편만이 권장될 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는 미래가 어둡습니다. 인류는 문학을 통해 사회 공통의 예의와 질서를 익히고, 조화를 해치지 않는 사람이 되도록 거칠어지기 쉬운 심성을 다듬어 왔습니다. 문학을 통해 자기만의 좁은 세계를 벗어나, 다양성을 포용하며 살도록 사고의 폭을
넓혔고, 그로 인해 창의력이 움트고 도전 정신이 숨쉬며 지혜를 성숙시켜왔습니다. 그런 문학이 우리 시대에 와서는 고만, 수능의 한 과목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판매나 유통 구조도 바람직하지 않은 쪽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IMF 때, 왜 도서총판까지 부도를 내고 도산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사회에서 도서총판은 젊은 혈기만으로 진출할 수 있는 시장입니다. 대부분의 책이 위탁판매 형식이요, 돈을 주고 받는 데도 문방구 어음이 통용되는 정도여서, 다른 짓 안 하면 부도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 사정이나 계책(?) 같은 게 있어 한두 곳이 부도를 낼 수는 있겠지만 랭킹 1위부터 줄줄이 부도를 냈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석연치가 않습니다.

유통 판매 중간 상인을 못 믿게 되니 출판사들은 서점을 직거래해야 합니다. 그러나 서점들이 영세하여 직접 거래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주요 도시마다 대형 서점이 들어서 주거나, 서적판매 조합 같은 게 믿을만하게 움직여 주면 좋을텐데 그 조직 역시 믿을 수가 없습니다. 교보문고 같은 대형 서점이 체인을 만들겠다면 서점주들이 집단 이기주의를 내세워 결사 반대합니다.

그런 와중에 살며시 도서대여점이 생겨 아예 문학시장을 붕괴 시키고 있습니다. 출판사가 큰마음 먹고 수천만원 들여 광고를 하면, 톡톡히 재미보는 곳은 도서대여점입니다. 책 한 권 사서 사십회 혹은 오륙십회를 빌려주니 얼마나 수지맞는 장사입니까.

40만명의 독자가 읽었는데 출판사는 겨우 만 부 발행에 그치고, 작가는 그 부수에 해당하는 인세, 몇백만원에 만족해야 합니다. 세상에, 장편소설 하나가 얼마나 피를 말리는데 몇백만원이 그 대가라니…

출판사들이 도서대여점의 불법성을 들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도서대여점은 웃으며 말합니다. 국민에게 책 읽게 하는 사업인데, 꼭 그런 식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까?

급기야 정부가 문학인 구제에 나섰습니다. 요즘 다양한 방법으로 문학인 지원이 활발해진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두 단발성이라는데 또 문제가 있습니다. 근본적인 게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헤매는 사이 어쩌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문학 시장은 이렇게 예전과는 다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안 좋은 쪽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모든 문학인이 다 같은 처지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건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뜨는 작가는 더욱 높이 뜨고 있습니다. 뜨는 작가들에겐 “배고픈 문인”이 무능력한 사람들로 보입니다. 같은 문인이란 타이틀을 달고 나란히 앉는 것조차 창피하다고 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십중팔구는 그 사람도 반짝일 뿐입니다.  

문제의 핵심을 저는 세 가지로 봅니다. 첫째는 정의를 상실한 우리 사회가 원인입니다. 대통령부터가 말 바꾸기를 밥 먹듯 하는 사회에 무슨 약속, 원칙이 있겠습니까. 둘째는 그런 사회에 익숙해지다 보니 국민들이 책을 멀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책 보다는 현실이 더 자극적이고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그러다보니 작가들이 너무 공부를 하지 않고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가장 최근의 조사결과를 보면 도시생활자 성인 100명 중 22명은 전혀 책을 보지 않습니다. 국민 1인당 월 독서량은 0.7권입니다. 이것이 문화적으로 어느 수준인기는 굳이 외국과 비교할 수 없다고 봅니다.

국민이 책을 읽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는 해석이 분분합니다만 부질없는 변명입니다. 정부(정치)가 주도하는 사회분위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문이 소설보다 더 재미있기 때문이라는 견해는 그래서 나옵니다. TV를 비롯 게임 비디오 등의 만연도 그래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다만 작가들은 읽을 만한 책이 없다는 소리에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저는 세상이 어떻든 작가들이, 사회풍토를 탓하기 전에 공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소설에는 너무나 전문성이 부족한 것입니다. 독자의 지식 수준 내지 전문성은 세계수준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데 문학을 하는 소설가의 전문성은 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의사가 소설을 쓴다면 의사세계나 의학적 지식이 심도 있게 다뤄질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어 시장에서는, 의사가 의사질 하는 것보다 소설을 써서 더 많은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 하고 있습니다. 검 판사 출신 중에 소설을 쓰겠다는 사람이 없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전문인 중에 소설가가 등장해야 하고, 소설가는 공부를 통해 전문가를 뺨칠 정도의 소설을 내놓아야 합니다.

이름 모를 산에 이름 모를 꽃이 피어 있었다. 숲을 지나는데 이름 모를 새가 울고 있었다. 따위 추상적인 것은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겉만 살짝살짝 (소위 문학적으로) 만지며 대충 지나가는 것은 통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의사 사회를 다룬 소설을 읽고 의사가 배울게 있어야 하고 법관이 법조계 비화를 다룬 소설에서 법관들이 아하, 하고 깨닫는 초전문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치열함을 갖추지 못하고, 그저 구 시대 창작 풍토에 젖어, 대충대충 넘어가며 그저 추상적인 인간 내면의 갈등이나 묘사하는 따위 문학으로는 이 시대에 문인 행세를 할 수 없습니다.      

사회 정의가 살아 있아야 문학도 살아난다는 점도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정의는 질서와 조화인데, 우리는 이 두 단어를 너무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법을 위반하고서도 태연하며, 적발되면 재수가 나빠서 걸렸다고 생각합니다. 여럿이 있는 자리에서는 스스로 목소리를 내야 남이 알아준다는 식의 미개한 생각들로 가득합니다. 무심히 내뱉은 약속 따위는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이라는 식의 자기 위주 견해가 만연해 있습니다. 이래서는 문학시장의 기초라는 추리소설조차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대충 살펴봐도 문학을 둘러싸고 있는 시장 형편이 이 모양입니다. 그 어지러운 가운데 문인들의 사회라는 문단이 버티고 있습니다. 점점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지는 풍토에서, 문인들은 자존심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변화를 헤쳐나가겠다는 의지도 없이 그저 과거의 영화에 젖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문학도들은 현실이 어떤지도 모르고 선배들이 누린 명예와 권위(?)만을 열망하는 나머지 오늘도 습작에 여념이 없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논리에서 보면 어쩌면 이런 환경이 문학을 위해서는 좋은 건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위의 세 가지 지적 중 가장 되새겼으면 하는 대목은 작가들의 반성 부분입니다. 열악한 환경, 황당한 경험에서 위대한 작가와 명작이 태어난 예는 수 없이 많습니다.

프랑스의 여류작가 사강은 1952년 소르본 대학 입학시험에 떨어지면서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슬픔이여 안년”을 쓰기 시작했고, 밀턴의 ‘실락원’은 첫 출판에서 40부밖에 팔리지 않았습니다. 5백여권의 탐정소설을 쓴 존 그레시는 7백번 이상 출판을 거절당한 아픔을 경험했고, ‘죄와 벌’의 도스토예프스키는 빚을 갚기 위해 소설을 썼습니다.

또 ‘갈매기의 꿈‘ ’러브 스토리‘ ’밝고 아름다운 것들‘ 등도 모두 12번 이상 출판을 거절 당했고, 미국의 위대한 시인 중 하나인 에밀리 디킨스의 시는 생전에 단 7편 만이 발표되었을 뿐입니다.

모든 작품이 결국에는 빛을 본다는 말은 아닙니다. 문학의 기본에 충실했을 때만 그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문학의 기본에 충실했던 한 작가의 예를 들면서 오늘 이야기를 끝맺겠습니다. 20세기 대표적 문호인 헤밍웨이는 유난히 스페인을 사랑했습니다. 그의 스페인 사랑은 32세때 스페인을 여행한 뒤, 투우에 심취하여 ‘오후의 죽음’을 발표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그 스페인에 파시스트 반란이 일어나자 4만 달러의 거금을 선 듯 보냈는가 하면, 나나통신의 특파원으로 직접 건너가 내란의 진실을 세계에 알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내란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고 프랑코 쪽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는 쿠바의 아바나에 머물며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써 내란에 희생된 영령들 앞에 바쳤습니다. 그리고 계속 쿠바에 머물며 10년 동안 침묵을 지키다, 그 10년 침묵의 이야기를 “노인과 바다”로 썼습니다. 노인과 바다의 심연에는 스페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깔려 있습니다.

이 작품은 그의 문학과 인생의 도덕성이 집약된 금자탑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53년 플리처상에 이어 54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노인과 바다’를 쓰는 데는 6개월 걸렸지만 이후 8개월 동안 200번이나 고친 뒤 세상에 발표했다는 사실입니다.

일관된 문학정신을 성숙시켜 가는 일, 완벽주의는 아니지만 전문가가 보고 탄성을 지를만한 전문성이 없는 문학은 앞으로 기생할 공간이 없어질 것입니다. 문장도 독자 보다 더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어야 합니다.  

한국 문단의 현주소에는 아직도 인내와 끈기가 없는, 가볍고 감성적이기만한 문학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현재에 안주할 수 없다면 변화에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알고 보면 변화야말로 영원한 것입니다. 이대로 라든가, 정지 상태는 곧 퇴보나 부패로 이어집니다.

제가 보는 한국 문단의 현주소는, 아직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거듭, 구태의 허물을 벗어 던지고 거듭 태어나야 합니다. 장르에 구분 없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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