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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언제 읽어도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위선이나 불의에 대항하여 정의를 세우면서 인간성을 옹호하고 정신을 이끄는 따위는 다음 이야기입니다. 잔잔한 물결처럼 다가와 가슴을 파고드는 반취 이기윤의 소설들에는 독특한 향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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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이데올로기의 무상함 (2000년 5월 4일 세계일보 7면)


신문에 실린 베트남전 종전 25주년 축하 퍼레이드 사진이 눈길을 끈다. 벌써 25년이라니… 나트랑에서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사이공이 함락되는 것을 보며 얼마나 가슴 아파했던가. 보트 피플은 볼 때마다 눈시울이 젖게 했다. 종전은 75년 4월 30일이지만 파리 평화협정에 의거 휴전이 발효된 것은 73년 1월 27일이다. 그때 나는 백마부대 상황실에 있었다.

"27일 24:00시 휴전 발효. 일체의 전쟁 행위를 중지하라. 적의 공격이 있을지라도 대응하지 말라…" 상부로부터 전통을 받아 예하 부대에 하달했다. 지옥 같은 정글에 휴전이라니. 그러나 24:00시를 넘기자 소란스럽던 밤이 적막해졌다. 과연 전쟁은 끝난 것인가.

우린 하나 같이 긴장하고 침묵했다. 휴전이 평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누군가 말했다. "차라리 전쟁보다 못한 휴전이야"
그는 머리를 감싸쥐며 울분을 토했다. 진정 평화를 원하는 놈들이라면 휴전 하자면서 이렇게 파상적인 공격을 할 리가 없어. 아아, 이삼일 새 아군 피해가 얼마나 큰지 알아?

슬프게도 그랬다. 휴전을 앞두고 그들은 전 병력을 투입, 있는 화력을 다 소진하며 총공격을 감행했다. 땅 속에 있던 베트공도 모두 나와 가담했다.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겠다는 식의 상식적인 논리로는 납득되지 않는 원한 서린 살육이요, 돌진이었다. 그 이삼일 동안 주월한국군의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다. 거기서 2년 후를 보았어야 했다. 휴전에 임박하여 전선에 뿌려진 피에서 2년 후 사이공 함락을 보았어야 했다.

베트남전쟁은 미국의 콧대가 여지없이 꺾인 것으로 더 유명하다. 베트민은 전쟁의 승패가 힘에 의해 좌우된다는 논리를 깨뜨렸다. 과다한 전쟁비용이 유럽 경제의 뿌리를 흔들어 "유럽의 세계경제 지배시대"도 막을 내리게 했고, 열악한 조건에서 끝내 민족의 독립운동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아시아 "민족주의"의 강인함과 정당성을 보여준 전쟁이기도 했다.

우리에게도 가볍지 않은 역사의 한 장이었다. 연인원 30만명 이상이 건너가 베트남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피를 흘렸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미국을 돕는 것이라고 여겼지 저희를 위해 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5천명이요, 1만 5천명이 불구가 되고,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숫자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이들의 희생은 무엇을 위해서였나.

미국의 영향을 잘못 받은 나라들이 대개 그렇듯이 사이공 정권은 부패의 극치였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보다 더 엄격한 청렴성과 준법정신을 요구한다. 그것을 지키지 않는 권력자에 대한 심판도 더 준엄해야 한다. 그들은 이런 원칙을 망각했다. 권력자는 부의 축적에 골몰했고 향락적인 경제문화와 유착해서 근본을 잃었다. 월남의 패망은 미안하지만 예고된 것이었다.  

4년전 베트남을 다시 갔다. 하노이에 발을 딛는 기분이 몹시 착잡했다. 그들에게 총을 겨누었던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발을 딛고 웃으며 손을 잡으니 또 친구가 된다. 가슴의 상처가 아문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너와 나의 죄는 아니지 않은가. 아픔으로 말하면 그들이 더 심할 것이다.

피부에 닿는 것은 베트남이 새로 태어날 준비를 마쳤다는 것이다. 과거의 적들과도 이미 관계를 개선했다. 개방과 함께 통제경제를 축소하고 시장경제를 도입하자 선진 외국의 투자도 활발해졌다. 도시마다 서구식 상점 레스토랑이 늘고 있다. 특히 호치민시가 유럽의 관광명소 못지 않게 발전하고 있다. 아직 나이트클럽이나 환락가는 허용되지 않지만 젊은 여성 접대부가 있는 단란주점이 관광객의 말초신경을 충족시켜준다.  

1단계 "도이모이"가 성공했다고 하나 아직 국민소득은 1천달러에도 못미친다. 롱(삿갓) 쓰고 푸른 야자수 사이를 하얀 아오자이 너플거리며 걷던 자존심 강한 아가씨들이 단란주점에서 단돈 10불에 헤픈 웃음을 팔고 있다. 호치민시보다 하노이시에 이런 모습이 더 흔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중국과의 전쟁에서 버티고, 프랑스를 물리치고, 일본을 패퇴시키고, 미국의 콧대를 꺽은 베트남. 그러나 새롭게 파고드는 선진 제국의 "자본과 기술"을 앞세운 경제침략에는 어떻게 맞설까. 종전 25주년 사진에서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무상함을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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