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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언제 읽어도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위선이나 불의에 대항하여 정의를 세우면서 인간성을 옹호하고 정신을 이끄는 따위는 다음 이야기입니다. 잔잔한 물결처럼 다가와 가슴을 파고드는 반취 이기윤의 소설들에는 독특한 향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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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내면서>
칠십 년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정리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직 평균수명이라 할 연령에 이르지 않았으니 이른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벌써 중간 평가를 하려 하다니. 아직 젊은데!’
한편에선 책을 펴낼 만큼의 가치 있는 삶을 살았는가 자문도 해본다. 올림픽의 금메달리스트처럼 국가나 한 분야를 빛낼 만큼 우뚝한 성과를 올린 인물도 아니요,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학술적 업적으로 큰 성취를 이룬 경우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주어진 환경과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서 열심히 산 보통사람의 하나로서는  글이 가능할 것 같다.

나는 기업인으로 평생을 살았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기업을 다시 아들에게 물려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열심히 살았다. 세상 일이 마음 먹는 대로 되는 것은 아니기에 ‘꼭’이라던가 ‘무슨 일이 있어도’ 따위의 절대 의식을 갖지는 않았다. 순리에 역행하지 않고 열심히 한 길을 걷다 보면 나의 소박한 꿈 정도는 이루어지겠지. 하는 신념으로 일관했다.
규모의 대소를 떠나 「기업인이란 구성원들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작업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본분」이라는 정의를 좌우명으로, 그 본분에 충실했다 할 삶을 살아왔다.
부동산이 기승을 부릴 때도 투기나 도박 따위는 하지 않았다. 수백 명 가족을 거느린 기업인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일만 열심히 했다. 그러다보니 남아돌아가는 건 없어도 부족한 것도 없었다.  

삶이란 쉬지 않고 문제를 만나고 그 답을 풀어 가는 시험의 연속이요, 하루에도 몇 번씩 새로운 문제에 부딪힌다는 측면에서 보면, 지내온 일만으로도 건질 이야기가 밤하늘의 별처럼 많다. 그러나 아직 삶이 진행 중이고, 아직도 내가 만나고 풀어야 할 더 중요하고 난해한 문제가 산적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면, 역시 정리가 이른 것 아닌가 망설이게 된다.

칠순에 이른 개인적인 삶도 그럴진대 한참 더 달려가야 할 기업 스토리는 더욱 조심스럽지 않을까. 기업은 집단의 생존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야 한다. 강물처럼 도도히 흘러가는 시대의 물결에 따르면서, 시시각각 만나는 환경에 때론 순응하고 때론 도전하고 장애를 헤쳐 나가는 「모험」과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땅 위에 솟아난 모든 물이, 한 방울도 낙오되는 일 없이 무난하게 낮은 곳으로 흘러 바다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건조한 지대를 만나 흡수될 수도 있고, 계류의 작은 소에서 구석에 몰려 지루하게 맴돌 수도 있다. 부단히 출구를 모색해야 하고, 때론 작은 호수를 만나 바다인양 착각하다 거대한 폭포에 몸을 던지는 도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태에 영합하는 장사가 아니라 외고집이 필요한 한 길, 목재창호 만을 생산하는 기업이었기에 더욱 모험이나 선택이 어렵고, 그 선택을 지키기 어려웠던 때가 많았던 것 같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모든 역사는 탄생 성장 번영 쇠퇴 소멸을 반복한다.」는 진리 앞에 서면 나는 우리 기업의 위치를 아직 성장의 초기 단계에 두고 싶다. 그리고 되도록 큰 원을 그리고 싶다.
성남기업의 모든 구성원이 도달하고 싶은 최종의 목표를 번영의 지점에 두기는 하되, 조급하게 이루려 하기보다는 현재의 성장이라는 과정에서 자신감을 더욱 다지고 한 걸음 한 걸음 확실한 발자국을 남기며, 전진하는 것을 함께 즐기고 싶다.

진실로 나는 내 대에 이루려고 서두른 일은 없다. 아시아의 톱, 나아가 글로벌 1위에 오를 때까지, 3대, 4대로 이어지며 부단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성장 과정」에 더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소중하고 풍요한 「삶의 가치」를 성남기업의 모든 구성원과 함께 나누고자 했다.  
산골짝에서 솟아난 작은 샘물이, 초기에는 불안한 나머지 넉넉하고 편안한 바다 한 귀퉁이에라도 어서 빨리 이르려고 서둘러 치열하게 바위 사이를 헤집고 달려가지만, 어느 정도 물줄기를 이룬 강물이 되어서는 거대한 대륙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처럼…

성남기업을 강에 비유하면 어느 정도의 줄기일까. 뜨거운 여름에는 증발을, 추운 겨울에는 결빙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빈약한 흐름이었던 때가 있었다. 이태원에서 한강을 바라보며 우리는 언제 저런 도도한 강물이 되어 당당한 모습으로 바다에 이를까, 생각하며 물의 생리를 기업의 생리에 견주어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흐르던 물이 흐름을 멈추면 그 순간부터 썩기 시작하는 것도 기업의 생리와 같다. 다만 「자연 속의 물」과 「사람의 기업」에 다른 점이 있다면, 자연의 흐름에는 하나의 주어진 길밖에 없지만 사람의 기업에는 언제나 두 개의 길이 있어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의 선택에 문제가 있었던 경우도 있었겠지만 나의 선택과는 관계없는 천재지변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 화폐개혁 오일파동  외환위기(IMF)와 최근의 금융대란 등 세계적인 쇼크는 우리에게도 엄청난 쇼크였다. 어디서 던졌는지 모르는 돌멩이가 날아와 죄 없는 기업의 유리창이 깨지고, 나와 구성원들이 피를 흘려야 했다.  
우리가 그 위기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어떠한 경우라도 우리 안에서 일어난 일은 우리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고, 우리 밖에 해결할 사람이 없다.」는 인식에서 답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성남기업은 나의 아버지가 창업하셨기에 기업의 연륜이 내 나이보다 많다. 이제 아버지가 물려주신 것을 다시 아들에게 물려줄 때가 다가오는 것 같다. 45년 전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을 당시는 년 매출 4억 원, 직원 70명 규모였던 것이 지금은 연 매출 500억 원, 직원 300명의 중소기업이 되었다.
그 동안의 우리나라 경제발전 크기에 비하면 내세우기 부끄러운  미약한 숫자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양적인 부족함에는 개의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사회 정의에 입각한 도덕, 윤리 경영에 실점을 없었는가를 돌아보고 싶다.

백년 기업을 위한 자산으로서 축적한 기술력은 자랑하고 싶다. 국내 1, 2, 3위의 세계적 건설업체들이 우리 기업을 「영원한 동반자(Eternal Partner)」로 불러주는 것을 자랑하고 싶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 시절부터 17대 이명박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청와대 목재창호는 우리의 기술이었고, 대한민국 민의의 전당인 국회의사당, 또 불국사 등 문화유적 복원에도 참여한 실적을 자랑하고 싶다. 기술이 곧 기업의 체력이요, 건강은 인간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업에도 최우선 과제라는 관점에서 「성남기업의 건강함」만큼은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인천직할시 서구 석남동에 있는 성남기업 본사 정문에 나는 ‘SINCE 1935'라는 문구를 봍여 놓았다. 나의 정신에는 아직도 시작만 있기 때문이다. 그 정신이 3대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휴든(huden)’이 등장했다. ‘휴든’을 보면서 나는 목재창호도 3세대를 맞이했음을 느꼈다.

돌이켜보면 1세대는 복구하기만도 바쁜 시대였다. 외세의 침탈과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와 건축물을 복구하는 작업만 하는 것도 낙후된 기술과 부족한 재원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70년대 아파트라는 국민주택 건설 붐이 일면서 목재창호는 기계화, 대량생산이라는 2세대를 맞았다. 질보다는 양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시절이었고 주택의 개념도 휴식보다는 생활을 우선시하는 기본적인 요구에 부응해야 했다. 당연히 소품종 대량생산으로 수요를 충당했었다.

이제 3세대를 맞고 있다. 「편안함이 깃든 웰빙라이프 ― 휴든」 의 등장이 그 변화를 느끼게 한다.  
‘휴든’은 2005년에 개발한 성남기업의 목재창호 브랜드로, 당해에 한국최고브랜드 대상(실내건축부문)을 받았다. ‘휴’는 쉴 휴(休) 자를 21세기 문자화한 것이고, ‘든’은 깃들다 또는 깃든의 뒷글자로 ‘편안함이 깃든’이라는 뜻을 담았다. 이 ‘휴든’에는 현대 건축가 중 가장 많은 논란과 상찬(賞讚)을 받는 루이스 칸(Louis Isadore Kahn)의 철학이 배어 있다.

‘휴든’에서 피어날 이야기가 칠순을 맞는 내 가슴을 설레게 한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이야기는 ‘휴든’이 탄생하기까지이다. 석남동 나의 집무실에서, 이제 그 나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기로 한다.

나의 이야기가 책으로 엮어져 나오기까지에는 말글커무니케이션의 김재화 대표 등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었다. 특히 원고 정리에 도움을 주신 이기윤 작가에게 감사드린다.     <석남동 집무실에서   김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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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꼼한 일꾼이었던 아버지


나는 이태원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서울시 도시계획으로 인해 남산기슭 경사면에 이태원로가 뚫리면서, 이태원의 중심이 해밀턴 호텔을 중심으로 한 현재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지만 원래의 이태원동은 용산중고등학교가 있는 자리에서 이태원 2동 중앙경리단 주변, 그리고 이태원 초등학교가 있는 곳까지였다. 이 부근에는 지금도 이태원 부군당(府君堂 : 조선 전기부터 한양의 각 관청에 설치하고 신을 모신 곳)이 있어 매년 당제가 열리는 등 예전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안마당에 목공소를 둔 우리 집이 있던 자리를 좀 더 자세히 밝히자면 지금의 녹사평역 사거리에서 중앙경리단 가기까지의 중간지점 쯤, 그러니까 한강 쪽의 이태원 1동과 해방촌을 포함하는 남산 쪽의 이태원 2동 사이에 위치한 이태원동이다. 우리는 지금 그곳을 떠났지만 우리 집 옆, 내가 다녔던 이태원초등학교는 아직 그 자리에 있다.

변화 많았던 이태원

어린 시절 이태원에는 변화가 많았다. 이태원 1동에서 한강로로 이어지는 거리에는 외국인의 이주가 많았다. 가게 간판이며, 거리를 오가는 말도 외국어가 많아졌다. 술집 같은 유흥업소나 보세품 가게의 원조라고 불리는 이곳의 가게들은 외국인을 위하여 생겨났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변화를 말하면 육이오 한국전쟁 이후 한국에 나와 있는 미국 군인들을 상대로 하여 차려졌다.
한국의 서민 문화와 미국 군인들의 양키 문화가 섞였다고나 할까, 좋게 표현하여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 그곳이다.
광복 후에 이곳을 생계의 터전으로 삼았던 사람들이 조악한 기념품 따위를 가지고 차렸던 구멍가게가 뒤에 그럴싸한 양복점이나 골동품 가게로 바뀌었고, 그런 기운이 서로 얽혀 1970년대 이후로는 점차로 한국에 나와 있는 외국 사람을 제대로 상대하는 어엿한 상가로서 제 모습을 띠게 되었다.


건너편의 해방촌은 말 그대로 해방이 된 뒤부터 육이오 전까지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일군 마을이다. 남산의 가파른 언덕바지에 함경도에서 내려 온 사람은 함경도 식의 집을, 평안도에서 내려 온 사람은 평안도 식의 집을 짓고 그 지역의 풍습을 그대로 재현시킴으로써 해방촌은 그야말로 북녘문화의 축소판을 보여주었다. 대체로 기독교 신앙을 마음의 기둥으로 삼았던 그들은 남산을 넘어 남대문 시장까지 걸어 다니면서 살림을 크게 일으켜 매우 억척스럽고 부지런한 사람을 뜻하는 서울의 또순이로 통했다.


우리 집은 그 두 세력 사이에 있었다. 가계도를 보면 가락국 김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김해 김 씨 안경공 파 자손으로서, 가문의 발자국은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백토2리에 있고, 지금도 그곳에서 시향을 지내는 데, 무슨 연고로 우리 부모님이, 아니 할아버지가 이태원에서 사셨는지는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태어날 무렵 아버지 3형제가 모두 이태원 한 동네에 이웃해 사셨다는 사실뿐이다. 아버지 3형제뿐 아니라 할아버지 4형제도 이태원에 사셨고 그 자손들 역시 이태원에 살았으니 이태원초등학교 주변은 우리 김해 김 씨의 일가가 사는 집성촌이었던 셈이다.  

할아버지나 할아버지 형제분들은 조선조 말엽을 사신 분들이다. 근세 100년을 천 년이나 되는 것처럼 격랑의 역사를 거쳤기에 ‘조선(朝鮮)’이라고 하면 빛이 바랜 역사책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지만, 집안 이야기를 하다보면 손에 닿을 듯 가까운 내 친할아버지 할머니의 시대였다. 하지만 할아버지 형제들이 이태원에 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모른다. 집안이 대대로 명신이거나 석학, 청백리를 많이 배출하였으니 그런 분의 하나였으리라 짐작만 할뿐이다. 솔직히 말하면 궁금해 했던 적도 없었다.  
아버지 3형제가 하셨던 일은 알고 있다. 형제간이면서 직업은 모두 달라, 큰아버지는 철도청 육운국에 다니셨고 중간인 나의 아버지는 목공소를 하셨고 작은 아버지는 용접 일을 하셨다. 그러나 점차 모두 아버지의 목공소를 돕는 쪽으로 바뀌었고, 그 자손인 나는 물론, 나의 사촌들까지 목공소 가족이 되었다.

짐작에 큰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한글 공부를 따로 하신 것 같은데 아버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두 분은 우리 글에 밝았지만 아버지의 한글 지식은 겨우 이름자나 쓰실 정도였기 때문이다. 말은 의사를 표현하는데 걸림이 없었지만 글은 일본 것을 더 잘 아셨다.
아버지(김태옥)가 1908년 생, 어머니(안순조)는 1909년 생이시니, 태어난 지 한두 해 후에 한일합방이 되어 버려 일제 강점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분들이라 교육에 공백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일본에 가서 4년 반 동안 당시로서는 신기술로 꼽히는 현대식 목공기술을 배우면서, 기술의 완성을 위해서라도 현지에서 일본어를 열심히 습득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나무로 무언가를 만들기 좋아했다고 한다. 놀이에 필요한 팽이나 새총, 연 날릴 때 쓰는 얼래 등 무엇이든지  만들면 또래 아이들이 갖고 싶어 탐을 냈고, 생활 소품의 경우는  이웃에서 과자값을 주며 만들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고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필요로 하는 도구도 잘 만들어 드려 사랑을 독차지 했었다고도 한다.

남산 기슭에 이주한 일본인들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약 70만 명을 한국에 이주시켰다. 그 중 17만 명 정도가 남산 기슭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태원의 우리 집 주변에도 하나 둘, 소위 적산가옥이 들어섰다. 모두 여섯 채가 들어섰는데 양복점 같은 가게를 하든가 소규모 공장 따위를 하는 민간인들의 주택 또는 주택 겸 공장이었다.  
우리 집 담에 붙여지은 집도 안마당에 공장을 꾸미고 녹말가루를 생산해서 팔았다. 살림집 안에 공장이 있었던 것인데 담이 둘러쳐 있어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동네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우리 집 모퉁이를 돌면 바로 그의 집이었다.

매일 얼굴을 마주보게 되니 할아버지와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집 주인은 한국에 이주한 뒤 녹말가루 공장을 하고 있지만 공대를 나온 지식인이었으며 겸손하고 예의가 바른 편이었다. 할아버지만 보면 하도 깍듯이 허리를 굽히는 등 인사성이 밝아 차츰 지배 피지배의 민족 감정을 초월하여 사이가 좋은 이웃이 되었다.

공장을 하다 보니 일본인에겐 설비의 보수나 시설 변경이 필요했다. 간단한 목공일은 아버지가 도와주었다고 한다. 그럴 때면 일본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아버지를 유심히 보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솜씨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비싼 비용을 들여 일본인 수리기사를 부르는 것보다 더 나았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두 해를 두고 여러 번 거듭되었을 때 하루는 일본인이 할아버지를 찾아와 아버지 솜씨를 칭찬하던 나머지 하나의 제안을 했다. 아버지를 일본에 보내 현대의 목공기술을 배우도록 하는 게 어떠냐는 것이었다. 재주가 출중하니 기술만 배우면 크게 성공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마침 동경 근교에 자기 친구가 경영하는 목공소가 있어 연수를 받도록 추천할 수 있다고도 했다.  

아버지가 기록을 남기지 않아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지만,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간 것은 1931년 전후로 보인다. 1931년에 만주사변이 발발했는데, 일본인이 그것을 언급한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시작됐지만 곧 끝날 겁니다. 그러면 복구사업이든 재건사업이든 대대적으로 시작되겠지요. 목공일처럼 전망 좋은 사업도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의견을 물었고, 스물이 넘도록 이렇다 할 직업을 갖지 못한 아버지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아버지가 좋아하는 나무를 만지는 일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일본에 건너간 아버지는 4년 반 동안 현대적 목공기술을 연수하고 돌아오셨는데 그때 아버지는 다양한 기술 중에서 문과 창호 만드는 방법을 중점적으로 배워오셨다.

성남기업의 시작인 성남목공소는 1935년, 그렇게 아버지가 일본 연수를 끝내고 귀국한 뒤 시작되었다. 현대 기술이었기에 아버지가 제작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새로 짓는 관공서나 주택의 ― 주로 양옥의 ― 목재 문과 창호였다. 하지만 건축이 활발하지 않았던 시대였고, 우리에겐 우리 전통의 주거 문화가 있었기에 현대주택만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목공소를 시작한 초창기 ― 그러니까 광복 전에는 아버지의 형제들이 한 동네에 살고 있어 일 밖에 모르는 아버지를 도와주었다. 견적서를 내든가 영업에 필요한 부분은 큰아버지가 도와주었고, 시공할 때나 허드레 일은 작은아버지가 도와주었다. 아버지 형제들은 그렇게 좋은 우애로 서로 도우며 살았다. 아버지 형제뿐 아니라 그 일대에 집성촌을 이룬 우리 일가 모두가 참 화목했다. 사촌 사이는 친형제와 다름없이 지냈다.
  
자연히 목공소는 아버지의 일만이 아닌, 일가의 일이었다. 일터도 많지 않고 할 일 찾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 일이 많으면 일가친척들이 너도나도 달려와 도와주곤 했다.

숙련공이 필요한 경우는 인근에 있는 다른 목공소의 지원을 얻었다. 광복 전에 청파동에 한 곳, 효창동 철길 옆에 한 곳, 갈월동에 한 곳 등 세 곳의 목공소가 있었는데 경쟁하는 사이가 아니라 동업자처럼 서로 도우면서 지냈다. 일감이 많으면 나누어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대로 꾸준히 주문이 이어졌다. 12명이 일하고 먹고 사는 정도의 목공소는 되었다. 특별한 건설 경기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그것도 고마운 일이었다. 양은 얼마 안 되었다. 양옥 한 채를 짓는데 필요한 문을 다 만들어도 리어카 한 대에 싣고 갈 수 있는 분량에 불과했다. 거래처도 건설회사 같은 곳이 아니라 그냥 집장사들이 짓는 집이거나 (사실은 그때의 집장사가 오늘날의 건설회사다) 아니면 자기 집을 직접 짓는 사람들의 주문이었다.

그렇게 일하는 사이, 아버지와 성남목공소에 대한 소문이 동종 업계에 번지면서, 일제에 강점당한 뒤 할 일을 잃어버린 조선의 대목들이 하나 둘, 성남목공소를 찾아와 아버지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주장

그 무렵은 아시아의 중심을 자처하던 중국(청)이 쇠락하여 유럽 열강 중에 다만 한 나라도 상대하기 버거운 종이호랑이가 되자 일본이 나서서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기 시작한 때였다.  

…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세력이 동아시아를 접수, 피부색과 눈빛, 종교, 문화 사고방식 자체가 완전히 다른 강력한 백인 세력에 맞서 이 지역 고유의 문화와 이익을 지켜내지 않으면 안 된다. 서양인들이 동양을 차지하는 경우 동양의 문화와 사회는 철저히 파괴되고 인민들은 아프리카에서처럼 모두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러므로 서양에 대항해서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새로운 세력 판도를 신속히 짜야 하며, 이것을 할 수 있는 나라는 일본 밖에 없다. 천황 폐하가 중심이 되는 대일본 제국으로 통합하고 그 힘을 통해 동아시아 전체가 하나가 되어 귀축미영(귀신이자 동물인 미국과 영국인들)의 침략을 분쇄하고 우리 아시아인이 노예가 되는 것을 막는 동시에 공동으로 번영해 나가도록 하자.…

이것이 대동아공영권의 명분이었고, 이 이론에 열광한 군국주의파들은 순순히 따라주지 않는 세력을 사전 분쇄하는 전쟁준비에 여념이 없던 때였다.

이러한 시기에 식민지 수도 서울(경성)에 이렇다고 할 건설 기운이 있을 리 없었다. 조선의 대목들은 아무리 걸어 다니는 문화재급 수준이라고 해도 손을 놓다시피 지내고 있었다.
  
아버지가 목공소를 창업하면서 만나 함께 일한 분들은 이렇게 할 일을 잃은 조선의 대목들이었다. 덕분에 현대적 목공 기술을 배워 온 아버지와 합치면서 전통과 옛것, 동양과 서양의 목공 기술이 조화를 이루는 곳이 되었다. 주문이 들어오는 대로 한옥과 양옥의 목창호를 만들어 가면서 한편에서는 전통 기법의 현대적 계승을 도모했고, 한편에서는 신기술 정보를 공유하며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과 노력이 있었기에 경복궁이나 불국사 같은 우리나라 대표적 역사문화재급 건물 복원에도 참여할 수 있었고, 소품종 대량생산이 요구되는 복구와 개발시대, 아파트 붐이 이는 시대, 쇄도하는 주문 물량을 유연하게 소화할 수 있었다.  
비록 일본 연수를 통해 신기술을 익혔지만 아버지에겐 그 이전에 한국 대목의 장인정신 기운이 있었고, 그 기운이 통하는 유능한 사람들이 우리 목공소에 둥지를 틀음으로서, 기술면에서 시작부터가 탄탄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연수를 도와준 일본인은, 아버지가 귀국하여 목공소를 차리고 잘 운영을 하자,  
“내가 사람을 잘 봤지. 잘 봤어.”
하고 스스로 기뻐하고 보람을 느끼며, 우리나라에 진출한 일본의 건설회사도 소개해 주었다. 목재창호는 건설회사의 파트너로 건설에 동참하는 것이 순리였기 때문이다.

사람의 세 가지 유형

언제부터인가 나는 사람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일꾼형 참모형 리더형의 세 가지다.
일꾼형은 일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부가가치에 연연하지 않고 묵묵히 일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도 일을 열심히 해 참모로 승진시키고 부하 직원을 배치해도 변함이 없다. 바쁘거나 잔업이 남았을 때면 부하 직원들 다 퇴근시키고 혼자 앉아서 남은 일을 해내곤 한다. 책임감은 모르지만 성실함은 으뜸이어서, 어쩌면 일꾼형이 가장 진솔하게 소비자를 위하고 리더를 위하는 타입일 수도 있다.
학문이든 기술이든 후배에게 자상한 가르침을 주는 존경 받는 교수나 학자, 예술인, 전문기술인들, 유능한 언론인까지도 분류를 하자면 이 일꾼 그룹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참모형은 자기의 존재 가치를 은근히 드러내는 것을 즐기는 타입이다. 참모형도 처음은 말단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일을 알려는 욕심은 있어도 직접 하려는 열정은 없다. 작은 일도 묻는 척하며 도움을 청하거나 슬쩍 동료에게 넘기는 등 자기 일을 재치 있게 잘 나눈다. 토론을 좋아하되 자기가 책임질 결정은 피한다. 최종 선택은 리더가, 혹은 상사가 하도록 분위기를 가져간다. 상담이나 타협을 잘 해서 소그룹의 팀장으로 임명하고 전결권을 주어도 그 전결권을 행사하는 일이 드물다. 최종 결정은 꼭 리더에게 가져간다. 끝까지 그런 자세에 변함이 없으면 탈이 있을 리 없다. 현상유지에 머물거나 실적이 저조할 때 역시 탈 날 일이 없다.
문제는 성과가 생각보다 클 때 나타난다. 공명심이 발동하면서 ‘그거 사실은 모두 내가 이룬 일이야’ 하며 분수를 잃기 쉬운 것이다. 분배에 불만을 품거나 욕심이 과할 경우 리더의 자리까지 넘본다. 이렇게 참모형이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을 부리면 그때까지 공들여 쌓았던 탑들은 적대감과 음모와 배신 따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만다.  

리더형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다. 책임감만큼의 권리도 누리고 싶어 한다. 리더형은 말단에서 일을 해도 대개는 완벽하게 해낸다. 그래서 참모로 승진시키면 더 완벽함을 보이려고 한다. 혼자 판단하여 상황을 종결짓고 결과만 보고한다. 처리가 잘 된 경우는 그냥 넘어가지만 상황이 꼬이면 상사는 화를 낼 수도 있다.
“왜 이런 중대한 문제를 자네가 결정을 해. 자네가 다 결정해 버리면 내 역할은 뭐야? 다시는 이러지 말아요!”
하면 리더형은 사과도 잘한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소용없다. 다음에 맡기는 일도 또 결과만 가지고 온다. 리더형을 수하에 거느리는 상사는 업무 분장을 명확하게 해주면서 단계적으로 자질 향상을 유도해야 한다.  

이야기를 하는 중에 불쑥, 사람의 세 가지 유형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앞으로의 내용에서 종종 인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이렇게 세 가지의 천성적 기질이 있다는 것이지, 어느 것이 위고 아래라는 뜻은 아니다.

나의 분류에서 보면 유능한 작가도 모두 일꾼형이고 세계적인 CEO 중에도 일꾼형이 많다. 반면 대통령이나 수상이라 해도 정치가나 관료는 리더가 아닌 참모형이 대부분이며, 중소기업인이거나 보다 영세한 기업인, 상인 사회에 리더형이 많을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일꾼형

아버지는 일꾼 타입이었다. 일을 사랑하고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즐기셨기 때문이다. 일을 배우는 후배에게 쏟는 정성은 마치 자식을 가르치는 것처럼 극진했다.

목공소 문을 연 것은 아버지 나이 27세 때였는데, 그것이 1935년이었음을 상기하면, 세계정세 ― 특히 동북아시아의 정세를 논하지 않아도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힘든 시기였는지 짐작할 것이다. 나라가 일본에 강점당해 기본적 권리조차 주장하지 못하던 시기였다. 독립운동의 거센 바람이 젊은 피를 들끓게 하던 때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타고난 목수요 일꾼형이 아니었다면 이 시기를 목공소에만 바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세상의 흐름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좋은 나무를 구해 그것으로 좋은 목창호를 만드는 일에만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목공일을 배우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사랑했다.

건설경기가 죽어있다고는 해도, 사람이 사는 한 주택이든 건물이든 신축은 필요하고 증축이나 개축 요청도 있는 일이어서 일은 꾸준했다. 12명의 목수가 모여 시작한 목공소는 넉넉하진 않지만 먹고 살만은 했었다.

차츰 타 목공소에 비해 기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나면서 일이 많아지자 목수 일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청소년들이 생겨났다. 우리 아이 기술 좀 가르쳐달라고 맡기는 부모도 있었다. 주로 15세에서 20세 미만의 청소년이었는데 아버지는 이들을 조수 겸 제자로 길렀다.
직업학교가 없었던 당시는 그게 기술을 배우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심부름하면서 욕도 먹고 연장으로 얻어맞아가면서 참고 기술을 배우는 것이었다. 직접 연장을 다루면서, 작업을 도우면서, 체험으로 배우는 것보다 더 빠르고 확실한 학습은 없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기른 제자를 당신의 목공소에 중용하기도 하고, 독립을 하겠다면 일을 떼어주기도 했다. 당신의 제자 중에서 가장 믿음이 가는 수제자를 사위로 삼기도 했다. 뒤에 이야기가 또 나오겠지만 내 큰누나의 남편(즉, 매형) 임규선 씨도 그렇게 아버지에게 선택된 분이었다.  

작은 목공소지만 목수가 하는 일 외에도, 일손이 필요한 분야는  많고 다양했다. 일자리가 빈약했던 시절이라 아버지 형제는 물론 나의 사촌들도 직간접으로 목공소의 부수적인 일을 많이 했다. 아버지의 목공소는 우리 일가의 일터이기도 했다.
문과 창호는 만드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원목을 구입하는 일부터 자재 관리, 원목 건조, 창호 설계, 제작, 운반, 현장 시공 등등 어느 한 분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었다. 하나 같이 안목이 필요하고 숙련된 기능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여기에 「일에 대한 애정」 하나를 더 추가하여 구성원들에게 요구했다. 아버지는 진실로  일을 즐기면서 당신의 목공소 기술을 인정해 주는 사람을 좋아하셨다.

형제 많은 집안에서 나는 아버지 보다 어머니를 닮아

반면에, 당연한 일인지 모르지만 아버지의 일에 무관심한 사람에겐 상대적으로 아버지도 무관심했다. 자식이라 해도 그랬다. 싫다는 것을 억지로 강요하는 일은 없었다. 어쩌면 나의 어린 시절이 그랬고, 따라서 누구보다 아들인 내가 아버지에겐 무관심의 대상이었던 것 같았다.  
아버지를 닮지 않은 것 때문에 그랬는지 모른다. 나는 외형은 물론 성격까지 어머니를 닮았다. 아버지는 일꾼형이었던 반면 나는 어려서도 스스로의 언행에 책임을 지는 리더형이었다. 아버지가 목공소를 경영하시는 것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대패질이나 못질 따위에는 흥미가 없었다. 아버지의 목공소 경영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요소를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었다.

목공소는 우리가 사는 이태원집에서 이십 미터도 안 되는 가까운 곳에 있었고 골목길의 초입이어서 늘 생활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목수들이 일하는 옆에서 어른거리게 될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면 어머니가 얼른 집에 가 공부하라고 채근하시는 바람에 물러나곤 했었다. 이런저런 나무 재료도 많고 기계도 많아 내가 필요한 게 있으면 재미로 만들어볼 수도 있었는데 (아버지는 나만한 때 그랬다고 한다) 전연 그런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아마도 나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 직접 말씀은 안 하셨지만 ― 저 놈은 목수가 될 자질은 없다고 제껴놓았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잠재적인 권유로 공업고등학교 건축과를 다니고, 또 공과대학에 진학해 건축을 전공하긴 했지만, 적어도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1960년 전후까지 나의 학업은 아버지의 목공소 승계를 염두에 둔 적이 없었고,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셨던 것은 확실하다. 나는 그렇게 아버지에게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아버지를 닮은 형이 있었기 때문에 둘째인 내가 무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수도 있다. 형은 아버지를 쏙 빼 닮았었다고 했다. 나무 다루는 재주도 타고 난 듯 했고, 효심도 깊어 보여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몸이 약한 것까지도 닮았었다는 것이다. 일찍 죽지만 않았다면 당연히 형이 아버지의 최고 수제자가 되어 가업을 계승했을 것이고, 그러면 우리 가계 구도는 크게 달라졌을 것만 같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형은 어린 나이에 죽었다. 아버지의 한쪽 가슴은 그때 무너진 것만 같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는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젖어 한동안을 보냈다.

잠시 가족 이야기를 하면, 나에게는 남자 형제가 셋, 여자 형제는 일곱이나 있었다. 딸, 딸, 아들, 딸, 딸, 딸, 아들(나), 딸, 딸 아들 순이었다. 6․25 한국전쟁 전까지만 8남매였다. 1940년에 태어난 나는 아들 딸 합해서 일곱 번째였다. 그러나 포성이 멎고 휴전이 되었을 때 남은 것은 절반이었고 아들로는 첫째가 되었다.

아버지의 지병 천식과, 데릴 사위

아버지는 진작부터 몸이 약했는데 천식이라는 지병이 있었다. 큰아들을 잃은 뒤 그 지병은 옆에서도 느낄 수 있게 악화되었다.
병원을 다니거나 누워 있어야 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기침을 하며 몹시 허약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폐와 기관지가 약했는지 어머니는 늘 삼이나 도라지 달인 물을 준비했다가 음료수로 드리곤 했다. 집의 연탄불 위에는 언제나 밑둥이 새까맣게 그을린 노란 주전자가 놓여있었는데 도라지 달이는 주전자였다. 도라지가 천식에 좋다는 것은 민간에 널리 알려진 상식이었다.

천식은 마음이 약해지면 더 증세가 심해지는 병이라는 게 증명이 된 건 큰아들을 잃은 뒤였다. 아버지는 눈에 띠게 허약해져 당신 느낌에도 오래 살 것 같지 않았던 것 같고 어머니가 보기에도 그랬다. 두 분이 터놓고 그런 느낌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불길한 느낌은 같았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 목공소는 어떻게 되나,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되나, 하는 걱정을 두 분이 함께 하셨던 것이다. 아버지가 안 계신 목공소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 때 목공소는 우리 집뿐 아니라 일가친척까지 생활의 터전이요 생계의 수단이었다.

목공소를 이어갈 사람을 준비해야 한다는 필요에 공감을 한 것인데 기대를 가졌던 큰아들은 죽었고, 둘째 아들인 나는 관심의 유무를 떠나 열 살에 불과했다. 장성한 딸은 넷이나 있지만 목공소는 딸들이 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한 때 두 분의 눈에 아른거리는 사람이 수제자 임규선 씨였다. 정직하고, 성실하고, 아버지 어머니를 잘 따랐으며, 직원은 물론 거래처나 고객과의 대인관계도 원만했다. 물론 인물도 훤칠했다. 어느 모로 보아도 부족한 게 없었다.

그는 열여섯 살 때인 1942년, 아버지를 도왔던 일본인이 소개하여 목공소에 들어와 먹고 자며 기술을 배웠는데 머리가 좋아 하나를 가르쳐주면 다섯을 알았다. 기초교육만 받았을 뿐 가난하여 진학하지 못하고 혼자 객지생활을 하다가 아버지의 목공소에 오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그의 비상한 머리와 손재주를 대견하게 여긴 나머지 마음 먹고 수제자로 길렀다. 그렇게 5년이 지났을 때 목공일에선 못 하는 게 없어지자 그는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대신하는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체력이 달려 쉴 때면 목공소의 웬만한 기술적인 일을 다 지휘하도록 믿고 맡겼다. 그러는 사이 그는 가족과 다름없는 식구가 되어 있었다.    

큰 누나가 그런 임규선 씨를 좋아했다. 짝사랑이 아니라 서로 좋아하는 것 같았다. 임규선 씨는 1927년생, 큰누나는 1930년 생이니 세 살 차이 나이도 안성마춤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의논 끝에 본인의 의사를 타진한 다음 임규선 씨와 누나를 결혼시키면서 데릴사위로 삼기로 했다.

데릴사위란 딸만 있는 집안에서 사위를 데리고 사는 풍속이라, 큰아들을 잃었지만 작은 아들이 멀쩡하게 자라고 있는 우리 집 형편에는 안 맞았지만, 아버지가 쉬 돌아가시면 당장 목공소를 이어받아 경영을 해야 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했던 것 같다.
어쩌면 나에 대한 기대가 없었기에 그런 결정을 하셨을 수도 있다. 내가 목공 일을 하거나, 목공소를 물려받을 인물이 아닐 것 같아 아예 젖혀놓고 그런 결정을 하셨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큰 역사든 작은 가정사든, 역사에 가정을 덧칠해보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이 때 만약 아버지가 그 후로도 (기력은 약하나 정신력은 건강한 상태로) 30년 이상 거뜬히 사실 수 있는 분임을 알았다면, 그래도 데릴사위를 삼았을까, 의문은 남는 일이었다.      

민족의 비극 육이오 남북전쟁

임규선 씨를 데릴사위로 삼고 나서 곧 육이오가 터졌다. 육이오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국에서의 전쟁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우리나라는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카이로회담에서 나라의 독립이 약속은 되어 있었으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에 미소 양군이 분할 진주함으로써 국토의 분단이라는 비참한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8월 9일 뒤늦게 대일전에 참가한 소련군은 허울뿐인 관동군을 격파하면서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8월 13일 제25군단의 일부가 청진에 상륙하고, 8월 22일에는 평양에 진주하였다. 미군 제24사단은 9월 8일에야 인천에 상륙하여 이튿날 서울에 진주하였다. 미소 양군의 한반도 진주 목적은 일본군의 무장해제 등 전후처리에 있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정당국은 남북간의 왕래와 일체의 통신연락을 단절시킴으로써 38도선을 남북을 가르는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었으며, 공산화통일이 보장되지 않는 어떠한 통일정부수립도 거부함으로써 한반도의 반영구적인 정치적 분단을 강요하였다. 한반도에서의 지배권 강화를 목표로 하는 소련의 기도와 적대정부의 출현을 반대하는 미국의 입장은 타협될 수 없었다. 따라서 한국의 통일독립 문제의 해결은 극히 어려웠으며 이 문제를 위해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고 말았다.

1947년 중반에 이르러 미국은 마침내 단일정부의 수립과 신탁통치의 실시를 전제로 하여 한반도를 통일하려 했던 종래의 대한 정책을 포기하고, 분단의 고정화라는 기정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한반도의 세력균형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유엔은 1947년 제2차 총회에서 통일된 한국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1948년 5월 31일 이전에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선거감시를 위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유엔이 결의한 전국적 범위에서의 총선거는 1948년 1월 소련 군정당국이 이의 수락을 거부하고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지역 출입을 막음으로써 좌절되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유엔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 실시'를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38도선 이남지역에서 유엔 감시하의 자유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국회가 구성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세계만방에 선포되었다. 소련군의 비호 아래 북한지역을 장악한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은 1948년 9월 9일 이른바 '흑백선거'에 의하여 북한지역에 독자적 공산정권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 제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러나 1948년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는 대한민국정부만이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정부'(유엔 총회결의 195 Ⅲ호)임을 결의함으로써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서 대한민국의 법통을 확인하였다.

북반부를 점령한 소련은 극동의 적화를 위해 우선 중공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북한을 위성국화하는 전략을 폈다. 만주를 점령한 소련은 자유중국과 맺은 우호조약을 무시하고 자유중국군의 만주진입을 거부하였다. 소련은 만주를 중공군의 성역으로 보호하는 한편, 구(舊)일본군 조병창을 중공에 인계하고 만주의 자원을 동원할 수 있게 하여 중공군의 전력 증강에 힘썼다. 중공의 대륙제패가 거의 확실해지자 소련은 북한군의 강화에 주력하였다.

김일성은 소련 및 중공의 대폭적인 지원 하에 무기를 들여오고, 남한 내에서 각종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는 등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적화통일을 위해 광분하였다. 소련군은 북한지역 점령 초부터 김일성을 후원하여 군사력을 조직 정리하기에 급급하였다. 1946년 2월 이른바 '평양학원'을 세워 장교를 양성하였고, 1946년 8월에는 '보안간부 훈련대대부'를 창설함으로써 북한군 창설과 무력강화는 급속히 이루어졌다. 1947년 9월 'Wedemeyer 보고서'에는 북한군은 소련의 지원 아래 잘 훈련되었고, 충분히 장비된 12만 500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련은 북한군에 3000여 명의 군사고문관을 배치하여 직접 남침훈련을 시켰으며, 소련 출신 한인들을 중심으로 제105전차여단을 창설하였다. 또한 해 ·공군의 창설을 돕는 한편, 내무성 산하에 보안대  경비대 등의 이름으로 막강한 군사예비대를 확보하였다.
한편에서 김일성은 남한에 끊임없이 게릴라를 남파하거나 남한 내에 있는 불순세력을 조종하여 사회 정치적 불안을 조성시키고, 한국군의 훈련과 전력증강을 방해하였다.

북한 전역은 1949년 초부터 전시체제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북한은 병력보충을 위한 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각도에 민청훈련소를 설치하여 청장년을 훈련시키는 한편, 고급중학 이상의 모든 학교에 배속장교를 두어 학생들을 훈련시켰다. 한편, 북한 전역에 조국보위후원회를 조직하고, 17세부터 40세까지의 모든 남녀를 동원하여 강제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북한군은 사단별 훈련을 완료한 다음, 1949년 2월 말에는 적진돌입 및 적 배후 침투를 위한 보전포합동훈련을 실시하였으며, 1950년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남한 전역의 지형을 연구, 이를 토대로 훈련을 계속하였다.

북한의 남침준비가 완료되자 소련 군사고문단은 1950년 6월 개전에 임박하여 북한에서 철수함으로써 「소련에 의한 남침기도」를 은폐하였다. 육이오 전쟁은 결국 김일성의 무력통일 야욕에서 결행된 것이 되고 말았다.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서해안의 옹진반도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38선 전역에 걸쳐 국군의 방어진지에 맹렬한 포화를 집중시키면서 기습공격을 개시하였다. 적의 야크(YAK)전투기는 서울 상공에 침입하여 김포비행장을 폭격하고, 시가에 기총소사를 하였다.
그 해 국군은 노동절(5월 1일), 국회의원 선거(5월 30일), 북한의 평화공세 등 일련의 주요사태를 전후하여 오랫동안 비상근무를 계속하여 왔기 때문에 경계태세가 이완된 상태였다. 특히 북한의 평화공세로 비상경계령마저 6월 23일 24시를 기해 해제되어 병력의 1/3 이상이 외출 중인 상태에서의 기습공격이었다.

미국은 북한의 남침을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행위로 보고 즉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소집을 요구하였다. 6월 25일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이 제출한 결의안을 9대 0, 기권 1(유고슬라비아), 결석 1(소련)로 채택, 평화의 파괴를 선언하고 적대행위의 중지와 북한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이 결의안은 모든 회원국이 유엔의 결의안 집행에만 원조를 제공하며, 북한집단에는 원조를 하지 않도록 촉구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북한은 유엔의 결의안을 무시하고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와 3일 만인 6월 27일, 서울을 점령해 버렸다. 같은 날 다시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합에서 미국대표 W R 오스틴 대사는 6월 25일의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무시한 북한군의 계속적인 대한민국 침략은 ‘국제연합 자체에 대한 공격임’을 천명하고, 국제평화회복을 위하여 강력한 제재를 취하는 것이 안전보장이사회의 임무라고 선언, 안전보장이사회의 토의를 위하여 결의안을 제출하였다. 그는 같은 날 정오에 대통령 트루먼의 발표문을 낭독한 후 “결의안과 본인의 성명요지 및 대통령 트루먼이 취한 조치의 중점은 유엔의 목적과 원칙, 즉 평화를 지지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

그 날 안전보장이사회는 찬성 7, 반대 1, 기권 2, 결석 1로 유엔 회원국들이 동 지역에서의 군사적 공격을 격퇴시키고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6월 27일의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와 회원국이 제공하려는 원조형식에 관하여 보고해 줄 것을 요구한 6월 29일의 유엔 사무총장 서한에 대한 회원국들의 반응은 신속하였고, 압도적인 지지를 표시하였다. 각종 원조제공을 더욱 효과적으로 이용하며, 대한민국 방위작전을 통일화하기 위하여 안전보장이사회는 7월 7일에 7대 0, 기권 3, 결석 1로써 군대와 기타 원조를 제공하는 국가들이 미국이 지휘하는 ‘통합사령부’에 집결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회원국들은 즉각적으로 결의에 따랐으며, 맥아더 장군이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프랑스 캐나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터키 타이 그리스 네덜란드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필리핀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16개국이 육 해 공군의 병력과 장비를 지원하였으며, 그 밖에 많은 나라들도 각종의 경제적 ·인도적 지원을 한국에 제공하였다.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을 전환점으로 전세를 반전시킨 유엔군은 패주하는 북한군을 추격, 10월에는 평양을 수복하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2월에는 다시 밀려 북한지역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38선이 돌파된 후인 1951년 1월 4일 또 한 번 서울을 북한에 내어 주어야 했다. 이후 전선은 엎치락뒤치락하며 현재의 휴전선 일대로 고착되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육이오

육이오 전쟁은 우리 목공소를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살아남기 위해 너도 나도 뿔뿔이 헤어졌다가 만나기를 거듭할 뿐이었다. 피난을 갔다 돌아오고 다시 피난을 가는 등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참으로 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역사는 세계적인 전쟁을 1차와 2차만 기록하고 3차 세계대전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나의 느낌에는 한국의 육이오 전쟁이 제 3차 세계대전이었다.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이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로 시작되어 영국 · 프랑스 · 러시아 등의 연합국과, 독일 ·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 각각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4년간 싸운 전쟁이라면, 1950년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국의 육이오 전쟁은 한국과 미국, 유엔 16개국 등의 민주 연합 세력과, 북한 소련 중공 등 공산세력이 지구촌 이데올로기의 판도를 놓고 벌인 세계적인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육이오 전쟁은 그때 휴전한 것이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전쟁으로 인한 우리 가족의 희생도 커서 8남매였던 것이 4남매로 줄어들고 말았다. 절반이 어린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비통하고 참혹한 현실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살아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받아들여 삭혀야 했다. 어머니는 어느 정도 삭히는 것 같았지만 아버지는 그 슬픔을 못 견뎌했다. 자식을 잃는 슬픔이 거듭되면서 아버지의 천식 증상은 더 심해졌다.

전쟁은 그렇게 3년을 계속하다가 휴전이 되었다. 휴전이 된 후에야 목공소 식구들은 하나 둘 이태원에 다시 모였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만 모였음은 물론이다.  

휴전이 되자 서울을 복구하는 사업은 빠르게 시작되었다. 우선은 폐허 속에서 전쟁의 파편을 걷어내는 일이었고, 다음은 살릴 만한 건물을 복구하는 일이었다. 완전 파괴된 자리에는 새 건물 건축이 속속 진행되었다.

아버지의 목공소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일이 바빠지자 아버지는 곧 타고난 천성대로 일에만 몰두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일에만 몰두하니 다소간 슬픔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고, 기력을 되찾는 것 같았다.
일꾼의 숫자는 금세 20명으로 불어났고 기술을 배우려는 어린 지원자도 많았다. 아버지는 받아줄 수 있는데까지 배우겠다는 아이들을 받아주었다. 많을 때는 열 명이나 되었다. 그들이 자라 목공소 기술 인력이 되면 다시 어린 후배들을 길렀다.  

목공소가 더욱 일이 많아지고 경영 규모가 커지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휴전 직후인 53년 8월 미 8군이 동숭동 서울대 캠퍼스에 있던 사령부를 용산으로 옮기고 장기 주둔을 염두에 둔 기지를 전국 곳곳에 건설하면서 부터였다.

미 극동공병단(FED)의 인정

미군의 기지공사는 을지로 5가에 본부를 둔 미 극동공병단(FED)의 지휘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미군 감독은 Mr. 네이표, 한국인 감독은 박성태 씨였는데, 건설 용역은 한국의 유수 건설회사에 나누어 주었지만 건설에 소요되는 자재는 전량 수입이 원칙이었다. 문과 창호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아버지의 목공소가 미 8군 (정확하게 표현하면 미 극동공병단) 일을 하게 된 것은 미 군정청에 다니는 5촌 당숙의 추천이 큰 힘이 되었다. 당숙은 광복 후 미 군정사령부 통역이었다가 육이오 전쟁 전, 미군 철수 후에는 한국본부, 즉 파견대 소속으로 남아 지냈을 정도로 주한미군 조직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당숙이 이태원에 현대 기술을 가진 목창호 전문 목공소가 있다고 추천을 하니까 FED는 자재 팀을 보내 실태조사를 했다. 아버지는 별 기대 없이 실태조사에 응했고 특별할 것 없는 샘플을 보내주었다. 견본 제품을 다각도로 분석해 본 그들은 품질의 우수성에 놀랐고, 소량의 시험 발주를 했는데, 그것으로서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다. 품질은 물론 시간도 정확히 맞춰주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박성태 씨나 미스터 네이표를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두 분의 신뢰와 적극 지지로 성남목공소는 미 극동공병단(FED)의 목창호 부문 지정업체가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현대건설 대림산업 고려개발 등 당시 미 8군 기지공사에 참여한 유수 건설회사와의 거래가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후일 베트남 미 해군기지 건설, 괌의 미 해군기지 건설에까지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미 극동공병단이 관장하는 기지공사는 용산의 사령부만이 아니었다. 봉일천, 의정부, 문산, 용문산 레이다기지, 팔공산기지, 일원산기지,  서산××기지, 오산비행장, 군산비행장 등등 가히 전국적이었다.  

따라서 이름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모든 건설회사가 거의 참여했다. 고려개발 현대건설 신성 대림산업 삼성건설 삼부토건 성지건설 한신공영 이화공영 등등… 가장 수주를 많이 한건 고려개발이었고 다음이 삼환, 현대 순이었던 것 같다.

FED는 그 모든 회사에 목창호 지정업체는 성남목공소라는 공문을 보내주었다. 아버지의 목공소가 바빠지고, 식구가 수십 명으로 늘어나는 것은 당연했다.

현대건설은 당시에는 순위에서 한참 밀려있었다. 비교적 규모가 작은 군산비행장 건설부터 참여하기 시작했다. 비행장을 겸한 오산 기지는 고려개발이 삼환, 이화공영, 삼일기업과 함께 건설했다. 건설은 그렇게 여러 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되었지만, 목창호에 국한된 아버지의 목공소 일은 지휘부 건물이 많이 들어서는 용산 사령부에 치중된 감이 있었다.

오랜 세월 외국군의 주둔지였던 용산
  
용산은 사실 오랫동안 외국군의 주둔지였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곳에 후방 병참기지를 설치했으며,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할 때에는 조선 주둔 일본군총사령부와 20사단이 진주했었다. 이후 용산, 남영동 등이 군용지로 책정되어 아예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부가 입지하였었다.  

그런 역사를 가진 곳에 미 8군 사령부가 들어서면서 그 주변, 이태원과 이태원에 인접한 한남동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졌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는 외국공관이 속속 들어섰고, 63년에는 이태원 사격장터에 군인아파트가 건설되는 등 외국인 집단거주지도 형성되었다. 나중에 부평에 있던 121후송병원까지 미 8군 영내로 이전되면서 용산은 서울 속의 미국이 되어 버렸다.

미 8군 공사는 한국에 건설업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현대건설과 아버지의 목공소와의 인연도 미 8군 공사에서 시작되었다. 성남목공소가 FED가 유일하게 인정한 지정업체라는 사실은 건설회사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는데 현대건설이 가장 빠르게 반응을 보였다.

FED 지정업체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우리 목창호로 시공을 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건설회사의 선택이었다. 현대건설은 목창호를 모두 성남목공소에 발주했다. 아버지의 목공소를 신뢰했다기보다 「FED 지정업체」라는 사실을 더 신뢰한 것이다. 우리와의 파트너십이 생각한 것이 아니라 미 극동공병단과의 파트너십을 과시하기 위한 결정이라고 이해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동반 관계에 있는 상위 파트너가 신뢰하는 제 3업체를 함께 신뢰해 주는 것 ― 그렇게 해서 호감을 나누는 전략 ― 그것은 고 정주영 회장의 스타일이기도 했다.
현대건설은 성남목공소를 하청기업이라 하지 않고 협력사라고 불러 주었다. 현대 외에 이화공영이나 신성, 삼환기업 등 여러 건설회사와 거래를 했지만 현대건설과의 거래가 그중 많아 해를 거듭할수록 둘의 관계는 돈독해졌다.

아버지의 목공소는 당시 주문을 받을 때 자재는 주문자가 사 주는 것을 조건으로 했었다. 그 조건 때문에 일부 건설회사는 우리에게 일을 맡기지 않고 전담 부서를 만들고 목수를 채용해서 자체 제작하기도 했다. 그렇게 만든 전담 부서가 발전하여 나중에 종합목재 라든가 가구회사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다시 나빠진 아버지의 건강

잠시 좋아지는가 했던 아버지의 건강이 다시 나빠져, 50세 전후의 모습이 노환에 시달리는 칠순 노인 같았다. 가뜩이나 약한 분이 기력이 없어 앉아있는 시간이 많았다. 일을 하다가 힘들면 누워서 쉬어야 하니 방에는 물론 작업장 한편에도 늘 이부자리가 펴져 있었다. 건강 때문에 바깥일은 아예 볼 수가 없었다. 성남목공소를 대표하는 대외 활동은 모두 임규선 씨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재정은 형식적으로는 어머니가 관리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직접 수금을 하고 장부를 정리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업 차원의 재정은 임규선 씨가 관리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머니는 얼마가 됐든 임규선 씨가 갖다 주는 돈을 주머니에 넣고 썼다. 못이나 철근 경첩 등 부속이 필요하면 직원들은 어머니에게 돈을 타서 썼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월급날 돈이 모자라거나 하면 딸라 돈을 얻어서라도 채워주곤 하셨다. 머리 속 계산은 있었겠지만 어쨌든 체계 있는 재무관리는 아니었다. 적어도 1950년대 말까지는 그렇게 그냥 매형의 영업과 어머니의 주머니 경리에 맡겨졌었다. (그때의 딸라돈은 하루 이자가 1%였다. 열흘이면 10%, 한 달이면 30%의 고리였다.)

어머니의 역할은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술 마시고 생떼를 부리거나 제시간에 안 들어오는 등 못된 짓을 하면 큰소리로 야단치고 작대기로 때리며 혼을 내기도 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피해 다니거나 반항하는 직원은 없었다. 목소리만 크고 무서운 호랑이 어머니가 아니라 남편을 극진히 봉양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고, 직원에게 주는 음식이 가족 이상으로 정성스러웠으며, 무엇보다 열심히 일하는 직원에게는 친어머니처럼 자상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는 너나없이 다 어려웠던 시절이라 가불을 해달라고 조르는 직원도 많았는데 어머니는 이유를 들어보고, 쓸데없는 가불은 절대 안 해 주었다. 그러나 이유 있다고 여겨질 때에는 두 달치, 세 달치도 가지급을 해주어 직원들은 고마워했다.

그런 어머니가 가장 끔찍이 여기며 정을 준 대상은 (당연한 일이라 여기겠지만) 데릴사위인 임규선 이었다. 어머니만 잘한 게 아니라 임규선 씨도 친아들 이상으로 잘했다.
아버지가 몸이 약했던 것 외에는 그런 화목한 분위기에서 우리는 지냈다. 육이오 전쟁 이후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십수 년 간은 임규선 씨, 즉 매형이 나서서 목공소를 이끌다시피 했다. 임규선 씨가 없었다면 성남목공소는 보다 작은 규모로 남거나 용두사미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목창호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현장에 싣고 가서 창호를 설치하고 문을 다는 시공팀이 있어야 했다. 시공은 아버지의 동생, 나에게는 작은 아버지가 팀장이 되어 이끌었는데 역시 호흡이 잘 맞았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아버지는 원자재 구입이나 관리, 완성된 제품의 품질 검증 등 기술고문 같은 역할만 했다. 그런데 이때 아버지의 불만은 문틀과 문 작업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건설회사에서 문틀까지 만들어 놓으면, 뒤에 우리가 가서 문만 달아주는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은 나중에 붙이더라도 빨리빨리 벽을 쌓고 지붕 공사까지 마무리하며 기성고를 받아내려는 시행사들 사정 때문에 그랬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보면 아무리 규격에 맞게 정교하게 만든다 해도 약간이나마 틈이 생기는 등 문제가 생기고, 시간이 흐르다보면 원목 건조나 관리의 문제로 문틀과 문이 서로 다르게 비틀리는 경우도 생겨 아버지는 기회 있을 때마다 문제를 제기하고 문을 만드는 쪽에서 문틀을 함께 만들어야 한다는 원칙을 주장하곤 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이 주장은 지금은 시장에 받아들여졌지만 당시에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귀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다.

전형적인 참모형이었던 매형 임규선 씨.

미 8군 사령부 건설로 인해 주문이 늘어나니 목공소 직원도 배로 늘어났고 매출도 늘었으며 영업도 바빠졌다. 아버지의 목공소는 워낙 기술이 앞서고 신용이 튼튼한 만큼 주문이 안정적이어서 영업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렇다고 영업활동이 전혀 필요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때의 매형은 정말 1인 3역, 4역을 해내는 능력자였고, 목공소의 빛나는 존재였다. 매형이 있어 이리 뛰고 저리 뜀으로서 그 어려웠던 시대 목공소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내 나름으로 정리하면 일꾼형이었던 아버지가 오히려 매형의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 참모형이었던 매형은 중간을 잇는 비즈니스를 특히 잘했다. 물론 최종 결정은 아버지에게 가져 오고, 들어오는 돈은 어머니에게 맡기는 형식을 취하며 영업을 할 때도 위에 경영자가 있음을 드러냈으나, 그러나 그러면서 사실은 모든 일을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갔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기 위에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아주 적절하게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힘들고 곤란한 일은 “사장님이 원치 않으셔서… ” 하고 사장님 핑계를 대고 거절했고, 자금 문제 역시 처세가 애매할 때는 “어머니가…” 하며 자신은 빠져나갔다. 대신 반갑고 긍정적인 일은 자신이 나서서 결정을 내리고 아버지의 추인을 받았는데, 이런 처세가 곧 참모형의 특징이기도 했다.  

목공소는 잘 돌아갔다. 많은 직원과 그 직원에 딸린 식구들 모두, 저축할 형편은 안 되더라도 사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그에 대한 신임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두터워졌다.
큰 누나는 나보다 꼭 10년이 위였다. 매형은 열세 살 위였다.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라 어릴 때의 열세 살은 큰 차이였다. 때문에 매형이지만 나에게는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어른이었다.

천상 일꾼이었던 아버지

우리 목공소가 미 8군 사령부 등의 일로 한창 분주할 때에 나는 중 고등학교를 다녔다. 어머니는 늘 나에게
“목공소 일은 매형이 잘 하고 있으니까 상관 말고 공부나 열심하 해라”
하셨기 때문에 나는 정말 목공소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버지는 왜소하고 꼼꼼하고 소심한 타입인데 반해 나는 어머니 쪽을 닮아 체격만 큰게 아니라 성격도 대범하고 활달한 편이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역도와 유도를 배운다고 설치기도 했다. 그런 나의 모습이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던 아버지가 보기에 순순히 목공일을 할 아들 같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내게 소홀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말씀이 적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일에 관한 것 외에는 별로 말씀이 없었으니 나와 이야기할 것이 별로 없었다.
아버지는 언성을 높이거나 화를 내는 일은 내 기억에 한 번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늘 온화했다. 아들 딸들이 무슨 일을 해도
“저 좋아하는 일 하면 됐지. 뭘”
하고 긍정정으로 받아 주었다. 다만 늘 하시는 말씀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면
“남과 다투면 안 된다.” 두 가지였다.


그렇게 아버지는 일에만 몰두했다. 영업이다 경영이다 하는 것도 뒷전이고 기술자다 사장이다 하는 것도 뒷전이었다. 새벽에 원목시장에 가서 나무 고르는 일을 제일 좋아하셨다.
좋은 원목을 구해 목창호를 만들고, 그것을 여봐란 듯 좋은 건물에 설치했을 때 최고의 보람과 기쁨을 느끼는 천상 일꾼이었다.  
대목이든 소목이든 우리나라 전통개념에 의하면 최고의 기술자는  나무를 볼 줄 알아서 용도에 맞는 최적의 것을 고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산처럼 쌓여있는 원목 가운데서 속이 꽉 찬 건강한 나무를 골라내는 안목을 제일로 쳐주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그랬다. 좋은 나무를 기막히게 잘 골랐다. 어디 괜찮은 원목이 들어왔다고만 하면 잠을 자다가도 일어나 달려가서 감정을 하고 마음에 들면 빚이라도 얻어 사 놓아야 편하다고 했다.
목재소에 가는 날이면 쌓여있는 나무가 아무리 많은 양이라도 다 둘러보고 필요한 것을 정했다. 그때 수요가 많았던 것은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 등 남방에서 들어오는 나왕과 북미 지역에서 오는 미송이었는데 미송은 하자 있는 것이 많았다. 건조실이 없던 때라 덜 마른 것을 잘못 사면 다루기가 힘들어 낭패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자연 건조가 잘 된 것을 골라야 했다. 나무를 고를 때 만큼은 아무리 몸이 불편해도 직접 가셨고, 바빠도 서두르지 않았다.

나무를 잘 보고 고를 줄 아는 사람이 첫째라면 둘째는 원목을 잘 다루는 사람이었다. 겉에서 보고도 속이 꽉 찬 나무인지 빈 나무인지를 분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능력 있는 기술자에 속한다. 살릴 부분과 버릴 부분을 구별하는 안목도 필수였다.  
망치나 톱 끌 대패 같은 연장을 잘 다루는 것은 제일 낮은 세 번째 기술로 쳤다. 연장을 댈 정도면 원목 선택도 끝난 거고 설계도도 나와 있는 것이니 주어진 조건대로 만들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연장으로 일하는 것은 기술이 아닌 기능이었던 것이다. 문이나 창호에는 경칩이라거나 고리 등 액세서리도 필요한데, 그건 목공 분야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원목 다루기를 아이 다루듯 조심스럽게 다뤘다. 버릴 부분을 엄격히 구별하며 아무리 비싼 원목에서라도 과감하게 버렸다. 때론 좋은 원목을 구했다고 그렇게 기뻐했음에도 나중에 살려놓은 부분은 30%에 불과한 적도 있었다. 70%는 버려야 했던 것인데, 그런 경우일수록 아버지는 30%로 만든 작품을 대견해 했다.

뒤에 와서 그런 모습들을 떠올려보면 아버지는 최고의 기술자였음에 틀림없었다. 하긴 그 때 현대적 목공 기술을 일본에까지 가서 4년 반 동안 연수받고 온 사람은 드물었다.  














숙명이었던 가업의 승계



59학번인 나의 대학 시절은 혼란하기 그지없던 때였다. 공부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정부수립 이후, 허다한 정치파동을 야기시키면서 영구집권을 꾀했던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의 부패가 극에 달해 고등학교 학생들까지 참지 못하게 악취를 풍기던 때였다.
결국 1960년 4월 19일, 전국적인 학생의거가 일어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기계 토목 전기 건축 4개 과의 단과대학이었던 한양공대는 이 시기에 종합대학이 되었으니 대학은 대학대로 변화를 거듭하는 시기였다. 공부보다는 정치, 학문보다는 학제개편 같은 게 더 큰 관심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해부터 연일 시위가 확산되는 양상을 보였다. 솔직히 나는 시위에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학교에 있는 시간보다 거리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안 한다 안 한다 하면서도 시위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역사를 바꾼 4․19 학생 혁명

4․19에 대한 평가는 이미 국민 모두의 가슴에 정리되어 있지만 국가 차원에서는 여러 번 바뀌었다. 때문에 뒤늦은 지금 내가 언급할 역사는 아닐지 모르지만 그 시절 이야기이니 안 하고 넘어갈 수도 없다.
요약하면 동기야 어떻든 비합헌적 방법으로 헌정체제의 변혁과 정권교체를 결과하였기에 초기에는 혁명으로 규정, 4월 혁명, 4․19학생혁명, 또는 4․19 민주혁명 등으로 불렀으나 5․16 군사정변 이후 이를 의거(義擧)로 규정, 일반화하였다가 문민정부(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 다시 혁명으로 환원되었다.
4․19를 초래한 근본원인은 종신집권을 노린 대통령 이승만의 지나친 정권욕과 독재성 및 그를 추종하는 자유당의 부패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평불만이 누적된 데 있었다. 광복과 더불어 환국한 이승만 대통령은 다른 어떤 민족지도자보다도 가장 두터운 국민의 지지와 신망을 얻었을 뿐 아니라 탁월한 수완으로 탄탄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였지만 12년을 집권하는 동안 '나밖에 없다'는 오만과 카리스마적 권위의식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끝없는 정권욕과 독재성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승만은 조선의 왕조 체제에 심한 거부감을 보였으며, 그래서 일제를 거치는 동안에 말살되지 않고 실낱처럼 남아 있던 조선 왕가의 혈육이며 흔적을 아예 끊고 지우는 일에 앞장을 섰었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되어서는 자신의 종신집권과 권력 강화를 위하여 숱한 정치파동과 정치적 비리를 저질렀음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럼으로써 그는 점차 국민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

과오를 나열하자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6․25 전쟁 발발 직후 서울 사수(死守)를 공언하고도 자신과 정부는 피난감으로써 국민을 배신하였고, 또한 국민방위군사건으로 많은 청년들을 희생시켰으며,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신의 집권을 위해 일대 정치파동을 일으켜 국민의 원성을 샀다.

1952년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위한 정치공작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부산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의원들을 체포, 연금하여 위협하는가 하면, 백골단, 민족자결단 등 정체불명의 단체가 나타나 국회의원들을 협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개헌을 반대하는 의원들의 지역구에서는 난데없이 국회의원을 성토하며 사퇴를 외치는 군민대회가 곳곳에서 벌어지기도 하였다. 당시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으로 불리는 일련의 정치테러 사건과 이때 통과된 발췌개헌(拔萃改憲)으로 이승만에 대한 국민의 신망은 더욱 떨어졌다.

1954년 11월 이승만은 재차 자신의 종신집권을 위해 헌법의 중임제한(重任制限) 조항을 없애는 개헌안을 국회에 상정시켜 이른바 사사오입개헌(四捨五入改憲)이라는 기상천외한 개헌을 단행하였다. 당시 개헌안이 가결되기 위해서는 재적 국회의원 203명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136표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했는데, 투표결과 찬성이 135표에 그쳐 부결된 것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다음날 재적의원인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명이므로 이를 사사오입하면 135명이라고 하면서 전날의 부결을 뒤집고 가결된 것으로 정정 선포함으로써 사사오입개헌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1956년 5월 15일 정부통령선거에서는 정권이 교체되는 듯한 분위기가 감돌았으나, 민주당의 신익희(申翼熙) 대통령 후보가 의문의 죽음을 당함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자유당은 선거법에 언론규제규정을 삽입한 ‘협상선거법’을 통과시켜 부정선거를 고발하는 언론을 봉쇄해놓고 관권에 의한 부정선거를 공공연히 자행하였으나,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가 20%에 달하였고 부통령에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됨으로써 민심의 소재가 분명히 밝혀졌었다.

1958년 12월 자유당은 국회의사당에 무장경찰과 무술경찰을 배치하여 반대하는 야당의원들을 완력으로 막고 2 · 4 보안법파동을 일으켜 언론규제와 야당탄압을 강화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1959년에 이르러 자유당 정권은 야당계 언론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여 몇 차례의 필화사건으로 기자를 구속했으며, 정부를 비판하던 경향신문을 폐간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이승만과 자유당의 극에 달한 온갖 정치적 비리가 4 · 19 혁명의 간접적 원인을 조성하였다.

자유당 정권은 더 이상 순리적인 선거를 통해서는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1960년 정부통령선거를 처음부터 관권을 동원하여 부정하게 치를 계획을 세웠다. 자유당은 민주당의 대통령후보인 조병옥이 신병치료를 위해 도미하게 된 것을 기화로, 5월 중에 실시해야 할 정부통령선거를 2개월이나 앞당겨 3월 15일에 실시하였다.

최인규 내무부장관을 중심으로 공무원을 총동원한 부정선거 음모의 내용은, ▲4할 사전투표 ▲3인조에 의한 반공개 투표 ▲자유당의 완장부대 동원으로 유권자위협 ▲야당참관인 축출 ▲유령 유권자의 조작과 기권강요 및 기권자의 대리 투표 ▲내통식(內通式) 기표소의 설치 ▲투표함 바꿔치기 ▲개표 때의 혼표(混票)와 환표(換票) ▲득표수의 조작 발표 등이었다.

이러한 음모는 정의감에 불타는 한 말단 경찰관이 '부정선거지령서' 사본을 민주당에 공개함으로써 백일하에 폭로되었다. 그러한 때 조병옥이 미국에서 급사함으로써, 이승만의 4선(四選) 목표 달성은 거의 확실하게 되었다.

3월 17일 이승만․이기붕 후보가 80%가 넘는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었음을 발표하였으나 국민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것은 선거가 아니라 선거라는 미명 아래 행해진 국민주권의 유린행위였고, 국민에 대한 배신행위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4․19 혁명의 도화선은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불붙여졌다. 민주당 정부통령후보의 대구 유세일이 28일 일요일로 잡히자 대구시내 모든 초․중․고교 학생은 당국의 지시로 등교를 강요당했다. 그것은 야당의 선거유세장에 선생과 학생들이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으므로 대구고교와 경북고교 학생이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고 외치면서 마침내 데모를 벌였다.

이어 3월 1일 서울 대전 수원에서, 8일 대전, 12일 13일 부산 서울에서 계속적인 학생데모가 일어났다. 학생들의 구호도 처음에는 “구속학생 석방하라”, “학생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등이었으나, 점차 정치적인 구호로 바뀌어 “학생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뭉치자”, “부정선거를 묵인하는 자는 자유로운 조국에서 삶을 포기한 자다”라는 등의 부정선거 규탄으로 방향을 바꾸어 갔다.

3월 15일 선거 당일에는 마산에서 학생들이 데모를 벌였고, 자유당의 작태를 목격한 시민들도 선거포기선언을 한 민주당 당사 주변에 모여 “협잡선거 물리치자”고 외치면서 학생 데모에 합류하였다. 경찰과 자유당 정치폭력배들의 무자비한 제지로 많은 사상자와 행방불명자가 속출하였으며, 갖가지 풍문은 마산시민들을 극도로 흥분시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4월 11일, 그동안 행방불명이 된 마산상고생 김주열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무참하게 살해된 시체로 바다에서 발견되자, 전국의 학생들과 국민들의 흥분은 극에 달하였다.

4월 18일 고려대생 3,000여 명이 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를 한 후 귀교하는 길에 정치폭력배들의 습격을 받아 10 여명 부상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데모에 앞서 밝힌 고려대생들의 선언문은 다음과 같았다.

…지난날의 학생들은 일제에 항거하고 멸공전선의 전위대열에 섰으나, 오늘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한 봉화를 높이 들어야 한다. 청년학도만이 진정한 민주역사창조의 역군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고 총궐기하자.…
고려대생들이 4․18 습격당한 사건은 다음날 학생들이 총궐기하게 된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1960년 4월 19일 서울 시내 각 대학 학생들이 미리 약속했던 계획에 따라 각 대학에서 총궐기 선언문을 낭독하고 중앙청을 향해 행진하였다. 선언문 내용은 4 ·18 고려대 선언문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학생들은 더 이상 현실을 좌시할 수 없으며 정의와 민주수호를 위해 궐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자극된 수많은 고등학생들도 데모에 참가하였다.

경찰이 경무대로 통하는 효자동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이승만과의 면담을 원하는 학생들의 요구를 무시한 채 무차별 발포를 하여 사상자가 늘어가자, 데모 군중은 더욱 흥분하여 경찰 지프차를 탈취하여 불사르고, 경찰서와 파출소를 파괴, 방화하였다. 또 일부 시위군중은 자유당정권의 전위부대의 하나였던 서울신문사와 반공청년단 본부, 그리고 자유당 본부 등을 습격하여 불태우거나 파괴하였다. ‘서대문의 경무대’로 알려진 이기붕의 집도 습격하였는데 이곳에서는 정치폭력배들이 데모 학생들을 몽둥이로 살상까지 하였다.

서울 시내는 완전히 무정부상태였고, 모든 질서는 회복할 수 없는 수라장이 되었다. 이 날의 구호는 “3․15부정선거 다시 하라”, “1인 독재 물러가라”, “이 대통령은 하야하라” 등 독재규탄과 민주수호 및 정권교체를 요구하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당황한 정부는 오후 3시를 기해서 서울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을 진주시켰다. 사망자 약 100명에 부상자 약 450명에 달한 엄청난 희생을 가져온 데모는 계엄군의 진주로 다음날부터 일단 멈췄다.

그러나 4월 23일 서울시 주관으로 4․19희생자에 대한 합동위령제를 올리자 일제히 이에 반발, “어용(御用) 위령제는 4․19 희생자에 대한 모독이다. 학생들이 주최하는 위령제를 다시 거행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한편, 23일 부통령 장면이 정부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사퇴하자, 이기붕도 자신의 부통령 당선을 사퇴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했고, 이승만도 자유당 총재직에서 물러날 뜻을 밝혔다. 그러나 결코 정부통령선거를 다시 한다거나, 대통령직을 사퇴한다는 의사는 밝히지 않았다.

이러한 자유당의 미온적인 태도에 국민들의 분노가 다시 일기 시작하였고, 25일 서울의 각 대학 교수 259명이 “대통령 이하 3부요인은 3․15 부정선거와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즉시 물러나는 동시에 정부통령선거를 다시 하라”는 내용의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구속학생의 즉시석방을 요구하면서 데모에 나섰다.

교수 데모는 자유당정권 퇴진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에 자극받은 일반군중들은 계속해서 야간 데모를 벌이며 “자유당정권 물러가라”고 외쳤고, 26일에는 다시 학생들이 거리를 메워 태평로는 4․19 때와 같은 혼란이 거듭되었다.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계엄사령관 송요찬이 주선하여 학생과 시민대표 5명이 이승만과 면담하고 시국수습을 위한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고, 3․15 부정선거는 다시 한다. 또한, 이기붕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는 동시에 내각책임제 개헌을 한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어 11시 이승만은 방송을 통해 직접 하야의 뜻을 밝히고 다음날 정식으로 '대통령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하였다.

28일 이기붕 일가가 경무대에서 자살하였음이 확인되었고, 29일 이승만은 극비리에 하와이로 떠났다. 결국 이승만이 이끈 자유당의 12년간의 장기집권은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였고 새로운 공화정을 위한 준비를 위해 허정 과도정권이 뒤를 이었다.
4․19 혁명은 처음부터 정권탈취를 목적으로 한 투쟁이나, 어떤 정치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체제변혁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어떤 정치적 주도세력이 개입된 것도 아니며, 조직적 투쟁 계획이나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학생들이 불의에 항거한 의분이 집단행동을 취하는 과정에서 사태가 변전하고 발전되어 나타난 하나의 결과적 현상이었다. 4 ·19혁명은 한국의 정치발전사에 하나의 획기적인 전기를 기록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는 일대사건이었다.

공포와 긴장의 5․16 군사 정변

1960년이 4․19로 불안과 초조 속에 어수선했다면 이듬해인 1961년은 5․16 군사정변으로 공포와 긴장 속에 몸을 사려야 했다.    
5․16 군사정변은 숫자가 밝히는 대로 5월 16일, 육군 소장 박정희의 주도로 육군사관학교 8기생 출신 군인들이 4․19 혁명으로 들어선 제 2공화국을 폭력적으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변이었다.

새로 집권당이 된 민주당이 신 ·구파간의 갈등으로 분열된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다양한 사회세력들은 각각의 정치적 요구를 주장하여 정국은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특히 혁신계 정치세력의 부상과 학생세력의 진출은 민족자주화운동, 통일촉진운동으로 전개되어 반공분단국가의 근본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육이오 전쟁을 통해 사회적 지위가 신장되면서 권력에 대한 욕구가 충만되어 있던 군부 내에서는,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고급 장성의 부정부패와 승진의 적체현상을 공격하는 하극상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소장 박정희와 중령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8기생들은 1960년 9월부터 쿠데타를 모의하였고, 61년 5월 16일 새벽, 제2군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8기생 주도세력은 장교 250여 명 및 사병 3,500여 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한 뒤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 전권을 장악하면서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하였다.

6개항이란 ①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②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한다. ③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렴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④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⑤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한다. ⑥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 등이었다.

군사정변은 초기에 미 8군사령관 C․B․맥루더, 야전군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혔지만, 미국 정부의 신속한 지지표명, 장면 내각의 총사퇴, 대통령 윤보선의 묵인 등에 의하여 성공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재편하여 3년간의 군정통치에 착수하였다.

군정기간 중 군사혁명세력은 ▲특수범죄(반혁명, 반국가행위)처벌법, ▲정치활동정화법 등 법적 조치를 통하여 정치적 반대세력과 군부 내의 반대파까지 제거하였다. 또한 핵심권력기구로서 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민주공화당을 조직한 후 대통령제 복귀와 기본권 제한, 국회에 대한 견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을 시행하였다.

쿠데타 세력이 주축인 민주공화당은 2년 반 후인 1963년 말 대통령선거, 국회의원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제3공화국으로 출범하게 되었지만, 1961년의 쿠데타 직후에는 모든 시민의 집회를 금지했었다.

대학생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3명만 모여도 붙잡아 가서 조사하는 기세였다. 내가 대학 3학년 때 뚝섬에서 신입생환영회를 가진 일이 있는데 그것조차도 군사정부가 문제를 삼자 나는 불안한 사회를 떠나 일찌감치 군대나 다녀오자고 육군에 입대해 버렸다. 그래서 64년 말 제대를 하고, 65년 복학 66년 졸업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혁명 전후의 혼란과 군사정변 전후의 불안과 긴장, 군사정부의 화폐개혁으로 인한 경기 침체. 제 3공화국 출범에 따른 사회적 동요 등으로 얼룩진 환경에서 대학생활을 보내다 보니 대학생활다운 추억을 가질 수가 없었다. 다만 학연이랄까 학맥만 만든 대학생활이었다.

화폐 개혁 후유증과 월남 파병

대학을 졸업한 1966년은 월남 문제로 다시 온 나라가 들떠 있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대규모 한국 전투부대를 월남에 파병하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대 월남지원(?)은 1964년부터 시작된 일이지만 66년에 본격화되었다. 우리처럼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던 월남은 경제 뿐 아니라 정치적 측면에서도 군사정부를 크게 도와주는 계기가 되고 있었다.
군사정부가 들어서서 1년 후 화폐개혁을 단행했는데, 이로 인해 국내 경기는 말할 수 없이 침체되었고 그 후유증으로 부도나는 기업이 속출하는 등 파장이 컸었다. 월남 정국이 아니었으면 이 문제도 보통 난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대한민국 전체가 크게 비틀거리며 겨우 겨우 지탱하는 시기에 군대도 다녀왔고 대학생활도 마쳤는데, 그때 즉 1966년에 더 큰 문제를 만나야 했다. 아버지의 목공소가 창업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공사대금으로 받은 약속어음들이 부도가 나서 가업은 물론 일가의 전 재산을 잃을 위기에 놓인 것이었다. 건설회사들이 속속 부도를 낸 것인데, 이는 앞에 적시한 1962년 6월, 5․16 군사정부가 전격적으로 단행한 화폐개혁의 후유증이었다.  

군사정부의 등장이 정치·사회 및 경제 등 다방면에 큰 충격을 가져왔음은 물론이다. 생산 활동을 비롯한 민간투자 및 소비수요는 부진을 면치 못하였고, 예비적 현금수요가 증가하여 한동안 금융기관예금은 급격히 감소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군사정부는 경제활동의 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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