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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언제 읽어도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위선이나 불의에 대항하여 정의를 세우면서 인간성을 옹호하고 정신을 이끄는 따위는 다음 이야기입니다. 잔잔한 물결처럼 다가와 가슴을 파고드는 반취 이기윤의 소설들에는 독특한 향기가 있습니다.

콩트
2002.02.02 04:42

본체파괴? (전파 99년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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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보(보고 또 보고)에게 틀림없이 무슨 일인가 있었다. 짜쾌(짜릿한 쾌감)는 그녀를 본 순간 전과 다름을 느꼈다. 당혹스럽다 해도 좋을 만큼 그녀는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사이버 인간 같았다. 일주일 전 오피스텔 옥상의 푸른 공원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 다소 고통스런 표정은 보였지만 ― 그렇지는 않았었다. 지난 일주일간은 대화방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궁금했고, 그래서 더 기다린 것인데… 짜쾌를 보는 그녀 눈동자엔 초점도 없었다.

그녀는 아픈 곳이 많은 특이한 여자였다. 처음에는 외로워서 주위의 관심을 끌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가끔 그런 사람이 있었다. 혼자 ― 아니 사이버 인간과 사는 데 익숙해진 시대에서 먼 옛날, 20세기와 같은 인간 사회를 그리워하는 부류가 있었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미 지구촌은 그때와는 연결조차 안 되는 판이하게 다른 세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과학이 눈부시게 발달하여 평균수명이란 용어가 아예 없어진 22세기였다.
그녀가 이상하게 보인 것도, 요즘 같은 세상에 60살도 안 된 여자가 그렇게 여기저기 아픈 데가 많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생명공학 중에서도 복제술이 크게 발달하여 인체의 오장육부는 물론 심지어 여성의 질이나 남성의 페니스 따위까지 상품화 되어 있고, 갈아 끼우는 이식술 또한 개개인의 특성을 완벽하게 파악하여 시행됨으로 부작용이 거의 없었다.  

신의 영역이네 인륜 윤리 도덕 어쩌고 하는 논란은 21세기 초에 잠시 있었을뿐 사라진지 오래였다. 팔 다리 따위를 다쳤을 때 치료하는 것보다 새것으로 바꾸는게 더 간편하고 쌌다. 성형수술은 캐캐묵은 낡은 기법이었다.  
심장마비도 새 심장을 넣고 작동시키면 다시 살아났다. 80세 노인이 노화된 부분을 바꿈으로서 삼사십대 젊은이 모습으로 살았다. 그야말로 사고로 뇌가 박살나지 않는 한 죽음이란 없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자 지구촌 어디에서도 아기 낳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한  사람이 확실히 지구를 떠나야만 새로운 아기 탄생이 허용되었다. 아기를 낳을 수 있는 행운을 거머쥐기란 정말 쉽지 않았다. 인류 평화와 공영을 위한 업적이 20세기에 노벨상을 받을 만큼 인정받아야 대기자 순번에 오를 수 있었다. 인류 공영을 위해 탄생을 통제하는 막중한 임무를 담당하는 곳은 WPC(세계인구회의)였다. 그들은 사법권까지 거머쥔 절대 권력을 가지고 세계 구석구석에서 감시의 눈을 번득였다.

사람들은 남녀 구분 없이 대개 혼자 컴퓨터와 더불어 살았다. 컴퓨터를 통해 사이버 공간에서 일도 하고 주식이나 증권 투자를 했다. 쇼핑도 일백퍼센트 사이버 공간에서 이뤄졌다. 도무지 바깥에 나갈 일이 없어졌다. 가끔 의도적으로 산책하는 것 외에는. 혼자 살면서 사이버 공간에서 게임을 통해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 많았다. 20세기 말 등장할 때 '육성'이라고 하던 프로그램의 내용이 실제 아이를 낳아 기르는 형태로 발전했다. '러브스토리' '오 마이 러브' 같은 프로그램에 들어가면 골라 잡아 짝짓기를 할 수도 있었다. 섹스도 '쾌락'이나 '환희' '오르가슴' 따위 지능 제품을 구입하여 컴퓨터에 연결하면 실제보다 훨씬 황홀한 체험이 가능했다. 뜨거운 체온이며 교성, 오르가슴까지 완벽한 즐거움이 제공 되었다.
사실 관계보다 더 만족한 섹스였다. 애태우고 달래고 싸우고 미워하는 따위 피곤하고 구질구질한 ― 혹은 달콤한 ― 인간 세상 이야기가 도무지 필요없는 깨끗한 세계였다.

아이를 갖고 싶다는 희망을 클릭 하고 섹스를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컴퓨터에서 신호가 울린다. 임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신부 일기'나 '태교' 따위 프로그램에 옮겨 관리하고 시간 속도를 조절해 놓는다. 키워본 사람들 말이 속도는 실제보다 다섯배 정도가 알맞다고들 했다. 두 달 정도 태교 프로그램에서 키운 뒤 출산을 시키는 게 좋다는 것이다. 출산 후의 육성도 그 정도 속도면 지루하지 않다고 했다.

그렇게 하여 컴퓨터 속에서 아이가 태어나고 또 육성되는 것이다. 근자에는 키우는 데 그치지 않고 어느 정도 자라면 결혼을 시켜 독립해서 사는 프로그램도 개발되었다. 사위도 보고 며느리도 맞이하는 것인데, 게임 개발회사들은 그들이 독립적으로 가정을 이루고 살 수 있는 신제품 개발에 한창이었다. 그건 섬찍한 일이기도 했다.

22세기가 되면서 그렇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혼자 살았다. 혼자지만 대화 상대도 얼마든지 있고 성생활도 부족할 것이 없었다. 그렇게 만족하니 거리는 조용해졌고 범죄도 없어졌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 인간 세상의 범죄가 차츰차츰 사이버 공간으로 옮겨지는 것이었다. 강도 사기는 물론 사이버 아기 유괴, 살인도 벌어졌다. 그리고 보니 지구촌이란 것이 하느님들 세계에서 창조해 낸 사이버 공간이었을 지 모른다는 가설도 튀어나왔다. 신이 만든 사이버 공간이 인간의 세계가 되었다. 그 인간이 독립된 삶을 누렸다. 그리고 이제 인간이 만든 사이버 공간이 또 하나의 우주로 창조된다? 결코 웃어넘길 가설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혼자 살면서 사이버 공간에 나름대로 가정을 구축하고 살았다.  게임 방식으로 크는 아이 모습은 신기하게도 인간을 닮았다. 유저는 스타를
만들려고 갖은 지식과 양분을 다 주지만 아이는 저 스스로 좌절하기도 하고 어느 날 훌쩍 중이 되겠다고 산으로 가버리기도 했다. 기분 좀 풀어주려고 술 담배를 하게 하면 얼마 안 가 중독이 되어 폐인이 되거나 병자가 되었다. '나'를 따르기를 요구하면 오히려 유저를 경멸하고 미워하는 반항아가 되어 갔다. 품안에 안으려고 하면 더욱 멀리 달아나는 꼴이었다.  

결국 사이버 공간의 아이도 인간과 같은 아이였다. 그걸 생명체라고 해야할 지, 유령이라고 해야할 지는 아무도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내 멋대로 살게 놔두라는 거였다. 어쩜 그렇게 사람의 아이와 같은지…

그래도 가끔 고향 감정이 일 때면 사람과의 교감이 그리웠다. 불완전해도 인간적인 만남의 푸근함이 그리운 것이었다. 짜쾌도 그랬다. 대화방에서 만난 보보가 같은 오피스텔에 있음을 알고 옥상 공원에서 만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서로 부담없이 만나 고향감정이나 달래자는 의도였다. 보보도 좋아했다.
그런데 만나고보니 정이 발동했다. 특히 보보의 병약한 모습은 자쾌의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내 몸 다 검색해 봤어요. 미심쩍은 부분은 미련없이 교체했어요. 이상한 데 없어요. 그런데 기운이 없어요. 에너지 말이에요"

에너지 ― 즉 기(氣)의 관리는 아직 숙제였다. 짜쾌는 보보를 위하여 도움이 될만한 의학 지식을 죄다 모아봤다. 종합한 결과 기를 보충해 줄 수 있는 길은 결국 인간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인간과의 접촉을 통해서만 보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짜쾌는 결심했다. 원한다면 나로부터 기를 보충받도록 해주리라 결심했다.
"그래. 역시 인간에겐 인간이 필요한 거야."
평범한 말이 진리로 다가왔다. 짜쾌는 어서 빨리 보보를 만나 그 비장한 결심을 말해주고 싶었다. 이 메일로 편지를 띠웠으나 부재중이어서 전달이 안 됐다. 일주일을 기다려 겨우 공원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보보가 전 같지 않았던 것이다. 전혀 다른 사람, 아니 사람이 아닌 듯한 느낌을 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죠? 무슨 큰 일이?"
"하도 힘이 없어 복제를 택했어요"
보보는 서슴없이 말했다.
"복제라뇨? 전체 복제는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데?"
"본체를 파괴하는 조건에선 가능해요"
"뭐라고요? 그럼…"
그녀는 복제품이었다. 본체는 이미 파괴되고 없다고 했다. 짜쾌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 하고 그녀를 보았다. 그녀 모습이 사이버 공간의 인물로 다가왔다. 아니 짜쾌 자신이 사이버 공간 속으로 깊숙히 들어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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