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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돌아가셨다 해도 "골프 끝내고 갈게." 하는 조크가 생겨났을 정도로 재미있는 골프. 재미는 진지함과 함께 할 때 가치를 지닌다. 알고 보면 골프처럼 에티켓을 요구하는 스포츠도 없다. 호쾌한 드라이버와 그린에서의 긴장...골프는 신사들의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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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모던골프 1993년 3월호>




2월의 필드산책으로 발안CC를 찾게 된 것은 순전히 모던골프 취재부 김정희 부장 덕분이었다. 겨울 골프에 자신을 잃어 어디를 가면 좋을까를 취재부와 의논하니 첫마디에 발안CC를 추천하며 "남쪽지방 못지 않게 따뜻하고 쾌적하다"고 추천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가보자고 하니 이튿날 시간이 마련되었다. 김부장이 청을 넣어 특별히 회원대접까지 해준다니 출발전부터 기분이 참 좋았다.

지난해 8월 15일 개장한 발안 컨트리클럽은, 특히 인천 사는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던 골프장이었다. 서울 근교에서 볼 때 수원에 사는 골퍼들이 가장 행복하다면서 인천 사는 골퍼들의 행복도(?)는 한참 하위권인데, 발안CC가 생김으로써 그 행복도가 조금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인천은 이미 인구 2백만이 넘는 대도시로 국제CC 하나로는 수용이 불가능 할만큼 골퍼의 수도 증가한지 오래였다. 그래서 안양으로 수원으로 원정을 가지만 수인도로가 워낙 체증이 심해서, 오고 가는데 너무 지쳐 어떤 돌파구가 만들어져야만 하는 때에 발안CC가 등장한 것이었다. 한찬 건설중인 서해안 고속도로만 개통되면, 국제CC 못지 않게 가깝고 편하고 좋은 위치의 골프장이었다.

자연 발안CC 회원권은 인천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지금도 고속도로 진척 현황을 곁눈질로 살피며 호시탐탐 구입의 순간(?)을 찾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게 꾸밈없는 오늘의 이야기인 것이다.

나의 현 거주지가 인천인 만큼, 주위에 회원들도 많아 발안CC에 초대된 경우는 많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번번히 다른 스케줄과 겹쳐 한번도 가보지 못해 조만간 가 봐야지 하고 벼르던 참이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김부장의 추천이 있었던 것이니 바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발안으로 가는 길은 국도를 이용했다. 서울에서라면 경부 고속도로를 이용, 오산 IC에서 나와 발안으로 가지만, 인천에서는 반월을 지나 39번 국도를 이용해 갈 수 있었다. 차가 밀릴지 몰라 2시간 여유를 두고 출발했는데 천천히 갔음에도 불구하고 1시간 10분만에 닿을 수 있었다.

서해안 고속도로만 완성되면 이삼 십분 거리가 될것이라는게 실감됐다. 발안을 향하면서 발안 이야기를 모아보았다. 발안은 남양만과 아산만에 둘러싸인 반도(?)의 한 중간으로 넓게는 평택평야에 포함되는 평원인데, 광주산맥의 한가지(脈)가 안성천을 아래에 깔고 서남쪽으로 달려오며 문득문득, 여러 개의 작은 산을 만들고, 끊어졌다가는 또 엉거주춤 일어나 몇 무더기 야산을 만들어놓은, 마지막 트림지대였다. 산이라고는 하지만 제일 높은 것이 해발 1백미터도 안되니, 차라리 구릉이라 함이 옳겠는데, 발안CC 골프 코-스는 이 몇 무더기의 구릉지대를 절묘하게 요리해 만들어져 있었다.

총대지면적 32만평에 전장 6,346미터의 파 72 정규 18홀과, 퍼블릭 9홀. 국내 최대 규모의 연습장. 그리고 수영장 테니스장 게이트볼장 등 가족 놀이터가 여기 만들어진 것이다.

코스 내에는 20여개의 인공연못을 17개홀에 잘 어울리게 배치, 아기자기한 맛을 주며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는데, 연못들은 보이지 않는 수로를 통해 모두 연결되어 있어 물고기들이 수로를 따라 수시로 이동하기도하며, 맑고 깨끗한 물에 떠있는 물오리들의 모습도 평화로왔다.

업다운은 별로 없었다. 아마도 설계자들은 표고차가 최고 60미터도 안 되는 지형에서 그 60미터를 최대한 활용하려 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약간의 완만한 경사 외에는 Flat한 코스로 평가되면서 "정원에서 골프를 즐기듯 설계"되었다는 헤드카피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다른 면에서 발안CC만의 특징을 부각시키는 노력을 기울였다.

발안의 가장 이색적인 특징은 국내에서는 처음 시도된 18홀 원웨이 방식의 코스일 것이다. 서구의 골프장이 모두 9홀을 한 라운드로 하는 코스인 만큼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로, 인코스 나인과 아웃코스 아니이 합쳐 18홀을 이루는 게 불문율이었다.

그러나 운영방식에 있어서는 나인을 돌고 난 뒤에 충분한 휴식시간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실제로는 원웨이 방식이나 다름없는 진행을 하고 있는 게 우리 모순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가까운 이웃 일본만 가도 아웃코스를 돌고나면 최소한 40분내지 한시간 휴식을 취한 뒤 인코스를 돌게 하는데, 우리는 코스설계만 그렇게 하고 형식만 갖췄지 실제 운영은 어디라 할 것 없이 Continuous Course로 "빨리빨리"진행을 시키고 있으니 9홀 단위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저 골퍼들이 알아서 마음으로 구분하며 심성껏 다듬으란 말인가?" 그렇다면 차라리 발안CC의 18홀 원웨이 제도가 솔직해 보이고 돋보였다. 그늘집도 6홀 정도에 하나씩 배치하면 더 효율적일 테고…(돌아보니 실제 그늘집이 6홀에 하나씩 두 곳 있었다.)

발안CC의 상징은 아무래도 7홀 8홀에 둘러싸여 있는 1만평의 거대한 인공 호수일 것이다. "발안CC 센추럴파크"라 이름짓고 싶은 이 상징에는 15미터 높이로 치솟는 분수와 한쪽의 4단계 인공폭포가 웅장함을 더해준다.

또 100미터도 안 되는 숏홀이 있는가하면 국내 최장인 645야드 짜리 롱홀이 있어 발안 코스를 쉽다고 얕잡아 보는 시건방진 골퍼들을 혼내 주기도 한다. 그리고 또 롱홀의 연속이나 같은 지형, 동일한 느낌의 홀을 연속적으로 잇대어 놈으로써 재도전의 의욕을 만끽하게 해주는 설계라든가 스릴과 쾌감을 맛볼 수 있도록 벙커나 해저드를 적절히 배치한 것도 뛰어난 안목으로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돋보이는 건 페어웨이 한 중간을 지형에 따라 지그재그 주행하게끔 설계된 셀리캐디카트. 신통하게도 골퍼의 심리나 볼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있어 1캐디 4백이면서도 부족함 없는 서비스가 보장되고 있는 것이었다.

발안CC에는 회원 위주의 경영에 보다 신뢰감을 주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 게 분명하다. 첫 눈에 띠는 것은 클럽하우스가 보여주듯 검소한 경영과, 부킹시스템에서 보듯 정직한 경영이다.

최근 신설골프장들의 클럽하우스가 최고급 수입 대리석과 호화 샹들리에로 초호화 판이 되어가면서 위화감을 부추기고 있는데, 이러한 면적과다나 호화건축이 사치성 시설 아니냐는 시비를 불러일으키는 핵심 요소의 하나였다.

그런데 발안은 신설골프장이면서도 검소한 클럽하우스를 건설해 좋은 평을 들은 것이다. 물론 지금은 클럽하우스 연면적을 1천평 이하로 제한하고 있지만, 발안은 규제 이전에 건축했으면서도 연건평이 7백48평에 불과한 것이다.

3층인 이 클럽하우스중 골퍼들이 사용하는 평수는 2층 3백여평과 3층 90여평으로 총 4백여평 내외로 알뜰한 편이다. 클럽하우스 건축비용을 줄이는 대신 최신의 카트를 들여오게 되어 대고객 서비스 쪽으로 재투자 된 셈이랄까.

개장 당시 진행 간격을 7분으로 정한 것도 쾌적한 플레이를 위한 배려였다. 그러나 모든 진행이 비교적 매끄러운 관계로, 여유를 드려도 7분은 너무 넉넉했다. 그래서 보통의 다른 골프장처럼 6분으로 줄인 것도 발안CC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면 과찬일까.

언제나 도착순으로 돌 수 있는 9홀짜리 퍼블릭 코스가 옆에 있는 것도 발안을 찾는 골퍼들을 든든하게 하고, 비거리 240미터의 국내 최장 실외연습장도 자랑이라면 큰 자랑일 것이다.
또 하나 좋은 점은 인접한 다른 지방은 우천시에도 이곳은 날씨가 좋을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비나 눈이 적게 오며, 눈이 내려도 쌓일새없이 녹는 곳이 이곳이니, 눈·비가 플레이에 장애를 주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취재를 겸한 라운딩에 동반자는 필자의 직장 상상인 한경호 국장과 이 근 박사(외과의사), 그리고 인천 희망백화점에서 골프코너를 경영하는 성기상 사장이었다. 세분 다 골프를 시작한지 1년 남짓으로 아직 백파를 못한 상태였다.

앞에 말한 대로 발안CC하면 인천에선 인기가 있어 가보고 싶었던 차에 함께 동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천에서 떠날 때는 꽤 쌀쌀한 날씨였다. 그러나 발안에 도착하니 매화·목련이 피어날 만큼 포근한 겨울이었다. 날이 풀린 걸까. 이곳 지형상 따뜻한 것일까.

그러나 바람은 있었다. 항상 있는 건지, 그날 유난히 심했는지는 몇 번 다녀야 판단이 서겠지만, 내 느낌에는 항상 바람이 있을 것 같았고 캐디는 그날 바람이 유난히 심했다고 했다.

11시 12분 티업 시간이 되어 코스로 나가니 사방이 확 트인 지형이 우선 편안함을 주었다. 아직 2월이라 필드는 누런 황금색 일색이었지만 느낌이 좋았고, 잘 손질된 정원처럼 포근함을 주었다.

다소 쌀쌀했던 날씨가 발안에 들어서며 많이 풀렸구나 하며 반가와 했는데 알고 보니 해양성기후의 영향을 받아 원래 겨울이 따뜻한 고장이었다. 중부지방에 눈이 쌓여도 이 속에는 약간 비치다 곧 녹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겨울골프는 적지(適地)아닌가. 티그라운드 한쪽 표시판에 붙여 풍향계가 세워져 있는 것이 이채로왔다. 저건 왜 유난히 눈에 띠는 것일까. 바람이 좀 있다는 표시일까?

1번 홀은 미들홀이지만 300미터에 불과하니 서비스 홀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린은 약간 좌측으로 구부러져 있어 티에서 보이지 않았다. 페어웨이가 꽤 넓은 편이어서 불안감을 주는 구석이 전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핸디캡 18번 홀이었다.

"옳지. 이건 골퍼를 편안하게 맞아주는 설계자의 배려로군"
일행은 순번을 정하고 차례로 드라이버를 휘둘렀다. 드라이버가 제대로 맞으니 그린 사오십미터 앞에 모두 떨어졌다. 나는 파를 잡고 일행은 모두 보기를 했다.

2번 역시 숏홀이면서 서비스 홀이라는 인상을 풍겼다. 110미터로 그린이 너무나 가깝게 한눈에 들어왔다. 발안CC 광고문안에 "정원에서 골프를 즐기듯 설계"했다는 표현이 있었는데 정말 실감도 그랬다. 여성들에게 좋은 코스, 아니면 장년이나 노년층에게 적절한 코스거나, 혹은 초보자에게 부담 없는 코스라 해도 무리가 아닐 것같은 정도로 쉽게 느껴졌다.
캐디에게 물으니 빙긋 웃는다.

"몇 홀 더 지나보세요, 결코 만만하지 않을걸요"
그러나 아직은 만만했다. 맞바람이 심상치 않게 불었지만, 그러나 이 짧은 거리에서 바람을 타면 얼마나 타겠느냐, 며 가볍게 여기고 9번 아이언을 휘둘렀다. 결과는 80미터도 채 못날라갔고 투온 쓰리퍼팅으로 더블보기를 범하고 말았다.

3번 홀에 서니 오르막으로 조금 어렵게 느껴졌다. 역시 그린은 조금 좌측에 가려져 있었고 뒷바람이었다. 거리는 300미터로 1번 홀과 같았는데 더 멀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건 티에서의 느낌일 뿐, 세컨샷의 위치에 서니 또 편안해졌다. 골프력 2, 3년 정도면 가볍게 파를 잡을 수 있는 홀이랄까. 물론 나도 파를 했다.

4번 홀 티에 서니 오른편으로 그림 같은 마을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전형적인 한국의 농촌풍경인데 높은 산이 없을 뿐이었다. 4번 홀은 그 마을을 넓게 둘러싸고 있는 야산능산의 반대편 부분에 있었다.

안내판에 446미터로 표시되어 있었다. 롱홀인가 보니 미들홀이었다. 300미터 짜리 미들홀을 거쳐오면서 싱겁게 여겼던 마음이 약간 긴장되었다. 캐디는 핸디캡 2번 홀임을 강조했다.

바람은 계속 뒷바람이었다. 250미터 전방쯤 우측 숲에서 삐져나온 소나무가 너댓그루 있는 것이 방향목(方向木)이었다. 힘껏 휘두르니 참 멋지게 날랐다. 뒷바람 덕분일까? 아무튼 기분은 좋았다. 동반자들의 샷도 훌륭했다. 모두 시원하게 날렸는데 이근 박사만 "나도!" 하다가 "풀석"하고 말았다. 4번 홀에선 보기를 했는데, 보기면 훌륭한 홀로 여겨졌다.

5번 홀로 가는데 문득 셀리 캐디카트가 돋보였다. 캐디는 한 명이었지만 아무도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그것은 무엇보다 셀리 캐디카트가 페어웨이 한 중간을 가로질러 주행하게끔 설계되어 있기 때문일 듯 한데 유심히 살펴보니 골퍼의 심리를 아주 잘 파악하여, 볼의 흐름을 앞지르는 설계로 보였다. 초보자의 경우라도 클럽을 몇 개씩 들고 페어웨이를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뛰는 일은 드물게 되어 있었다. 설계자의 지혜로움이 전 코스에 숨어있었다.

5번 홀은 360미터의 미들홀. 팅그라운드에 서니 왼쪽에 연못이 보이는데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됐다. 거리는 180미터 전방이라고 했다. 클럽을 선택하기가 어려웠다. 바람은 여전히 뒷바람이었다. 그러나 드라이버만 어느 정도 맞아주면 역시 파가 무난한 홀이었다.

6번 홀은 그림 같은 홀이 아니라 한 폭의 그림 그 자체였다. 백티에서 147미터라지만 우리의 거리는 90미터였다. 피칭이 얼마만큼 정교한가. 또 자신 있는가를 시험해보는 홀이라 할 수 있지만, 흔히 만만하게 보이는 홀에서 낭패를 보는 게 다반사라면 여기서도 그런 일이 비일비재할까.

아니나 다를까. 이 장난감 같은 홀에서 아무도 파를 못했다. 나는 보기를 했고 이근 박사는 양파를 했다. 아쉽고 속이 상했지만 코스가 원망되지는 않았다. 할 수 있다면 얼른 뛰어가 다시 휘둘러보고 싶은, 그런 충동을 강하게 느낄 뿐… 허허 참. 요걸!

6번 홀을 지나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니 그늘집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6홀이 지났는가 싶었다. 발안의 그늘집은 두곳뿐이라고 했다. 9홀 단위의 라운드가 아닌 18홀 단위 설계여서 6홀마다 그늘집이 있다는 것이다. 11시 티업으로, 점심이 애매했던 우리는 우동을 먹었다.

7번 홀에 서니 발안이 자랑하는 웅장함이 나타났다. 거대한 연못. 4단으로 흘러내리는 폭포. 15미터나 위로 치솟는 분수. 이 겨울만 지나면 상상만으로도 대단한 장관일게 분명했다. 철철 흐르는 물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 했다.

그런 메인 관장이었고 발안CC를 상징하는 센추럴 파크라해도 좋을 듯 했다. 이어지는 코스는 7번과 8번으로 이 1만평이나 되는 거대한 연못을 가운데에 두고 7번 미들홀이 상현달 모양으로 3분의 2를 돌고나면 8번 롱홀이 이어받아 연못을 넉넉하게 감싸며 쭈욱 뻗어 나갔다.

7번은 419미터였다. 하지만 상현달 형태의 굽은 코스여서 직선거리로 치면 300미터 내외였다. 드라이버가 240미터만 자신 있다면 연못을 가로지르는 시도를 해볼 만 했다. 나는 힘껏 휘둘렀다. 그러자 훅이 되면서 깨끗이 연못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캐디는 나가서 치는게 어떠냐고 했다. 하지만 나는 티에서 재 시도했다. 멋지게 날아간 볼은 간신히 연못을 넘었다. 1타를 공으로 먹은 셈이지만 기분은 이게 더 좋았다. 덕분에 7번 홀에서는 더블보기를 하고 말았다. 두 번째 더블보기라고 생각하자 이래선 안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8번 홀에 서니 "평화"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살랑거리며 신경을 건드리던 바람이 이곳만은 잔잔했다. 오른편에 완만한 구릉이 있어 안정감을 더 주었다. 아아, 잔디가 푸른 계절이면 얼마나 환상적일까. 어서 빨리 4월이 되어 다시 오고 싶었고, 머리 속에서는 이미 4월의 풍경이 전개되고 있었다.

8홀은 550미터의 롱홀이었다. 거대한 연못이 알을 낳은 듯 그린 가까이 조그만 연못이 또 하나 있어 신경을 쓰게 했다. 하지만 대체로 무난하지 않을까. 동반자들은 모두 트리풀을 했는데 나는 파를 잡았다.

웅장하고 화려한 발안CC 센추럴 파크를 지나 능선에 만들어진 9번 홀에 서니 전방고지에 선 듯 적막감 황량감이 몰려왔다. 야산 능선이지만 정상인만큼 바람이 제법 부는데 조절하기 매우 까다로운 방향이었다. 매홀 티그라운드에 풍향계를 설치한 친절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캐디에게 언제나 이렇게 바람이 부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젓는다. 바람이 좀 있는 편이지만 오늘은 유난히 심하다는 것이었다.

9번 홀은 "<"모양으로 기억자 같다할까 니은자 같다 할까. 처음 경험하는 미묘한 코스였다. 338미터의 미들홀이지만 6번 아이언과 피칭으로 투온이 가능했다. 물론 언덕을 넘겨 가로질러 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잘못하여 지나치게 질러 치면 언덕 넘어 워터해저드에 빠지게 되니 가늠을 잘 해야 했다.

여기서도 파를 잡으니 9홀 합계 41타가 되었다. 괜찮은 성적인데 기분은 잘친 것 같지가 않았다. 코스가 완만하고 난이도가 적기 때문일까?
10번 홀로 향하는 발길은 이상하게도 허전하다. 9홀 단위로 도는 습관이 어느새 몸에 밴 탓일까. 아무런 맺고 끊음의 변화감 없이 10번 홀로 이어지는 게 좀 그랬다.

따지고 보면 형식일 뿐 국내코스는 대개 18홀 라운딩 시스템인 만큼 발안이 유별난 것은 아니었다. 인코스 아웃코스를 구분하는 것은 나인 단위로 충분한 휴식을 갖는 시스템을 말하는데, 우리는 어느 곳도 그런 운영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인코스 아웃코스가 습관 되었다니… 허허 참 습관이란 무섭군.

10번 티에 서니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맞바람이 본격적으로 불어대는 것 같았다. 여기 오기까지는 대개 뒷바람이었는데 9번 홀에서 애매한 방향이더니 10번 홀부터는 맞바람인 셈이었다. 춥지는 않은데 바람은 점점 심하게 느껴졌다. 여기만 지나면 괜찮겠지 하는 기대로 참고 쳐, 384미터 미들홀에서 간신히 파를 했다. 20미터 롱퍼팅이 들어가 주어서.

들뜬 기분으로 11번 홀로 가니 바람은 더 심했다. 날씨 탓인지 지형 탓인지 분간하기는 어려웠다. 200미터의 제법 긴 숏홀. 가운데는 큰 연못이 입을 벌리고 있는데 심한 맞바람… 클럽을 선택하기도 어려웠고 심적 부담도 컸다. 클리크를 뽑아 휘둘렀다. 맞바람을 의식해 힘껏 휘둘렀는데 바람이 생각보다 강했다. 잘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150미터도 나가지 못했다.

스코어는 여기서 무너졌다. 파3 홀에서 무려 7타를 쳤다. 어이가 없었다. 허허. 하며 걷는 길 우측경계 너머에 퇴비를 준 밭이 있어 농촌냄새를 물씬 풍기니 일시 고향감정이 일기도 했다. 착잡한 기분으로 12번 330미터 미들홀을 담담히 돌았다. 역시 맞바람이 심해 힘들게 보기를 했다. 어디 그늘집이 있다고 했었지.

발안의 특징은 바로 이런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퍼의 심리를 얄밉게 잘 파악해 적당히 분노도 주고 위안도 주며 리드하고 있지 않은가. 따끈한 차를 한 잔 마시고 13번 홀에 서니 다시 "마음의 평화"가 왔다. 지형상 뒷바람이었다. 기억자형, 니은자 형으로 심하게 휘어진 홀의 행진도 끝난 것 같고, 드넓게 펼쳐진 광장 같은 페어웨이… 문득 짐작되는 게 있어 캐디에게 묻는다.

"여기가 롱게스트 가리는 홀?"
"네. 롱게스트 홀 일뿐 아니라 국내 최장의 롱홀이에요. 610미터 에요"
캐디는 명랑하게 대답했다.
일행은 모두 자신감이 재충전 된 듯 힘찬 스윙을 했다.
다음 홀에 닿아 안내판을 보니 또 롱홀이었다. 의아해서 확인하니 연속 롱홀이 맞았다. 이것도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바람은 다시 맞바람인데 더욱 심해져서 스윙에 장애를 느낄 정도였다.

15번 홀은 호수를 건너 치는 180미터의 숏홀. 아름답긴 했지만 꾸민 흔적이 역력했다. 잔디도 컨디션은 좋지만 아직 뿌리를 충분히 내리지는 못한 것 같고.

16번 홀에서는 숲을 건너 치는 게 해봄직한 도전이었다 캐디는 이미 나를 "싱글"이라 부르며 "싱글은 가로질러 쳐야죠"하며 부추긴다. 나를 믿어주는 캐디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성공해야 했다. 한껏 힘을 빼고 휘두르자 캐디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내가 멋지게 성공하니, 아직 비기너인 성기상 사장이 비장한 미소를 흘린다. 저도 넘겨보겠다는 것이 분명하다.

과연, 과연. 하고 지켜보는데 정말 멋진 샷이 나왔다. 그린 앞 벙커에 빠졌지만 정말 훌륭한 드라이버 샷이었다. 그는 대성할 재목이었다.

17번홀은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음을 상기시켜주는 280미터의 까다로운 미들홀 이었다. 앞에 연못이 가로놓여 있는데 220미터 이상의 장타만이 넘길수 있다고 했다. 아니면 스푼이나 클리크, 혹은 아이언으로 편하게 나누어 쳐야했다. 나는 여기서도 무난히 넘겼다. 동반들은 모두 짧게 짧게 이어 쳤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동반들은 모두 파를 하고 나만 쓰리퍼터로 보기를 했다.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한국장의 퍼팅이 일품이었다. 돌이켜보면 비기너에게도 쾌감을 주는, 놀라운 샷이나 퍼팅이 몇 차례 있기 마련인데 17번홀 한국장의 퍼팅이 그런 하나였다. 홀컵주위를 한바퀴 돌며 들어갔는데 "국장님의 엉덩이"도 따라 돌아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어느덧 18홀이었다. 약간 피곤한 느낌이 드는 것은 바람에 시달린 탓 같았다. 5백미터짜리 마지막 롱홀을 앞에 두고 스코어를 계산하니 한국장과 성사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두 분 공히, 여기서 버디만 하면 99타로 대망의 백파가 실현되는 것이었다.

"옳지"
두 분은 이를 악물었고 나와 이근 박사는 잘 해보라고 격려했다. 그러나 한국장은 더블보기를 하고, 성사장은 보기를 범해 백파의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하긴 파를 잡기도 아직 서툰데 "버디"라니.

라운딩을 끝내고 출발점에 돌아와 코스를 두루두루 둘러봤다. 아름답고 따뜻하고 편안한 코-스 어서 빨리 봄이 오고 필드에 녹색기운이 넘쳤으면… 출발의 원점에 돌아왔을 땐 그렇게 모질게 불어대던 바람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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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골프장 산책 산책 - 신원CC- 이성의 멋 넘치는 신흥 명문 반취 2002.02.02 16567
47 골프장 산책 산책 - 은화삼CC- 여성적이면서 도전적인 절묘한 코스 반취 2002.02.02 16405
46 골프장 산책 산책 - 동진CC-최상의 플레이를 약속하는 전략적 코스 반취 2002.02.02 16216
45 골프장 산책 산책 - 엑스포CC-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비경의 코스 반취 2002.02.02 15954
44 골프장 산책 산책 - 신라CC-자연 경관 속에 담은 유머와 해학 반취 2002.02.02 15716
43 골프장 산책 산책 - 안성CC-품위와 여유, 가치를 지닌 국제적 수준의 챔피언코스 반취 2002.02.02 15517
42 골프장 산책 산책 - 충주CC-한국의 수려한 미 모아놓은 아기자기한 골프장 반취 2002.02.02 15112
41 골프한담 골프한담 - 나가사끼 해변의 멋진 골프장들 반취 2002.02.02 14997
40 골프장 산책 산책 - 춘천CC- 맑고 시원한 프라이비트 코스 반취 2002.02.02 14916
39 골프장 산책 산책 - 서서울CC-수려한 구릉지에 펼쳐진 천변만화의 18홀 반취 2002.02.02 14266
38 골프장 산책 산책 - 스릴만점의 코스. 사이판 코랄 오션 포인트 리조트 클럽 반취 2002.02.02 13740
37 골프장 산책 산책 - 클럽700CC-풍요한 고장에 들어선 선진 가든형 골프장 반취 2002.02.02 13715
36 골프장 산책 산책 - 88CC- 경탄이 절로 나오는 정감 넘치는 코스 반취 2002.02.02 13498
35 골프장 산책 산책 - 프라자CC - 신중한 골퍼들의 노련미 실험무대 반취 2002.02.02 13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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