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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돌아가셨다 해도 "골프 끝내고 갈게." 하는 조크가 생겨났을 정도로 재미있는 골프. 재미는 진지함과 함께 할 때 가치를 지닌다. 알고 보면 골프처럼 에티켓을 요구하는 스포츠도 없다. 호쾌한 드라이버와 그린에서의 긴장...골프는 신사들의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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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골프 1997년 7월호

회원권은 신사의 애첩-


■힘 발휘하기 시작한 회원권

바야흐로 골프의 황금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골프를 부인하던 문민 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시대에는 감히 생각지 못한 일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다. 심야프로였던 SBS 금요골프가 용기 있어 보이던 때는 옛날이 되고 있다. 공영방송을 대표하는 KBS 1채널이 한국에서 벌어진 국제골프대회를 연일 생중계하고 신문은 신문대로 현장감 있는 사진과 함께 대서 특필하고 있다. 스포츠 신문이나 경제신문이 아니다. 주요일간지 스포츠란을 골프가 프로야구만큼 차지하는 날이 흔해진 것이다.

KBS를 움직인 것은 MBC라고 볼 수 있다. 국내에서 벌어진 국제골프대회 생중계를 MBC가 먼저 시도했기 때문이다. 골프인구 확산과 시청률의 상관관계를 의식한 MBC의 실험적 기획은 큰 호평을 받았고 기대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KBS가 어찌 눈치만 볼 것인가. 한보사건, 대통령의 차남 사건, 대선 자금 시비가 터지면서 문민정부의 도덕성이 도마 위에 오르고 사실상 권위를 상실하자, 때를 놓칠세라 잔뜩 웅크리고 있던 골프 중흥론이 고개를 쳐들었고, 진일보의 기술과 정비로 시청률 경쟁을 시작해버린 것이다. 마스터즈 대회나 US오픈 같은 메이저 대회 소식이 공영방송망을 통해 금년처럼 생생하게, 중계된 일은 일찍이 없었다.

재미있는 일은 이에 그친 것이 아니다. 대선 주자들이 저마나 TV 공개토론 석상에서 골프를 예찬하기 시작한 것이다. JP야 원래 골프 예찬론자였지만 DJ까지 여기 가세한 것은 그가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닌가 싶다.

이쯤 되니 골프장은 연일 만원사례다. 골프의 황금시대는 도래하는 중일지 모르지만 골프장은 이미 황금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소위 "권력의 힘"도 요즘 같은 레임덕 시대에는 통하지 않는다. 금력도 한계가 있다. 가장 강한 힘은 회원권이 차지하게 되었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골프와 골프장의 기본질서는 빠르게 정상화의 길로 나아갈 것이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시작된 골프계의 수난은 역사이래 가장 심한 것이었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라고만 믿고 품에 안았다가 고비를 이겨내지 못해 살점을 뜯기며 놓쳐버린 이들에게 오늘의 분위기는 기쁨이 아니라 통곡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오호 애재라, 세월이 어찌 이리 가볍게 인생을 기만하는가."

■애첩의 가치를 어찌 돈으로 환산할까

골프의 황금시대에 회원권은 애첩(愛妾)과 같다. 가정 파탄을 초래하는 유치한 사랑 행각이 아니라 인간완성을 향해 가는 길의 조력자다. 골프장이란 여성과 같아 어디에 어떻게 만들어져도 완성되면 한결같이 저마다의 개성과 매력으로 골퍼의 시선을 끌고 정복욕을 자극한다. 업다운이 심하면 야성미, 조경이 뛰어나면 지성미, 플래트하여 편안함을 주면 안정미, 있는 그대로의 지형을 이용한 곳이면 자연미, 예술성을 살린 조형미, 연륜을 느끼게 하는 전통미… 저마다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손짓하는 것이다.

잔디 상태로도 유형을 구별할 수 있다. 멀리서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가까이 가보면 페어웨이가 맨땅이나 다름없이 재미를 느낄 수 없는 백미터 미인형, 피부가 들뜬 것처럼 잔디가 들떠 푸석푸석한 병든 창녀형, 찍으면 채를 놓아주지 않는 흡입형, 만만해 보이는데 애만 태울 뿐 단단히 거부하는 양처형, 집안 물건 훔쳐 가는 도둑에게 나는 왜 건드리지 않고 가느냐는 헤픈형도 있다.

애첩이지만 골프장은 일부일처 하는 여성이 아니다. 뭇사내를 받아들이고 또 거느리는 일처다부형이다. 보통 6, 7분에 한 번씩 깃발이 뽑히고 새로 꽂힌다. 하루종일 보통 시달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피곤한 가운데도 반기는 사내가 있다. 매너와 에티켓을 지키는 형이다. 남자가 아닌 신사를 좋아하는 것이 골프장이라는 여성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눈을 감고 생각해보자. 바람 피울 때 하는 정성과 매너로 부인을 대하면 바람날 여자가 백에 하난들 있을까.

은행가나 장사꾼처럼 이자 따지고 실익 따지는 사람은 신사가 될 수 없다. 회원권이 1억이니, 월 이자가 1백만 원쯤 될 테고, 그 1백만 원이면 비지터 자격으로도 여섯 번 정도 골프할 수 있는 데  굳이 회원권을 살 필요 있느냐, 나는 그렇게 자주 골프할 시간도 없다. 부킹 못하면 어떠냐, 따라다니면 되지…하고 계산기 두드리며 요리조리 따지는 사람은 애첩을 거느릴 자격이 없다고 봐야 한다. 애첩을 어찌 돈으로 환산한단 말인가.

다만 중요한 것은 보고싶을 때 볼 수 있어야 하고, 하고 싶을 때(?)할 수 있어야 한다. 눈앞에서 엉덩이 흔들며 투정부리는 것은 애교로 보이지만, 얼굴조차 보기 힘들어지면 애첩이 될 수 없다. 회원권이 있으나 부킹이 안 된다면 골퍼는 다른 애첩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그린의 독립성 돋보이는 신라 CC

회원권 3차 분양이 한창인 신라컨트리클럽을 찾았다. 까치가 반갑게 맞아주는 골프장이다. 한 구좌에 1억 8천만 원이라면 다소 비싼 감이 있으나 애첩의 조건을 훌륭하게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한번 만나 볼만한 대상이다. 평생 그린피를 안내며 언제든지 부킹이 보장되고, 하와이에 건설중인 자매 골프장도 있어 "내가 싫증날 때면 가끔 바람도 피우도록"배려하고 있는 속 넓은 애첩이다. 또 직계가족 중 1인을 준회원으로 예우하고 주중 부킹에 확실한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골프장의 경우 건설 중에 회원을 모집하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신라CC는 100% 조성공사를 마무리짓고 회원권을 분양하고 있다. 미모와 지성에 자신감까지 감춘 것이요, 겸하여 재력도 든든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코스는 전문 디자이너 임상하 씨, 그린은 유머와 해학을 담는 것으로 유명한 일본인 오우쿠버 씨가 맡아 완성하였는데 세계에서 유명한 골프장의 장점을 모으는 데까지 모았다고 한다. 여주군 북내면 덕산리 소달산 중턱에 27홀 규모로 들어섰는데 첫인상이 과연 자연경관과 지형을 최대한 활용한 듯 했다.

우선은 티에서 그린을 볼 수 있어, 인쇄물이나 안내판에 의존하지 않고 작전을 세울 수 있게 한 설계가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27홀 중 22개 홀이 티에서 그린을 볼 수 있었다. 그린은 대개 3백평쯤 되는 원그린 시스템인데 잔디 질이 좋아 흐름이 빠르고 언듀레이션이 절묘하여 핀이 위치에 따라 퍼팅 감이 달라지곤 했다. 1캐디 4백의 충전식 카트는 페어웨이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 역시 골퍼를 골프에만 전념토록 하는데 일조 하는 시스템이었다.

전망이 괜찮은 클럽하우스에서 전의를 다지며 코스를 둘러보니 연못과 계곡, 우묵한 곳(Hollow), 벙커 따위 장애물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아 보였다. 업다운도 만만찮아 보였다. 과연 표고가 높은 홀은 300m쯤, 낮은 곳은 110m쯤 된다는 귀뜸이었다. 그러나 막상 코스를 돌 때는 업다운을 느낄 수 없었다. 한 홀씩 떼어낼 경우 코스의 업다운은 오르막의 경우 4% 이내, 내리막의 경우 10% 이내여서 오히려 평탄한 느낌이었다.

특별히 신선해 보이는 것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27개 전 홀이 남에서 북, 또는 북에서 남으로 공략토록 되어 있어 태양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점이고, 또 하나는 그린의 독립성이었다. 티에서 그린까지 평탄하게 이어진 홀이 없는 것이다. 중간에 반드시 연못이라든가 계곡, 아니면 Hollow, Bunker라도 있어 그린의 독립성을 지켜주고 있었다.

아일랜드 그린 앞에만 서면 골퍼들이 심호흡을 하며 특별한 매력을 느끼듯, 그린의 독립성은 신중하고 정확한 샷을 요구하기에 진지한 골퍼들로부터 각광받는 설계이다. 방향과 거리가 정확해야 함으로 방심은 절대 금물인 것이다. 신라CC에서와 같은 내륙에서 그린의 독립성은 자연지형을 이용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설계였다. 신라CC는 클럽하우스 앞의 원래 계곡이었던 곳에 코스를 배치하면서 여러개의 연못을 만들고 폭포와 내(Creek)로 연결하여 그린의 독립성과 함께 한층 아름다운 경관조성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래, 다음에는 너를 더 진지하게 대해 줄게

18홀 평균 길이 6,900야드 파72의 신라CC 27홀은 동코스 남코스 서코스로 나뉘어 있었다. 동코스는 아름답고 아기자기하게 만들어졌고, 남코스는 변화가 많아 도전욕을 다듬도록 되어있었으며, 서코스는 여성적이랄까 편안하고 부드러웠다.

필자에게는 남·동이 주어졌다. 남코스는 신라CC의 자랑이자 가장 거친 코스라고 했다. 말하자면 야성미와 조형미가 넘치는 코스였다. 과연 1번 홀부터 티에서 연못을 건너 치는 약간 오르막이 등장했다. 오르막의 382야드, 파4는 아마추어에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2번홀은 왼쪽으로 굽은 도그렉 홀로 506야드 파5. 드라이버만 잘 맞으면 투온이 가능하다. 티에서 그린의 위치를 볼 수 없는 다섯 개 홀 중 하나인데 구조만 숙지하면 로우핸디 아마추어는 버디가 무난했다.

3번 홀은 오른쪽으로 굽은 339야드 파4. 거리가 짧은데서 짐작할 수 있듯 페어웨이 1P지점 양쪽에 해저드가 있어 정확한 샷을 요구했다. 드라이버로 칠까 아이언을 잡을까 망설여지는 대표적인 케이스. 4번 홀은 448야드 파4홀이니 거리가 무척 길다. 장타를 자랑 말고 있는 힘껏 휘둘러 멀리 보내는 티샷이 필요한데 그린 주변이 좁아 어프로치도 신중해야 한다. 욕심은 금물이란 경국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보기 작전이 만족의 지름길.

5번 홀은 다시 연못을 건너 쳐야 한다. 180야드 파3. 하도 경관이 아름다워 딴 생각을 하기 쉽다. 아름다움에는 반드시 가시가 있다. 5번 홀은 아일랜드 그린 이상으로 냉정하고 정확한 샷을 요구한다. 6번 홀에 이르면 넓은 페어웨이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러나 편해 보이는 것이 나중까지 편했던 적은 몇 차례나 있었던가. 마음놓고 갈기니 볼은 그넓은 페어웨이를 마다하고 우측으로 휘어진다. 오오 그만 그만, 우측은 OB야 OB…

남코스는 마지막 홀까지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8번은 203야드 파3홀이어서 클럽선택을 망설여야 했다. 드라이버나 스푼을 잡으면 오버되기 쉽고, 아이언으로는 모자랄 것 같다. 9번홀 역시 그린 옆에 연못이 붙어있어 신중에 신중을 더해야 했다. 티샷을 페어웨이 우측에 제대로 갖다 놓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어프로치가 매우 어려운 홀이었다.

남코스에서 버디 하나 잡고 41타를 쳤다. 야성미 넘치는 거친 코스 첫 산책에서 41타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괜찮은 점수였다. 동코스는 아지자기하지만 무난한 코스라 했으니 잘하면 모처럼 만에 7자를 그려보지 않을까, 저절로 미소를 짓게되고 엉뚱한 기대가 피어났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런 기대가 문제였다. 동코스에서는 무려 46타를 기록, 87타로 밀려났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탓이었다. 긴장을 푼 탓이기도 했다.

육칠년전인가, 장애물 많고, 좁고, 업다운이 심해 어려운 코스를 미워하며 기피했던 때 일이 떠올랐다. 온 국민을 프로골퍼로 만들 일 있냐며 거칠게 필주를 가했었다. 운동이나 산책을 겸해 가볍게 골프를 즐기려는 사람을 골프장 설계자들이 우롱하고 있다고 비난을 퍼부었었다. 그때는 골프의 진수를 왜곡하고 있었던 때였다.

이번 신라CC 산책은 또 한번의 교훈을 얻은 셈이었다. 난이도가 높아 신중을 기하면 결과도 좋고 기분도 상쾌했다. 정복의 쾌감, 만족감, 성취감은 정말 기분 좋은 것 아닌가. 아직도 고치지 못한 것은 편안해 보이는 코스에서 '이까짓 것' 하고 대충 치는 버릇이다. 드라이버를 미스하면 어떠냐, 세컨샷에서 바로잡으면 되지 하는 식으로 긴장을 풀어버리면 보기, 더블보기의 쓴잔을 수 없이 맛보게 된다. '이게 정말'하고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하면 그날의 골프는 이미 망가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왜 아직도 이 모양일까…"
코스가 한눈에 보이는 클럽하우스에서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며 후회하지만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실패한 동코스의 아기자기함이, 귀엽게 손님을 거부한 애첩의 모습으로 다가오자 필자는 약속을 던졌다.

"그래, 다음에는 너를 야성미의 남코스보다 더 진지하게 대해 줄게, 그때도 나를 거부할 순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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