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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돌아가셨다 해도 "골프 끝내고 갈게." 하는 조크가 생겨났을 정도로 재미있는 골프. 재미는 진지함과 함께 할 때 가치를 지닌다. 알고 보면 골프처럼 에티켓을 요구하는 스포츠도 없다. 호쾌한 드라이버와 그린에서의 긴장...골프는 신사들의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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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8월호 40회 한국아마추어 골프선수권 참전기

 

魅惑의 골프 三昧境 맛 본 88 서코스

 

골프 삼매경(三昧境)

 

흔히 골프는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한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야 되는 외로운 게임이기 때문이다. 잘 다듬어진 골프장을 그냥 쳐다보면 마냥 아름답고 평화롭지만, 골프를 치러 나서면 완전히 전쟁터로 변해서 머리를 살짝 들어도 안되고 한눈을 팔거나 딴 생각해도 안되고 한눈을 팔거나 딴 생각해도 안되고, 조금만 힘이 들어가도 여지없이 패배자의 낙인이 찍히고 만다.

칠 차례를 기다리면서 이미 자기가 잘못 쳐서 웃음거리가 되고 망신당하는 광경을 그려보며 긴장하기도 한다. 벼르던 동반들과의 일전일 때도 그러한데 권위 있는 대회에 처녀 출전하여 티 오프를 기다리는 심정은 오죽할까.

문득 이렇게 스트레스를 사서 받는 골프는 왜 치나 하는 의문이 든다. 차곡차곡 스트레스가 쌓여 끝내 화병을 얻고 드러눕게 될지도 모르는 이 요사스런 운동을.

가까운 사람들의 경우 건강 때문에, 비즈니스 때문에, 남이 하니까 등등 시작의 동기가 여러 가지이다. 하나 그것은 시작의 동기일 뿐, 일단 골프의 세계에 들어서고 난 후 열심도가 가해지는 것은 성취 욕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 아닐까.

사람들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것이어서 에버리지 90의 골퍼는 80으로 내려오려하고 80에서는 70대를 마크하려 들고, 70대의 플레이어는 60대의 레코드를 이루려고 혼신의 힘을 다한다. 동호인 모임에서 몇 번 연속 우승하다보면 기고만장해져서 보다 규모 있는 클럽의 챔피언에 도전하고 나아가 권위 있는 대회를 기웃거리게 된다.

그런데 또한 사람에게는, 어떤 일을 집념 있게 하려고 하거나 또 배우려 할 때 그것을 방해하는 힘이 자신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기묘한 현상이 있다. 골프에서도 미스샷의 원인을 분석해보면, 연습부족이나 기타 이유보다 마음의 흔들림때문일 경우가 더 많다. 공이 잘 맞을까 하는 자기자신에 대한 의심. 불안, 필요 이상의 긴장, 집중력의 부족 등등이 내부로부터 자기를 방해하는 기묘한 힘인 것이다. 골프에 있어서 이른바 핸디 귀신이다.

한쪽에선 핸디 귀신이, 다른 한쪽에선 극복하려는 의지가 한치 양보 없이 맞물려 서로 견제하고 충고하며 뒤엉켜 향상되는 것이 골프라면, 골프는 체육이기에 앞서 인간 내면의 성숙을 도모하는 훌륭한 수련이 아닐까.

그렇다면 선()에 선정삼매경(禪定三昧境)이 있듯 골프에는 골프삼매경이 있을 수 있다. 오직 한가지에 마음을 모으는 것. 고요함과 엄숙함. 냉정한 자기성찰. 정지된 볼을 발 앞에 놓고 일체의 사념 없이 집중함으로써, 감각과 인식으로 조화되는 우리들 정신과 물질의 당체인 존재는, 삼매에 의해 하나가 되고 개오(開吾)의 깊은 경계(境界)에 도달하게 된다.

아아, 건강에도 좋고 정신수련에도 이렇게 좋은 골프가 왜 한국에서는 따가운 눈총에 시달려야 하나.

어느덧 골프 삼매경에 빠져든 필자는 KGA가 주관하는 제40회 한국 아마추어골프 선수권대회 미드아마추어(중년부)부에 처녀 출전했다.

 

가장 역사 깊은 대회

올해로 40회를 맞는 한국아마추어 골프 선수권대회는 국내에서는 가장 오랜 연륜을 자랑한다.

6.25전쟁의 폐허 속에서 군자리 골프장(서울CC)이 복구된 것을 기념하여 54년 첫 경기를 가진 이래 한 해도 거름 없이 올해 40회 대회를 맞는 것이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골프를 잘 이해하고 있었고, 따라서 아마추어골퍼의 예지와 사기를 높여주기 위하여 우승자에게 대통령배를 직접 시상했다. 한국 선수 13명과 외국인선수 3명이 참가한 이 최초의 대회에선 주한 유솜 소속의 매스카(THOMAS L METSKER) 선수가 우승, 경무대에서 대통령배를 받았다.

1회 대회부터 68년의 15회 대회까지는 줄곧 서울CC에서, 매치플레이 방식으로 경기를 가졌으나, 국내 골프 코-스가 여러 곳에 증설됨에 따라, 16회 대회부터는 스트로크 방식으로 바뀌었고 장소도 옮겨가면서 대회를 치뤘다. 해를 거듭할수록 내용이 충실해지니 미국 일본 대만 등지의 외국인 선수들도 출전했고 재일 교포 재미교포선수들도 대거 참가해 왔다. 말하자면 대통령배 한국오픈 투어 아마추어골프 선수권 대회였다고나 할까. 물론 지금도 핸디캡 5 이내의 아마추어 골퍼라면 국적 관계없이 참가할 수 있게끔 문호는 열려있지만 예전처럼 외국선수의 출전은 많지 않다. 아시안 투어를 비롯, 각종 오픈경기가 년중 계속 이어질 정도로 많아졌기 때문이리라.

그 동안의 우승 기록을 보면, 재일 교포 김영창씨가 13, 14, 15회 대회를 3연패하는 위업을 남겼고, 재미교포 김병훈씨는 20, 26, 27회 등 세 번 우승컵을 안았다. 외국인 우승은 1, 4, 5, 22, 36회 등 다섯 차례였다.

 

골프 붐의 계기는 86, 88.

 

한국 골프사를 대변함에 있어서 5.16이전을 도입기로 본다면, 64년부터 84년까지의 약 20년간을 육성기로 볼 수 있다. 64년 한양CC가 민간자본에 의해 처음 개장되면서 다른 기업들도 적극 참여, 65년 뉴 코리아CC와 제주CC, 67년 안양CC와 관악CC, 68년 인천국제CC, 70년 양지CC 부평CC 오산CC, 71년 동래CC 등이 속속 개장하며 골프 인구는 늘어났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은 경제적으로나 의식적으로, 골프를 스포츠로 받아들일만한 여력을 갖추지 못했고 사회적 분위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골프에 대한 인식이 급격히 변화하고 붐을 맞게 되는 것은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이 계기였다. 특히 아시안게임에는 골프가 정식 종목 이였다.

86, 88에 대비해 84년 발족된 체육부는 우선, 당사까지 대한체육회 준가맹단체로 설움 받던 대한골프협회를 정가맹단체로 격상시키고 경희대, 건국대, 한국체대, 이화여대, 세종대, 제주대, 전북대, 서원대, 유도대 등 전국 주요 대학에 골프부를 설치, 골프도 체육특기자로 입학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일부 전문대는 골프학과를 신설했고 체육부는 체육부대로 국가상비군 제도를 마련 골프 꿈나무육성에 의욕을 보이는 일편, 85년 전국체전부터 골프를 정식 경기종목에 추가했다.

이런 일련의 획기적인 상황변화가 골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 주면서 골프 인구는 급격히 늘기 시작, 고급 스포츠에서 중산층의 스포츠로, 다시 대중 스포츠로 그 인구를 넓혀왔다.

상황이 이렇게 변화 발전하자 한국 아마추어 골프 선수권대회는 프로에 버금가는 국가 댚급 선수나 프로를 지향하는 대학 선수들, 또는 특기자 입학을 열망하는 고교선수들의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90년의 37회 대회에서 고교 2년생인 민혜식이 우승하고, 9239회 대회에서 역시 고교 3년생인 김주형이 4라운드 토탈 5언더인 283타로 우승하자, 골프에 있어서 아마추어의 꽃이라 할 수 있는 30, 40대는 한계를 느끼며 의욕이 저하되고 말았다.

이에 대한골프협회는 숙고 끝에 39회인 92년 대회부터 중년층을 위한 미드아마추어부(중년부)”를 신설 운영하기 시작했다. 선수권부나 중년부나 우승의 영예에 대한 무게는 같았고 참가자격도 핸디5 이내로 마찬가지였다. 다만 선수권부는 4라운드, 중년부는 3라운드 경기로 우열을 가리는 게 차이일 뿐이었다.

그러나 중년부가 처음 신설된 지난해에는 홍보 부족으로 중년부가 마치 선수권부의 들러리에 불과한 인식을 준 듯, 미드 아마추어부 참가자는 매우 적었다. 국가대표급과 겨루어 보겠다는 의지의 파 플레이어들은 여전히 선수권부로 참가했고 일부 어중간한 중년들은 미드아마추어부의 신설에 역자극받아 거꾸로, 아예 참가를 기피하기도 했다.

그런데 금년은 달랐다. 1회때 기피했던 간판급 중년 스타들이 모두 미드 아마추어부로 참가했다. 지난해 우승자인 이준기씨를 비롯 세계시니어골프대회 우승 경력의 재일 교포 김홍수씨. 전라남도 체전대표 김경현. 오기택씨. 전북 체전대표 이선열씨. 인천체전대표 박상찬씨 등 널리 알려진 선수들이 대거 선수권부가 아닌 미드 아마추어부로 참가한 것이다.

골프계의 관심은 미드 아마추어부로 모아졌다.

 

처음 경험한 대회 분위기

 

대회 장소는 88CC 서코스였다. 골프채를 잡은 이후, 처음 경험하는 공식대회라는 점에서 나는 그야말로 바짝 긴장했다. 솔직히 나의 기량은 핸디5 이내라고 자신할 수 없었기에 더욱 불안했다. 경기에 대비하여 열심히 연습을 하기는 하였고 행운이 따라주던 어느 날인가는 연속 8홀 파를 잡기도 했고 쓰리홀 연속 버디의 기록도 있으니, 그 최상의 조각들이 잘 모아지면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메모 책을 꺼내 살폈다. 그것은 코스공략 도면이었고 한편에 작전계획도 있었다. 가장 이상적인 목표는 74. 그러니까 1, 4, 9, 11, 14, 15. 16번 홀 등 7개홀에서는 욕심부리지 말고 보기를 목표로 한다. 반면 6, 8, 10, 12, 17번 등 5개 홀은 버디를 목표한다. 나머지 6개홀은 파플레이 - 침착하게 집중하면 행운이 따라줄 것도 같았다.

아냐. 아무리 행운이 따라도 어디선가 무너져 항상 제 핸디 다 찾아먹었잖아. 골프에 핸디귀신 있다는 거 모르나?”

핸디귀신? 그렇다면 비장한 도전이 되는군

그건 시간이 필요한걸 텐데될까?”

해 보세. 하다 안되면 왜 단재뉴어리가 한 유명한 말 있잖아. 그냥 쳐라! - 잡생각 없애고 그렇게 그냥 치겠네

젠장, 첫 샷부터 OB를 내지는 않을까. 더블보기나 쓰리퍼트로 나인 홀에 보기이븐도 못해 망신당하고 쫓겨나지는 않을까. 골프장을 향해 가는 동안 별별 망상을 다했다.

밤새 비를 뿌린 하늘은 아침이 되어도 여전히 무거운 비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오냐 그렇지, 비나 펑펑 쏟아져라. 영국 오픈이 열리는 세인트 앤듀르스 올드코스처럼 바람도 세차게 불고. 흐흐흐흐. 그러면 날고기는 놈 있을라고. 스코어가 전체적으로 엉망이 되겠지. 그래. 그러면 어영부영 되는 거야. 날짜를 장마철로 잘 잡았군. 어차피 이번 대회야 경험 얻자는 거지 다른 기대야 있는가. 망신만 당하지 않으면 대 성공인 거야.그래서 내가 결선에 올라간다?.

내가 속물이라는 것은 이럴 때 극명하게 나타나곤 한다. 겸손하게 민폐만 안 끼치도록 노력하자 다짐하면서도 은근히 기대가 비약하곤 한다. 혹시, 혹시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

비가 내렸다. 빗줄기는 굵어졌다 가늘어졌다 했다. 비를 맞으며 드디어 골프장에도 도착했다. 13조로 편성되어 08:24 Tee off인데 도착한 시간은 640분 이였다.

락카룸에서 준비를 끝내고 레스토랑에 올라가 해장국을 먹었다. 그래도 1시간이나 시간이 남았다. 그렇지 퍼팅 연습을 해야지. 그러나 비가 오는 바람에 연습그린은 닫혀 있었다. 젠장-

긴장을 다스리지 못해 나는 빗속을 서성거렸다. 출발선에 가니 선수들이 출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비가 오시는 바람에 1조 티오프가 연기되고 있었다.

오기택(가수) 선수가 10, 조수현(영화배우 신일용) 선수가 11조에 편성되어 내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도 풀겸 신일용씨와 인사를 나누고 격려의 악수를 나눴다. KGA직원들이 출석선수를 체크했고 캐디들은 각자 맡은 백을 살피고 선수와 인사를 나누며 출발을 기다렸다. 티 그라운드 뒤쪽에 서 있는 경기위원은 유난히 근엄해 보였다.

드디어 제1, 선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18개 그린 오늘의 핀 위치가 각각 정확하게 표시된 도면이 나누어지고, 경기위원의 볼 확인이 있은 후 서로 동반자의 마커(스코어 기록관)가 되어 카드를 나눠 받고 로칼룰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이어 티 샷

나는 뒤쪽에서 1조 선수들의 첫 드라이버 샷을 숨죽이고지켜 보았다. -따악-. 조금도 흠 잡을 데 없는 샷들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나이샷. 굳샷! 하고 칭찬해주지 않았다. 골프는 칭찬을 주고받는 게임이라면서.

1조 선수들이 나간 뒤 또 하나의 볼이 티샷 되었다. 상상(想像)으로 친 나의 티샷이였다. 아아, 그것은 슬라이스가 되어 우측 숲을 넘더니 9번홀 페어웨이 한 중간에 떨어졌다. 싸늘한 시선이 집중되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 어디서 저런 사람이 다 나왔어!”

?”

내 가슴은 도대체 긴장으로 터질것만 같았다.

 

처참하게 무너진 꿈

 

5, 6, 7조까지 티샷 미스는 없었다. 하나같이 어쩜 그렇게 스윙도 예쁘고 장타도 곧게 뻗어나가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 긴장이 고조되고 초조했다. 마치 첫 미스샷의 주인공이 될 것만 같은 불안한 예감에 휩싸였다.

8조에서 미스 샷이 하나 나왔다. 슬라이스가 되어 큰 원을 그리더니 우측 숲 깊숙히 떨어졌다. 10조에서 또 미스가 나왔다. 이번엔 훅이 되어 좌측 산 중턱에 꽂혀버렸다. 또 하나는 공중으로 치솟아 100미터나 나갔을까? 으흐흐, 그래야지. . 그렇게 좀 미스가 나와야 나 같은 사람도 칠 맛이 나지. 나는 은근히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차례가 다가오니 티 그라운드에서 내려와 캐디와 인사를 나누고 클럽을 꺼내 휘둘러보았다. 자자, 힘을 빼고 이렇게, 이렇게, 부드럽게.

이윽고 나를 부른 소리가 들렸다. 경기감독관 앞에 나가 의식(?)을 치르고 동반자와 인사를 나눴다. 동반자의 폼을 보니 얼굴이 시커먼 게 골프장에서 사는 사람 같았다. 다시 긴장이 밀려왔다. 빗줄기는 굵어졌다.

동반이 먼저 티샷했다. 따악-. 소리는 좋았다. 그러나 형편없어 큰훅이 되어 10조 선수의 볼처럼 산 중턱에 꽂혔다. 위험해서 잠정구를 쳐야 할 정도였다. 저런 저런.

드디어 나의 티샷 순서가 왔다. 나는 기도하는, 아니 구도 하는 자세로 드라이버를 휘둘렀다. 볼은 참 예쁘게 날아갔고 원하는 지점에 떨어졌다. 아아, 성공이다. 성공! 첫 관문은 통과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동반의 잠정구는 더욱 큰 곡선을 그리며 더 깊은 곳으로 날아갔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는 일단 페어웨이로 나갔다. 동반은 볼을 찾지 못했다.

시간이 자꾸 흐르자 나도 올라갔고 결국 내가 처음 친 볼을 찾아주었다. 그는 고맙다고 정정히 인사하고 세컨샷을 휘둘렀다. 그런데 또 생크가 났다.

이번엔 내가 실망했다. 모처럼의 경험에서 하필 저런 동반을 만나다니,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랴. 나는 묵묵히 내 볼만 치기로 했다.

첫 홀에서 나는 목표대로 보기를 하고 그는 트리플을 했다. 파가 목표인 둘째 홀에서 나는 또 목표대로 파를 잡았고 동반은 보기를 했다. 마치 내가 팀의 리더가 된 기분이었다. “오냐. 비가 와서 조건은 나쁘지만 긴장하니 그런 대로 되는구나

3번 홀에서 동반은 더블보기를 했다. 나를 생각해서라도 좀 신중히 쳐주지 이게 뭔가 싶었다. 물론 겉으로 표시할 순 없었다. 그 영향인지 2피트 짜리 퍼트를 놓쳐 나도 보기를 했다. 목표에서 하나를 더 친 것이다.

4번 홀은 552미터의 파 5. 원래 보기를 예정한 홀이었으나 전 홀에서 한 타먹은 것을 만회하고자 욕심을 부렸다. 웬걸, 써드샷이 벙커에 빠졌다. 벙커의 모래는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살짝 떠낸다고 친 것이 생크가나 이웃 벙커로 들어갔다. 치기 고약하게 턱 밑에 박혔다. 궁리 끝에 우드를 꺼내 톡, 치니 3피트나 굴렸나? 도 톡 치니 2피트순간 싸늘한 정적이 왔다. 주위의 모든 시선이 의혹으로 냉각됐다. 나는 나대로 몸이 굳고 얼굴은 벌개졌다. 이게 뭔가 대체 지금 뭘하고 있는 건가.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나는 심리적으로 무너졌다. 위기가 아니라 아주 무너졌다. 동반은 나를 거꾸로 비웃기라도 하듯 산듯하게 보기로 마감했다. 나는 치욕의 양파를 했다. 양파라. 그러면 그렇지 그 실력이 어디를 가겠나.

다음 홀도 더블보기를 했다. 정말 이렇게 쉽게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하늘을 보았다. 비는 더욱 주룩주룩 내려 경기진행을 불안하게 했다. 비가 고마운 생각이 또 들었다. 비 때문이라고 핑계를 댈 수 있을 만큼 비는 많이 왔다.

어쨌든 시작한 거. 최선을 다해보자. 6번 홀에서 파를 잡으니 동반은 버디를 잡았다. 동반은 이제 제 페이스를 찾은 듯 했다. 그 동안 헤맨 것은 늦게 도착하여 허둥지둥 경기에 임한 때문 이였다. 1시간쯤 전에 도착하여 여유있게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새삼 동반에게서 느꼈다.

그의 버디 퍼트가 성공하자 나는 일부러 큰 소리로 나이스 퍼트를 외쳤다.

그렇게라도 소리를 질러야만 이 갑갑함이, 아니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일행은 한바탕 웃었다. 침묵과 긴장의 싸늘한 분위기에 온기가 스몄다.

하루종일 줄기차게 내릴것만 같던 비는 8홀에서 멎었다. 동반도 나도 비옷을 벗어 버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인코스로 옮겼다. 결국 이 날 제1일 경기에서 나는 94타를 치고 동반은 86타를 쳤다. 어떻게든 90을 넘기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역부족이었다. 대회에 출전한다고 여러사람에게 소문 냈는데. 창피하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기가 민망했다. KGA에도 송구스러웠다. 할 수 없지 뭐.

 

황홀한 체험 통해 얻은 자신감

 

목욕을 긑내고 스코어 게시판 앞으로 가 보았다. 내가 꼴찌일 것은 분명하고, 남들은 얼마나 쳤나? 찬찬히 들여다보니 이건 또 무슨 일. 내 얼굴이 환해졌다. 94타는 양반이었다. 98타도 있었다. 총출전 91명중 90타 이상이 14명이었다. 85타 이상을 헤아리면 반도 넘을 것 같았다. 나는 안도의 미소를 흘렸다. 살펴보니 비가 쏟아질 때 코스를 돈 앞조 선수들의 성적이 대체로 안 좋았다. 그렇다면 골프는 공평한 조건이 아니지 않은가. 기상 조건도 운에 맡겨야 하니.

. 좋다. 그렇다면 내일도 나오는 거다. 나를 테스트하는 거다. 오늘의 경험이 내일, 같은 코스에서 어떻게 반영되고 결과될 까도 궁금했다. 무엇보다 대회 분위기를 한번 더 즐기고 싶었다. 정말 기분은 참 좋았다. 골프의 또다른 맛에 나는 매료되고 있었다. 매스터즈나 US오픈에라도 출전한 기분이었다. 적당히 긴장되는 덕에 신중할 수 있어 좋았고, 공식경기이니만큼 서로 조심하는 분위기가 좋았고, 서로 상대선수의 마커가 되다 보니 매너나 룰에 엄격할 수 있어 또한 좋았다. 캐디들이 보통 때와는 달리 경기보조원으로서의 본분에 묵묵히 충실한 것은 특히 좋았다.

아아, 만약 골프에서 이런 에티켓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과연 오늘날과 같은 인기를 누릴 수 있을까? 골프 규칙의 제1조가 에티켓인 이유를 충분히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2일 경기조편성은 제1일 경기 결과 성적이 비슷한 사람들로 재편성됐다. 나는 첫날 91타를 쳤다는 이승남씨와 함께 3조였다. 티오프시간은 공교롭게도 첫날과 같은 0824. 이튿날 날씨는 이상적이었다. 하늘에 구름이 가득했으나 비구름은 아니었다. 바람도 기분 좋을 정도였고 덥지도 않았다. 왠지 결과가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첫날보다는 훨씬 부드러워진 자세로 경기에 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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