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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언제 읽어도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위선이나 불의에 대항하여 정의를 세우면서 인간성을 옹호하고 정신을 이끄는 따위는 다음 이야기입니다. 잔잔한 물결처럼 다가와 가슴을 파고드는 반취 이기윤의 소설들에는 독특한 향기가 있습니다.

단편
2012.02.26 09:03

고향의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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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고향의 노을

                          이기윤

저뜸이 밤나무 단지를 돌아본 큰아들은 마음이 놓인다. 지난 해 추위가 너무 심해 모두 동해를 입었을 거라고 걱정했는데 6월이 되어 꽃 핀 모양이 예년보다 더 풍성하다. 구수한 밤꽃 냄새가 오늘따라 더 정겹게 느껴진다.
‘이 정도면 올 가을 수확은 괜찮을 거야.’
마음이 놓일 뿐이지 기쁘거나 흐뭇한 건 아니다. 이제는 인건비가 높아 밤을 따 보았자 별 소득이 없다. 오히려 손해를 볼 때도 많다.  
‘세상이 변해도 한참 변했지. 하루 종일 딴 밤을 몽땅 팔아도 인건비에 미치지 못 한다니…’
밤만 그런 게 아니라 잣도 그렇다. 하루 일당을 십만 원은 줘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하루 종일 딴 잣을 모두 팔면 팔만 원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러니 그냥 내버려두는 게 낫다. 재미로 따 가고 싶은 사람들 마음대로 따 가게 내버려두는 게 낫다. 잣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데 밤은 아직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다. 소득이 없어도 밤만은 정성껏 챙긴다. 사연이 많기 때문이다.
밤나무혹벌이 극성을 부려 그 달고 맛있는 토종 밤나무를 모두 베어버리고 병충해에 강하다는 고위 접목묘로 바꾼 지 십 년이 넘었다. 일본에서 개량한 종으로 한겨울 동해나 줄기마름병에 강하고 알이 굵다. 그래서 보기에는 탐스러우나, 그러나 맛이 토종밤 같지가 않다. 육질도 엉성해 푸석하고 향도 없다. 당연히 영양도 떨어질 것이다. 그렇게 질이 떨어지는 것을 안 것은 한참 뒤였다. 그래도 혹벌에 하도 놀란 큰아들에겐 병충해에 강한 게 우선이어야 했다.
아버지 때는 그냥 내버려두는 방식으로 재배했었다. 품종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 이거다 저거다 차별도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지역 특산물로 유명한 것이 평양밤(함종밤) 다음에 양주밤(불밤)인데 큰아들 네 밤은 양주밤에 속했다. 다른 과일나무에 비하여 저절로 잘 자라고, 산간에서도 비교적 쉽게 재배할 수 있어 좋았는데 어느 해부터인가 혹벌이 번지기 시작해 국내 밤나무를 절멸시킬 듯 기세가 강했던 것이다.
큰아들의 둘째 아들이 대학에 입학할 무렵이었으니 삼십 년 전인 것 같다. 그 때에 정부가 나서서 토종 밤나무는 거의 다 베도록 독려하고 해충에 강하다는 품종을 일본에서 들여와 보급했다. 해충에만 강한 게 아니라 열매도 크고 튼실해서 수확량이 두 배 이상이라고 하니 너도 나도 신품종을 구해 심었다.
한편에서 토종 밤나무에 애착을 보이는 연구진도 있어 몇 년 뒤 임업시험장에서 한국 재래종 가운데, 해충에 강한 밤 우량종 선발사업을 시작하여 10여 품종을 발표하기도 했다. 재래종 밤의 달콤한 맛이 워낙 뛰어나 이 맛을 살리자는 노력이 일환이었다. 그러나 호응하는 농민이 없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기라도 한 듯 혹벌에 너무 심하게 당한 탓이었다.  
큰아들의 밤나무 단지는 70%가 일본 개량종이요, 30%가 임업시험장이 추천한 재래종이었다. 개량종은 병충해에 안심이 되는데 재래종은 아직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혹벌 뿐이 아니었다. 줄기마름병도 있었다. 이상하게 동향보다 서향인 곳에서 줄기마름병은 극성을 부렸다. 그 뒤에 나타난 게 밤바구미였다. 게으름을 부리다가 방제시기를 놓치기라도 하면 밤나무의 50% 이상 피해를 보기도 했었다. 꽃이 피었다 지는 7월부터 10월까지는 주기적으로 약을 쳐야 하고, 밤을 수확한 직후에는 훈증제로 유충을 죽이는 작업을 서둘러야 했다.

그렇게 힘들어하면서도 큰아들이 밤나무 단지를 특히 아끼는 이유는 부모와 자식, 3대의 추억이 생생하게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양주밤은 옛날부터 알이 작고 속껍질이 잘 벗겨지며 육질이 치밀하고 단맛이 많아 평양 밤과 더불어 한국 밤을 대표할 만큼 그 품질이 뛰어났었다. 단지가 커서 한 해 수확량이 30여 가마니에 이르니 가계에도 여간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을 서울로 보내 공부시킬 수 있는 일차적 힘이 이 밤나무에서 얻어졌었다. 구수한 밤꽃 냄새가 온통 마을을 덮을 때면 유난히 마을이 평화롭고 부유하게 느껴졌었다. 밤이 익을 때면 최대 명절의 하나인 추석이 있어 공부 때문에 서울 가 있는 아이들이 모두 고향집에 모이곤 했다.

저뜸이 밤나무 단지는 큰아들이 소유한 전답의 위쪽 경계이기도 했다. 밤나무 단지 아래는 보리밭이었다. 밤꽃이 피는 6월이면 바로 아래서는 잘 익은 보리가 출렁거렸다. 큰아들에게 그것은 풍요를 상징하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밤나무 숲을 지나면 뒤에 버티고 선 해발 구백 미터의 서리산에 오르는 가파른 비탈길이다. 그 우측에 있는 축령산은 등산객에게 조금 알려졌으나 서리산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오솔길 옆 골진 곳으로는 맑은 물이 졸졸 소리 내며 흘렀다. 가냘픈 물줄기지만 극심한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다. 이래저래 이곳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곳이요, 비경의 산과 계곡을 좋아하는 사람만 즐겨 찾는 숨겨진 보석 같은 곳이다. 그런 천혜의 자연에 둘러싸여 사는 것을 복으로 여기는 큰아들에게 밤나무 단지는 가장 소중한 마음의 재산이었다.

10여 년 전 밤나무 혹벌이 번져, 나무를 모두 베어내야 했을 때 큰아들은 신체의 일부를 잃기나 하는 듯 몹시 아파했다. 하필이면 그 때가 큰아들에겐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때였다. 대학원을 마치고 박사 과정에 있는 아들과, 대학에 갓 입학한 딸의 학비를 위해 할 수 없이 밤나무 단지 밑 보리밭을 팔아야 했던 때였다. 혹벌이 극성을 부리지 않았다면 고비를 넘기기 조금 수월했을 텐데…  

보리밭을 산 사람은 농사를 짓지 않았다. 그냥 황량한 채로 두었다. 처음부터 농사를 지으려고 산 사람이 아니었다. 계곡 물이 맑고 경치가 좋아 머지않아 피서지로 크게 각광받게 되면 휴양시설을 만들던지 땅값 자체에서 크게 남길 투자 개념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
농사꾼으로서는 용서 못할 사람이었다. 옥답을 놀리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천벌을 받을 거다. 판 것을 후회도 하고, 그대로 둘 바에는 소작이라도 하게 주라고 청도 넣어 봤지만 새 주인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소작을 주는 것도 불시에 재산권 행사를 할 때 불편할 수 있다고 보면 귀찮은 것이다. 그는 만약 땅이 놀고 있어 이용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허락을 얻지 말고 그냥 이용하라고 했다. 그래야 불쑥 재산권을 행사할 수도 있고 부담이 없다는 것이었다.
밤나무단지 아래가 황량해지니 밤나무 숲이 예전처럼 풍요로워 보이지 않았다. 하긴 다섯 길 이상 되던 큰 나무를 모두 베어버리고 새로 심어 놓은 데서 어찌 예전의 울창함을 찾아보랴 마는….

이런저런 아픔을 감내하며, 아끼는 땅까지 팔며 아이들을 박사 석사로 만든 큰아들에겐 기대가 있었다. 아이들이 성공한 모습으로 금의환향하여 고향을 빛내줄 것이란 기대였다. 큰아들은 배운 것은 없지만 아버지가 남겨 주신 땅을 부지런히 일궈 다섯 배로 늘렸다. 아이들은 공부를 많이 했으니 나 보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들 눈치는 달랐다. 공부를 마친 뒤 서울에서 직장을 얻은 아이들은 그냥 서울에 눌러 앉았다. 내려올 생각을 하기는커녕 얼마 남지 않은 시골 전답을 몽땅 팔아 서울에 집을 장만하고 이사하자는 소리까지 했다. 불효자는 아니었다. 결혼하고 나서 부모를 모시지 못 해 안달했다. 다만 고향에 내려와 모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 모시겠다는 것이어서 불가능했다. 백 세를 넘긴 할아버지 할머니가 멀쩡하게 살아 계시기 때문이었다.
큰아들의 아들들은 기다리는 눈치였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부모님을 서울로 모시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할아버지 할머니가 쉽게 돌아가실 분들이 아니었다. 백 세 할머니 허리가 팔순 큰며느리 허리보다 더 꼿꼿했다. 서울 사는 큰아들의 아들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며 세월만 보냈다. 그러다보니 고향집은 팔십 넘은 큰아들 부부가 백 세 넘긴 부모를 모시고 사는 ― 젊은 아이는 없는 네 노인만 사는 가옥이 된지 오래였다.      
어느 날, 맏며느리는 꿈을 꾸었다. 하얀 구름에 오색무지개가 번지더니 그 속에서 은빛 비행기가 나타났다. 비행기는 그림처럼 날아와 집 뒷마당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맏며느리는 신기한 일도 다 있다고 생각하면서 황급히 뒷마당으로 뛰어 간다. 은은한 빛을 뿌리며 앉은 비행기의 문이 열리자 하얀 드레스를 입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 가볍게 마당으로 내려섰다.

천천히 주위를 살펴본 여인은 손을 내밀어 비행기에서 또 내리려는 사람을 부축한다. 지팡이를 짚고 내리는 이는 큰할머니, 즉 시아버지의 어머니였다. 땅에 내린 큰할머니는 젊은 여인이 그랬던 것처럼 주위를 살핀 뒤 온화한 목소리로 묻는다.
“세상이 분주해 지지는 않을까?”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대답한다.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럴까?”
“예, 염려 놓으십시오”
근심 어린 큰할머니 다짐에 여인은 미소로 답한다. 조금도 구김살이 없다. 처마 밑에 두 손을 보듬고 선 맏며느리는 그들의 안중에 없다. 주위는 더할 수 없이 조용하고, 분명 집 뒷마당이건만 세속의 장소가 아닌 듯 기분 좋은 밝음이 모든 것을 감싸고 있었다.

맏며느리는 ‘참 신기한 일도 다 있다.’ 하고 생각하다 잠에서 깨어난다. 깨어나 꿈을 생각하니 이상해서 견딜 수 없다. 마침 첫 닭 울음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남편을 깨웠다. 꿈 이야기를 듣고 난 남편은 눈을 크게 뜨며 얼른 일어나 앉았다.
“혹시. 사랑방에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닐까?”
노부모를 모시고 사는 입장은 늘 긴장이요 조심스럽다. 불길한 예감이 한 가닥만 스쳐도 혹시 부모님께 무슨 일이… 생각하게 마련이다. 큰아들은 벌떡 일어나 옷을 추스려 입고 사랑으로 건너간다. 미닫이문에 살며시 귀를 대고 청각을 곤두 세워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언제나 듣던 낯익은, 코 고는 소리조차 없다.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잠시 서성이던 큰아들은 침을 꿀꺽 삼키고 헛기침을 한 뒤 아버지를 불러본다.
“아버지”
“왜 그러느냐”
아버지는 깨어 있었다. 깨어 있으니 코를 골 리가 없다. 여느 때나 다름없는 목소리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냐…”
아들은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안심하기는 아직 이르다.
“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구요?”
“난 괜찮다…”
아버지는 누워 계신 듯하다. 큰아들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돌아서 안채로 간다.

날이 밝았다. 팔십 며느리가 사랑방으로 아침상을 들인다. 꿈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 맏며느리 역시 은연중 노부모의 건강을 눈치로 살핀다.
“편히 주무셨어요?”
“오냐…”
정정하신 모습에 변고의 그림자는 추호도 보이지 않는다.

“괜찮으신 데 뭘… 평소와 조금도 다름이 없으셔.”
남편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꿈이 꿈인지라 맏며느리 마음은 편하지 않다.  
“그래도… 오늘은 멀리 가지 마세요.”
“그래, 그럼 고추밭에 있을 게”
고추밭은 걸어서 백 보 이내에 있다.

상을 물린 남편은 지게를 지고 대문을 나선다. 좀 쉬어도 누가 뭐랄 사람 없건만 평생을 부지런히 일해 온 남편은 해가 솟으면 집에 있지를 못 한다. 아무래도 기분이 개운치 않은 며느리는 그렇게 멀어지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본다. 이윽고 남편의 모습이 길모퉁이에서 사라지자 그녀는 노부모 아침상을 거두려고 사랑채로 간다.

참새 소리가 유난히 시끄럽다. 사랑방 앞마당에 널어놓은 곡식을 참새가 떼로 몰려와 쪼아 먹는다. 평소 같으면 사람의 기척에 후다닥 날아갈 만도 한데 오늘은 도망도 안 가고 잘도 짹짹거리며 먹는다.

언제부터인가 참새는 노부모의 친구가 되었다. 나이 구십을 넘기면 신선이 된다는데, 그래서인지 노부모 주변을 참새들이 따라 다녔다. 할머니는 참새와 이야기도 한다고 했다.
하루는 툇마루에 앉아 있는데 참새 한 마리가 날아와 할머니 앞에서 날개 짓으로 울며 도움을 청했다고 들려준다.
“할머니, 할머니. 어제 밤 아내를 야단쳤더니 나가서 들어오질 않았어요. 어디 가면 아내를 찾을 수 있을까요?”
참새를 물끄럼이 바라보던 할머니는 말한다.
“장구메기에 있는 것 같구나. 그쪽에서 소리가 들려…”
할머니가 손짓하는 장구메기를 향해 날아간 참새는 잠시 후 두 마리가 되어 할머니 앞에 앉았다.  
“할머니 고맙습니다.”

할머니는 진짜처럼 그런 이야기를 했다. 참새와 노부모는 이렇게 다정하지만 그래도 곡식은 아깝다.
“훠어-이. 훠어-이”
팔을 휘저으며 새를 쫓으니 겨우 새들이 도망간다.
사랑채에 들어가 상을 내온다. 상을 문턱에 놓고 신을 신으려는데 그새 참새들이 또 모여 곡식을 쪼아댄다.
“훠어-이. 훠어-이”
상을 그대로 둔 채 맏며느리는 또 새를 쫒는다. 멍석 위의 곡식을 휘저으며 쫓으니 그제야 멀리 달아난다.

맏며느리는 잠시 허리를 펴고 새들이 날아간 허공을 바라본다. 6월의 하늘이 가을 하늘처럼 맑고 투명하다. 초여름 하늘이 투명하면 장마가 깊다 했는데… 바람도 싱그럽고 동녘에 뿌리를 둔 뭉게구름도 유난히 희다.
흰 구름을 보니 간밤의 꿈이 되살아난다. 오색 무지개가 번지며 은빛 비행기가 곧 구름 사이에서 나타날 것 같다. 꿈이 꿈같지가 않다. 참 이상도 하지… 잠시 상념에 젖었던 맏며느리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사랑방 문턱에 놓인 상을 집어 든다.
순간 방안에서 가늘게 흐느끼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미닫이문이 닫혀있는 사랑방 안에는 노부모밖에 없다. 맏며느리는 귀를 기울인다. 할아버지가 말한다.  
“나… 이제 가봐야겠어. 먼저 갈 게”
분명히 할아버지 목소리다. 어디를 가신다는 걸까. 할머니는 말이 없다.
“여봐. 나 그만… 먼저 갈 게”
“……”
“갈 때가 됐어.”
“……”
“당신은 천천히 와…”
이윽고 할머니의 소리도 들린다.
“가시긴… 어딜 혼자 먼저 가신다구…”
눈물을 훔치며 말하는 듯하다.
“때가 됐으니 가야지. 내 먼저 가서 준비하고 당신 부를게. 어머니가 부르셔…”
“……”
“벼루 좀 꺼내 봐. 글이나 한 수 남기고 가게”
“에이그 영감두…”
울먹임 속에 체념이 담겨 있다. 벼루며 먹 연적 찾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먹 가는 소리가 들린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맏며느리는 상을 대청마루에 갖다놓고 정신없이 고추밭을 향해 뛰어 간다. 여보. 여보— 소리쳐 남편을 부른다.

아내의 말을 듣고 한걸음에 뛰어온 큰아들이 사랑방에 들어섰을 때 아버지는 이미 눈을 감고 누웠고 어머니는 돌아앉아 서럽게 울고 있다. 먹이 말라 가는 벼루 옆에 화선지가 있고 방금 쓴 듯한 글이 적혀 있다.
무정백발최인명(無情白髮催人命)  
인노증무경소년(人老曾無更少年)
그리고 끝에 작은 글씨로 대한민국 기념(大韓民國 記念)이라 적혀있다.

목침을 베고 반듯이 누운 아버지는 말이 없다. 큰아들이 아버지를 부른다.
“아버지”
대답이 없다. 큰아들은 아버지 옆에 더 바짝 다가앉아 아버지 손을 꼬옥 잡고 다시 부른다.
“아버지.”
아버지의 입술이 움직인다.
“왜 그러느냐”
반응을 하니 일단은 마음이 놓인다. 하지만 여느 때 같은 목소리가 아니다. 힘이 없다. 아들은 평소 글공부하던 대로 묻는다.  
“무정한 백발이 사람의 목숨을 재촉한다.… 윗글은 알겠는데 아래 글은 뜻을 모르겠습니다.”
“많을 증(曾)으로 읽지 말고 일찍 증으로 읽으면 돼. 그리고… 없을 무(無)로 읽지 말고 아닐 무자로 해석 해. 그렇게 쓰는 거야… 무(無)자 밖에 없어…”
“왜 이런 글을 쓰셨어요?”
“……”
“아버지 왜 이런 글을…”
하는데 아버지 고개가 조금 움직인다. 순간 80년을 함께 살아온 아들은 아버지 얼굴의 변화를 읽는다.
“아버지! 아니, 아버지!”
“……”

“이제 가신 거야…. 아까부터 가신다고 했어”
한 무릎 세우고 돌아앉은 채,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어머니는 서럽게 흐느낀다. 나이 십육 세에 동갑내기 남편에게 시집와서 팔십육 년을 오직 이 집에서 살아오신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시간이 흐를수록 아들의 울음소리보다 며느리의 통곡이 커진다.  


자손이 모인다. 팔십 된 큰아들의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들… 아우 형제 사촌  이종사촌 삼촌 오촌 육촌 팔촌… 사돈의 팔촌이며 이웃 노인까지 모인다.
“경사 난 거여, 경사”
“뭐가 슬픈가. 이런 게 호상이라는 건데”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살아서 이미 신선이셨는걸 뭐…”
모인 사람마다 슬퍼하기는커녕 상가를 온통 취기 어린 웃음으로 채운다. 평생을 모시고 산 맏아들 맏며느리 외에는 아무도 마음으로부터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 백년 하고도 이년을 더 사셨으니 가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하지만 맏아들 맏며느리 눈에서는 눈물이 마를 새가 없다.

“아버지…”
밤이 늦어 조문객의 발길이 오늘은 끝났다 싶은 시간에 손자들이 아버지를 찾는다. 큰아들에겐 2남 3녀가 있는데 두 아들이 온 것이다.
“오냐”
“상심이 크시지요?”
“그래… 말할 수 없이 슬프구나.”
“……”
큰아들 작은아들 모두 오십이 넘었다. 맏손자는 더듬거린다.
“할 말이 있으면 하려므나.”
아버지의 허락에 맏손자는 어려워하며 입을 연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저희 둘이 의논했습니다. 더 이상 불효하게 하지 마셨으면 해서요.”
“뭐가 불횬데?”
“이제 정리하셨으면 해서요. 할아버지 장례 치른 뒤에 서울로 이사하도록 하세요.”
맏손자가 편안하게 모시겠다는 말이다. 고향에 내려와 모시겠다는 게 아니라 저 살고 있는 서울에서 모시겠다는 이야기다. 그 동안 연로하신 할아버지 때문에 미루었던 일을 이제 실행에 옮기고 싶다는 말이다.
“더 망설이실 필요 없습니다. 서둘러 정리하도록 하세요. 저도 열심히 돕겠습니다.”
작은 손자도 한 마디 거든다. 아버지는 고개를 흔든다.
“가긴 어딜 가고, 정리하긴 뭘 정리해”
“그럼 아무도 없는 곳에서 계속 이렇게… 너무 쓸쓸하시잖아요. 이젠 할아버지도 안 계시고…”
“할머니는 아직 계셔. 할머니가 도시에서 사실 것 같으냐?”
맏손자 생각엔 할머니나 어머니는 문제가 안 된다고 여기는 것 같다. 큰아들 생각은 그렇지 않다. 아니 어쩌면 할아버지보다 할머니가 더 조용한 농촌생활에 길들여졌다고 여기는 큰아들이다. 소란하기 짝이 없는 서울로 옮기는 것은 그만 사시라는 선고와 같을 것이다. 현대판 고려장이랄까.
“할머니야 정정하시니까 서울 생활에 금세 적응하실 겁니다. 어머니는 진작부터 원하시는 것 같고요.”
손자들은 뜻을 굽힐 기색이 없다.
“할머니가 건강하신 건 바로 여기, 고향에서 사시기 때문이야. 낯선 도시에서는 못 사신다.”
“……”
손자들은 답답해하고 큰아들은 한숨을 쉰다.
“얘들아…”
한숨 끝에 큰아들은 넋두리처럼 입을 연다.
“모르겠구나. 무엇이 옳은 건지… 옛날에는 마을이 작아도 청년들이 지켰고 어린애들 재잘대며 천진하게 웃는 소리가 가득했는데… 그래서 마음이 허허롭지 않았고 희망이 넘쳤는데…”
“세상이 변하니까 그렇죠.”
“그렇겠지. 하지만 들어봐라. 이 애비가 너희들을 도시로 보내 공부시킬 때 무슨 생각을 했겠니. 물론 너희 잘 되라는 것이 첫째였다만… 이면에는 너희가 잘 돼서 돌아와 고향을 빛내주고 발전시켜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던 거다…”
“……”
“하지만 결과가 이렇구나. 너를 도시로 보낸 것이 아들만 잃은 게 아니라 손자까지 잃었어.”

큰아들의 말에 맏손자는 외국에 유학 보낸 자기의 아들을 떠올린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 그 아들은 증손자가 된다. 미시건 주립대학을 졸업한 증손자는 시카고에서 직장을 얻어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다. 증조부 부음을 보냈는데 아직 못 오고 있다.
증손자를 유학 보낼 때 맏손자의 심정도 그랬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보다 괜찮은 모습으로 사회와 집안을 위하며 살기를 바라지 않았던가? 그런 증손자가 아버지 염원대로 공부를 잘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곳에서 신망을 얻다보니 귀국은커녕 자꾸 아버지보고 시카고로 건너와 살자고 한다.  
‘그래. 그 녀석이 나를 미국으로 건너오라고 하는 거나… 내가 아버지보고 서울로 가자고 하는 거나… 결국 같은 얘기야…’
현존하는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 돌아가신 큰일을 당하여 큰아들 심정이 비로소 이해되는 맏손자다. 큰아들의 훈육은 이어진다.
“사람이 나무라면 고향은 뿌리요 자손은 가지와 같은 건데… 점점 고향에 사는 사람들은 가지 없는 나무가 되어가는구나”
“아버지. 저희도 느끼는 게 없는 건 아닙니다만… 현실도 직시해야지요.”
“현실이 뭔데? 너흰 할아버지 유시(遺詩)를 읽었니? 그 뜻을 새겨봤어?”
“……”
“유시를 보고도 느끼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자손에게 남기시는 말씀이 없어. 그저 당신 마음만 표현하고 가신 거야…”
“저도 읽었습니다. 말씀을 안 남기신 게 아니라 남길 말이 없으셨던 거 아닐까요?”
“그러셨는지도 모르지.”
“너무 어렵게 생각하실 건 없을 거예요, 아버지. 세상은 좁아지고 단순해지고 편해지고 첨단화되었어요. 자연에 의지해 살던 때는 지났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그래도 흙은 변하지 않아.”
“변하지 않는 것은 없어요. 세월 따라 변하는 것이 진리라구요, 아버지……”
손자들은 번갈아 큰아들을 설득하려 한다.
“자연은 변하지 않아. 사람이 변하는 거지…”
“……”
큰아들에겐 흔들림이 보이지 않는다.
“세월이 흐른다고 여기는 것도 착각이다. 세월은 맴돌 뿐이야. 인생이 흘러가는 거지…”
그러나, 큰아들 얼굴에 쓸쓸함은 역력하다. 방방을 채우고 있는 조문객들의 웅성거림이 조금 커졌다 다시 작아진다. 백 년 하고도 이 년을 더 사신 할아버지의 죽음이 조용했던 마을에 온통 생기를 불러일으킨다.
“너희들은 고향이 싫으냐?”
큰아들이 묻는다.
“싫다니요. 이 고향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는 데요”
“그럼 고향의 정이라는 게 뭐냐?”
“아버지……”
“너희는 모른다. 그저 막연하게 마음속에서나 고향, 고향 하는 거야. 이상향으로 생각하겠지. 이번처럼 큰일 생기면 마지못해 찾아오고… 에미 애비 살아 있는 동안은 명절 때나 찾아 올테고… 너희 마음속의 고향이란 그런 정도일 거야”
“……”  
“애비는 다르다. 여기 흙에는 내 땀이 가득 배어있어. 할아버지 땀도 그만큼 섞여있고”
“……”
“지금 너희들의 불효를 책망하자는 건 아니다. 네 말마따나 세상이 변한 걸 나도 알지 왜 모르겠니… 하지만 서운하고 불안한 심정을 숨길 수 없구나. 내가 죽으면 고향과 우리 집안의 인연은 끊어질 것 같아서…”
“고향집이나 땅을 모두 팔자는 건 아닙니다, 아버지.”
“5대를 모시고 있는 선산도 있지 않습니까?”
두 손자가 한 마디씩 한다.
“알아. 그러나 그것들이 있어서 고향이 남는 게 아니야. 그런 거나 남아있는 고향이란 마음의 고향일 뿐이지. 진정한 고향은 땀방울이 배어야 해. 그래서 이 땅의 호흡과 내 숨소리를 맞춰야 지.”
“……”
“거듭 말하지만 나는 너희들만 잘되라고 서울로 보낸 것이 아니었어. 너희들을 많이 가르침으로서 가문이 윤택해지고 고향이 발전되기를 염원하는 마음이 있었어.”
“……”
“자꾸 세상이 달라졌다는 말만 하니까 긴말이 필요친 않을 거야.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태어난 고향을 죽어 묻힐 때나 찾아서야 쓰겠니?”
“……”
“할아버지 유훈을 잊지들 말거라. 끝에 대한민국 기념이라 적지 않으셨니. 어디서 어떻게 살았든 나 대한민국에서 살다 갔노라고 부끄럼 없이 말할 수 있도록 만 살아… 그러면 애비는 족하다.”
“……”
“나는 죽을 때까지 예서 살 생각이니까 더 이상 서울 가자 소리 하지 말고…”
두 손자는 아버지 얼굴에서 고향의 노을을 본다.
“아버지…”
“알아들었으면 이제 나가 봐. 손님들 시중들어야지.”
“아버지…”
방방이 가득한 조문객의 취한 웃음 소리. 상주 찾는 소리가 밤을 낮처럼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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